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산림문화작품공모전
대상
산행 / 최찬상
-설악을 넘으며
해돋이를 보기 위해 대청봉에 올라가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험한 산길을 따라 봉우리로 올라가고
10월 단풍은 산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소청봉에서 대청봉에 이르는 길 사이
눈잣나무들이 이파리를 고드름 속에 화석처럼 박고 동면에 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하룻밤 사이 공중에서 두 계절을 건너 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음 능선을 밟고 가는 느낌은 차고도 맑았습니다
마지막 숨결의 동아줄을 당기며 대청봉에 올라 섰습니다
파란 새벽 하늘이 이마에 시리게 부딪쳐 왔습니다
나의 발 아래론 가을의 천장을 뚫고 산이 우뚝 솟아 있었고
산의 발치에는 푸른 동해의 파도가 밀려와 부딪칩니다
붉은 여명 속에서, 잠시 나는, 묵념하듯
나에게 봉우리를 허락해 준 산과
산의 조화를 꾸며 온 대자연의 신에게 감사를 드렸습니다
드디어 동해를 하나의 부챗살로 펼치며 해가 떠올랐습니다
나의 턱 밑을 조명하는 햇살은 더욱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태양은, 자기를 태우지 않고는 등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스로를 태워 없애면서 세상이 나아갈 길을 밝혀주는 사랑이
온 누리에 가득차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순간 태양의 눈동자 속에 서 있었습니다
차갑고 어두운 곳을 따뜻하게 조명하고자
내 눈동자에도 불을 그었습니다
이렇게 어둠을 뚫고 봉우리로 짊어지고 온 나를 부리고
새로운 나를 짊어지고 황금 빛 정상에서 내려옵니다
그리고 다시 단풍잎들이 불타는 가을로 돌아왔습니다
등 뒤로는 여전히 밤과 낮을 이어가며 내가 넘어온 길이 아득히 솟아 있습니다
이제
앞 길 저 멀리 아스라이 솟아있는 생의 봉우리를 향해
출발할 채비가 되었습니다
금상
산에서 몽땅 털렸다 / 이영옥
등산복에는
주머니가 여러 개 달려있다
일주일분의 고민과
일주일분의 집착과
평소 털어내지 못한 절망의 부스러기들이
조금씩 쌓여 주머니가 불룩해질 때쯤
나는 주저 없이 산으로 간다
비 그친 산에는 세탁된 햇살 조각들이
퍼즐처럼 널려있고
투명한 새소리는 물방울을 뚫고 날아들었다
은사시나무 잎사귀를 뒤집던 바람과
세상의 한 귀퉁이를 잡아보려는
저 가느다란 덩굴손에
나는 어느새 주전부리 모두 털려버렸다
바위 위에 좌판 차린
등 굽은 노파가 말아주는 국수처럼
붉은 노을이 주르륵 흘러내릴 때
무거운 시간들을 벗어버린
등산객의 뒷모습이 보인다
빈 것이 아름다워지는 저녁
나는 주머니가 몽땅 털려 행복하다
모든 것을 받아준 산은
어둠만 꿀꺽 꿀꺽 삼키고
계곡물은 콸콸콸 소리를 높여
참았던 속내를 허옇게 게워내고 있다
은상
방태산 자연휴양림에서 / 이향순
나는 지금 별천지로 걸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여우별 풀밭에 총총 나들이 나온 듯
살짝 눈맞춤하며 발목 잡는
쥐똥나무아래 흐드러진 애별꽃 방긋 나를 반깁니다.
그 별꽃 빛에 눈이 부십니다.
온몸을 휘감는 덩굴진 사위질빵에게도
잔뿌리를 뻗고 발길질 해대는 애별꽃에게도
어린 새들의 비상에 빈 가지를 내어주어도
쥐똥나무는 불평하는 법이 없습니다.
눈뜨기 위해 찬 땅에 몸 비비는 벌레마저
삶의 치열함 속에서 보듬고 아우를 뿐
쥐똥나무는 결코 채근하는 법이 없습니다.
밤골 계곡을 따라 박달나무 푸른빛 우거진
꺽지가 산다는 마당소에 이르면
잎보다 먼저 숨결 불어넣어
도깨비방망이 같이 생긴 꽃밥을 인
앉은부채처럼 덩그라니 통나무 집 한 채
터를 잡고 있습니다.
쑤아아 청아한 물소리가
나무들 사이를 지나 하늘로 놓여납니다.
시간에 떠밀리고 공간 속에 갇힌
연연한 내 삶을 끝내 놓아버립니다.
하룻밤 새 여린 영혼 여기서 몸풀고
아침이면 아스라한 안개처럼 가벼워져
가만, 귀기울이면 꽃눈 트는 소리에 온 산이 진동합니다.
동상
너도 알겠구나 / 김희동
백련암 내려오는 길
속이 빈 나무 한 그루
길옆에 서 있다.
아이가 조르륵 달려가
나무의 가슴 안으로 들어서며
사진을 찍어 달란다.
“예쁘게 찍어 주세요.”
하고 말하며
미소 짓는 일도 잊지 않는다.
오래 전에는
제 엄마가 바로 나무였다는 사실을
아직은 모르는 아이.
그러나 아이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 때는 물론 저도
또 다른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서.
동상
산에 한번 올라가세 / 황승철
여보게 친구
우리 산에 한번 올라가세
삶에 지쳐 피곤하고 힘들 때
그 신선한 산소를 마음껏 마셔보세
어느 새 닫혔던 입이 절로 열려
어릴 적 외쳤던 “야-호”가
순박함을 간직한 채
희망과 용기로 분출될 걸세
여보게 친구
망태와 지게지고 수없이 올라 다녔던
그 산에 한번 올라가세
우리가 성장해서 변했을지라도
언제나 변함없이 반겨주었던 어머니의 품일세
그 어떤 소리도 그 누구의 외침도
편애하지 않고 귀담아 들어주던
정겨운 메아리가 귓가에서 사라지기 전에…
여보게 친구
새벽마다 피어오르는
연무빛 안개가 그립지 않는가
부드러운 솜이불로 거대한 안개바다를 만들고
알아주는 이 없어도 암벽 틈새에 힘겨운 뿌리를 내리고
거센 바람과 사연 많은 세월을 이겨낸 노송을 보면서
생명의 경이로움과 삶의 지혜를 배우세
아직도 남과 북의 소나무는 여전히 푸른색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