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사상은 과거세, 현세, 미래세로 구분되는 불교 세계관 중 미래세의 미랙부처님에 관한 사상으로, 불교에서 그 사상적 지위가 높다. 현세와 관련 깊은 미래에 대한 사상이기 때문이며, 또한 불교의 메시아사상인 만큼 난세에 접어들 수록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사상이다.
그러나 미래하는 막연한 개념에 대한 사상인 만큼, 불교 세계관 중 가장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사상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미륵사상에서도 과연 미륵보살이 언제 하생하여 중생들을 제도할 것인가 하는 부분은 명확하지 않다. 아니, 과연 미륵보살이 하생하여 중생을 구도할 날이 올지도 막연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어쩌면 미륵사상의 사상적 완성은 미륵보살이 하생하지 않은 채 도솔천에 머무르는 지금 이 상태가 완성된 형태이지 않을까 제시한다.
쉽게 말해 미륵 상생신앙은 직접 덕을 쌓아 죽고나서 도솔천에서 태어나는 사상이고, 미륵 하생신앙은 언젠가 찾아올 용화회상에 참여해 구원받는 사상이다.
용화세계는 미륵신앙을 가진 중생들의 이상세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기원후 408년에 구마라집이 번역한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용화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시간이 흘러 세간이 난세에 접어들었을 때, 사람들은 미륵불을 찾았고 이에 맞춰 미륵불을 자처한 인물들이 나타난다.
이렇듯 궁예와 화랑의 예를 통해 후대인들이 미륵을 대한 태도를 보면, 이는 단지 개인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 순수한 신앙이라 보기 어렵다.
또한 난세가 찾아왔다고 해서 막연하게 미륵불만을 기다리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지도 의문이 든다.
반면 초기 미륵사상에서 나타나는 용화세계는 십선도라는 10가지 규율을 지켜야 죽고나서 도솔천에서 환생할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십선도를 지켜야지만 훗날 미륵불이 하생하여 용화회상을 열었을 때 이에 참가할 수 있다고도 한다.
미륵보살은 본래 석가모니불의 불제자로, 당시 이름은 아일다였으며 성이 미륵이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제자 아일다는 결코 제물에 얽매이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 예로, 수행자 석가모니에게 금란가사를 선물하는 마하파자파티 일화를 들 수 있다.
마하파자파티는 석가모니의 이모로, 석가모니가 어렸을 적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석가모니를 아들처럼 기른 인물이었다. 그런 마하파자파티는 석가모니가 출가하여 노비들이 입는 누더기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만든 금란가사를 석가모니에게 준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이를 사양하며 자신의 첫 제자인 마하가섭에게 준다. 마하가섭은 스승이 사양한 옷을 입을 수 없어 다시 다른 제자에게 넘기고, 그 제자는 마하가섭과 같은 이유에서 금란가사를 입지 못하고 다른 제자에게 넘겨준다.
그렇게 금란가사는 석가모니의 제자들 사이에서 한동안 돌아다닌다. 그러다 우연히 이 금란가사가 아일다에게 주어지고, 아일다는 누구도 입지 못한 이 금란가사를 입고서 참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이에 다른 제자들이 아일다의 행실에 의문을 가질 때, 석가모니는 이를 보고 저 금란가사는 오직 아일다만이 입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였다.
이처럼 아일다의 일화를 살펴보면, 그는 재물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을 보는 인물이었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자 아일다를 근간으로 삼는 미륵사상을 통해 단순히 막연한 구원을 바라는 것이 과연 올바른 태도인지, 다시 한번 의문이 든다.
또한 다양한 경전에서 각각 다르게 표기되는 미륵보살의 하생시기를 살펴보면 언제 올지 모를 미륵불을 기다리는 일이 더욱 막연하게 느껴진다. 명확하게 표기되는 것도 아니며, 심지어 30겁이라는 숫자를 보면 아예 미륵보살이 하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라고 느껴질 정도이다.
미륵사상은 대승불교가 성세함과 동시에 함께 더 흥한 사상이다. 실재로 이 시기에 미륵사상과 관련하여 많은 경전들이 쓰여졌다. 그래서 이때 쓰여진 경전들에 나타나는 미륵사상은 그 목적이 대승불교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경우가 여럿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인 보살사상에 대하여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범부보살과 대보살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범부보살은 "일체 중생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이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바탕을 둔 개념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수행하는 모든 중생을 가르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대승불교의 사상은 자신의 안에 있는 불성을 깨우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범부보살은 흔히 육신보살이라고도 한다. 어머니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몸을 입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절에 가면 흔히 "보살님, 보살님"하는 것이 범부보살을 가르키는 말이다.
대보살은 우리가 흔히 아는 관수보살, 문수보살, 보현보살, 대세지보살, 지장부살, 미륵보살 등이 이에 해당한다. 성불에 대흔 수기가 약속되어있지만, 이를 미뤄둔 채 중생 교화에 헌신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기본적인 불심이 이미 부처와 동급으로 여겨지며, 이로인해 흔히 법신보살이라고도 부른다.
어찌보면 대승불교의 범부보살과 대보살은 그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진다. 정확히는 이 경계가 자기 스스로의 불심을 꺠우치는 정도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어떠한 신분적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어찌보면 자리이타사상을 강조하는 대승불교의 정신에서 비롯된 개념이기 떄문일 수 있다. 대승불교는 너와 나를 구분짓지 않으며, 나의 꺠우침이 곧 이웃의 꺠우침이고, 이웃의 깨우침이 곧 나의 깨우침이라고 이야기한다. 쉽게 말하면 중생교화에 치중한 사상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관계를 가르는 분별이 흐린 사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보살과 범부보살의 경계가 가장 잘 나타나는 예중의 하나가 바로 수행자 아일다이다. 아일다는 본래 석가모니의 제자였던 만큼 다른 제자들 사이에서도 자신들과 같은 신분의 범부보살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석가모니불이 아일다에게 성불에 대한 수기를 주었을 때 우바리 등의 제자들이 의문을 품었던 것이다.
이 대목을 종교적 관점에서 단순히 미륵사상에 힘을 싫어주기 위한 예로 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선 대보살과 범부보살, 그리고 부처의 경계가 흔히 생각하는 신분제도처럼 명확한 경계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미륵사상의 신앙적 형태에 대하여 정리해본다. 현재 미륵은 미래불 미륵보살로서 도솔천 내원궁에 머무르고 있다. 도솔천은 욕계의 네 번째 하늘로, 외원에는 행복과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상세계의 모습이며, 내원에서는 미륵불이 하생하기를 기다리며 마음을 닦고, 그곳의 천인들을 상대로 설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미륵보살이 머무르는 도솔천 내원궁은 과거 석가모니불이 왕자로 태어나기 이전에 머무르던 장소다. 즉, 이는 미륵보살이 제2의 석가모니불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과연 미륵보살이 제2의 석가모니불이 되어 중생들을 제도하는 것이, 과연 가장 이상적인 방향일까? 실재로 석가모니불이 열반에 든 이후, 사람들은 정법, 상법, 발법의 삼시법을 지나서 다시 사악해져 간다. 말과 문자를 통해 전수되는 가르침은 너무나 멀고, 눈앞의 욕망은 너무나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리 미륵불이 용화회상을 열어 세 번의 설법으로 각각 96억, 94억, 96억의 중생을 제도할지라도, 결국 중생은 다시 삼시법을 지나 사악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서 사람들은 다시 제2의 미륵불을 찾게 될 것이다.
이러한 미륵사상의 결점에 대한 해답으로, 본 고에서는 문태준 시인의 여행자의 노래에 한 부분을 예로 든다.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신과 기도' 본 고에서는 바로 이 문장에 미륵사상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에 대한 해답이 있으리라 제시한다. 결국 미래는 미래라는 개념으로 현재에 존재한다. 즉, 우리가 사유하는 미래의 실체는 막연한 가능성이 아닌 미래라는 개념인 것이다. 그러니 미륵사상 역시, 미래불인 미륵보살로 존재하는 지금 이 형태가 곧 미륵사상의 사상적 완성이라고 본 고에서는 제시하는 바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공부하면서 느낀 바로, 어쩌면 미륵사상을 대하는 그 올바른 태도는 석가모니의 입장이 되어 생각했을 때 그 해답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석가모니는 아마 먼 미래 사람들은 분명 불성을 망각하고 난세를 겪으리라 예상했을 것이다. 당장 말이라는 매개를 통해 설법하고 있는 제자들 역시 자신의 깨달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와중에, 저 먼 미래의 중생들이 석가모니불의 설법하는 깨달음을 이해하리라고는 생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석가모니가 봤을 때, 자신의 제자인 아일다가 가지고 있는 어떤 덕목이 바로 난세를 살아가고 있을 미래의 중생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단순히 아일다가 미륵보살이 되었다가 먼 훗날, 56억7천만 년 후에 하생하여 자신이 제도하지 못한 모든 중생들을 제도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아마 석가모니가 보기에 아일다에게 있는 어떤 덕목을 보고서 이러한 성품을 지닌 아일다는 분명 성불하리라 얘기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맥락상 알맞는다고 생각한다.
즉, 큰 스승 석가모니는 아일다라는 매개를 통해 먼 훗날 우리에게 설법을 남긴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에 대해 깊이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내가 본 아일다의 덕목은 바로 이것이었다. 있음과 없음에 얽매이지 않고,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잠깐 이어진 연에 연연하지 않으며, 있음이 없고, 없음도 없기에 자유로운 성품. 주어진 현실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바로 그 성품이 내가 미륵사상을 공부하면서 만난 메시아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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