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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년(1737년) 가을, 내가 과거 시험을 보러 서울에 들어갔을 때 시장에 어떤 그릇이 있었다. 위는 둥글고 아래는 평평하며 속은 비어 있고 꼭대기에 마치 일(一) 자 모양의 가느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전에 못 보던 것이었다. 나는 하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것이 무슨 그릇이냐?” “벙어리입니다.” 내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또 물었다. “이것이 무슨 그릇이냐?” “벙어리입니다.” 그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나는 화를 내며 물었다. “내가 이 그릇을 물었는데 ‘벙어리입니다’ 하고 대답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소인이 감히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그릇의 이름이 벙어리이기 때문에 벙어리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상해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이 그릇으로 말하자면 입은 있지만 말을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벙어리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여염집 쪼그만 계집애들이 이걸 사서는 돈이 생기면 그 속에 던져 넣었다가 가득 찬 뒤에 부수어서 꺼냅니다. 돈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허허, 입이 있지만 말을 못하는 게 어찌 이 그릇뿐이냐. 병, 옹기, 항아리는 입이 없단 말이냐? 병, 옹기, 항아리가 말을 못한다고 벙어리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여기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 곁에 있던 여관 주인이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손님은 알지 못하십니까. 이것은 사람이 이름붙인 것이 아니라 조물주의 희극(戱劇)입니다. 무릇 조물주가 사람에게 부드러운 말씨와 웃는 낯빛을 하고 보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 아이들의 입에 퍼져 노래가 되기도 하고, 때로 물건으로 형상이 드러나 그릇이 되기도 하는 것은 모두가 사람이 보고 들어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그릇이 나온 지가 10년이 안 되는데, 그 뜻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이 벙어리 같다고 풍자하는 것이고 하나는 사람이 벙어리 같아야 한다고 경계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풍자하는 것이냐고요? 사람이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하지 않아 벙어리와 다름 없음을 풍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경계하는 것이냐고요? 사람이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말을 하면 재앙만 취하게 되니 벙어리처럼 해야 함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순(舜) 임금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겠습니까만 고요(皐陶)와 익(益)이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무왕(武王)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겠습니까만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漢) 문제(文帝)와 당(唐) 태종(太宗)이 모두 몸소 태평을 이룩했지만 가의(賈誼)는 한숨을 쉬다 못해 통곡을 하고 위징(魏徵)은 십사(十思)의 상소를 올리다 못해 십점(十漸)의 상소를 올렸습니다. 신하된 마음으로 ‘우리 임금은 이미 성군이야.’ 하지 않고 혹시라도 잘못이 있을까 염려하여 눈을 밝히고 대담하게 숨김 없이 직언한 것이니, 임금에게 잘못이 있으면 임금에게 간쟁하느라 겨를이 없고 정치에 해악이 있으면 정치를 논하기를 그치지 않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임금은 성군이 되는 데 실패하지 않고 신하는 자기 직분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임금님(영조)께서는 요 임금처럼 어질고 순 임금처럼 공손하며 문왕(文王)처럼 경건하고 무왕(武王)처럼 의로우셔서 말씀드릴 만한 잘못이 아예 없습니다. 하지만 신하된 의리상 어찌 이것으로 충분타 하고 여기에서 그치기를 바라겠습니까. 어질더라도 영원토록 어질기를 바랄 일이고, 공손하더라도 영원토록 공손하기를 바랄 일이며, 경건함과 의로움에 대해서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신하가 임금을 위하는 지성측달(至誠惻怛)의 생각이건만,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우리 임금은 이미 성군이시고 우리 나라는 이미 치세(治世)가 되었다.’고 하며, 한 달이 가도록 임금의 덕을 논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한 해가 가도록 국정을 논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벙어리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풍자한다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로 화호(和好)도 맺고 전쟁도 일어나는 법입니다. 자식된 사람에게 말할 때에는 효도에 의해야 하고 신하된 사람과 말할 때에는 충성에 의해야 합니다. 지위도 없으면서 국정의 장단을 논하고 책임도 없으면서 조정의 득실을 말하며, 심한 경우 공론을 어기고 당(黨)을 위해 죽으며 눈을 부릅뜨고 논란하다가 결국에는 임금을 배반하는 죄를 저지르면서도 자기가 세상의 화변(禍變)에 죽는 줄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른바 경계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풍자하는 바를 알아서 돌이킨다면 조정의 명신(名臣)이 될 것이요, 그것이 경계하는 바를 알아서 본받는다면 처세의 달인이 될 것입니다. 손님께서는 이를 아시겠습니까.” 내가 그 말을 기특하게 여기고 이름을 물었더니 주인은 입을 가리키며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뜻을 알아채고는 물러나 이를 기록하여 스스로를 경계한다. 아울러 이 글을 당국에 바치고 싶다.
무릇 입이 있으면 울고, 입이 있으면 말을 하는 것이 천하의 바른 도리다. 그런데 입이 있으면서 울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는다면 정상적인 것과 반대되는 것으로 요상한 것이다. 이 기물이 나오면서부터 조정에서는 말할 만한 일도 말하지 않게 되었고 이 기물이 나오면서부터 사람들은 모두 말하는 것을 서로 경계하게 되었다. 이는 온 천하를 벙어리로 만드는 것이다. 요사스러운 물건이니 성세(聖世)에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깨부수어 버렸다.
- 안정복(安鼎福),〈벙어리 저금통[啞器說]〉,〈벙어리 저금통을 부수다[破啞器說]〉,《순암집(順菴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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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전포럼 120번 째 이야기 잘 보았어요. 고마워요.
탕평정치.. 그렇게 깊은 뜻이 숨어 있었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