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의 결심
박찬욱의 이전 작품을 돌이켜 보면 인간과 사랑에 대한 지독한 냉소로 가득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폭력과 섹스만 남은 세상에서 보이는 본연을 여과 없이 드러내던 그가 사랑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자가발풍하는 버섯처럼 미묘한 공기의 떨림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에게 범죄의 용서와 이해는 기독교적인 근본으로 입각해 해결해야 한다고 작품으로 줄곧 말해왔다. 작품 속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들에게 참회의 과정을 통해 구원을 갈구하라고 끊임없이 주문했고 이해와 용서라는 감정의 골 사이를 흐르던 것은 사랑이었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그 강에서 허우적거리는 두 남녀의 이야기다.
이번 작품은 박찬욱에게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의 작품에서 익숙지 않았던 인물들이 배치되고 인간의 심연을 드러내는 장치에 불과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면에 내세운다. 인장과 같던 장르적 요소는 뒤로 미뤄두고 스스로 적자라 믿고 있는 히치콕의 코드에 본인을 형상화한 듯한 장해준이란 인물을 빌어 그의 영화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음을 조심스럽게 전하고 있는 것 같다.
자석같은 사랑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을 떠났고, 이제 내가 당신을 사랑하려니 당신이 나를 떠나네” 우연은 운명을 만들고 사랑은 언제나 엇갈린다. 현대인 같지 않았던 남자와 꼿꼿한 몸을 지닌 여자는 함께 할 수 없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를 갈구하지만 바다는 이미 만조가 되었다. 그림 한 장의 두께 같은 간극이지만 그 사이는 그림의 안과 바깥만큼 닿을 듯 멀다. 패턴을 알고 싶다는 해준의 말은 당신이 나와 같은 동류의 인간임을 알아버린 순간일 것이다. 식사를 하고 누구랄 것 없이 오래된 부부처럼 손을 맞춰 책상을 정리하는 순간, 아내는 한참을 뒤져서 찾아내던 그의 주머니 속 물건을 한 번에 찾아내는 그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한국말로 전해도 알아듣지 못하던 남편과 달리 느껴본 적 없는 친절함을 지난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된 서래 역시 마찬가지다. 박찬욱의 카메라는 구도의 대칭과 비대칭을 통해 두 사람의 감정을 드러내고 마음이 가까워질수록 시선과 몸이 멀어지는 애달픈 사랑을 그려낸다.
육체와 마음의 간극
사랑이라는 감정은 대상이 존재함으로써 성립이 된다. 대립된 구조 속에서 관찰하고 관음 하고 그러면서도 멀어지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일말의 불씨를 통해 가까워지는 것이다. “해어질 결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꼽자면 단연코 취조실에서 대치하는 서래와 해준일 것이다. 카메라가 투 샷을 잡을 때 설치된 이중 거울에 반사되는 그 기하학적인 화면은 마치 동일한 인물이 다른 차원 속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때 취조실 밖의 모니터는 한 사람을 취조실에서 또 하나는 밖에서 담아낸다.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곳에 머물게 함으로써 육체와 마음에 이상한 간극을 만들어 낸다.
산해경과 송서래
기도수가 서래에게 가하는 폭력은 소유욕으로부터 발현된다. 타인의 신체에 자신의 이니셜을 세기고 보이지 않을 곳만 가격해 상처를 준다. 외국인이라는 신분을, 한국말이 서툴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의 통제에 두려 하는 것이다. 그게 기도수가 생각하는 사랑이다. 두 번째 남편 임호신은 말뿐이다.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그녀를 이용해 금전적 이득을 볼 생각밖에 없는 사람이다. 서래가 바라는 것은 오직 친절한 마음 하나였다. 번역되어 나오는 말의 텀을 기다려주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나로 봐주는 마음이 고팠고 엄마에게 줄 수 있는 건 죽음의 안식 밖에 없었던 불쌍한 여자, 그녀가 읽어 내려가며 공부하던 산해경은 산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세계를 만들어낸 시간의 기록이었다. 그 무게는 고스란히 서래의 영혼에 녹아있었다. 폭력과 차별과 멸시의 시선까지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전달해야만 했던 모든 순간들이 질곡인 것이다.
빈집에 갇혀버린 사랑
엇갈리는 사랑의 결말은 붕괴였다. 같은 세계의 충돌은 마침내 하나의 세계를 무너뜨려야 온전히 꼿꼿하게 서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해준은 그렇게 무너졌고 당신에게 집중할수록 멀어지는 순간들을 존재하는 모든 시점으로 우리는 목도했다. 서래는 엄마와 할아버지의 유골을 뿌려줄 남자와 받아줄 산을 찾았지만 그녀의 빛이 남자를 드러내 보이면 자신은 사라져야 한다. 해준의 안개의 도시에서 헤매다가 숨을 쉴 바다를 찾았지만 그 바다는 그림이었다. 종이의 두께는 얇았으나 그림의 안과 밖은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다. 그의 가엾은 사랑은 빈집에 갇혔고 미결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붕괴되고 있을 것만 같다.
첫댓글 글에서 영화의 장면 장면들이 살아나
서래의 아픔이 또 밀려드네요. ㅜㅜ
영화를 보고 느꼈던 생각들이 여러분들의 리뷰를 보며 구체적으로 정리가 되어갑니다.
그리고 영화 하나로 여러분들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할수 있게 만들어준 깐느박께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고 싶네요.
박감독님처럼 꾹꾹 눌러담은 언어들로 채워주신 리뷰
잘 읽었습니다. ㅎㅎ
https://youtu.be/mIHOHu9DC8g
아마도 이자람 밴드 - 빈집
가엾은 그녀에게 바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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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의 조각들을 맞추고
소대가리님의 감상평으로 모자란 조각들을 더 해
감상의 퍼즐을 다 완성한 느낌입니다.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
PLAY
좋은 영화가 만들어낸 좋은 리뷰 너무 잘봤어요
소대가리 내사랑
깊은 통찰력과 글솜씨에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늘 귀감이 되는 글 감사합니다
영화 보면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소대가리님의 리뷰를 읽으며 다시 곱씹어봅니다 ..
강렬한 인상을 준 영화는 아니었는데
자꾸 자꾸 영화가 생각나는걸 보니 좋은 영화가 맞는 것 같아요 ^^
한 번 더 보고싶어지게 만드는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어쩜, 가슴에 와닿는 아름다운 리뷰 감사합니다.
마침내, 저도 보고 말았네요.
올해 본 영화중 단연 최고였고, 완벽한 영화였다는..
소대가리님 리뷰를 새기며 다시한번 더 관람 ^^
영화를 보고나면 소대가리님 리뷰를 기다리거나 찾아보는 찐 팬입니다. 이번에도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아..감상후기..넘 멋져서 말이 안나옵니다..ㅎ
실제로 이영화도 저에게 그랬구요..넘 완벽하게 멋진 만듦새에 저는 말을 아끼고싶더라구요..최소 3번이상은 봐야 얘기 할 수 있을거같아요~ 소대가리님 리뷰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