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뱀 이야기
외할아버지의 낡은 옷을 보며 나는 뱀의 껍질 같은 비릿한 내를 맡았다
지게의 등이나 받쳐주던 지겟작대기 끝에 뱀 한 마리가 대롱대롱 걸려 들어왔다
숫돌에 얹혀져 푸른 등을 내보이던 낫보다 그 능구렁이가 더 무서워 보였다
(저녁연기가피는집을방문한놈 / 그놈을 / 낯선 꽃이라 / 부르겠네)
뱀을 본 누이들이 서둘러 굴뚝을 돌아 도망쳤다
목구멍이 조인 그놈을 보니 내 목이 갈근거렸다
작고 빈 독을 가져다 놈을 집어넣고
외할아버지는 독 안에 뭔가 무서운 것이 들어찼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독에 뚜껑을 얹고 그 위에 큰 돌을 하나 더 얹었다
놈의 목이 딸각딸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꽃도갇히면숨을멎을까? / 낯선꽃이꺾어질까?)
늙은 능구렁이는 쉬이쉬이 휘파람을 분다고 외할머니는 생전에 얘기했다
쉬이쉬이 휘파람이 끝나는 자리에서
그놈을 데려갈 놈들이 밤새 기어온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는 쉬이쉬이 숨이 가빠지더니 저승으로 가버렸다
(외할머니도생이라는것을살았다면 / 하나의꽃?)
일전에 동네에 여자가 길 위에서 죽었다
여자는 연신 애를 배어, 애를 배게 만든 남정네들이 그 여자를 매번
둔덕에서 밀어버린다고 소문이 돌았다
둔덕에 메어져 있던 소가 비탈로 굴러
솔방울 같은 눈망울을 하얗게 만들며 죽는 것을
나는 아주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다, 그 여자도 소처럼
눈자위가 하얗게 쇠어버렸을 게다
여자가 미치면 소를 닮는다,고 누군가 말했다
미친 여자는 늙은 구렁이가 거두어 간다,고 누군가 말했다
(미친여자도꽃이었을까? / 그꽃씨들은?)
토끼 귀보다 높게 귀를 허공에다 내다걸어
그 작고 까만 독을 나는 꼬박 지켜보았지만
아카시아가 많은 공동묘지 산에서부터 길 위에까지
해가 천천히 걸어내려오는, 그런, 오래된 아침만 반복되었다
(들깨하얀꽃망울에피어나던세월이이따금 / 자줏빛가지꽃에가서
피고지고하였다 / 능구렁이가사라졌다! / 아무도
독을열지못했다 / 손끝멀리피어있는꽃!)
- 문태준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중에서
뚜껑을 열어 보았을까
혹여나 세상 모든 것들이 꽃이었다면
두려움에 치를 떨며 독에 가둬논 뱀도
쉬이쉬이 숨 가빠져 저승으로 간 외할머니도
길 위에서 죽은 여자도, 그 꽃씨들도, 비탈길로 굴러 떨어진 소도
그렇게 꽃은 모두 손끝 멀리 피어났다
더 이상 손이 닿을 수 없는
머나먼 저 세상에서
이건 마치
사라진 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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