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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슬리 뉴 비긴이라는 영국 국교회의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탁월한 신학자이십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35년간 힌두교 교인들에게 선교를 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매 주 힌두교 사원으로 출근 하셔서 그 곳에 있는 힌두교 지도자들과 함께 그들의 경전인 “우파니샤드”를 “산스크리트 어”로 공부하고 요한복음을 헬라어로 공부하면서 서로의 경전에 대해 토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힌두교 사원엘 가면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벽에다 걸어 놓는데 그 속에 예수님의 초상화도 들어 있답니다. 그리고 그들도 매년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 예수님이 초상화 앞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답니다. 힌두교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범신론의 기초 아래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이 모든 세상, 우주는 하나로 귀결되는 데 그 것을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범신론자들입니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 우주 자체가 신이기 때문에 무엇 하나 신이 아닌 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도 결국 해탈에 이르면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결국 범신론이라는 것은 무신론과 맥이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게 신이면 아무 것도 신이 아닌 것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 힌두교 지도자들 중에 죄와 용서에 대해 연구하는 유신론 적 교리를 갖고 있는 신학자가 있었답니다. 그 레슬리 뉴비긴 목사님께서 그 힌두교 신학자에게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와 그리스도를 통한 용서에 대한 교리를 잘 설명해 주었더니 그 힌두교 신학자도 “당신이 말하는 그 예수 그리스도만 빼면 나와 당신의 교리는 정확하게 일치 한다”고 하더랍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죄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는 자신도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레슬리 목사님께서 “그럼 당신도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냐?“라고 묻자 그 힌두교 신학자는 ”왜 꼭 그게 예수여야만 하는가? 예수가 나를 구원해 주지 않으면 저 많은 신들 중 나를 용서해 줄 다른 신을 찾아가면 되지 않는가?“ 하고 벽에 있는 그 종교 지도자들의 초상화를 가리키더랍니다.
오늘 날 예배당 안에 이 힌두교 신학자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왜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를 믿어서 여러분에게 얻어 지는 유익,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위해 예수를 믿으시지요? 틀린 답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 목적이 “구원”이라는 “우리의 필요”에 초점이 모아지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을 놓치게 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너무 “우리의 구원“에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을 두게 되면 우리는 나를 구원하시는 이가 어떤 분이신 지, 나는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지 이런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그냥 아무나 나에게 구원만 주면 나는 그 신을 좇아 갈 거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위험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섬김과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그 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공부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후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두문불출 하자 시내 산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여호와라고 불렀습니다. 금송아지는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을 구원해 준 하나님을 섬긴 자들이 아니라 자기들의 필요를 채워 줄 “아무 신, 불특정 다수 중의 하나”를 섬긴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어떤 힘 있는 존재에게 아부를 떠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나의 필요가 하나도 채워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 누구 신지를 알고 그 분을 섬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분이 누구인지는 상관없고 그저 나를 지옥에서 구원해 주는 “어떤 신”을 섬기고 계십니까?
왜 이 구분이 중요하냐 하면 나중에 가면 이 둘의 목적지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구원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구원 그 이후의 삶을 경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나의 목적지가 되면 나는 나를 구원하신 그 크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늘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른 구원관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삶이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술 취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는 반면에 성령 충만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자기의 삶 속에서 드러내려 열심을 내는 것처럼 신앙은 나에서 하나님으로 나의 눈과 관심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 신앙이 “나의 필요, 나의 구원” 이러한 감각적이며 제한된 한계 속의 신앙으로 변질이 된 것은 여러 가지 근본적인 이유가 있지만 가장 악 영향을 받은 것이 바로 르네상스입니다.
기독교 역사 중 1,500년간은 오히려 지나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비하되고 맹신이 판을 치게 되고 성직자들이 고위 관리처럼 대접이 되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르네상스, 문예부흥이 유럽을 강타하면서 지나친 신본주의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강조되면서 성경의 계시까지도 인간의 이성의 심판을 거쳐야 계시로서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게까지 되었습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은 성경에서 가차 없이 신화나 설화로 매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는 극히 인간중심적인 종교로 변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인본주의가 물질주의를 낳으면서 기독교는 급속도로 인간중심적이며 물질주의 적인 종교로 전락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에 와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보다는 ”나의 유익과 나의 구원, 나에게 쏟아져야만 하는 은혜” 이런 것만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항상 내가 중심입니다. 예수님을 말하고 하나님을 부르며 믿음과 은혜를 이야기하는데 그 이야기의 중심은 항상 “나”입니다. “나의 가족, 내가 속한 공동체“ 엄밀히 말해서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걸 우리는 “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와서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눈물을 흘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감동한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종교적 엑스터시나 감격은 어떤 종교에도 다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도 있고 힌두교에도 있고 이슬람교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나의 필요”에 초점을 두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우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배당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보이는 “나의 필요“를 구하는 사람들은 뭔가 감각적이며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그 것을 추구하지도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증거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서 제일 안심하는지 아세요? “큰 것과 다수가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감동 적인 것”들을 추구합니다. “은사를 강조 한다든 가, 선교를 강조 한다든 가해서 다른 이들은 쉽게 경험 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는 할 수 있다”라는 자부심을 줍니다. “나의 필요”가 주 관심인 사람들은 그래야 안심이 되거든요. 내가 눈에 보이는 뭔가를 해야 하나님 앞에 떳떳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의 필요”를 구하는 교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면서 교회라고 간판을 붙인 곳에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종교를 통해 먹고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늘어나 버렸고 그들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기관들이 생겨나 버렸기 때문에 사람을 붙들어 놓아야 헌금이 들어오고 그래야 그 것들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동적인 프로그램들을 도입합니다. 윌로크릭 교회 같은 곳에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지요?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그 프로그램을 도입해 가면서 수십만 불의 로열티를 지불하고 들여갔습니다. “제자훈련, 새 신자 훈련, 열린 예배“ 이런 것들을 수 십 만 불 씩 주면서 들여가는 의도가 뭡니까?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서입니다.
자식이 있는 많은 부모들이 어떤 교회를 찾습니까? 주일 학교에서 뭘 가르치든 그건 상관 안 하고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있나 없나“”우리 아이의 시선을 잡아끌어 줄 교육 프로그램이 있나 없나“ 이런 것만 찾아다닙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뭘까요? 그들의 죄 성을 자극해 주는 프로그램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이 뭘 제일 좋아할까요? 죄 짓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뭘 제일 싫어할까요? 고리타분하게 성경 가르치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들은 저마다 아이들 예배 때 연극을 한다, 음악회를 한다, 운동을 한다, 미술을 가르친다, 난리들을 떱니다. 부모들은 그걸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들이 저마다 좋은 프로그램들을 유치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신비한 성령의 은사를 강조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눈에 보이는 신비한 것과 자기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잠깐이지만 아주 안심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왕이면 예배당도 크게 짓습니다. 우스개 소리 같지만 큰 예배당에 계신 하나님은 뭔가 나를 위해 더 큰 일을 해 주실 수 있는 분으로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많아지고 예배당이 커지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나는 모두가 공인하는 안전한 공동체에 들어와 있다“는 안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경주해 나가야 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큰 교회나 인기 있는 교회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일까요?
기독교는 공간의 종교가 아닙니다. 공간의 종교는 바알 신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바알은 그의 신전에만 있습니다. 그래서 바알을 섬기는 여 사제들과 성직자들, 혹은 일반 신자들이 그 신전에서 성 관계를 하면 바알이 흥분을 해서 비를 내려 주고 다산을 약속하는 그런 잡교입니다. 기독교는 시간과 역사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하는 것이지 공간의 종교가 아닌 것입니다.
(왕상8:27-30)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그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 때도 하나님이 그 성전에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왕상8)
32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
34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36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 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44주의 백성이 그 적국으로 더불어 싸우고자 하여 주의 보내신 길로 나갈 때에 저희가 주의 빼신 성과 내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건축한 전 있는 편을 향하여 여호와께 기도하거든
45 주는 하늘에서 저희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 일을 돌아보옵소서
사람들이 큰 것과 다수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될 때는 ”나의 필요, 나의 구원“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일단 예수를 믿고 성숙해져 가면서 나의 관심의 초점이 옮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였을 때는 부모가 그저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잘 키워 주어야 하는 분으로 인식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라면서 철이 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그 부모에게 무엇을 뜯어낼까 보다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 뭘 드시면 건강하게 오래 사실까? 뭘 챙겨드리면 기뻐하실까? 이런 것을 고민하게 되듯이 우리가 일단 예수를 믿고 성숙해 져 가면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15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가 나오기 전에는 사람들이 이 우주의 중심이 지구인줄 알았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도 달도 별도 전부 돌아가고 있다는 천동설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는 오히려 거대한 항성 주위를 돌아야 하는 행성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을 코페르니쿠스 적 변혁이라고 부릅니다. 천동설에서 하루아침에 지동설로 바뀌어 버렸으니 세상이 얼마나 깜짝 놀랐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바로 그 코페르니쿠스 적 대 변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중심이었고 하나님이 나를 돕는 분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중심이고 내가 그 분을 위해 존재하는 코페르니쿠스 적 대 변혁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입니다.
하긴 미국 전체 국민 중에 아직도 천동설을 믿는 사람이 33%나 된다고 하니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아직도 자기중심 적인 신앙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자기 인생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자꾸 힘을 키우려고 시도합니다. 재물과 명예는 물론이고 세상 적인 인기와 다른 이들의 인정, 이런 것을 추구합니다.
여러분은 아닌 것 같지요? 여러분이 “신앙이 좋다, 믿음이 깊다, 믿음이 뜨겁다“라고 인정하는 사람들을 한번 떠 올려 보세요. 여러분은 그 사람들의 무엇을 근거로 그들의 믿음을 좋다, 뜨겁다, 깊다, 라고 평가하십니까?
“교회 일을 많이 하니까” “기도를 잘 하니까” “예배 시간에 잘 우니까” “성경을 많이 아니까” 뭐 이런 것 아닙니까? 믿음은 크고 작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온전한 전체가 우리에게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딤후3:14)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갈3:23-26)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믿음은 예수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모두 같은 크기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걸 얼마만큼 내가 내 삶 속에서 누리는가가 바로 신앙생활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그 온전한 믿음을 자꾸 까 보면서 “아 나에게 이런 것이 주어졌구나.” 하고 감격하며 그 믿음을 통해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자꾸 드러내는 삶을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 항복해 들어가며 그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을 우리는 신앙이 좋다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드러남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자꾸 깨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고후4:6-7)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품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그대로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질 그릇이 깨져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겠지요?
그래서 예수를 잘 믿게 되면 여러분의 삶이 본의 아니게 자꾸 깨지는 모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은 어떻게 저 상황에서 저런 인내가 나올까?”“저 사람은 어떻게 저런 악한 사람을 저렇게 용서를 할까?”“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까지 낮아지면서도 얼굴 하나 안 붉힐까?”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깨지는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 그 분의 속성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 걸 거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의 목적지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도구요 방법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십자가는 십자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채워져야 할 내용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그 분이 우리 안에 들어 와 계신 것처럼 십자가의 원리는 그런 것입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형벌의 모양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입니다.
나를 죽여 원수를 살리는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 아니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집대성하여 요약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는 그 십자가가 하늘나라 삶의 원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원수들에게 수난을 당하시고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억지로 이를 악 물고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속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삶을 이 땅에서 그대로 재현해 내는 삶을 삶으로써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목표 지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렇게 살다 가신 것처럼 계속 깨지며 부서지는 고통 속에 던져 지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지요?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가시적으로 우리가 볼 수 있게 보여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시죠? 그런데 우리는 그 분을 지금 뵐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배울 수 있습니까? 바로 그 예수에 관해 자세하게 우리의 수준에 맞게 기록해 놓은 성경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요1:17)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 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5:39)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여러분이 열심히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속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나”에서 초점을 옮겨 “하나님의 영광”으로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고 가신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는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모든 시간은 그리로 쏟아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술 취하지 마십시오. 시간을 아끼세요. 여러분의 배 만을 위해 시간을 헛되게 쓰지 마세요.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으십시오. 성령 충만은 성경을 통하여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합3:17-19)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
(빌3:8)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벧후3:18)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자, 이제 뭐가 진짜 중요한 것인지 아시겠지요?
レズリー・ニュービギンという英国国教会の宣教師がおられます。
その方は卓越した神学者でした。しかしインドで35年間、ヒンドゥー教徒に宣教をされた方です。
その方は毎週ヒンドゥー教の寺院に通い、そこにいるヒンドゥー教の指導者たちと一緒に、彼らの聖典である「ウパニシャッド」をサンスクリット語で学び、ヨハネの福音書をギリシャ語で学びながら、お互いの聖典について討論をしていたそうです。ところでヒンドゥー教の寺院に行くと、偉大な宗教指導者たちの肖像画が壁に掛けられているのですが、その中にはイエス様の肖像画も入っているそうです。そして彼らも毎年クリスマスになると、そのイエス様の肖像画の前でイエス様の誕生を祝うのだそうです。ヒンドゥー教は皆さんもご存じのとおり、汎神論を基礎として作られた宗教です。このすべての世界、宇宙は一つに帰結するのであり、それを神と呼ぶ人々が汎神論者です。
簡単に言えば、この宇宙そのものが神なので、何一つ神でないもの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だから人間も最終的に解脱に至れば神にな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のが彼らの主張です。結局、汎神論というものは無神論と同じ根を持つものです。
すべてが神であるなら、何一つ神ではないのと同じではありませんか。
ところがそのヒンドゥー教の指導者たちの中に、罪と赦しについて研究する有神論的教理を持つ神学者がいたそうです。
レズリー・ニュービギン牧師がそのヒンドゥー教の神学者に、キリスト教で語る罪とキリストによる赦しの教理をよく説明してあげると、そのヒンドゥー教の神学者はこう言ったそうです。
「あなたが言うそのイエス・キリストさえ除けば、あなたと私の教理はまったく同じです。」
私たちは皆罪人であり、罪の赦しを受け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点には、自分も同意するというのです。
そこでそのレズリー牧師が、「それならあなたも、イエスを信じなければ救われないということを認めるのですか?」と尋ねると、そのヒンドゥー教の神学者はこう言ったそうです。
「なぜそれが必ずイエスで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か。もしイエスが私を救ってくれないなら、あの多くの神々の中から、私を赦してくれる別の神を探しに行けばいいではありませんか。」
そう言って、壁に掛けられている宗教指導者たちの肖像画を指さしたのです。
今日、礼拝堂の中にも、このヒンドゥー教の神学者のようにイエスを信じている人が非常に多くいます。皆さんはいかがでしょうか。皆さんはなぜイエスを信じるのですか。イエス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皆さんに得られる益、皆さんに与えられる救いのためにイエスを信じ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か。間違った答えではあり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がイエスを信じる目的が「救い」という「私たちの必要」に焦点を当てるようになると、私たちはそこで「神の栄光」というものを見失ってしまいます。どういう意味でしょうか。
もし私たちがあまりにも「私たちの救い」に信仰生活の目的を置いてしまうと、私たちは私を救ってくださるその方がどのようなお方なのか、私はその方を全面的に信頼できるのか、そういったことには関心を持たず、「とにかく誰でもいいから私に救いさえ与えてくれるなら、その神について行く」という方向へ行ってしまうのです。
これは本当に危険な信仰です。私たちは救いを受けるために神に仕えるのではありません。私を救ってくださった神が、仕えられ、栄光と尊厳と賛美を受けるにふさわしいお方であるからこそ、その方に仕えるのです。
私たちが出エジプト記で学んだように、イスラエルがエジプトから出た後、モーセがシナイ山に登って40日間姿を見せなかったとき、シナイ山の下でイスラエルの民は金の子牛を作りました。
そしてその金の子牛を主(ヤハウェ)と呼びました。金の子牛はエジプト人が仕える豊穣と多産の神でした。つまりイスラエルの民は、自分たちを救ってくれた神に仕えたのではなく、自分たちの必要を満たしてくれる「どんな神でもよい、不特定多数の中の一つ」を拝んだのです。
キリスト教で言う信仰とは、私の必要を満たしてくれる力ある存在にへつらうことを信仰と言うの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教の信仰とは、私の必要が一つも満たされないとしても、その方が主なる神であるからこそ、その方を信じることを信仰と言うのです。
皆さんはいかがでしょうか。皆さんは、皆さんに救いを与える方がどの神なのかを知ってその方に仕えている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その方が誰であるかは関係なく、ただ私を地獄から救ってくれる「ある神」を拝んでいるのでしょうか。
なぜこの区別が重要なのでしょうか。後になれば、この二つの行き先が違ってくるからです。
私の救いが目的になると、私たちは救いの後の人生を走り続けることができません。
しかし、私を救ってくださった神の栄光が私の目的地になるなら、私は私を救ってくださったその大いなる神の栄光のために今日を生きるようになります。だから正しい救いの理解を持っている人とそうでない人の人生には違いが出るのです。
つまり、酒に酔う人が自分のためにすべてを動員するのに対し、聖霊に満たされた人は神の栄光を自分の人生の中で現そうと熱心になるように、信仰とは私から神へと私の目と関心を向けることなのです。
このように「神の栄光」に焦点を当てるべき信仰が、「私の必要、私の救い」という感覚的で限られた範囲の信仰へと変質してしまったのには、いくつかの根本的理由がありますが、その中でも最も大きな影響を受けたのがルネサンスです。
キリスト教の歴史の中で1500年間は、むしろ過度に神中心の信仰でした。そのため人間が卑下され、盲信が横行し、聖職者たちが高位の官僚のように扱われていた時代でした。
しかし宗教改革が起こり、ルネサンス、文芸復興がヨーロッパを席巻すると、過度な神本主義は崩れました。そして人間の理性が強調されるようになり、聖書の啓示でさえも人間の理性の審判を経なければ啓示としての価値を発揮できないほどになりました。人間の理性で理解できない部分は、聖書の中でも容赦なく神話や伝説として扱われ始めました。
そのようにしてキリスト教は極めて人間中心的な宗教へと変質し始めたのです。
その人本主義が物質主義を生み、キリスト教は急速に人間中心的で物質主義的な宗教へと転落していったのです。だから礼拝堂に来ても「神の栄光」を求めるのではなく、「私の利益、私の救い、私に注がれるべき恵み」ばかりを追い求め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いつも私が中心です。イエスを語り、神を呼び、信仰や恵みを語っているのに、その話の中心はいつも「私」です。「私の家族、私が属している共同体」。厳密に言えば、それはキリスト教ではありません。
むしろそれを私たちは「罪」と呼びます。私たちは礼拝堂に来て感動することがあります。恵みを受けたと言うこともできます。
涙を流すこともあります。しかし皆さんが感動したその方が、主なる神ではない可能性もあります。そうした宗教的エクスタシーや感激は、どんな宗教にもあるものです。仏教にもあり、ヒンドゥー教にもあり、イスラム教にもあります。
私たちが信仰生活をしていると言いながら、このように「私の必要」に焦点を当てると、「神」という名前が付けられた偶像を作り出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そのように礼拝堂で、目に見えない「神の栄光」ではなく、目に見える「私の必要」を求める人々は、何か感覚的で目に見える証拠を求めるようになります。なぜなら彼らは、目に見えない神の栄光を知らないだけでなく、それを追い求めてもいないため、目に見える証拠を探すようになるのです。彼らがどこで一番安心するかご存じですか。「大きなもの」や「多くの人が共通して認める感動的なもの」を追い求めます。「賜物を強調するとか、宣教を強調するとかして、他の人たちは簡単には経験できないことを私たちはできる」という自負心を与えるのです。「私の必要」が主な関心である人々は、そうでなければ安心できないのです。自分が目に見える何かをしなければ、神の前で堂々としていられないと感じるからです。
そのように「私の必要」を求める信徒たちが大多数を占めるようになると、教会という看板を掲げた場所で彼らの必要を満たし始めました。なぜなら、その宗教によって生計を立てている人々があまりにも多く増えてしまい、彼らを維持するためにあまりにも多くの機関が生まれてしまったため、人々を引き留めなければ献金が入らず、そうしてこそそれらを維持できるからです。
それで感動的なプログラムを導入します。ウィロークリーク教会のような所には良いプログラムがたくさんありますよね。韓国の大型教会がそのプログラムを導入する際に、数十万ドルのロイヤリティを支払って導入しました。「弟子訓練、新信者訓練、オープン礼拝」などのものを、数十万ドルも払って導入する意図は何でしょうか。人々の必要を満たすためです。そして彼らをつなぎとめるためです。
子どもを持つ多くの親たちは、どんな教会を探すでしょうか。日曜学校で何を教えるかは関係なく、「うちの子が好きなプログラムがあるかないか」「うちの子の関心を引きつける教育プログラムがあるかないか」そんなことばかりを探します。
子どもたちが好きなプログラムとは何でしょうか。彼らの罪性を刺激するプログラムしかありません。子どもたちは何が一番好きでしょうか。罪を犯すことが一番好きです。何が一番嫌いでしょうか。古臭く聖書を教えられることが一番嫌いです。それなのに教会はそれぞれ、子どもの礼拝で演劇をする、音楽会をする、運動をする、美術を教えるなど、大騒ぎしています。親たちはそれを喜びます。だから教会はそれぞれ、良いプログラムを導入するために心血を注ぎます。
ある教会は神秘的な聖霊の賜物を強調します。人々はそのような目に見える神秘的なものと自分が関係していると思うと、たとえ短い間でも非常に安心するからです。
どうせなら礼拝堂も大きく建てます。冗談のように聞こえるかもしれませんが、大きな礼拝堂におられる神は、何か自分のためにもっと大きなことをしてくださる方のように人々が錯覚するのです。そしてそのように人が多くなり礼拝堂が大きくなると、人々は必ず「自分は誰もが認める安全な共同体に入っている」という安心感を持つようになります。それで自分自身で走り続けなければならない信仰生活をおろそかにするようになるのです。本当に大きな教会や人気のある教会が、神が共におられる証拠なのでしょうか。
キリスト教は空間の宗教ではありません。空間の宗教とはバアルを拝む宗教です。
バアルは彼の神殿にしかいません。だからバアルを仕える女祭司や聖職者、あるいは一般信者がその神殿で性関係を持つと、バアルが興奮して雨を降らせ、豊穣を約束するというような雑多な宗教なのです。キリスト教は時間と歴史の中で理解されるべきものであって、空間の宗教ではないのです。
(列王記上8:27-30)
27 神は果たして地の上に住まわれるでしょうか。天も天の天もあなたをお入れすることができないのに、まして私が建てたこの宮など、なおさらです。
28 しかし、わが神、主よ、しもべの祈りと願いに目を留め、今日あなたの前でしもべが叫び求めている祈りを聞いてください。
29 あなたがかつて「わたしの名がそこにある」と言われたこの場所、この宮に向かって、昼も夜もあなたの目を注ぎ、しもべがこの場所に向かって祈る祈りを聞いてください。
30 しもべと、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がこの場所に向かって祈るとき、その願いを聞いてください。あなたがおられる天で聞き、聞いて赦してください。
ソロモンが神殿を建て、その神殿を神に奉献する場面です。しかしソロモンはその時でも、神がその神殿に住まわれる方ではないことを知っていました。
(列王記上8)
32 あなたは天で聞き、行い、あなたのしもべたちをさばき、悪者の罪を定めてその行いをその頭に報い、正しい者を正しいとし、その義にしたがって報いてください。
34 あなたは天で聞き、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の罪を赦し、彼らをその先祖に与えた地に帰らせてください。
36 あなたは天で聞き、あなたのしもべと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の罪を赦し、彼らが歩むべき良い道を教え、あなたの民に嗣業として与えた地に雨を降らせてください。
39 あなたがおられる天で聞き、赦し、それぞれの心をご存じであるあなたが、そのすべての行いにしたがって報いてください。人の心をすべて知っておられるのは、あなただけです。
44 あなたの民が敵と戦うためにあなたの遣わされる道に出て行き、あなたが選ばれたこの町と、私があなたの名のために建てたこの宮の方に向かって主に祈るとき、
45 あなたは天で彼らの祈りと願いを聞き、その訴えを聞き入れてください。
人々が大きなものや多数を好むのは、このように目に見えない神の栄光を知らないからです。
もちろん、私たちが最初にイエスを信じるようになるときには、「私の必要、私の救い」に関心を持ちます。しかし一度イエスを信じ、成長していくにつれて、私たちの関心の焦点は移っていくものです。私たちが幼い子どもであったときには、親とはただ私の必要を満たし、私をよく育ててくれる存在として認識されます。しかし私たちが成長して分別がついてくると、それからは親から何をもらえるかではなく、「お父さんお母さんは何を召し上がれば健康で長生きできるだろうか」「何を差し上げれば喜んでくださるだろうか」と考えるようになるように、私たちもイエスを信じて成長していくと、関心の焦点が変わっていくのです。
15世紀にコペルニクスが現れる前までは、人々はこの宇宙の中心が地球だと思っていました。
地球を中心に太陽も月も星もすべてが回っているという天動説を信じていました。しかしコペルニクスは、地球こそ巨大な恒星の周りを回る惑星であることを発見したのです。
それをコペルニクス的転回と呼びます。天動説から一夜にして地動説へと変わったのですから、世界がどれほど驚いたことでしょうか。
私たちの信仰生活にも、まさにそのコペルニクス的な大転換が起こ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今までは私が中心で神が私を助ける方でしたが、これからは神が中心で、私がその方のために存在するというコペルニクス的な大転換が、私たちの信仰生活には必要なのです。
とはいえ、アメリカ国民全体の中でも、いまだに天動説を信じている人が33%もいるそうですから、本当に言葉もありません。
このように、いまだに自己中心的な信仰にとどまっている人は、まだ自分自身が自分の人生の神であるため、自分で自分の力を強くしようとし続けます。財産や名誉はもちろん、世俗的な人気や他人からの認められること、そういうものを追い求めます。
皆さんは違うと思いますか。皆さんが「信仰が良い」「信仰が深い」「信仰が熱い」と認める人を一度思い浮かべてみてください。皆さんはその人たちの何を根拠にして、彼らの信仰を良い、熱い、深いと評価しているのでしょうか。
「教会の働きをたくさんしているから」「祈りが上手だから」「礼拝の時間によく泣くから」「聖書をたくさん知っているから」そのような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信仰には大きい小さいというものはあり得ません。信仰は完全な全体が、私たちに一度に与えられるものだからです。
(第二テモテ3:14)
15 あなたは幼いころから聖書を知っており、その聖書はキリスト・イエスにある信仰によって救いに至る知恵をあなたに与え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ガラテヤ3:23-26)
23 信仰が来る前には、私たちは律法の下に閉じ込められ、後に現される信仰の時まで閉じ込められていました。
24 このように律法は、私たちをキリストへと導く養育係となり、私たちが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るためでした。
25 しかし信仰が来た後は、私たちはもはや養育係の下にはいません。
26 あなたがたはみな、信仰によって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神の子どもだからです。
信仰はイエスの中にあるものです。そしてそのイエスが私たちの中に入っておられます。だから私たちの信仰は皆、同じ大きさの信仰なのです。その信仰をどれだけ自分の人生の中で味わい、用いるかということを、信仰生活を通して私たちは追い求めていくのです。
すでに私たちに与えられているその完全な信仰を、一つ一つ開いて見ながら、「ああ、私にはこのようなものが与えられていたのだ」と感激し、その信仰によって救いを与えてくださった神の栄光を現していく人生、それをキリスト者の人生と言うのです。
そのように神を知り、神の前に降伏し、その神の栄光を現す人を、私たちは信仰が良い人だと認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しかし私たちの人生の中で、その神の栄光が現れる人生を生きるためには、私が現れることによって神の栄光が現れるのではなく、むしろ私が砕かれていくことによって神の栄光が現れるのです。
(第二コリント4:6-7)
6 「闇の中から光が輝き出よ」と言われた神は、イエス・キリストの御顔にある神の栄光を知る光を、私たちの心に照ら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
7 私たちはこの宝を土の器の中に持っています。それは、この非常に大きな力が神から出たものであって、私たちから出たものではないことが明らかになるためです。
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という宝を宿している土の器です。しかしそのイエス・キリストは、神の栄光をそのまま持っておられる方です。その神の栄光が現れるためには、土の器が砕かれなければ神の栄光は現れないのです。
ですからイエスを本当に信じるようになると、皆さんの人生は思いがけず、何度も砕かれるような経験をするのです。他の人が見て、「あの人はどうしてあの状況であんな忍耐ができるのだろう」「あの人はどうしてあんな悪い人をあのように赦すことができるのだろう」「あの人はどうしてあそこまで低くなりながらも顔一つ赤くしないのだろう」と言うように、私たちは自分が砕かれていく姿の中で、神の栄光、その方のご性質を私たちの人生の中で現す人々なのです。それを聖さと言うのです。それがまさに私たちの信仰の目的地なのです。
多くの人が誤解しているのは、十字架を私たちの救いの道具や方法としてだけ考えていることです。そうではありません。十字架は私たちの救いの方法でもありますが、十字架は十字架によって救われた神の民の中に満た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内容でもあるのです。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救いを得ましたが、その方が私たちの中に入っておられるように、十字架の原理もそのようなものなのです。
十字架は単なる刑罰の形ではありません。十字架は天の国の人生の原理です。
自分を死なせて敵を生かす天の国の人生の原理、いや、神のご性質を最もよく集約して要約したものがまさに十字架なのです。この世では愚か者のように扱われるその十字架が、天の国の人生の原理なのです。イエス様はこの地上に来られ、敵から苦しめられ、彼らを赦しながら、無理に歯を食いしばって耐えられた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がイエス・キリストと神のご性質なのです。
私たちはその十字架の人生をこの地上でそのまま再現する人生を生きることによって、神の栄光、神のご性質を現すのです。それが私たちの目標地点です。
ですから私たちは、イエス様がそのように生きていかれたように、絶えず砕かれ、壊される苦しみの中へと投げ込まれていくのです。
では、私たちがそのように神の栄光のために生きるためには、その神の栄光が何であるのかを知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
では、その目に見えない神の栄光を、この地上で目に見える形で私たちに示してくださった方は誰でしょうか。イエス様です。しかし私たちは今、その方を直接お会い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は、どのようにして私たちはそのイエス・キリストを学ぶ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それはまさに、そのイエスについて詳しく、私たちの理解できるレベルに合わせて記録してくださっている聖書を、熱心に学ぶことです。
(ヨハネ1:17)
18 いまだかつて神を見た者はいない。父の懐におられる独り子なる神が、神を現されたのである。
(ヨハネ5:39)
39 あなたがたは聖書の中に永遠の命があると思って聖書を調べているが、その聖書こそ、わたしについて証ししているのである。
皆さんが熱心に聖書を通してイエス・キリストを学ぶこと、それが神の栄光、神のご性質を学ぶことなのです。
キリスト教とは、「私」から焦点を移し、「神の栄光」へと目を向けること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神の栄光を啓示してくださったイエス様を説明している聖書を、熱心に学ば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そして私たちのすべての時間は、そこへ注ぎ込まれ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酒に酔ってはいけません。時間を大切にしなさい。自分の腹のためだけに時間を無駄にしてはいけません。そして聖霊に満たされなさい。聖霊の満たしは、聖書を通して受けることができます。
(ハバクク3:17-19)
17 たとえ、いちじくの木に花が咲かず、ぶどうの木に実がなく、オリーブの木の収穫がなく、畑に食物がなく、羊が囲いから絶え、牛が牛舎にいなくても、
18 それでも私は主にあって喜び、私の救いの神にあって喜び躍る。
19 主なる神は私の力であり、私の足を鹿のようにし、私を高い所に歩ませてくださる。この歌は指揮者のために、私の弦楽器に合わせて歌うものである。
(ピリピ3:8)
8 そればかりか、私の主キリスト・イエスを知る知識のすばらしさのゆえに、私はすべてを損と思っています。私はキリストのためにすべてを失い、それらをちりあくたのように思っています。それはキリストを得るためです。
(第二ペテロ3:18)
18 むしろ、私たちの主であり救い主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と、その方を知る知識において成長しなさい。栄光が今も永遠の日に至るまで、その方にありますように。
さあ、これで何が本当に重要なのか、もうお分かりになったでしょ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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