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이 초청한 시인_이설야 신작시>
점포정리
이설야
구십 퍼센트 할인 의류 매장 앞
줄이 줄어들지 않는다
토착민에게
일손에게
기계에 끼인 사람에게
얼마나 주었을까
벽에 박힌 못에
햇볕에 바짝 말라버린 장롱에
눕지 못하는 그늘에
매일매일 넘치는 물건들을 사서 걸어놓는다
남아도는 것들
풀지도 못한 상자들
창고들이, 집들이 작고 작아진다
빌딩과 거리들 비좁아 바람이 자주 갇히고
벽보와 현수막 위에 흩날리는 상표들
내일을 담보로 긁힌 카드들
많이 사거나
많이 망하거나
계산을 마친 손들은 점점 말라간다
하청과 매장 사이
적자와 생존 사이
오늘도 점포는 정리되고
살아남은 겨울은 이월되고
간판은 어디서나 뜯겨져 나가고
<시편이 초청한 시인_이설야 대표시>
굴 소년들
이설야
한낮의 어둠
하늘 끝자락을 말아 올리던 매캐한 연기
어둠과 어둠이 역사 앞에 내렸지
검은 기차에 실려 강제로 끌려온 어린 소년들
깊은 산속 붉은 물이 흘러내리는 동굴
그들은 동굴 벽에 구멍을 내고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했지
굴을 파던 소년들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왔지
폭발음이 들리고 구름 연기가 피어올랐지
동굴 입구까지 돌먼지가 뿌옇게 밀려 나오면
소년들 다시 들어가 가슴에 돌덩이들을 안고 나왔지
새벽부터 저녁까지 소년들 굴을 팠어
손톱이 빠지면 피가 멈추지 않았지
동굴은 너무 어두워
돌덩이들이 떨어지면 팔다리가 부러지곤 했지
해와 달을 데리고 굴속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무거운 돌들이 사라질까
매일매일 정 두드리는 소리에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았지
종유석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부평 지하호*
함께 끌러온 다른 소년들은 조병창**과
미쓰비시 제강***으로 흩어졌어
그들은 무기들을 실어와 지하호마다 숨기곤 했지
죽은 소년들 구름처럼 떠돌다
동굴을 발견한 사람들이 말하는 걸 듣고는 했어
붉은 물발자국이 고이고 고인
녹슨 열쇠가 녹아내리는
깊고 깊은 구덩이들
어두운 굴속에 갇힌 오래된 시간의 뼈마디들
소년들 죽어도 죽은 줄도 모르고 계속 굴을 팠어
굳은 제 심장을 팠어
죽어도 죽지 않는 소년들
죽어서도 계속 굴만 파는
굴 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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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가 조선의 어린 학생들을 강제 동원하여 만든 부평 함봉산 지하호(토굴)는 현재까지 총 24개가 발견되었다.
**조병창(일본 육군 조병창)은 일제가 1939년에 만든 군수공장이다.
**미쓰비시 제강三菱製鋼은 일본 전범 기업으로 군수물자를 만들어 조병창에 공급했다.
이설야 시인
2011년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굴 소년들』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제1회 고산문학대상 신인상.
제8회 박영근 작품상.
경향신문 <시상時想과 세상>연재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