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별된 음식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인간과 가장 처음으로 하신 일이 행위언약이었다. 그것은 먹을 수 있는 것과 금지된
음식에 대한 것이었다(창 2:17). 하나님은 인간이 동산 안의 모든 것을 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과의 최초의 언약을 지키지 못했고, 그 결과 죽음이 임했다.
그후 세상에 사람의 죄악이 관영하여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와 무지개언약을 세우시기 전에 또 다시 먹을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별하여 경계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피를 먹지말라고하시며 “피를 먹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창 9:3-6). 하나님은 먹는 것과 죽음을 항상 함께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셔서 애굽에서부터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또다시 음식에 대한 규례를 정해주셨다. 레위기 11장에서 하나님은 먹을 수 있는 정한 음식과 먹으면 안될
뿐만 아니라 만지지도 말아야 하는 가증한 음식을 구별하여 주셨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하나님이 성별하여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구별된 식습관을 통해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 14장에서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聖民)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으니라”라는 말로 시작하여 정한 음식과 가증한 음식을
구별한 뒤에 또 다시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라고 말을 마친다.
그런데 여호와의 성민이 먹으면 안 되는 가증한
것을 “객”이나 “이방인”에게는 팔아도 된다고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음식의 규례는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 사람(하나님과 관계없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구별하는 척도가 되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술과 담배나 마약을 금하라는 설교는 자주 듣지만, 성경에서 선포하신 금기의
말씀은 거의 듣지 못하거나 오히려 예수께서 그것을 다 폐지시켰다라는 것을 듣게 된다. 사실 술은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지만(잠 20:1,
23:29-35, 31:4, 사 5:11, 롬 13:13, 고전 5:11, 6:10, 갈 5:21, 엡 5:18, 벧전 4:3, 살전
5:7-8)
담배나 마약에 관한 말씀은 없다. 그래도 나쁘다는 이유로 금지시킨다. 또한 병에 걸린 사람에게도 음식을 구별하여 먹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사들의 말은 어떻게 해서든 잘 지키려고 애를 쓰면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많은 이론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까지 팔아먹으면서 무시하려고 발버둥을 친다(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했다면서). 그러나 천지는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마 24:35).
하나님이 가증한 음식의 이름을 지적해서 말씀하신 것은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 그리고
이사야 66:17에서 ‘쥐’가 언급된 것 외에는 어떠한 곳에도 ‘돼지’처럼 지명해서 여러 차례 말씀하신 곳이 없다. 돼지는 구약 성경에서 6회,
신약 성경에서 13회 나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그토록 돼지를 가증하게 여기시며 반복해서 경계의 말씀을 하셨는지 살펴보자.
1.
하나님이 금하신 돼지 – 이방인과 선민의 구별방법
“돼지는 굽이 갈라져 쪽발이로되 새김질을 못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레 11:7, 8, 45下, 47).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셨고,
돼지고기를 먹는 이들은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그들도 거룩하게 하기 위해 머글 것과 먹지 못할 것을 분별해서 지시한
것이었다. 여기에 추가로 “…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66:17)라는 말씀은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라는 명령과 흡사하다.
물론 선악과는 돼지처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돼지는 가증스러운 것이지만, 선악과는 가증하다는 말이 없다. 그러나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것을 선택할만큼 탐스러운 것이므로 그것이 아무리 선한 것이어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우상)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하나님은, 하나님이 지명하여 먹지말라고 하신 것들을 먹을 경우, 반드시 죽거나 망할 것이라고 선포하셨고 그대로
실행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쁜 것만을 금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하나님을 순종하는지
불순종하는지를 시험하기 위해 인간에게 항상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더불어 의지를 주신 것이다(신 8:2-3).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음식에 대한 규례로 인해 그 당시의 이방인들은 돼지를 먹는 사람은 유대인(하나님의 선민)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신구약 중간 시대의 안티오커스 4세(Antiochus Epiphanes IV, B.C. 175-163) 는 안식일과 유대인의 절기를
폐지하고 성경 소유를 금지했으며, 이스라엘의 신앙의 포기 및 배교의 증표로 하나님이 가장 가증하게 생각하는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했고, 돼지의
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도록(이방인의 희생제사) 명령했다. 돼지 고기를 먹는 순간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포기하였음을 의미하는 증거로 삼았던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안식일에 처형시켰다.
제우스 상이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졌고,거룩한 제단에는 가증한 돼지
피가 뿌려졌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자들은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하나님의 선민보다는 당장에 사는 것이 더 중요했던 그들은 죽지 않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여 돼지고기를 먹고 돼지와 돼지 피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성전에는 제우스(Zeus)의 상과 각종 우상들(헬라의 많은 신들의
형상)이 세워져 예루살렘 성전은 헬라인들과 배교자(헬라화된 유대인)들의 우상 숭배 장소가 되고 말았다(참고 겔 8장, 렘 7:17-18,
44:15-19).
이 박해와 순교의 기록은 마카비서 등 외경에 나타나 있다. 천주교는 마카비 등 외경을 인정하여 공동번역 성경에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마카베오 1서 41-47절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 후 안티오커스왕은 온 왕국에 영을 내려 모든 사람은 자기 관습을
버리고 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방인들은 모두 왕의 명령에 순종했고,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도 왕의 종교를 받아들여 안식일을 더럽히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쳤다. 왕은 또 사신들을 예루살렘과 유다의 여러 도시에 보내어 다음과 같은 칙령을 내렸다.
유다인들은 이교도들의
관습을 따를것. 성소 안에서 본제를 드리거나 희생제물을 드리거나. 술을 봉헌하는 따위의 예식을 하지 말 것, 안식일과 기타 축제일을 지키지 말
것. 성소와 성직자들을 모독할 것. 이교의 제단과 성전과 신당을 세울 것. 돼지와 부정한 동물들을 희생제물로 잡아 바칠 것. 사내 아이들에게
할례를 주지 말 것. 온갖 종류의 음란과 모독의 행위로 스스로를 더럽힐 것. 이렇게 하여 율법을 저버리고 모든 규칙을 바꿀 것. 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2. 목숨을 건 돼지 제사 거부
B.C. 167년 안티오커스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25km떨어진 ‘모디인(Modi’in) 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그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제우스신에게 절하도록 강요했다.
그때 늙은 제사장 맛다디아(Matthathias)는 “왕의 영토에 사는 모든 이방인이 왕명에 굴복하여 각각 조상의 종교를 버리고 그를 따른다고
작정하였다 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이 맺은 계약을 끝까지 지킬 결심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겁이 많은 한 유대인이
앞으로 나가 제우스 신에게 절하였다. 그때 격노한 제사장 맛다디아는 그 배교한 유대인을 죽이고 이에 달려드는 군인까지 죽인 후 산 속으로
달아났다.
이것이 독립국가 하스모니안(Hasmonian) 왕가를 일으킨 유명한 마카비(Maccabee ‘쇠망치’라는 뜻) 전쟁의
시작이다. 맛다디아의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Judah Maccabee)가 특히 그 용맹으로 유명하여 헬라주의에 반대한 그들의 전쟁을 가리켜
마카비 전쟁(Maccabee War)이라 한다.
3. 하누카(수전절, 봉헌절) – 성전에서 돼지 제사
추방
맛다디아(Matthathias)의 다섯 아들(요한, 시몬, 유다(마카비), 엘르아살, 요나단)은 약 25년 동안 대 제국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전쟁을 치루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성전이 더럽혀진지) 3년만에(B.C. 164년) 드디어 예루살렘 성전을 탈취하여 유다
마카비(Judah Maccabee)는 신실한 제사장들을 세워 성전을 정결케 하였다.
부정한 돼지로 더러워진 제단은 허물어 버리고
새로운 돌로 새 제단을 만들었다. 또한 금관과 금방패를 만들어 새롭게 봉헌하고 부서진 문들을 만들어 달고 무너진 방들을 수축하였다. 3년전
유대력으로 키슬레브월(12월) 25일에 빼앗겼던 성전은 정확하게 3년 후 같은 날에 봉헌되었다. 성전을 새로 봉헌한 유다 마카비는 이 날
기슬레브(Kislev)월 25일부터 8일간을 하누카 명절로 지키도록 명령하여 구약성경의 제사법에 따라
8일간의 봉헌절(수전절, 하누카
절기)을 지켰다. 그래서 이 절기는 신약에만 나타나 있다.
(*참고 *하누카(Hanukkah 뜻: 봉헌 dedication)는
셀류시드 왕조(Selucid Dynasty)의 안티오커스 4세(Antiochus IV)에 의하여 더럽혀졌던 성전을 탈환하여 하나님께 바쳤던 성전
봉헌을 축하하는 명절이다. 한글 개역에는 성전을 수리한 명절이라하여 수전절로(요 10:22) , 표준새번역에는 성전 봉헌절로 번역되어있다.
마카비서에 의하면 기슬레브월 25일부터 8일간을 장막절과 같이 지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시편의 할렐송을 노래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1세기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hephus)는 이 날을 “빛의 절기(Feast of Lights)”라고
하였다. 9개의 가지를 갖고 있는 하누카 촛대(메노라)는, 여덟개는 짧고, 한 개(샤마쉬:종 Servant)는 길다. 하누카가 되면 하루에
하나씩 촛불을 켜서 마지막날에는
여덟개의 촛불을 밝힌다. 그러나 샤마쉬는 처음부터 켜놓고 있으므로 9개의 촛불이 켜지는 것이다. 이는
성전을 봉헌하던 날 금촛대에 겨우 하루 정도만 쓸 수 있는 기름이 있었는데, 그 촛불이 8일동안이나 꺼지지 않고 계속 성전을 비추었다고 해서
유래되었다.)
4. 하스몬 왕조와 바리새파
성전은 모독당한 지 3년만에 다시 회복되었으나 완전한 독립은 아니었다.
맛다디아가 1백46세의 고령으로 죽고, 가장 용맹했던 마카비도 전사한 가운데, 항쟁을 시작한 지 25년만인 B.C. 142년에야 완전한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시몬 마카비는 이 나라를 그의 조상의 이름을 따서 하스몬(하스모니안) 왕국이라 불렀고, 하스몬 왕조는 시몬의 아들들이 나라를
다스리며 B.C. 63년 로마의 침공을 받기까지 1백여년간 강한 독립왕국을 유지했다(B.C. 142- B.C. 63).
종교적
자유는 유다 마카비에 의해, 정치적 자유는 시몬 마카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유대인들은 이 독립기간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마카비를 다윗 왕에 견줄만한 유대의 영웅으로 여기고 있다. 이 전쟁 중에 핫시딤(Hasidim 뜻: 경건한 사람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했는데, 핫시딤은 마카비가 게릴라전을 벌일 때 함께한 유대 반란자들을 일컫는 말로, 아직까지 유대인들의 한 종파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마카비 2서 14:6). 이들은 거룩한 제사장과 율법학자들로 구성된 강력한 민족주의자들로서 유대주의를 보존하고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으며 헬레니즘을 반대했다. 이들은 마카비 전쟁 참여 후부터 유대교를 더럽히는 이교적 영향에서 구별되는 그룹이라는
의미로
‘바리새파(Pharisees 뜻: 분리자)’로 불려졌다. 바리새파는 후기 유대주의의 한 부류로서 B.C. 3세기 경에 등장한
정치ㆍ종교적 그룹이었으나, 포로기를 지나면서 반(half)정치ㆍ종교적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는 이교국가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여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들은 이방인과의 결혼을 엄금하여 제사장이라도 이방인과 결혼하면 부정한 자로 여겼다. 신약시대에 이들은 ‘모세의
의자(Moses’ seat)’에 앉아 가르쳤는데(마 23:2), 이는 그들의 막강한 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마 23장).
5.
사탄을 상징하는 돼지떼를 심판하신 그리스도
지금도 제사(무당의 굿, 동제(洞祭))를 지내는 곳에 가면 돼지 머리가 올려져 있다. 또
돼지는 ‘지신(地神)’을 상징해 왔으므로 돼지꿈을 꾸면 재수가 좋다고 알려져왔다. 그래서 돼지꿈을 꾸면 사람들은 복권을 사야한다며 아우성이다.
세상에서 ‘돈’을 상징하는 돼지를 기독교에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가르친다(딤전 6:10). 즉 ‘돈’을 상징하는
‘돼지’(豚:돈)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롬 8:7, 약
4:4, 요일 2:15). 이렇게 돼지로 제사를 지내고 돼지가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로 사탄을 숭배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한다는 뜻이다. 돼지고기를 먹는
일은 단지 ‘음식’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포기를 말하는 것이다. 선악과가 그러했듯이……
이는 신약의 교리와는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해 묻지 말고 먹으라”(고전 10:25)라고 말했고, 예수님은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라고 하시면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막
7:19)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렇게 한 구절만 떼어서 보기 때문에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 구절만 뽑아서 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자세히
읽어보되 분명히 거기에는 짝이 있다고 하셨다. 따라서 성경을 한 구절만 뽑아서 내 생각대로 해석할 경우,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로 사람들을 현혹할
수 있는 이름만 기독교인 종교를 만들어낼 수 있다. 성경에는 반드시 짝이 있다고 말씀한다. 즉 성경을 해석할 때, 다른 것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설명이 되어있는 다른 부분의
성경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세히 그 뜻을 상고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조명해주시며 진리의 길로 이끌어주시므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을 합리화하려는 마음을 갖고 성경을 해석할
경우 성령이 아닌 더러운 영의 개입으로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5장과 마가복음 7장에 기록된 이
내용은 ‘하나님의 율법’과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장로의 유전’을 놓고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논쟁하는 장면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장로의 유전’을 613가지나 만들었다. 그들의 유전 중에는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고 먹어야 된다는 법이 있는데,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을 보고 비난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이사야서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사 29:13)라는 말씀과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라는 말씀을 언급하시면서 ‘고르반’의 모순에 대해 말씀하셨다.
‘고르반’(κορβᾶν)은 하나님께 바쳐진 예물로,
하나님께 성별해서 바친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바꿀 수 없었다(레 27:28-33).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 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레 27:28).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기의 재산을
고르반이라고 함으로써 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수 있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이는 하나님께 바친다고 하면서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교활한 사기수법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동시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라고 하는 십계명을 어기는 범죄행위라는 것을 예수께서
그들에게 지적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라고 하시며
그때에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두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로 들어가서 배설되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지만,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막 7:18-19)
여기에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저자 마가가 첨가시킨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말해서 마가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마가복음은 마가가 베드로의 말을 듣고 기록한 것으로 이것이 쓰여질 당시는 예수님의 부활 후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던 때이며 초대교회에 핍박이 심할 때였다.
그리스도께서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기록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또한 하나님께서
가증하므로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어도 된다고 말씀한 내용도 없다. 만약 예수께서 돼지고기를 먹었다면, 돼지와 그 피로 제사를 지내지 않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들(바리새파)의 신앙이 예수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욥바에서 환상 중에 베드로에게
가증한 짐승들을 먹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베드로는 지금까지 그런 속되거나 더러운 것을 먹은 적이 없다면서 3번이나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했듯이 마가가 기록한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하신 먹을 수 있는 모든 음식’을 말하는 것이지, 먹지말라고 금하신 “가증한
것”까지 포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리새인과 충돌할 때에 먹었던 음식은 정결한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은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20) 즉 하나님께서 정결하다고 하신
모든 음식은 아무리 손을 씻지않고 먹어도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돼지고기를 먹음으로 그들과 시비가
있었던 내용이 성경에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예수님이 돼지 치는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 귀신들을 돼지에게 보내 돼지를 몰사시킨 사건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당시 거라사(가다라) 지방의 사람들은 로마 군대에 납품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먹지않고 배척하던 돼지들을 엄청나게 사육하고 있었다.
그들은 돈벌이를 위해서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던 것이다(마 8:28-34, 막 5:1-20).
의학박사인 돈 콜버트(Don
Colbert, M.D.)는 그의 책 「예수님처럼 식사하라」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돼지가 깨끗한 짐승이었더라면 예수님은 절대 귀신이
그 속으로 들어가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귀신을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부정한 대상을 부정한 대상답게 처리하셨던 것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로마 신들을 위한 의식이 매일 치러졌다. 소는 ‘상위(上位)의 신’들을 위해 바쳐졌고, 돼지는 ‘하위(下位)의 신’들을 위해
바쳐졌다. 예수님은 돼지가 사탄을 위한 제물로 바쳐지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사탄이 지옥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끔 하셨던
것이다.”
돼지고기를 더럽다는 이유로 혐오하게 되었다는 이론의 시작은 랍비 마이모니데스(Moses ben Maimon
1135-1204, 보통 Rambam으로 부름) 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돼지고기가 “인체에 해롭고 나쁜 영향을 끼친다”라고 말하면서,
“돼지고기를 법으로 금하는 주요한 이유는 돼지의 습성과 먹이가 매우 더럽고 혐오스럽다는 데에 있다”라고 하였다. 또 그는 “만약 법이
이집트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돼지를 기르도록 허용한다면, 카이로의 집과 거리는 유럽처럼 더러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돼지의 입은 똥과 같이 더럽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위생 이론은 다른 동물 음식의 금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집트에서 쥐와 토끼는 전염병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금지되었으며(레 11:6, 사 66:17), 돼지 역시 위생적인 이유로
먹는 것이 금지되었다. 특히 전염병은 악귀들의 활동과 동일시
되었는데,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도구 중 하나가 바로 전염병이었다.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 ‘돼지’가 상징하는 것은 ‘외식’이다. 겉은 굽이 갈라져서 크리스천같이 보이지만, 속은 새김질을 하지 않는
즉 말씀대로 살지 않는 외식하는 자들의 표본이 바로 돼지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도 둘째 아들의 바닥생활을
표현할 때에 이방인 밑에서 돼지 치는 일을 했다고 말씀하셨다(눅 15:15).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개와 돼지처럼 취급되었던 존재였고,
그런 존재 밑에서 돼지를 치는 일은 저주받은 인생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은 ‘돼지’에 대해 언급하실 때에 먹을 수 있거나 가까이
해도 괜찮은 것을 표현하지 않으시고, 저주받은 인생이 마지막 바닥생활을 하게 될 때에 어쩔 수 없이 함께하게 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대에 살면서 돼지를 치고있던 사람들을 그 저주에서 해방시켜주기 위해 돼지떼를 몰사시키셨던 것이다.
귀신들렸던 사람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었고, 돼지를 치는 저주받은 인생에서 새롭게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저주받은 삶에서
해방시켜주시려는 예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경제적인 손실만을 생각한 그들은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시기를 간청했던 것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그들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6. 베드로가 본 환상은 음식이
아니라 이방인에 대한 상징
베드로는 욥바에서 비몽사몽간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보자기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레위기 11장에 나오는 가증한 것들)의 환상을 보았다. 하늘에서 그것을 먹으라는 음성이 들리자, 베드로는 속되거나 깨끗지 않은 것을
먹은 적이 없다고 거부했는데, 그때 하늘에서 들린 음성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행 11:9)였다. 그러나 이것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가리지 말고 모두 먹으라는 계시가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전도하라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그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부정한
개와 돼지처럼 취급했다(마 15:26-27, 7:6).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행 11:8)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도 베드로 즉 예수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하여 식생활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결코 부정한 것을 입에 대거나 또는 먹어도 된다고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며, “모든 식물이 깨끗하다”라는 것이 하나님이 부정하다고 하신 것을 정하다고 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예로
예수께서는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마 13:47-48)라고 하시며 레위기 11장에서 언급한 먹을 수 있는 것(좋은 것)과 먹을 수 없는 가증한
것(못된 것)을 비유로 들어 천국을 설명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음식의 규정을 비유로 들면서 가르치셨던 것이다.
이는 예수님과 그 말을 듣고 따르는 무리들도 결코 ‘못된 것’ 즉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는 가증한 것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말이다.
레위기 11:9-12에는 물 즉 강이나 바다에 있는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먹고,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새우, 가재,
게, 굴, 조개류,
오징어, 문어, 낙지, 장어, 홍어, 꽁치, 갈치, 삼치, 곰치, 메기, 미꾸라지 등)’ 은 먹지 말고 가증히 여기라고
하셨다.
한국의 경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 바닷 생선 중에서 “치”자로 끝나는 것(멸치,꽁치,갈치 등)은 하급 어종이므로
제삿상에 올리지 않는다. 또한 뱀장어 종류나 메기 등 예로부터 비늘이 없는 생선은 부정한 생선으로 구분을 하였으므로 제삿상에 올리지 않는다.
이처럼 세상에서도 부정한 것과 깨끗한 것을 구분한다.
사도행전 10장에는 고넬료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세례를 받은 가이사랴에 주둔했던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으며, 그는 식민통치하의 유대 백성들에게 자비와 선행을 베풀어서 널리 칭찬을 받았다.
환상을 체험한 뒤에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이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개와 돼지처럼 취급하며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그때까지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었다. 이 사실에 대해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가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행 10:28). 즉 그 당시까지 이방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위법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식사를
한다거나 그들과 교제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신
7:3-4).
그런데 베드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행 10:28-29).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환상이 가증한 것들을 이제는 먹으라고
지시하신 것이 아니라, 가증하게 생각하던 이방인들에게 가서 전도하라는 상징적인 것이었다는 것을 확실히 나타내어 주고 있다.
사실
베드로는 상당히 겁쟁이였다. 그는 예수께서 잡혀가자 자기도 죽을까봐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었다. 또한 물위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자기도 물위를 걷겠다고 뛰어내렸다가 금방 바람을 보고 겁에 질려 물 속에 빠져들어갔다. 이러한 성품을 갖고있는 베드로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특히
그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므로 담대히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에서 떠남으로 바울의 책망을 받은 일이 있다(갈 2:11-14). 만약 하나님께서 환상으로 베드로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그가 이방인을 전도하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서 “아무도”라는 헬라어
원어는ἄνθρωπος(안쓰로포스)이다. 이 용어는 ‘인간(a human being)’, ‘사람(man)’ 또는 ‘사람들(people)’을
의미하며, ‘성(sex)’을 구별하는 차원에서 ‘남편(husband)’ 또는 ‘남성(male)’을 뜻하는ἀνήρ(아네르)라는 남성 명사에서
유래되었다. 즉 이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며, 결코 사람 이외의 동물이나 그 어떠한 것도 지칭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라고 하신 말씀은 부정한 것들도 무엇이든 먹어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동안 속되며
부정하다고 생각했던 이방인들을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들에게도 전도하라는 뜻으로 ‘이방인’을 지칭한 말이다.
7. 이교도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돼지
사도 바울이 사역할 당시의 고린도교회는 시장에서 파는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이라는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 왜냐하면 시장에서 사온 고기를 먹는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당시 소아시아지역에는 큰
규모의 이방 신전들이 있었고, 신전들의 규모는 상당했다. 그래서 신전에 바쳐지는 제물을 다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분량이 많았기 때문에 남은
음식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러한 제물들이 기독교인들의 관점에서는 우상들에게 드려진 더러운 것이지만, 이방인들의 눈에는 신들이 먹는 신성한
음식이므로 선호했다. 신전들의 입장에서는 잉여음식을 해결하는 동시에 막대한 제정을 마련할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이방인들은 이러한 음식을
거리낌없이 먹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먹음으로 신들의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미신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학자는
이교도들이 거룩하게 여기는 동물들은 유대인에게 금기시 되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이방 제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부가 성경의 음식
금기의 기원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방 제의에서 제물은 ‘신의 음식’ 이었으며, 제사 후 사람들은 그 음식을 먹음으로써 신의 생명에 참여하여
신과의 합일(合一)을 이루려 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선호하는 제물인 돼지를 거부함으로써 자신들을 그들과 구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레위기 20:23에서 뒷받침된다. “너희는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의 풍속을 좇지 말라. 그들이 이 모든 일을 행하므로
내가 그들을 가증히 여기노라”
이렇게 이방인들과는 달리 유대인이나 기독교인들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은 결코 먹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항상 세상과 구별된 것 즉 ‘거룩’을 원하셨기 때문이다. 특히 정결법에 대해 무관심한 것으로 간주된
갈릴리 출신의 베드로도 부정한 짐승들을 먹는 것에 매우 부정적이며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는데, 이런 부정한 것을 먹는 것보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 것은 더욱 심각한 일로 유대인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시 106:28-29).
그러나 바울은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라 할지라도 우상은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서, 그렇다 할지라고 우상에게서 자유함으로 말미암아 양심이 약한 자들이
그 음식 먹는 것을 보고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는 것으로 인해 다른 형제의 연약한 양심을 상하게 한다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므로 바울은 평생 우상에게 바쳤던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다(고전 8:13). 결국 바울도 먹지
않았다.
8.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한 결과
이미 돼지고기의 맛을 안 사람들은 다른 가증한 것을 먹는 것은 끔찍해
하면서도 돼지고기에 대해서만은 매우 관대하다. 즉 박쥐, 까마귀, 뱀, 족제비, 독수리, 매, 토끼, 쥐도 레위기 11장에서는 돼지와 함께
가증하므로 먹지말라고 했는데, 삼겹살이나 베이컨, 햄을 먹는 것처럼 족제비 고기나 박쥐고기를 즐겨 먹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서도 그런 고기를 먹는 사람을 개나 돼지처럼 생각하듯이 옛날 유대인들은 돼지고기와 그 외의 더러운 것을 먹는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처럼
생각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성도)은 세상과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식생활에서부터 세상 사람이
즐기는 것과 분리시키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이 무엇을 먹느냐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만약 고양이 고기나 박쥐 고기를 그것도 아직
피가 고기에 배어서 붉은 빛을 보이는 덜 구워진 상태의 고기(mideum, mideum rare)를 먹는 사람과 함께 앉아서 식사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돼지도 이것들과 똑같이 가증하게 여기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금한
음식을 먹으므로 인해 ‘에이즈’와 ‘사스’ 그리고 ‘돼지독감’이라는 끊임없는 질병들이 발생하며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사스’는 온갖 종류의
동물(특히 고양이)을 잡아먹는 중국 광동지방에서 발생했고, 에이즈는 원숭이를 잡아먹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것으로 돼지독감을 포함한 신종 병들이
발생한 곳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이교도 국가나 그런 집단에서 발생하였다. 즉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
것처럼, 하나님의 경고를 어기고 가증한 것들을 맛과 영양이 좋다고 허위 광고를 하며 판매하는 자들과, 지금은 은혜 시대이므로 거리낌없이 먹으면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거짓 선생들의 죄로 인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향해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사 66:3-4)라고 하시며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여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사 66:17, 24)라고 선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말로 죽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금 지구는 먹거리의 재앙을 받아서 먹을
수 있는 정결한 것까지도 구제역이니 하면서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식욕을 절제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므로 생태계도
파괴되어가고 점점 먹는 것을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 여기에서 “망하다”라는 히브리어 ‘수프’는 완전하게 끝나 없어지는 상태를 말하는 동사이다.
이 용어는 성경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각 도,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 자손 중에서도 기념함이 폐하지(perish)않게 하였더라.(에 9:2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consume)(렘 8:13)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 결딴나리라(shall have and
end)(암 3:15)
돼지독감은 먹지 않아도 공기로 전염되는 끔찍한 전염병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세상은 이젠 먹거나 만지지
않더라도 공기를 통해서 감염되는 심판을 받게 된 것이다. 세계사를 보면 돼지와 새우 때문에 콜레라 등 수많은 병에 걸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너로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 14:12)
“이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너는 향로를 취하고 단의 불을 그것에 담고 그 위에 향을 두어가지고 급히 회중에게로 가서 그들을 위하여 속죄하라. 여호와께서
진노하셨으므로 전염병이 시작되었음이니라”(민 16:46).
다음은 전염병이 발생했던 시기와 그 결과에 대해 간추린
것이다.
년도 전염병 결과(사망자 수)
B.C.430 아테네역(장티푸스) 그리스의 군인과 인구의 ¼
사망
165-180년 안토니우스 역병(천연두) 이태리 인구의 ¼(5백만명) 사망
251-266년 키푸르스 역병
로마: 하루에5천명 사망
541-750년 유스티아누스 역병
(선페스트 역병) 이집트에서 시작하여 비잔틴제국의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러 비잔틴의 ¼인 1만여명이 하루동안에 사망:
세계 인구의 절반을 감소시킴
1300년대 흑사병
7만5천명 사망
1348~6년간 흑사병 유럽인구의 ⅓(2-3천만명) 사망
1370 흑사병 영국: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
1520년대
천연두 멕시코: 15만명 사망
1500년대 세계의 천연두 사망자: 8천만~1억명
전체
인구가 5억명이므로 세계의 5분의 1 사망
1529년 홍역 쿠바 주민의 ⅔사망
1618-1619 천연두
메사추세츠만의 아메리카 원주민의 90% 사망
1665-1666 대역병(흑사병) 영국: 인구의 5분의 1인 10만명
사망
1848-1849 홍역, 백일해, 독감 하와이: 4만~15만명 사망
1875 홍역 피지: 4만명
사망
콜 레 라
년도 지역 결과(사망자 수)
1817-1824 인도네시아 자바섬 10만명 이상
사망
1817-1860 인도 아대륙 1천5백만명
1831 헝가리 10만명 이상
1832 영국
런던 5만5천명 이상
1832-1849 미국 15만명 이상
1854-1855 스페인 23만6천명
멕시코 20만명
1866 러시아 6만명
북미 5만명
1865-1917
인도 2천3백만명
러시아 2백만명
1883-1887 유럽 25만명
미국
5만명
1892 러시아 26만7천8백90명
스페인 12만명
일본
9만명
이란 6만명
함부르크 8천6백6명
1902-1904 필리핀
20만명
1907-1908 메카 순례자 2만명 이상
인 플 루 엔 자
년도 전염병 나라
결과(사망자 수)
1889-1890 아시아 독감: H2N8 약 1백만명
1918-1919 스페인
독감:
H1N1(돼지독감)과 유사 세계인구 5억명 중 ⅓이 감염.
6개월 동안 50만명 사망
인도 17만명
미국 675만명
영국 20만명
1957-1958 아시아 독감:
H2N2 미국 7만명
전세계적 2백만명 사망. 오늘날에도 지속됨
1968-1969 홍콩 독감:
H3N2 미국 3만4천명
전세계적 1백만명
발 진 티 푸 스
년도 나라
결과(사망자 수)
1489 스페인 2만명(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와의 전투에서
3천명 사망. 즉 전쟁보다 병으로 더 많이
사망)
1542 발칸반도(오스만제국군) 3만명
1618-1648 독일인(30년 전쟁) 8백만명(발진티푸스와
선페스트로 사망)
1813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 (러시아에서) 21만9천명 이상
제1차
세계대전 세르비아
15만명 이상
1918-1922 러시아 2백50만~3백만명
천 연 두
18세기 유럽인의 약 40만명
사망
20세기 약 3백~5백만명 사망
1950년대 초 5천만명 사망
1979년12월 WHO에서 천연두 멸종
발표(멸종된 유일한 병)
홍 역
1529 쿠바 원주민의 3분의2 사망
2000 세계적으로
77만7천명
결 핵
19세기 유럽 성인의 ¼ 사망
1918 프랑스 국민의 6분의 1
황
열
1793 미국 필라델피아 5천명 사망(인구의 10분의 1)
19세기 스페인 약 30만명
H5N1
바이러스
2007년 11월 유럽 59만명 사망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발생하고 있는 전염병들을 보면 아래와 같이
부정한 동물들로 인한 결과이다.
전염병 원인 및 경로
돼지독감(Swine Influenza, H1N1) 돼지(1918:
콜레라, 2009)
사스(SARS) 고양이
메르스 코로나 바이러스(MER-CoV) 원인: 박쥐, 경로:
낙타
콜레라 돼지, 새우
에볼라 원인: 과일박쥐, 경로: 원숭이, 돼지(2008년 필리핀)
오늘날
우리가 살고있는 땅에 왜 이렇게 자주 전염병이 발생하며 그것으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이 죽어가는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과 교회를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데 그것을 무시한 죄, 내가 먹고 싶기 때문에 신약에서는 모든 것을 먹어도 된다고 했다면서 잘못
해석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더한 죄, 그리고 하나님께서 금식하지 않고 먹으면 분명히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뺀 죄, 그러면서 “이 맛있는
것을 왜 먹지 말라고 하느냐? 마음껏 먹으라”라고 강단에서 가르치고 있는 죄들로 인하여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정결한 동식물들까지도 저주를 받아서
우리의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신실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마지막 책인 성경의 결론에서 말씀하고 있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율법(먹으면 망할 것이다, 정녕 죽으리라)에 더한 결과 즉 “먹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먹어도 된다고 하셨다”는
등 하나님의 말씀에 더한 결과,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보다 더해져서(add) 우리가 들어보지도 못하던 각종 전염병들이 계속해서 이 땅에 생겨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먹지말라고 하신 모든 것들을 먹어치으므로 우리의 삶의 환경이 얼마나 나빠졌는가? 돼지는 땅을 청소하라고 만드신
땅 위의 청소기이며, 갑각류(가재, 게, 새우 등)를 비롯한 조개류, 연체동물(오징어, 문어 등) 등은 바닷속을 청소하라고 넣으신 바다
청소기들이며, 장어를 비롯한 비늘이 없는 민물고기들은 민물 청소기로 만들어 넣으신 것이다. 예전에 한국TV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는데, 민물에
농약을 뿌리자마자 장어들이 몰려들어서 그 농약을 모두 먹어치우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 바닷속에 죽은 동물이 보이자마자 문어와 오징어들이
몰려들어서 다리에 붙어있는 빨대로 그 사체의 피를 빨아 먹었다. 하나님께서 땅 위와 물 속과 하늘 위에 필요한 청소기들을 만들어서 놓았는데,
인간들이 청소기들을 모두
먹어치우는 바람에 이세상은 구제역을 비롯한 갖가지 전염병이 늘어나고 있으며 오염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가고 있다.
심지어 메르스라는 전염병은 한국의 1천개 이상의 학교의 문을 닫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교회의 문까지 닫아야 하지 않느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돈 콜버트 박사(Don Colbert, M.D.)는 그의 책 「예수님처럼
식사하라」에서 돼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돼지고기는 먹어도 안전한 육류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돼지는 엄청난 양의 사료를 먹기 때문에 위장의 염산 농도가 묽은 편이다. 그런 관계로 돼지고기에는 독소와 바이러스, 기생충,
박테리아 등이 쉽게 침투할 수 있다. 엄청난 대식가인 돼지는 극히 불결한 동물인 셈이다. 이것들은 각종 쓰레기는 물론이고 배설물이나 심지어 썩은
고기까지 먹어치운다. 이렇게 먹어치운 것들은 돼지 살의 일부가 된다. 돼지는 트리치넬라나 돼지 촌충, 독소플라스마(사산, 유산, 기형,
시력장애를 일으킴) 같은 기생충들의 은신처이다.
돼지는 아무리 먹을 것을 많이 주어도 문자 그대로 너무 먹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먹어댄다. 먹는 문제에 있어서 이 동물은 결코 중지라는 것을 모른다. 돼지는 폭식가이다. 돼지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지상의 독소를 청소할 목적으로
창조하신 동물 가운데 하나이다.
돼지고기를 요리할 때 160℉나 그 이상의 열로 조리를 하면 돼지고기 속의 기생충들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그 열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 돼지고기 속 중심부의 기생충들은 죽지 않는다. 때때로 조리된 돼지고기에서
선모충병균이 검출되기도 한다. 선모충병균은 근육에 통증을 일으키며 감염된 부위의 근육을 부풀어 오르게 한다. 이와 함께 두통과 열, 그리고 간혹
위장 역류 증상을 일으킨다.
돼지의 질병이 전염되는 경로는 대부분 돼지의 지방질을 통해서이다. 돼지의 독소는 특히 돼지의 지방질에
축적되어 있으며 이 지방질은 소고기처럼 살코기로부터 분리해 내기가 어렵다. 돼지고기를 이용한 식품들, 볼로냐나 베이컨, 런치 미트들은 종종
지방질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 이런 이유 하나 만으로도 돼지고기를 피해야할 충분한 사유가 된다.”
9. 예루살렘 회의의
결과
사도행전 15장을 보면, 어떤 이들이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치므로 구원에 대한 문제가 생겨서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소집되었다. 사도 베드로는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라고 말하여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을 확실히 선포했다. 그리고 그 회의 결과 “우상의 제물(제사에 드린 가증한 고기)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개를 죽일 때 목매어 죽임)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행 15:20, 29)라고 하며 이방인들에게는 할례를
해방시켜주었다.
여기에 보면 돼지라는 말은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신약에 와서는 돼지고기를 포함한 레위기에서 먹지말라고 한 모든
것을 먹어도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의 제사음식은 주로 돼지를 포함한 것이었으며, 오늘날에도 고사를 지낼 때에는 돼지로 제사를
지낸다. ‘우상의 더러운 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그것을 먹음으로 인해 그들의 신과 하나가 된다는 개념을 그 당시 사람들은 갖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그것을 미워하셨는지에 대해 시편 106:28-29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이것은 그 음식을 먹음으로 인해 함께 우상숭배
행위에 동참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며, 단순히 그 음식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와 같이 당시의 제사 음식은 간단히 ‘음식일 뿐’이라고
처리할 수 없는 배경을 갖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신앙 양심과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과의 화합을 위해서도 신중하게 행동하기 위해 금지했던
것이다.
성경에서는 무슨 피든지 먹지 말라고 끊임없이 강조해오고 있다. 피를 먹는 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는 엄중한
심판을 받도록 되어 있다(레 7:27, 17:10-14, 신 12:23-24, 15:23). 그 이유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에 생명을
중요시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비롯된 명령이다. 이는 십계명 중 제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라는 교훈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아니며, 모든
사람이 단순하게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을 지켜야 할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인 것이다.
이방인들에게 금지한 것 중에서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이 사도행전 15장에서 두번 다 앞 뒤로 함께 나오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목매어 죽인 것’이란 짐승을 잡을 때, 목을 매어
죽이든 어떤 다른 방법으로 죽이든 ‘적절하게 피를 빼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즉 동물의 피를 제대로 빼지 않은 상태의 고기를 먹을 경우
간접적으로 피를 먹어서 생명을 범하는 죄를 저지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음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말라”라며 경계하셨는데(레 22:8) 이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부정하기도 하지만, 그 동물의 살 속에 피가 퍼져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를 잡을 때 목매어 잡는 이유는 피를 빼지 않기 위함이다. 즉 육질을 부드럽고 맛있게 하기 위해 개를 목매어서
마구 때림으로 말미암아
피가 온 몸으로 골고루 퍼지게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는 요리할 때에 고기의 피를 절대로 빼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 이유는 피 안에
있는 영양가가 없어지며, 또 피가 있어야 고기가 부드럽고 맛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스테이크를 살짝만 구워서 아직 핏빛이 도는 핑크빛의 육질이
가장 맛있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육즙(핏물+)이 많을수록 맛있게 요리한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방식대로 고기를 먹는 사람을 세상에서는
촌스러운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리고 해장국에는 선지(돼지피)가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고 하며, 돼지피로 만든 순대 또한 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기있는 음식이다.
그러나 살아있는 피는 생명을 주고 몸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지만, 죽은 피는 반대로 수많은 독성이 생겨서
몸에 아주 해롭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살아있는 피의 좋은 점을 설명하면서 죽은 피를 먹고 있다(순대, 선지, 육회, 덜 익힌 스테이크
등). 그리고 조금 더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동물의 몸에 빨대를 꽂아서 피를 빨아먹기도 한다. 그러나 빨대를 통해 피가 몸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미 피는 독성을 갖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들을 서슴치 않고 행하고 있으면서도 지각이 없으므로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4:2-3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그러므로 거룩과 관계가 없었던
이방인들에게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알려주었듯이 참된 예배자들은 아직 분별력이 없는 세상적인 이들에게 깨닫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10. 구별된 백성(성도)의 구별된 식생활
디모데전서 4:4에는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창조되었으므로
감사하게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레위기 11장에서 분명하게 구별되어 있는 부정한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으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은 이미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란 단어에 주의해야 한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천지창조를 하시면서 땅의 짐승을 만드시고 보시기 좋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시기 좋았더라”라는 말은 모든 짐승이 선하신
뜻대로 창조되었다는 뜻이지 모든 짐승이 깨끗하다는 말이 아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하나님은 정한 동물은 7쌍씩, 부정한 동물은 2쌍씩 방주에
들여보낸 기록이 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즉 태초부터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분하셨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이 깨끗한 것이 아니지만, 비록 부정한 것들도 부정한 그 특성 그대로 세상을 청소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창조된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3:16에 나오는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라는 말씀을 놓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알미니안파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저를 믿는 자마다”라고 구원받을 자에 대해 한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것이다.
디모데전서 4:5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한 동물을 거룩한 것으로 복을 주셨다는 의미이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한 구절만 떼어서 해석하면 계시록에서 경고하고 있는 재앙을 만나게 될 것이다(계 22:18-19).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사 34:16).
만일 디모데전서 4장4절 한 구절만을 떼어서, 정한 고기나
부정한 고기를 막론하고 모두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고 해석한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손을 씻지 않고 먹은 것에 대해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어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막 7:19)라고 하신 것에 대해
“그러므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라는 말씀만 갖고 예수께서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폐지했다라고 한다면, 또 로마서 14장의 말씀을
가지고 사도 바울이 말한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 없으되”(14절)라는 말과 “만물이 다 정하되”(20절)라는 말만 갖고 해석한다면,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구별하셨던 하나님을 일관성 없고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 된다. “제사장들은 … 거룩함과 속된 것을
분변치 아니하였으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사람으로 분변하게 하지 아니하였으며… 내가 그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았느니라.”(겔 22:26)”
또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말이 모순되므로 삼위일체라는 말과 성경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이 말한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롬 14:20)라는 말은, 정한 동물일지라도 그
당시에 시장에서 파는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일 확률이 높기 때문에 거리낀다는 것이며, 부정한 동물을 거리낀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만물이 다 정하되”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정한 음식들을 의미하는 것이며, 부정한 것까지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즉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는 것과 같다. 여기에서 “아무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들을 말하는
것이지, 선택받지 못한 모든 세상 사람을 통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디모데전서 4:4에 나오는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는 말씀과 이사야 66:17에 나오는 “돼지고기와 가증한 것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라는 말씀은 서로 짝이 맞는 말씀(사 34:16)이다. 즉 이 말씀들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2절)라는 말씀과 “너희는 이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도 만지지 말라. 이것들은 너희에게 부정하니라”(8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정하고 정한 것과 먹을 생물과 먹지 못할 생물을 분별한 것이니라”(47절)라는 말씀을 뒷받침해주는 말씀들이다.
원래 선악과는
지극히 맛있어 보였다. “먹음직도 하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은 정말로 그럴듯하고 먹음직스럽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민과 마귀의 자녀를 구별할 수 없는 것이다. 금식에 대한 규례를 주신 것은 그것이 악하거나 건강에 해롭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 즉 금식하는 자와 금식하지 않는 자를 구별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순종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민의 자격이 있는 것이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주인도 무는 개와 같은 자로 취급하기 위해서였다.
각 가정에서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금하는 음식과 권하는 음식들이 있다. 만약 자기 아이가 더러운 것을 땅에서 집어먹으려고 하면 “지지!”라고 하며 얼른 빼앗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러나 자기 자녀가 아니면 그 아이들이 무엇을 먹던지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혹시라도 상관했다가
부모들 간에 다툼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깨끗한 것을 먹어라”, “너가 내 자녀이면 내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절대로 먹지 말고, 만지지도 말아라. 만약에 그 더러운 것을 먹으면 너와 나와의 부자지간의 관계는 끝이다”라고 하시며
세밀하게 하나씩 이름을 말씀해 주시며 순종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자들은 무엇을
먹건, 어떠한 행동을 하건 상관치
않으신다. 그러다가 그들의 악이 너무 심해지거나 하나님의 자녀를 너무 괴롭히면 그들을 심판하시는 분이다.
대체적으로 온 가족이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은 함께 식사할 때이다. 그 외의 시간은 서로의 일이 있으므로 식사할 때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시간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사 시간을 통하여 자녀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르쳤다. 만약 자녀가 가증한 음식을 먹고싶다고 할
경우에 그것은 개와 같은 이방인들이 먹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녀는 하나님께서 정결하다고 말씀하신 것만을 먹으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즉 그들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거룩’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며 살았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더러운
진흙탕에서 똥파리들과 뒹굴며 아무것이나 배가 터지도록 먹어대는 돼지가 왜 함께 할 수 없는지를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있다. 또한 ‘피’가
들어간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에는 “생명을 존중하라”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쳤으며, 돼지나 각종 어패류와 갑각류 등(조개, 새우, 가재 등)을
먹으려고 할 때에는 그것을 먹으면 지구의 생태계가 파괴되며 각종 새로운 질병이 생기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구를 잘 보호하며 다스려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줄 수 있었다.
오늘날 무엇이나 먹어도 된다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먹으면 망할
것이라”라고 하신 말씀을 빼는 행위이다. 계시록 마지막장 마지막 부분에 보면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신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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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신명기
14장21절에 나오는 “너는 염소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어떻게 어미의 젖에
새끼를 삶아서 먹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당시에 이교도들은 그런 풍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잔인한 방법을 하나님께서는 금지하셨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레위기 22장28절에 나온다.
“암소나 암양을 무론하고 어미와 새끼를 동일(같은날)에 잡지
말지니라”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인자하신 분이다. 말못하는 동물이라고 할지라도 같은 날에 부모와 자식을 함께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염소새끼는 모든 육류를, 그리고 어미 젖은 유제품 전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서 모든 육류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치즈버거를 먹지 않으며 페퍼로니 피자를 먹지 않는다. 유대인들의 아침 식사는 우유제품이 들어간 식사를 하고, 저녁에는
육류인 고기가 들어있는 식사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규정상 최소한 6시간이 지난 후에 먹는 것을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릇까지 다른 것으로 사용하며 개수대와 찬장, 행주까지도 아침 저녁에 쓰는 것을 다른 것으로 사용한다. 음식하는 그릇이나 음식
보관까지도
철저히 그들의 정결 음식법에 따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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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 론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일
먼저 인간에게 행위의 약속인 “금식”의 규례를 주셨으나, 인간이 그것을 범하므로 말미암아 세상에서는 더욱 먹을 것이 많아졌고, 그에 비례해서
금식할 것도 많아졌다. 하나님께서 금지하실수록 마귀는 더욱 금식거리들을 우리의 눈앞에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게 포장해서 갖다놓는다. 그래서 더욱더
먹을 것이 많아진 것 같지만, 그 결과 하나님의 약속대로 지구는 망하기 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그나마 하나님께서 정결하여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들까지도 저주를 받아서 유기농조차 믿고 먹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바닷물속에 사는 생선들이 오염되어서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땅에서 나는 야채들조차 그것을 먹으면 건강을 헤치는 상황에 이르렀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백성이 왜 그토록
하나님께 그들을 구원해달라고 울부짖었는가? 노예살이가 너무나 힘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육체가 안식을 얻고 싶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출애굽시켜서 노역으로부터 해방시켜주셨다. 그런데 그들의 육체가 편해지자 그들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이 음식에 대한
불평이었다. 그들은 육체의 구원을 얻기 위하여 노동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었지만, 노동에서 해방되자 제일 먼저 육체의 정욕을 구하기 시작했다. 우리
속담에 “작심3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뒤에서 쫓아오는 애굽 군사들로부터 탈출에 성공하여 홍해를 건너서 사흘이 되자마자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그들은 마라에서 마실 물이 없다며 원망하였고, 신광야에 이르자 그들은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라며
원망하였다(출 16:3).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시며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먹을 것에 대하여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까? 우리가 애굽에서 마음대로 먹던 생선과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양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혼(soul)이 메마르고 이 만나 외에는 우리 눈앞에 아무 것도 없다”(민 11:5-6)라며 먹는 것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그들에 대하여 진노하신 여호와께서는 메추라기를 한없이 주신 뒤에 그들이 입안에 고기를
넣어 그것을 씹기도 전에 그들을
죽이셨다(민 11:33-34). 이처럼 에덴동산에서부터 시작하여 금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탐욕의 결과는 죽음이다. 왜냐하면 “탐심은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골 3:5).
성경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돼지는 탐식과 탐욕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성경은
“탐식자”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와 같이 취급하고 있다. 잠언 28:7을 보면,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탐식자를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지혜의 영’(사 11:2)이신 성령께서 동행하므로
지혜로운 자이며,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 사는 자와 또 그런 자를 사귀는 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천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는 말이다. 또 잠언 23:2에는 “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라고 경계하고 있으며, 20-21절에서는 “술을
즐겨하는 자와 고기를 탐하는 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 술 취하고
탐식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다.
전에는 모르고 자기 입맛대로 또는 세상의 풍습대로 따라 살았지만,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하나님께 복종해야 한다. 우리를
불러 주신 분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모든 행위에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라고 말씀하신다(레
11:45, 19:2, 20:9, 벧전 1:15). ‘거룩’ 즉 구별되라는 말씀이다. 돼지를 비롯한 부정한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불신자들과 신자들을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 놓으신 것들이다. 그것이 좋고 나쁘고, 또는 먹어도 되고 안 되고를 따지는 일은 끝이 없는 변론만
무성하게 할 뿐이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보면 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기 때문에
너무나 먹고싶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합리화해서 먹으려고 하고, 내가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것이므로 어떻게 해서든 좋게 포장해서 팔려는
속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오늘도 “돼지고기와 가증한 것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라고 경고하고 계시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할 경우에 반드시 이루실 저주를
약속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복에 대해서만 약속하지 않으시고 저주도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반드시
당신께서 말씀하신 약속을 지키신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먹어도 된다고 하셨다고 하면서 거짓말을 뿌리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한 입으로 두 말씀을 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는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는 먹어도 된다고 하신다면, 과연
성령님은 누구의 편을 들 것이며, 그러한 삼위 하나님을 누가 믿겠으며, 누가 ‘삼위일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도 베드로가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2)라고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역사를 통해 또다시 반복되는 에덴동산에서의 불순종의 역사를 이루어 개나 돼지와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율법시대의 말씀이고, “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고,
수험생들에게 좋고…”와 같은 그럴듯한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영원히 버림받는
미련한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피조물답게 단순히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허락하신 것은 맛있게 먹고, 먹지말라고
저주하신 것은
가증하게 여겨 먹지 않음으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자로서 건강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자유로운 경향을 가진 사람이나 극단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사도 바울 당시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
14:3-11).
판단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먹지 않는 성도들이 많은 곳에 그런 음식을 잘
먹는 사람이 함께 있을 때에는 성도들의 입장은 존중하여 그런 음식을 대접하거나 먹는 것을 삼가야 할 것이며, 반면에 그런 음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 먹지않는 사람이 섞여있을 때에는 함께 먹는 것이 불편하더라도 온유한 마음을 갖고 그들을 정죄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인의
정신일 것이다. 정죄는 오직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이며, 과거에 우리도 그런 것을 맛있게 먹었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들도 속히
깨닫고 하나님께서 청소기로 만드신 것을 먹어치우는 우를 범하므로 세상을 오염시키고 더럽게 만들지 않도록 힘써 기도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며,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기” 때문이다(롬 14:17-18).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라는 말을 떼어서 “그렇기 때문에 마음껏 먹어도 된다”라고 자기 멋대로 해석한다.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가 욕을 먹게 된 것이다. 로마서 14장17절 “하나님의 나라는” 앞에 헬라어 “가르(왜냐하면)”가 한글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다. 이 구절 앞의 15-16절에는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하여 자유함이 있는 믿음이 강한 자가 믿음이 연약한 자를 실족시켜서
그들의 영적인 파멸을 가져오는 것을 언급하면서, 따라서 믿음이 강하다고 하면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제사음식을 먹어도 된다며 그것을 먹는
이들의 무분별한 행동이 약한 자들을 파멸의 길로 이끌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17절에서 “왜냐하면”이라고 하면서 시작되는
것이다. 따라서 17절은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말한다. 천국에 가서도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변론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크리스천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먹고 마시는 것조차 절제하지 못하며 그것을 먹기위하여 애를 쓰고 있다면
과연 그가 천국을 소유한 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오직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통하여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라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우선순위에 대해 가르쳐주셨다(마
6:33). 그리고 평강과 희락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오직”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의와 평강과 희락은 오직 성령충만한 자를 통해 맺게되는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들이지 성령을 떠난 인간이 힘으로도 능으로도 결코 맺을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매일 매순간 성령충만함을 위하여 기도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먹고 마시는 것에 집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돼지와 같은 탐식자의 삶을 버리고 먼지(dust)로 만들어진 피조물답게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참된 행복일 것이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신 33:29).
- 김수경의 [성경적 예배]
중에서
†he 2nd Life Foundation
뉴 욕 퀸 즈 교 회
Esther Soo-Gyung Kim, Pastor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As for me and my house, we will serve the LORD!
(Joshua 2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