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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평론] 김엔야 ‘세계문학의 가능성과 번역, 그리고 또 번역’
세계문학의 가능성과 번역, 그리고 또 번역
- 황석영 장편소설 <해질 무렵(At Dusk)>론
김엔야
1. 황석영 소설의 두 계열과 <해질 무렵>의 위상
세계문학이라 하면, 일단 그것은 외국에 사는 독자의 상황에서도 공감을 자아낼 수 있어야 한다. 또 그것은 시간적으로도 동시성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또 무엇보다 번역, 번역이다. 세계문학을 논하면서 이 번역의 문제를 결코 우회할 수 없다.
황석영은 방북 이후 유럽에서 얻은 감각을 바탕으로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나는 한국고전의 전통적 서사를 되살려 그것을 활용하는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의 병폐에 ‘찌든’ 한국의 개발 중심적 현대성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작업이다. 이 두 작업이 공통적으로 겨냥한 것은 바로 자신의 문학을 ‘세계문학’으로 격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그의 첫 번째 작업에 해당하는 작품 계열은 <손님>, <심청, 연꽃의 길>, 그리고 <바리데기>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논자들에 의해 지적되어왔듯이 이 계열의 작품들은 타자가 아닌 우리의 ‘토착적’ 문화로 돌아가 자신을 되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포스트콜로니얼리즘에 호소한다.
이 작품들 모두에서 황석영은 현대와 전통, 보편과 특수의 ‘혼합’을 추구했다. 이 첫 번째 작업의 계열 즉 전통적 서사를 살린 소설의 계열은 포스트콜로니얼한 자기 정체성의 새로운 구축에 관계한다.
그의 두 번째 작업에 해당하는 작품 계열에는 <강남몽>, <낯익은 세상>, 그리고 이 글의 주인공 격인 <해질 무렵>이 있다. 이 세 소설은 모두 대도시, 특히 서울을 무대로 삼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서울이 거대도시가 되어가는 폭력적인 현대화 과정을 조명한다.
이 계열의 작품들이 세계문학을 겨냥하는 원리는 바로 서구적 자본주의의 발달을 상대로 하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용어로 말한다면, ‘비동시성의 동시성’(the contemporaneity of the uncontemporary) 또는 ‘동시성의 비동시성’의 구축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계열에 속하는 작품인 <해질 무렵>이 근래에 맨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의 롱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가장 최근에는 <철도원 삼대>라는 묵직한 장편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글은 그의 장편소설 <해질 무렵>이 맨 부커상 후보작으로 올랐던 ‘작은’ 사건을 계기로 삼아, ‘한국어’ 문학은 어떻게 ‘세계문학’이 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번역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관해 생각하고자 한다.
2. 인공 ‘잔디’의 낙원을 사는 현대 한국인들의 풍경
<해질 무렵>은 노년기에 접어드는 한 산동네 출신의 자수성가한 도시 건축가 박민우가 첫사랑의 상대였던 차순아로부터 뜻밖의 연락을 받고 지난날을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정우희라는 ‘제3의’ 젊은 인물이다.
소설의 홀수 장은 이 중산층 남성인 박민우의 시선으로, 짝수 장은 정우희라는 스물아홉 살 여성의 시선으로 교차적으로 서술된다. 이 소설은 세대에 관한 이야기를 함축하는데, 윗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박민우와 차순아라면 아랫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로 정우희와 차순아의 아들 김민우가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젊은 세대들은 아프다. 정우희는 지하 자취방의 월세를 마련하느라 편의점 알바를 뛰는 예술대학 출신의 가난한 극작가다. 피자집에서 정우희와 같이 생계형 알바를 하던 김민우 역시 연애를 사치로 여기며 살아가는 N포세대의 피폐한 청춘이다. 처음에는 연결고리가 분명치 않았던 박민우와 차순아, 그리고 정우희와 김민우 등의 연결 관계는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윤곽을 드러낸다.
이 소설의 묘미는 정우희가 차순아의 옛 남자였던 박민우를 향해 차순아를 가장하여 메일을 보낸다는 데 있다. 그러자 밀려오는 회환 속에서 박민우는 차순아를 향해 답장을 보내면서 독자는 이들을 둘러싼 옛날의 사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소설에서 기성세대와 젊은 층을 연결하는 고리이자 소설을 관통하는 열쇠는 바로 건축 모티프다. 한국에서 건축은 특수하고도 지극히 기형적인 형태로 진행되어왔다. 해질 무렵은 이러한 건축 모티프를 전면적으로 다룬다. 그럼으로써 이 소설은 한국의 자본축적 지향의 발달이 낳은 삼풍백화점이나 그것이 상징하는 부실설계 건설, 또는 ‘꽃섬’이 대표하는 자연 파괴와 같은 단편적인 문제들을 넘어선다. 이 소설은 한국현대사에서 건축이 맡아온 역할의 폭력성을 폭넓게 추적해 한국의 현대화 과정이 낳은 ‘야만성’이라는 문제를 전체적이고도 급진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그 ‘야만성’은 한국 사회의 특별한 공간, 특별한 시기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깊숙한 곳에까지 들어와 열정적인 영혼을 파괴하고, 남녀 간의 사랑을 훼방하고, 젊은이들의 꿈을 짓밟는다.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은 ‘옛날’ 영화 ‘건축학개론’은 건축을 사랑에 비유했지만, 현실에서 건축물을 세우는 것은 자본의 힘이지 사랑이 아니다. 작중에서 박민우는 “건물을 무엇으로 짓느냐고? 결국은 돈과 권력이 결정한다. 그런 것들이 결정한 기억만 형상화되어 오래 남는다”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처럼 건축업을 하는 지인들이 죽음 앞에 놓이자 도시 건축가로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이 소설은 이러한 건축사를 배경으로 이 흑역사를 견인해 온 기성세대,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의 격절을 이어주며 동시에 그 새로운 악순환을 그려낸다.
먼저 박민우로 대표되는 나이든 세대다. 박민우는 대학을 막 졸업했을 때 광주항쟁을 목격한, 1950년대 초중반에 태어나 1970년대 초중반에 대학을 다닌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는 ‘베이비부머’ 세대다. 그는 무리한 추진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한국을 OECD 국가로 도약시킨 이른바 한국식 개발 현대화, 난개발을 대표한다.
이 베이비부머의 경제도약 시대에 박민우가 경상도의 영산읍에서 서울로 상경, 동대문 근처 산동네를 거쳐 달골시장 동네에 자리 잡았다가 대학입학과 함께 서울의 중심으로 나가고 또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과정은, 하급계층에서 중산층을 거쳐 상류층이 되어가는 그의 출세 가도를 지리적으로 보여준다.
달골시장 동네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박민우의 결심은 곧 차순아를 버리겠다는 뜻과 평행하게 간다. 건축가가 되고 나서 수많은 철거지역을 물리적으로 밀어버린 것처럼 그곳의 추억도 “한꺼번에 밀어붙이고 휩쓸어서 말살해버린”다. 이처럼 그가 출세를 지향하면서 첫사랑 차순아와 이별하게 되는 과정은 한국의 경제 발달과 계급사회의 관계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 젊은 2030세대. <해질 무렵>의 윗세대를 이루는 박민우의 과거와 중년의 회환은 곧, 아랫세대인 정우희와 김민우의 좌절로 연결된다.
집이 없어 고시원을 전전하는 정우희는 자신이 알바로 일하는 편의점의 폐기물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애써 연극을 무대 위에 올리지만, 경제적 소득으로 따지면 극장 건물주에게 좋은 일만 해주는 셈이다. 같은 ‘흙수저’ 처지인 그녀의 친구 김민우는 도시개발자라는 ‘적’의 하수인이 되어 달동네 ‘이웃’의 집을 치는 철거반원이 된다. 그런데 철거 현장에서 버티고 있던 한 가족의 아이가 포클레인에 치여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생계를 위해 극악한 일에까지 뛰어들어야 했던 김민우의 정신은 해체된다. 부당 해고의 억울함보다 죄책감이 그의 자살의 내적 동기다. 가난을 대물림한 오늘날 ‘흙수저’ 청년의 자화상이다.
작가는 이 두 세대의 이야기를 통해 베이비부머 세대가 만들어놓은 사회구조의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박민우의 시대에도 신분 상승에 실패했던 자는 빈곤에서 벗어나기가 극히 어려웠다. 이렇게 사회적 발전의 그늘 속에서 도태된 이들을 가리켜 <해질 무렵>의 두 화자는 각자 ‘강아지풀’이라는 하나의 비유어를 제시한다.
차순아가 사망한 후, 그녀의 집에서 물품을 정리하고 나오면서 정우희는 빈 화분에 수북이 자라나 있는 강아지풀을 발견한다. 이 소설에서 도시의 인공 ‘잔디’와 대비되는 ‘강아지풀’은 강하고 질긴 생명력을 상징한다. 비록 부르주아의 삶을 살지는 못했으나 인생의 말미에서도 차순아는 젊었던 시절 신분상승에 실패한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첫사랑과의 이별을 슬퍼하고, 사라져버린 달골시장 동네를 그리워한다.
작중에서 강아지풀로 대표되는 차순아 정우희 김민우 이 세 사람의 삶, 그리고 이들이 처한 극빈층 서민의 환경은, 처참하면서도 여전히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공간이다. 가난에 허덕일지라도 그곳에는 사랑과 눈물의 추억, 순수와 생명이 숨 쉬고 있었다.
황석영은 차순아와 그 주변인의 안타까운 삶의 굴레를 통해, 산업화와 사회 양극화, ‘난개발’ 한국 현대사회의 청년실업, 비정규직, N포세대, 인터넷 자살 동호회, 독거노인의 고독사 등 우리나라 뉴스를 장식하는 각종 어두운 ‘헤드라인’들을 라이브로 들여다본다. 드물게 멜로드라마의 플롯을 차용해 변형하면서 많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다.
그 요점은 한국사회는 첨단화된 현대성을 갖춘 사회이지만, 그 안에서 인공 ‘잔디’ 낙원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강아지풀’과 같은 진짜 자연의 순수한 삶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한국식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가짜 인공 낙원과 이 물질주의에 부정당했으나 사랑과 생기가 넘치는 진짜 자연의 세상은 공존할 수 없다. 이러한 점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다른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박민우와 차순아는 마치 잔디와 강아지풀과 같다.
소설의 울림은 크다. 이 소설은 맨 부커상 후보로 오른 사실이 말해주듯 어쩌면 ‘세계문학’의 반열에 발돋움할 만한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려움도 있다. 한국현대사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외국 독자의 입장이라면 이 소설을 얼마나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복잡한 한국현대사를 다 알지 못하는 보통 외국 독자의 경우를 가정할 때, 황석영이 문제 삼는 한국적 도시건축에 관한 성찰과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전략이 얼마나 심각하게 다가왔을지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이 소설은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영혜라는 인물을 통해 육식성의 세계라는,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형이상학적인 주제를 다뤘던 한강의 채식주의자와 조금 다른 차원의 어려움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한국의 구체적인 ‘역사’를 다룬 소설이 ‘세계문학’으로 발돋움하고 인정될 수 있는가?
이것은 번역의 문제이기도 하다. <해질 무렵>은 2018년에 스크라이브(Scribe)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소라 김-러셀(Sora Kim-Russell)에 의해 ‘At Dusk’라는 제목으로 영어권 세계에 번역, 소개된 것이다. 이 유일한 영역 판본은 2019년 맨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의 심사에서 롱리스트에까지 올랐던 판본이기도 하다.
3. ‘썬셋(Sunset)’과 ‘더스크(Dusk)’, 또는 직역과 의역 사이
번역은 문학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논의되어 왔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직역이냐 의역이냐 하는 것이다. “번역가는, 가능한 한 작가를 그대로 두고 독자를 작가에게로 움직이든지, 가능한 한 독자를 내버려두고 작가로 하여금 독자에게 다가가도록 해야 한다”(<번역이론>, 동인, 2009, 16~17쪽)라는 슐라이어마허의 유명한 번역관은 이를 대변한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번역이란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원문을 충실하게 옮기는 작업이라는 개념은 비교적 근대에 와서야 생겨난 개념이다. 로마제국에서 번역이란 자국의 문화와 언어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그리스문화로부터 사상을 빼앗고, 내용을 전유하는 것을 의미했다. 동양에서도 예를 들자면, 조선시대 학자 홍희복(洪羲福)(1794~1859)은 번안도 번역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현대에 이르러 번역물이 쌓이면서 원문에 대한 충실성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원전의 언어를 하등한 것이 아닌 자국어와 동등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이국적인 것’에 대한 존중 또는 책임감이 생긴 것이다. 이 이질성에 대한 책임의식은 20세기에 이르러 로렌스 베누티(Lawrence Venuti)에 의해 계승되어 ‘이국화’ 방법론으로 불린다. 그에 따르면 제국주의 언어인 영어는 특히 원어의 이국적 요소를 억압하므로 영어권 번역에서는 유창한 번역 혹은 ‘자국화’를 더욱 지양해야 한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좋은 번역은 이 ‘이국화’와 ‘자국화’의 중도를 지키는 것이다.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하는 부분, 즉 원문의 문학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는 부분에서는 번역의 가독성이나 유창성을 ‘희생하더라도’ 원문의 이질성에 충실해야 한다.
특히, 자신의 문학을 세계에 알리고자 노력해온 황석영의 경우, 한국적인 특수성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그의 문학의 문학성은 번역어의 수려한 문장력에 묻힐 뿐이다. 번역사에서 있어 온 원전이나 원어에 대한 특권화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다.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도 환상이지만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타당하지 않다.
쟈크 데리다는 ‘관련된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에서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유명한 재판 과정을 끌어와 자신의 번역론을 펼친다. 채무를 갚지 못하게 된 안토니오에게 1파운드의 살을 요구하는 냉혈한 유대인 샤일록의 논리는, 마치 원어와 번역어에 일대일 번역을 요구하는 율법과도 같다. 그러나 재판관으로 남장한 포샤는 그에게 ‘긍휼’의 논리를 제안한다. 전자는 직역적인 사고, 후자는 의역적인 사고에 해당한다.
나는 여기에 ‘용서’라는 항을 추가하고자 한다. 번역 행위에는 ‘용서’라는 관용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떤 번역들이 긍휼로써 ‘용서’되는 것이고 어떤 번역들이 긍휼을 통해서도 ‘용서’되지 않는 것일까?
2016년 맨 부커상을 탄 한강의 에는 상당한 분량의 오역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번역자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번역자의 창의성이 아닌 몰이해에서 비롯된 결과였다는 점에서 나의 식으로 말해 ‘용서’되지 않는 오역들이었다. 그렇다면 에서는 도저히 ‘용서’되지 못할 어떤 오역들이 있는가?
우선, 영역판의 제목인 ‘At Dusk’에 관해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처음에 나는 <해질 무렵>의 제목이 좀 더 서정적인 느낌을 주는 ‘When the Sun Sets’로 번역되었더라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을 완독하고서 생각이 달라졌다. ‘When the Sun Sets’ 쪽이 영어로서의 울림은 더 좋지만 ‘At Dusk’가 작품의 내용에 더 적합하다.
이유는 이렇다. 작중에서 해가 떨어지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박민우의 건축가 지인 일행이 말기암인 김기영 선배와 함께 있고자 모인 자리에서다. 지는 해를 같이 목격한 이 날에, 일행 중에는 한국의 땅들을 마구잡이 난개발로 엉망으로 만든 것을 후회하는 말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는 황석영의 주제적 메시지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해가 지는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소설 전체의 맥락상 <해질 무렵>의 ‘해’는 돌이킬 수 없는 이 건축가들의 지는 ‘해’를 의미한다.
그래서 ‘더스크’가 제목으로 더 어울린다. 실제로 ‘더스크’와 ‘썬셋’은 어감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더스크’는 독자들에게 암울한 느낌을 선사한다. 반면 ‘썬셋’은 앙투안 드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의 명대사, “one loves the sunset, when one is so sad”(The Little Prince, Katherine Woods 옮김, 6장)를 기억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낭만적인 어휘인지 파악된다. 어린 왕자가 ‘썬셋’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릴 줄 안다는 것은 그가 순수한 마음의 소유자임을 뜻한다.
더구나 ‘더스크’는 ‘썬셋’과 의미에서도 다르다. 엄밀히 말해 ‘더스크’는 노을(‘sunset’)이 진 후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의 일정한 기간인 황혼을 뜻한다. 시간 선상에서 ‘쎈셋’이 먼저 온다.
영어 사전에 ‘더스크’는 “the dark part of twilight”(Dictionary.com)라고 나온다. 이는 ‘썬셋’에 비해 확실히 어둠이 강조된 정의다. ‘썬셋’이 직역으로 가능하지만 좀 더 어두운 의미와 느낌을 지닌 ‘더스크’가 원작의 암울함을 더 잘 살려낸다.
박민우의 타락한 일행의 처지에서 볼 때도 그렇지만, 박민우와 차순아의 러브라인이 행복한 결실을 이루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로맨스의 분위기를 풍기는 ‘썬셋’이란 어휘는 적절하지 않다. 제목의 번역은 ‘합격’이다.
다음으로 영역판의 문장들 또는 표현력을 보자. 소라 김-러셀의 번역은 상당히 유창한 원어민적인 영어다.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예를 들자면 한국어 관용구인 “죽이 잘 맞았”다(13쪽)는 영어권 관용구인 “we were like hand in glove”(영역판, 7쪽)로, 은어인 “보릿고개”(13쪽)는 그 의미만 추려내 “true hunger”(영역판, 7쪽)로, 또 “비아냥거리지 않고”(16쪽)는 “I didn’t give him shit for it”(영역판, 10쪽) 등으로, 슬랭을 섞어서 자유자재로 번역하는 방식을 취했다.
특히, 우리말 관용구인 “피차마차 역마차”(44쪽)를 영어권 관용구인 ‘Potayto, potahto’(영역판, 40쪽)라고 한 것은 훌륭한 번역이다. 다만 ‘Potayto’로 됐어야 할 것이 “Potato”로 오식된 것은 옥에 티다.
문장 자체는 매끄러우나 의미가 이상해지는 부분도 없지는 않다. 박민우가 고향 영산읍을 언급하는 부분에서, “어쩌다가 인연이 닿아야 한두 번 들를까 말까 하다 보면”(17쪽)라고 한 것을 역자는 “While you’re busy debating whether or not to go back home for a visit, wondering if there is some compelling enough reason to go”(영역판, 11쪽)로 번역했다. 원문의 의미는 그저 우연이라도 갈 핑계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는 뜻에 불과하며, 여기에는 아쉬움도 서려 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박민우가 고향 방문하기를 적극적으로 따지며 회피한다는 뜻으로 바꿔놓았다. 오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오역을 일일이 지적할 수는 없지만, 이상의 사례로써 그래도 역자의 번역 문장은 대체로 매끄럽게 읽힌다고 하겠다. 기본적으로는 독자 중심의 번역을 한 셈이다.
이 영역은 약간의 개작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일종의 ‘추가’다. 예를 들어, 정우희가 박민우에게 누군가의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건네주는 소설의 첫 장면에서 소싯적 친구 윤병구가 수술을 받고 죽어가는 영산읍의 병원을 찾아가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다. 원문에서는 정우희가 건네준 쪽지가 윤병구로부터 온 쪽지인 것으로 착각할 여지가 있어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원문에서 비공개된 이 인물에게 “She”라는 성별을 특정할 수 있는 대명사를 중성 인칭 대명사 대신에 또는 우회하는 방식 대신에 사용했다. 또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Not long after”이라는 구를 삽입하기도 했다. 두 장면 사이에 원문에는 없는 시간적인 거리를 만들어줌으로써 독자의 착각을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삭제’를 통한 개작도 있다. 차순아가 아들의 장례를 치른 후 정우희에게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말하는 대목이다.
자아, 이제부터 우리도 인간적으로 한잔하자.
어머니가 툴툴 털어버리겠다는 듯 평소의 내 말을 흉내내어 말했다. 인간적으로 너무하다, 인간적으로 배고프다, 인간적으로 얄밉다, 인간적으로 건배하자, 아무데나 인간적으로를 붙여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그녀는 내 말투를 흉내내며 무척 재미있어했다. 나는 주전자를 들어 그녀의 잔에 소주를 따랐다고 내 잔에도 따랐다. (164쪽)(밑줄-인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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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ay, now it’s turn to have a drink.
I picked up the kettle and poured her a cup of soju, then poured myself one. We downed it in one gulp and immediately drank several more shots. (영역판, 157쪽)
이렇듯이 번역문은 원문에 나온 “인간적으로”라는 표현을 모두 삭제해버렸다. 속어를 번역하기가 어려워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으로”라는 말은 ‘까놓고 말하자면’의 뜻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영어로도 “honestly (speaking)”, “frankly (speaking)”, “seriously (speaking)” 등으로 얼마든지 번역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위 인용문의 밑줄 그어진 부분은 모두 삭제되어나갔다. 슬픔을 절제된 방식으로 전하는 이 대사의 한탄조를 영어로 전할 수 없게 되었다.
4. ‘세계문학’으로의 관문, 의 번역 문제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치명적인 실수라 하기보다는 소소한 것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문장력이 유창한가가 아니라 얼마나 이 작품의 한국적인 특수성을 잘 살려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이 번역은 아쉬운 선택들이 적지 않다.
건축이 주제인 만큼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토건 사업 관련 용어나 표현들은 아주 중요하다.
살펴보자면 역자는 ‘산동네’(46쪽)는 ‘hillside slum’(영역판, 43쪽)으로, ‘판자집’(103쪽)은 ‘shacks’(영역판, 98쪽)로, ‘판자촌’(92쪽)은 ‘hillside shantytowns’(영역판, 96쪽)로 ‘음차어’ 없이 번역한다. 물론 이 번역어들은 영어권에서도 많이 쓰이는 보편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전달에 큰 문제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역자는 영어에 마땅한 대응어가 없는 경우에는 음차어를 사용한 후 풀어서 설명하는 방식을 많이 활용한다. 예를 들어서, ‘대청마루’(9쪽)와 ‘일자집’(10쪽) 모두 음차어를 쓴 다음에 부연해서 설명하는 식으로 번역한다. ‘대청마루’는 ‘a daecheong maru, a wooden-floored breezeway, right in the middle’(영역판, 3쪽)로, ‘일자집’은 ‘a traditional ilja-style home: long and straight like the numeral 1’(영역판, 3쪽) 등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번역 단어 수는 늘어났지만 필요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가장 유감스러운 것은, 가장 중요한 ‘한옥’을, 음차어 ‘hanok’이 아닌 ‘traditional Korean-style house’(영역판, 2쪽)라고만 번역한 점이다. ‘한옥’은 매번 ‘hanok’이라고 음차어를 사용해도 좋았을 법한 유일한 건축용어인데도 말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 양식인 초가집과 기와집을 모두 일컫는 말인 ‘한옥’은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매력이 있다. 더욱이 한옥은 본래 역사적으로 ‘나’만 생각하는 건축이 아니라 주변의 땅과 계절 등을 고려해 위치와 내부 설계가 이루어지는 건축 양식이다. ‘배산임수’의 원리를 중요시해 산과 강 주변에 있는 자연과 더불어 살도록 짓는, 자연과의 상생을 추구하는 건축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적 특수성을 잘 드러내는 이 용어를 역자는 번역에서 살리지 못했다. 역자의 결정은 <해질 무렵>에서 건축이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서도 그렇지만 ‘한옥’의 국제화 추세를 생각해서도 이해하기 어렵다.
한옥 구조의 일부인 ‘툇마루’도 두 번 정도 등장하지만, 역자는 매번 ‘the porch’(영역판, 45쪽 및 93쪽)라고만 번역한다. 우리는 일본식 온돌마루를 ‘다다미’라고 부르고 영어권에서도 ‘tatami’라고 하는데, 왜 ‘toetmaru’는 안 되는 것일까.
더 심각한 문제는 ‘달골시장’이라는 어휘의 ‘달골’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박민우가 소년 시절 성장한 산동네인 ‘달골시장’(47쪽)은 작중에서 매우 중요한 심상지리학적 장소다. 재섭이 재근이 형제와의 추억이 있는 곳이고, 부모님의 어묵전 가게와 차순아 식구들의 국수 가게가 있었던 곳이며, 사춘기 시절 그녀와의 사랑이 꽃피었던 곳이다.
그런데 역자는 이 ‘달골’이 처음 등장할 때, 이를 ‘Dalgol, or Moon Hollow’(영역판, 45쪽)라고 번역한다. ‘Dalgol’(영역판, 45쪽)이라는 음차어를 한 번 써주고 옆에 ‘Moon Hollow’라고 또 번역해 놓는다. 이후에는 계속 ‘Moon Hollow’(45쪽, 등)라는 번역을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문 헐로우(Moon Hollow)’는 두 글자인 ‘달골’을 ‘달’과 ‘골’로 나누어, ‘달=Moon’이라는 공식에 ‘골=Hollow’라는 공식을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단어를 해부하는 식의 번역은 주로 한자어를 번역할 때 쓰이는 방법이다.
그러나 ‘달골’은 순우리말이기 때문에 우선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적절치도 않을뿐더러 ‘Moon Hollow’라는 울림이 영어에서는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지명이라서, 유치한 느낌마저도 선사할 수 있다.
아마도 역자의 의도는 ‘Moon Hollow’의 ‘비어있는 달’이란 영어적 의미를 통해 작품의 불행한 느낌을 끌어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래 ‘달’은 ‘산’을 일컫는 옛말로서 ‘달골’은 ‘산골짜기 마을’이라는 뜻이다. 달은 “우리말 ‘땅’의 어원과 닮아 있”고, 예로부터 “우리말에서는 땅을 달이라고 했”다.(조현용, 우리말 지혜, 마리북스, 2018, 77쪽)
고유명사라서 울림이 중요한 지명인 ‘달골’을 꼭 그렇게 말의 의미를 제시하려고 하면서 번역했어야 했나 싶다. 그뿐 아니라 ‘골’은 ‘골짜기’ 할 때의 ‘골’이므로, 굳이 그렇게 번역하자면 ‘Hollow’ 대신 ‘Valley’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문 헐로우’는 한국소설에 나오는 지명 같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어마을 이름 같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두 사례를 통해 더 생각해볼 수 있다.
(가)
우리가 살았던 달골이 지상에서 이미 사라진 기억 속의 박제에 지나지 않듯이,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102쪽)
→
Moon Hollow was long gone, like a memory of some taxidermied thing. And once something is gone, it does not return. (영역판, 97쪽)
위의 인용문에서 원문에 따르면 ‘달골’은 아주 그리운 목가적 공간으로 느껴져야 하는데, 영어 번역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의미 중심의 번역인 ‘Moon Hollow’가 나머지 문장의 의미를 방해할뿐더러, “사라진 기억 속의 박제”를 “like a memory of some taxidermied thing”으로 번역한 것은 오역에 가깝다.
원문의 뜻은, ‘너무 오래되어서 달골이 기억 속에 박제화되었다, 혹은 깊숙이 박혀버렸다’라는 뜻인데, 번역에서는 ‘달골은 어떤 박제물에 대한 기억처럼,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굳이 ‘박제화 된’이라는 뜻을 지닌 ‘taxidermied’라는 딱딱한 단어를 사용해 일대일 번역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
나는 길 한복판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196쪽)
→
And so there I stood, in the middle of the sidewalk in what was once Moon Hollow, like a man who’d lost his way. (영역판, 188쪽)
위의 인용문의 문장은 소설의 맨 마지막 문장이다. 보다시피 이 대목에서 역자는, 원문에는 없는 ‘Moon Hollow(달골)’을 번역에 삽입함으로써 의미를 변경시켰다. 그런데 이 번역은 완전히 길 잃은 인물을 묘사해야 하는 상황에서 ‘what was once Moon Hollow(한때는 달골시장이었던)’라는 형용사구를 통해 오히려 그에게 위치감각을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장면의 낭만성도 삭감되고, ‘Moon Hollow’와 함께 부수적인 단어들이 추가되면서 문장의 서정성 또한 삭감되는 효과를 낳았다.
나의 생각이지만 번역의 ‘용서’와 관련하여 가장 어렵게 여겨지는 번역은 아무래도 ‘강아지풀’에 관한 것이다. <해질 무렵>에서 자본주의의 지배 아래서 밀쳐져 버려진 자연적이고 토속적인 소중한 옛것들을 상징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 ‘강아지풀’이다. 그런데, 역자는 이것을 ‘foxtail(폭스테일)’이라고 번역한다. 이를 한국어로 다시 옮기면 ‘여우꼬리’가 된다. ‘폭스테일’이라는 영어의 울림 역시 거칠고 아름답지 못하다.
물론 사전에서 찾아보면 ‘강아지풀’은 영어로 ‘폭스테일’이라고 나온다. 강아지풀의 생김새가 한국인들에게는 수북한 털의 동물인 강아지와 같은 친근한 느낌을 주는 반면, 영어권의 외국인들은 이 동일한 식물이 여우의 꼬리를 닮았다고 생각해서 붙여진 이름 같다. 한국어로나 영어로나 동물에 빗대어 이름을 붙였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으나, 한국어에서 영어로 번역할 때 이 동일한 식물이 갑자기 강아지에서 여우로 변신한 느낌이다.
‘폭스테일’이 직역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원문이 지향한, 강아지풀이 가지고 있는 귀엽고 순수한 이미지와 대조되는 이미지와 어감을 지닌다. 외국에서도 여우는 오래전부터 교활함, 간사함, ‘술수가 뛰어난’, ‘잔꾀가 많은’ 등을 상징해 왔다. 좀 더 긍정적으로 말해도 ‘팜므파탈적인’, ‘치명적으로 유혹적인’, ‘농락하는’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순수함과는 딴판이고, 전혀 이상한 번역이 된 것이다.
차라리 정확하게 같은 풀을 가리키지는 않더라도 부정적인 어감이 없는, 성질이 비슷한 잡초의 영문명으로 번역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폭스테일’ 대신 우리 주변에 흔하디흔한 식물인 pigweed(명아주), Shepherd’s purse(냉이), chickweed(별꽃) 등에서 하나를 골라서 쓰거나, 아니면 차라리 잔디 정원을 방해하는 또 다른 식물인 ‘dandelion’(민들레)으로 바꿔서 번역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차라리 ‘강아지풀’을 다시 영어로 번역해, ‘puppygrass(퍼피그래스)’나 ‘puppytail(퍼피테일)’로, 소설을 위한 가상의 풀의 이름을 만드는 방법으로 가도 좋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라면 ‘puppygrass(퍼피그래스)’로 번역했을 것 같다. 그런다면 정확한 번역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원작의 문학성을 훼손하지는 않는, 앞에서 말한 ‘이국화’의 번역이 되었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소라 김-러셀의 는 뛰어난 유창성을 지닌 번역이며, 그만큼 기본실력과 수고에 대한 인정이 요청되는 번역의 결과물이다. 이질적인 것의 의미보다는 영어권의 슬랭이나 관용구를 적절히 활용해 자구를 매끄럽게 번역한, ‘자국화’의 번역 쪽에 해당한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위에서 내가 언급한 몇 가지 문제들은 놓치면 안 되는, 이 소설의 핵심테마와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번역 지점들이다. 또 지면상 다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박민우 부모님의 어묵전 가게를 번역할 때 ‘어묵전’을 좀 더 정확하게, 이를테면 ‘fishcake pies’나 ‘fried fishcakes’, 아니 ‘fishcake omelettes’라고 하면 좋았을 것을, 단순히 ‘어묵’을 가리키는 영어인 ‘fishcake’으로 번역한 점 등등 아쉬운 것들이 있었다.
나의 생각인데, 기본적으로는 ‘자국화’의 번역을 유지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문화와 같은 특수성이 드러날 수 있는 부분에서만큼은 좀 다르게 갔어도 괜찮았으리란 여운이 남는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이 글에서 처음 제기했던 문제로 다시 돌아오고자 한다.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황석영의 <해질 무렵>의 번역물은 어느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 소설은 유럽을 향해, 현대성에 있어서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화두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유럽인들에게 비서구 사회 한국의 현대사 속에서도 현대성에 대해 ‘심문’하는 문제적인 이야기가 산출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난개발 시대를 통과해 노년기에 접어드는 박민우의 과거의 끝이, 성만 다르고 이름은 같은 청년 김민우의 현재에 닿아가는 이 소설은, 오늘날 한국에서 어딘가 벌어지고 있을 법한 현실감 있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문학에 호소하는 장점이 있다.
이 두 세대에 걸친 이야기는 한국현대사의 복잡한 국면들에 대한 이해를 요청하는 난점도 있다. 작가로서 이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동시에 이는 번역의 문제를 불러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는 번역의 문제라는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세계문학’에 도달할 수는 없다는, 한국어 문학의 어려움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나는 이 글을 통하여 더 많은 ‘이국화’와 이를 위한 섬세한 조절의 필요성을 이야기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어 문학의 ‘세계문학’을 향한 발돋음, 여기서 문제는 번역, 또 번역이다.
➲ 평론 당선소감 / 김엔야
“언어는 나의 종족, 국적, 피다”
김엔야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The unconscious is structured like a language)." 라캉의 이 기본 명제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적 명제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 속하는가 하는 저의 정체성의 문제를 이처럼 잘 정리해주는 명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나의 종족, 나의 국적, 나의 피입니다.
어려서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이주했던 저는 과거에, 한국어를 ‘잊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문학을 읽고 쓰며 문학청년을 꿈꾸었던 언어는 영어였습니다. 세월을 지나 한국에 돌아왔을 때 저는 이미 성인이었고, 성인이 되어서 처음으로 저의 모국어인 한국어로 된 문학을 읽고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영어를 사용하던 세계에서 성장 과정을 다 보내고 성인이 되어서 다시 한국어를 사용하는 세계로 들어와 한국어가 저의 세상 속으로 스며들어 왔을 때였습니다. 저는 어릴 적 알았던 어떤 세상, 소멸했던 어떤 세상이, 꿈틀거리면서 부활하는, 그런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알고 있었으나 ‘잊고’ 지냈던 ‘새로운’ 또 하나의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이 경험은 마치 저에게, 크로노스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 이래로 저는 두 개의 언어로 구축된 두 개의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제게는 한국어로 된 세상과 영어로 된 세상, 두 개의 세상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깨달은 게 있습니다. 나의 피부색이 무엇이든 국적이 무엇이든, 내가 어디에 있든,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언어며, 언어야말로 나의 정체성이자 나의 피라는 사실입니다.
저의 모국어로 쓴 글로 상을 받아 기쁩니다. 그 글이 저의 또 다른 세상을 구축하는 언어인 영어로 된 글을 분석하는 작업이었기에 더없이 기쁩니다. 나는 한국인인가 캐네디언인가, 이제는 그 어느 일방에 온전히 속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방인’의 운명에 대해서 저는 방황하지 않습니다.
번역이 저의 두 가지 세상을 연결하는 작업이라면, 번역 평론이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누군가가 이루어놓은 그의 두 언어적 세상의 연결을 평가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그 세상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건설적인 평가를 위하여 애쓰겠습니다.
김엔야라는 이름으로 인생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소중한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과 불교신문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 평론 심사평 / 방민호 서울대 교수
“번역이 한국문학 난제임을 환기시킨 작품”
방민호
올해의 평론 부문은 세월이 어려운 때여서 그런지 오히려 높은 수준의 작품을 낸 분이 많았다. 문학은 역시 행복의 산물만은 아니라는 것, 고통 속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게 했다.
좋은 문장들 가운데에서 먼저 세 편을 어렵게 선정했다. 하나는 ‘세계문학의 가능성과 번역, 그리고 또 번역―황석영 장편소설 <해질 무렵>론’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고인이 된 박상륭 작가의 ‘죽음의 한 연구’를 대상으로 삼은 ‘죽음, 그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박상룡 장편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중심으로’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올해 한창 뜨거웠던 김봉곤 사태를 상기시키듯 두 퀴어소설 작가의 문학세계를 다룬 ‘퀴어(queer) 소설(들)에 묻는 관계의 본질-김봉곤과 박상영의 게이(gay) 소설들’이었다.
비평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하게 한 세 작품이었다. 비평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하나는 시류의 흐름을 타는 비평, 세상일에 개입하는 비평, 문학의 장 속에서 싸우는 비평이다. 또 하나는 어떤 주제에 몰두하는 비평, 즉 아르바이트 비평이다. 나머지 하나는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을 바탕으로 성찰하는 비평, 예술가 비평이다.
황석영 장편소설 <해질 무렵>의 번역 문제를 검토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으로 어떻게 ‘도약’할 수 있는가? 여기서 번역에 수반되는 문제는 무엇이냐? 하는 문제를 다룬 평론이다. 무엇보다 그 질문의 현재성이 관심을 끌었다. 황석영은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작가이며 어느 의미에서 계속 도전 중인 작가다. 번역 문제의 구체적 사례들을 원활히 다룰 수 있었던 ‘실력’에도 관심이 간다. 번역이 여전히 한국문학의 난제임을 환기시켜 주었다.
당선작의 선정은 ‘쇼트 리스트’에 들어간 이후에는 일종의 우연에 맡겨진다. 그만큼 모두 제각기 자격이 있다는 말이다. 당선작은 낸 분에게 큰 축하드리며 아쉽게 탈락한 두 분께는 더 좋은 결실 있기를 기대하고자 한다.
[불교신문3642호/2021년1월1일자]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