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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수필 창작을 위한 6행(行)6수(手)6상(想)6안(眼)
박양근
1. 짧은 시간의 긴 만남을 위하여
수필은 ‘짧은 시간의 긴 만남’이다. 수필 한 편을 읽는 3분 미만의 짧은 시간에 수필가는 자신이 겪은 일과 생각과 삶의 자양분인 인생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하루를 보낸들, 며칠을 함께 여행한들, 그의 본성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문화비평가 콜라쿠시오가 “한 나라의 민족성을 알려면 그 나라의 고전을 읽어라”라고 하였듯이 한 사람을 알려면 그의 글인 수필을 읽으라고 권할 것이다. 그만큼 수필은 가장 자전성이 강하게 배어있는 문학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이러한 자전성과 문학성을 어떻게 구현하는가라고 할 것이다.
수필문학의 정체를 한 줄로 요약하면 물상이 지닌 내적 의미를 소통시키는 작업이라고 하겠다. 특히 사이버공간과 인터넷 매체의 등장에 따른 현대표현양식으로서 수필은 단순한 이야기 방식에서 벗어나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을 중시하고 영상 서사로서의 내러티브를 강화할 필요가 생긴다. 즉 수필은 짧은 시간 안에 독자와 소통하고 대상과 교감하는 새로운 글쓰기 양식으로 변신하여야 한다.
진지한 수필가라면 한 편의 수필을 쓸 때 체험을 그대로 기록하지 않는다. 문예수필가는 자신의 체험을 미적구조로 변환시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인터넷 시대의 수필쓰기를 위해서 북송작가 구양수가 말한 많이 읽고 생각하고 써야 한다는 교훈을 현대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생긴다. 현대수필이 수필적 체험과 남다른 내공과 상상력을 결속하여야 하는 이유도 수필은 전인적 투사와 재구성의 결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왜 수필 요건을 설정하여야 하고 수필창작을 위한 여섯 가지의 행동과 글쓰기와 안목이 필요하며 그 구체적 실천방안은 무엇인지 논의하도록 한다.
열면서 1: 좋은 수필의 요건
좋은 수필은 시적이고 소설적이며 드라마틱하다. 시보다 영감이 넘치며 소설보다 더 구성력이 뛰어나고 드라마보다 더 현장감이 있어야한다. 그러면서 수필은 문학철학으로서 사상과 철학을 담되 영적 소통으로 인간애와 자연애를 그려낼 필요가 있다.
수필은 먼저 진솔하고 격조 높은 언술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 진솔한 수필은 부끄러운 약점, 잘못된 실수, 숨기고 싶은 결점을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면을 진지하게 성찰하여 표현해준다. 그러면서 서사를 전개시키는 구성, 적절한 비유, 신선하고 유연한 문체를 통해 체험을 형상화하고 의미화한다면 좋은 수필로 도약하게 된다. 수필은 독자에게 춘풍처럼 부드럽게 속삭이고 때로는 날선 비수처럼 폐부를 찌르고 때로는 가을 낙엽처럼 처연한 몸놀림을 보여주어야 한다. 혹은 수필은 팔방미인과 같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수필에는 4차원이 충족되어야한다.
1차원은 신변이나 신체를 친구나 이웃에게 담담하게 털어놓는 고백의 진지성을 말한다. 사실의 왜곡이나 누락은 진솔하지 못하며 헤픈 넋두리는 잡문이 되기 쉽다. 문학적인 인간은 일상의 다양성, 수용의 다양성, 지식의 다양성, 그리고 표현의 다양성을 통해 자기의 영성을 발전시켜야 한다. ‘내가 하니까 개성’이 아니라 ‘나만 할 수 있으니까’ 개성이다. 다양한 문학의 재료인 인생을 자기의 색깔로 서술하여야 자조와 자성과 자각의 공유가 이루어진다. 수필을 최고의 인생학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차원은 지적 생산성을 가진 수필을 말한다. 고리타분한 지식이나 피상적 개념으로 짜깁기한 글은 인상미(Impression)가 부족하다. 산문으로서 수필은 신선한 지성, 객관, 논리, 경험이 있어야한다. 수필은 아는 것만큼 쓴다고 하듯이 박학다식한 읽을거리가 있어야 독자가 공감하고 생각할 거리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지식이 흩어진 낟가리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3차원은 연륜의 향기가 풍겨나야 한다. 연륜이라 함은 인공적인 지식이나 싸구려 감정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과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과 관용을 말한다. 과거의 체험을 반추하여 현재와 현실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해석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이럴 때 그 수필은 미래와 우주를 꿰뚫어내는 통찰을 갖는 글이 된다.
4차원은 적절한 미적구조와 미학성을 구축하려는 예술가적 소명감을 지니는 경우다. 시적 요소인 미래, 이상, 감각, 사색, 감성, 직관이 수반되는 이 단계에서는 수필의 완성단계인 예술수필이 나타난다. 지정의(知情意)가 서권기(書卷氣)를 얻어 문자향(文字香)을 발하고 우주를 읽어내는 투시력(透視力)을 모두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잡문수필가가 자신이 수필가라는 명예에 골몰하는 현시욕(現示慾)을 바라고 저자수필가는 양적 발표에 집착하는 서권력(書卷力)을 추구한다면 작가수필가는 비로소 문인다운 수필가로서 하나의 표현에도 문학성을 저울질하는 문자향(文字香)을 추구하며 마지막으로 예술가수필가는 영감의 문학화에 헌신하는 일체성을 기원하는 예영기(藝靈氣)를 희구한다고 할 것이다.
열면서 2 : 6행(行)의 고행자
인간은 원초적으로 사유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사유는 근원에 대한 사유, 태생에 대한 사유, 종말에 대한 사유로 구분된다. 어린 아이가 철이 들면서 자신의 출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성장하며 자연현상에 대하여 궁금증도 키워가고 지긋하게 나이 들면 우주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된다. 그것이 신화가 만들어지는 순서이고 신화 같은 수필이 창작되는 과정이다. 신화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한 점과 같다. 신화의 점은 상상이라는 공간 내에서 좌표로 존재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신화는 인간, 자연, 지구, 우주에 대한 비밀을 풀어간다.
그렇게 생각하는 정신만 있으면 수필을 쓸 수 있다. 수필은 성현의 경전이나 석학의 글이 아니다. 다만 체험을 상상의 채로 쳐서 옹이 같은 문장에 담을 수 있으면 수필이 된다. 그래도 장을 담을 때와 같은 노력이 필요하고 그 과정을 바라보는 평심의 자세가 필요하다.
1. 소화불량을 즐겨라
좋은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독(多讀)·다작(多作)·다상량(多商量), 곧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이 세 마디의 가르침은 10세기 중국 북송 때의 문인 구양수가 남긴 말이다. 자그마치 천 년 동안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서 세 가지 순서를 바꾸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든 틀린 말이 아니다.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기엔 능력이 벅차고 시간도 많지 않다. 그렇더라도 한 줄을 쓰기 전에 백 줄을 읽어라. 한 편의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백 편은 아니더라도 10편의 수필은 읽도록 한다.
많이 쓰지 말고, 많이 생각하지 말고, 제발 많이 읽자. 시집을 백 권 읽은 사람, 열 권 읽은 사람, 단 한 권만 읽은 사람 중에서 글을 가장 잘 쓸 사람은 누구이겠는가? 특히 초보자의 수필은 독서량에 비례한다. 여기에서 많이 읽는다는 것은 쓰기의 원동력에 해당한다. 맛난 음식을 많이 먹어야 요리도 잘한다. 안도현은 “시집은 언제든 연습할 수 있는 악기”라 하였다. 그렇다면 100편의 수필은 100인의 삶이 연주하는 심포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는 그의 방대한 저서 인정에서 “문장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니라 오랜 세월 노력이 쌓여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은 두 아들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의 글을 통해 읽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 바 있다.
“삼대 이상 의원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병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 또한 그렇다. 반드시 오래도록 노력한 다음에야 능숙하게 글을 지을 수 있다. 글을 쓰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세상을 다스리는 경학(經學)을 읽어서, 문장의 기초와 뿌리를 단단하게 세워두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역사 관련 서적들을 두루 공부하여 나라와 개인이 흥망성쇠 하는 근원을 알아야 하고, 일상생활에 유용한 실용 학문에도 힘을 쏟아 옛사람들이 남겨 놓은 경제서를 즐겨 읽어야 한다. …내가 말한 대로 해 본 다음에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밤, 짙은 나무 그늘과 가랑비 내리는 때를 만나면 문득 감흥이 일어나 시를 읊게 되고, 문장의 구상이 떠올라 글이 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과 땅, 자연의 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생동감 있는 글을 짓는 문장가의 창작 활동이다.”
2. 동심(童心)으로 낯설게 보라
“미(美)는 언제나 엉뚱하다.”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의 말이다. 그의 말이 고스란히 쉬클로프스키 등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말한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에 일치한다. 수필을 쓰려는 사람은 “엉뚱함”을 신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제발 문학에 전범이 있음을, <좋은 수필 창작론>을 창작의 교과서로 믿지 말라. 그냥 참고하라. 낯설게 하기는 관습적인 용어, 관행적인 행위, 타성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낯설게 보고, 참신한 형식을 창조하고 신선한 언어를 찾아내는 행위다. 일상어를 문학어로 전환시키는 것을 유명한 시인들은 동심에 비교한다.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이라 하였고 윌리엄 블레이크는 <Song of Innocence>를 노래하였으며 많은 예술가들이 “동심은 마음의 첫 모습이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을수록 도리와 견문에 빠져 새롭게 보지 못한다. 왜 그런가, 어른이란 이름을 날리고 싶고, 지식만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학문과 사상에 앞서 문학에서 동심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투적인 눈,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손, 남의 뒤를 따르는 발걸음으로는 문학의 끄트머리도 붙잡을 수가 없다. 새로운 것과 참된 것은 어린아이의 눈 속에 있다.
3. 귀를 열어라
자연은 가장 거대한 소리의 도서관이다. 책을 읽고 싶은데 주위에 수필 한 권도 없다면 어찌해야 하나? 그때는 숲으로 들어가서 눈을 감고 귀를 열면 된다. 두 귀를 닫으면 마음의 귀가 열린다. 세상의 소리를 듣는 행동은 책을 읽는 행위보다 더 가치가 있다. 인간의 오감 중에서 가장 예민하고 어둠에서조차 더욱 예민해지는 것이 귀다. 장 콕토는 “내 귀는 소라껍질/바다 소리를 그리워한다.”고「귀」에서 말한다. 기형도 시인은「풍장」에서 “시장에 간 엄마를 기다리며 창틈으로 새어드는 빗소리를 듣는다. 그는 세상을 뜰 때 귀만 두고 가겠다”고 말한다. 여자가 죽으면 입만 뜨고 남자가 죽으면 손가락만 뜬다는 우스개가 있다. 오직 귀만 두고 가는 마음은 세상을 귀로 읽으려는 마음의 표현이다.
내 세상 뜰 때
우선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입을 가지고 가리.
어둑해진 눈도 소중히 거풀 덮어 지니고 가리.
허나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황동규/「풍장 27」
4. 사랑을 자주 많이 하라
사랑은 팍팍한 삶을 비춰주는 조그만 손전등 같은 것이다. 사랑만이 “The more, the better” 이다. 어둠에 숨어 손전등에 비친 물체를 향해 나의 모든 촉수를 집중해보자. 그때 나의 온몸은 비 묻은 나뭇잎 소리에 반응하고, 달팽이의 조그만 촉수에도 전율한다. 사랑이란 대상과 맺은 관계를 바탕으로 보이지 않는 수많은 그물을 만들어낸다. 사랑은 아무리 시간과 돈과 공을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은 이유는, 언젠가는 내게 눈길을 주겠지, 언젠가는 마음을 주겠지 하고 기다리기 때문이다. 사랑만큼 집중력과 상상력을 요하는 작업은 없다. 마침내 그가 내 속에 들어오고, 내가 그 속에 들어간다. 자아일체 같은 소재 찾기가 글을 쓰기 위해 첫 번째 실천하여야 할 방정식(나=대상)이다.
사랑의 감정이 없이 수필 한 구절을 얻으려는 것은 맨 땅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과 같다. 소나무 둥치를 감고 오르는 칡넝쿨을 가만히 지켜보라. 여린 줄기가 나무에 자국이 남도록 조여서 마침내 덩굴자국이 새겨지고 잎은 그 상처를 가린다. 글이란 나를 산산이 깨뜨리되 상대를 보듬어 안는 행위다.
중국의 시인 아이칭(艾靑)이 <시론>에서 한 말을 음미할 만하다.
“제재를 완전히 장악해야 비로소 예술세계의 통치영역을 확대하게 된다. 무릇 당신이 눈동자로 본 것, 귀로 들은 모든 것을 빠짐없이 당신의 사상체계 속에 잘 짜 두어서,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명령에 대기하고 있어야 한다. 당신의 감각과 사유가 한 제재로부터 습격을 당할 때, 한바탕의 격투를 치르게 하라. 그 제재가 완전히 굴복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게 하라.”
5. 재능이 아니라 열정을 믿어라
천재 예술가는 과연 있을까? 문학 탤런트가 있을까. 문학적 재능을 타고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에디슨도 천재는 1%의 행운과 99%의 노력이라 하였다. 만일 어느 작품을 두고 천재적이라 한다면 작품이 지닌 예술성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작가의 재능에 대한 찬사일 것이다. 천상병 시인을 가리켜 ‘천상(天性)에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천부적인 재능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행동을 보니, 기구한 행적을 보니, 글에 사족을 못 쓰는 열정을 보니 “천상에 시인”이라 말하는 것이다.
“시는 감성으로 쓰고, 소설은 노력으로 쓰고, 수필은 나이로 쓴다”는 허무맹랑한 말이 있다. 만일 당신이 작가로서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수필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말라. 몇 편의 수필을 쓴 후 펜을 꺾지 말라. 펜을 꺾는다 함은 세상에 대한 의분과 열정과 절교하는 것이다. 작품이 여러분의 삶의 나침판이 되려면 선천적인 재능보다 자신의 후천적인 열정을 믿어야 한다.
“열정은 미침”이라고 노래하는 시를 읽자
시에 미치고
그림에 미치고
음악에 미치고
춤에 미치고
사랑에 미치고
혼자 미친 것도 좋지만
보는 사람마저 미치게 한다면
그거야말로 위대한 미침
두려워 마라
미치는 것을
<미친 사랑의 노래 7>/ 김순이
열정의 노예가 되어 미친 듯이(狂) 글에 복무할 때 우리는 문필가의 경지에 미치게(達) 된다.
시간을 투자하고, 내공을 키우고 공력을 집중시켜라. 나이를 먹었다고 감성이 무뎌진다고 한숨을 쉬지 말고 훈련하지 않는 자신의 나태를 탓하라. 열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나이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청소년에게는 풋풋한 감성이 있고, 청년에게 화려한 감성이 있고 장년에게는 완숙한 감성이 있다. 계란에도 날계란과 반완숙과 완숙이 있다. 봄 여자, 가을 남자라는 말이 있고 남성이 더 무드에 약하다고 한다. 부디 열정을 품고 감성을 연습하고, 훈련하라.
6. 발품을 팔아라
발품은 바람과 길로 이루어진다. 박목월은 젊은 시절에 홀로 동해 해안을 따라 한 달 이상을 도보여행을 하였다. 대구에 사는 수필가 구활 씨는 자신의 삶의 9할이 바람이라고 매번 노래한다. 인간은 애당초 노마드(nomad)라는 염색체를 지닌다. 길을 떠난다 함은 존재의 원초성에 다다르는 구도이고 낯선 관찰을 얻을 수 있는 공간적 탈주이다. 달리 말하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수필가들은 방랑자라는 3겹의 디아스포라(diaspora)로서의 체험과 기억을 가진다.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로 ‘흩어지다’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유대인의 대명사로 쓰였으나, 근래에는 보통명사로서 이민자와 이민민족을 나타내는 명칭이 되었다. 제1디아스퍼라는 수렵체취시기로부터 전해오는 원시인과 유목민의 원형이다. 두 번째는 21세기에 들어와 심해지고 있는 사이버리즘시대의 가상공간에서의 노마드적 사람이다. 현대인은 원시인이 먹을 것을 구하듯이 현대인의 생존식량인 정보를 찾아 헤맨다. 세 번째는 예술가와 작가들이 갖는 생득적인 유랑성이다, 이들은 자신의 방랑성을 해소하기 위하여 미의 세계를 부단하게 추구하고 헤맨다. 그 점에서 예술가와 작가로서 수필가는 인류 원형으로서의 디아스포라, 현대인으로서 디아스포라, 그리고 작가로서의 디아스포라를 동시에 의식한다. 그래서 진정한 수필가는 소재를 찾아 늘 발품을 판다.
신화가 인류의 역사라면 수필은 개인의 신화이기도 하다. 기하학적으로 풀이하면 생활과 문학의 좌표를 어디에 놓는가 이고, 그래서 수필가는 뒤퐁이 말한 “글이 사람이고 사람이 글이다”라는 고행자인지도 모른다.
열면서 3: 6수(手)의 테크니션
문학의 전달수단은 언어이다. 언어는 개인 간의 소통수단이므로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고 문학가도 언어로 창작한다.
언어의 기능에는 일상적 언어, 과학적 언어, 문학적 언어의 3종류가 있다. 일상적 언어는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매체로서 사전적 의미에 바탕을 둔다. 과학적 언어는 어떤 이념, 곧 지식의 세계를 진술한다. 반면 문학적 언어는 체험을 표현하면서 함축적인 의미와 다양한 정서를 전달해준다. 영국시인 코울리지(Samuel T. Coleridge)는 시는 “가장 훌륭한 단어들이 가장 훌륭한 순서로 나열된 것”이라 하였다.
문학어를 구사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문학어는 명료하고 간결하고 자연스러워야 강한 인상과 효과를 남긴다. 널리 알려진 표현이나 구절을 사용한다면 아무리 주제가 특이하다 할지라도 독자는 별다른 감동을 느낄 수가 없으므로 독창적이고 개성이 있는 글이어야 한다. 문학어의 함의는 함축과 연상의 효과를 강조한다. 그리고 다의적, 입체적, 초 논리적, 함축적, 유동적, 모호성, 고차원적인 성질을 지닌다. 문학에서 함축적이고 다양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촉매로서의 언어훈련은 어떻게 하는가.
1. 당신만의 ‘연장상자’를 가져라
글쓰기에서는 자신만의 연장상자(toolbox)를 마련해야 한다. 그 상자에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도구는 어휘다. 미국의 인기 있는 공포소설 작가 스테판 킹(Stephen Edwin King)이 최근 글쓰기에 관한 조언을 담은 자전 에세이집 “글쓰기에 대하여 (On Writing)”에서 “틀에 따라서 쓰기보다는 개성 있게 참신하게 쓴다. 굴곡 없이 무미건조한 글이나 상투적인 표현은 금물이다.”라고 제안하였다.
소문난 글맛집, 그런 작품집을 운영하려면 비법이 있어야 한다. 작가 이윤기는 글에 하나의 위트를 집어넣어 재미에 대한 기대감을 주며 대구의 수필가 구활은 방대한 고전에 대한 지식으로 일화를 제시하며 전주의 수필가 김용옥은 생소한 토속어를 반드시 사용하며 서울의 수필가 최민자는 한문을 패러디하여 낯설게 사용한다. 탁월한 문장가로 꼽히는 작가 이문열은 논란이 많았던 소설『선택』에서 예스러운 의고체(擬古體) 문장을 적절하게 구사한다. 김훈은 산문집 풍경과 상처, 자전거 기행 등에서 현기증을 일으키는 미문으로 독자의 기를 질리게 한다. 이렇듯 글 잘 쓰는 사람들은 나름의 개성을 팡팡 친다. 명문장은 아니더라도, 수필에서 자신의 연장을 휘둘러 볼 일이다. 따뜻한 성품이 우러나는 글, 정직한 글, 재치 있는 글, 시원시원한 글, 팍팍 속도감을 내는 글, 적절하게 영어로 간을 맞추는 글……. 모두 매력적이고 좋은 연장이다
2. 줍는 손을 가져라
시인 유안진의「다보탑을 줍다」에는 다음의 구절이 있다.
고개 떨구고 걷다가 다보탑을 주웠다
국보 제 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
정신 차려 다시 보니 빠알간 구리동전
이 시를 들으면 대개 재미있다고 웃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러나 잠시 정색을 하자, 누가 고개를 떨어뜨리는가. 승자는 목에 힘을 준다. 문학은 승자를 예찬하지 않고 패자를 위로한다. 승리의 기록이 역사에 남는다면 패자의 기록은 문학에 남아 진실을 전한다. 기가 죽었을 때, 실의에 빠졌을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어쩔 줄을 모를 때 우리는 고개를 숙인다. 승자는 손을 뻗어 승리의 과일을 따지만 시인은 고개를 숙여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처럼 삶의 길바닥에서 진실을 줍는다. 주우려면 어떡해야하는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한다.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처럼 작가가 굽힌 허리에는 겸손과 포용과 인내가 들어간다. 손을 들어보라. 몸이 직선의 칼 모양이 될 것이다. 손을 내려 허리를 굽혀보라. 활 모양이 될 것이다. 줍는 손은 몸과 마음을 굽혀 작고 미미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의 품격을 발견하게 해준다. 이 말을 기억하라. 문학가는 버려진 것을 주워 가슴에 담는 넝마주이다.
3. 하이브리드 장치를 달지 말라
미국의 인터넷 사이트 플레인 랭귀지(www.plainlanguage.com)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소개한다. 글을 꾸미다 보면 수식어를 자꾸 달고 문장을 길게 쓰고 싶어진다. 마이크를 손에 쥐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는 질문자와 같다. 글줄이 길어지면 문장이 잘못되기 쉽고 주부 술부의 호응이 엇갈리고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거리가 멀어지면서 오해를 가져온다. 여자의 스커트와 연설은 길이가 짧아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듯이 “one sentence-single idea”(一文一思)가 바람직하다.
단락도 내용에서 심플하여야한다. 단락이란 내용의 단위로서 단순한 문장의 결합 이 아니다. 기본적인 단락구성은 도입문장-뒷받침문장-닫는 문장으로 이어져 글쓴이의 주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one-paragraph-single topic(一段一脈)에 해당한다.
글쓰기를 잘 하려면 단락을 정확하게 사용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처음부터 긴 작품을 쓰기보다 단락 완성에 충실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단락을 충실하게 짜고 기본적인 문체들을 쌓아가노라면 언어의 집을 지을 수 있게 된다.
1. 주어와 술어를 바짝 붙여 의미가 분명한 문장을 만든다.
2. 한 문장에는 한 가지 주제만 집어넣도록 한다.
3. 짧은 문장과 문단을 쓴다.
4. 능동태를 쓴다. 주어를 강조할 경우나 꼭 필요한 경우에만 피동태를 쓴다.
5. 부정적인 의미가 들어간 단어는 될 수 있는 대로 피한다.
6. 읽기 쉬운 톤을 유지하고 지나치게 엄격한 형식은 피한다.
7. 단순하고 친숙한 일상어를 사용한다.
8. 전문용어나 약자는 가급적 피한다.
9. 문법을 지킨다.
(1)문법은 작가와 독자 간의 무언의 약속이다 지나치게 문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문법의 오류는 나쁜 문장을 낳는다. 작가를 문장가라고 부르는 이유도 문장과 문법에 충실 하라는 주문이다. 수필 한 편을 쓰면서 국어사전을 곁에 두지 않는다면 못줄이 없이 모를 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 객관적인 서술과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다.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시각이나 표현은 삼가고 거부감 없는 내용을 넣어야 한다. 인물, 고사, 일화, 숫자, 과학적 사실을 인용할 경우 반드시 그 출처를 밝혀야한다.
(3) 추상적인 문구나 과다한 수사법을 삼간다. 한문이나 외래어가 때로는 고급스러운 표현이 될 수 있지만 지나치면 현학적이 된다.
(4) 표현과 문체에 일관성을 유지한다.
서술은 한 가지 주제를 충실하게 나타낸다. 수필은 일종의 체험의 자술서이므로 다른 화제로 바뀌면 곤란하다.
4. 상 목수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
상 목수는 못질을 하지 않는다고 이어령은 문장론에서 말한 바가 있다. 상 목수는 못 하나 박지 않고서도 아귀를 맞추어 기둥을 잇고 서까래를 깔아 한 채의 집을 짓는다. 문장을 이어가는 기술도 마찬가지이다. 서툰 글일수록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로 글을 잇고 불량한 글일수록 마무리를 ‘~다, ~이다, ~한다, ~것이다’라는 망치질을 해댄다. 그런 글은 눈으로 보아도 읽을 마음이 사라져버린다. 수필은 읽는 맛도 있어야 한다. 잘 다듬어진 글은 접속사가 없어도 자석처럼 서로 끌어당겨준다. 특히 단락의 첫 문장을 접속사로 시작하거나 단락의 끝 문장을 똑같은 종지형으로 반복하면 안 된다. 초고를 마무리한 후에 ‘~것이다’를 몇 번 썼는가, ‘그리고, 그러나’와 같은 접속사를 얼마나 많이 썼는가를 헤아려보라. 그것만으로도 졸문을 명문으로 고칠 수 있다.
5. 기록의 손을 놀리지 말라
자각의 본능은 적는 것이다. 손을 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사냥꾼과 먹잇감 간에 벌어지는 미묘한 게임을 생각하여보자. 이 치열한 게임의 원리는 ‘성공적인 포획’에 있다. 작가라면 마땅히 사냥꾼이 총을 손질하듯,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기 위하여 화장하듯 습관적으로 적고 고치고 다듬을 필요가 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생각이 떠오르면 수시로 메모하는 ‘수차차록법’을 실천하였고 발명왕 에디슨도 지독한 ‘메모광’ 이었다. 작가의 특징은 건망증이며 이름 난 작가들은 모두 창작노트를 가지고 있다. 손은 기록하고 기억하는 뇌이다. “Memory is short, Note-taking is long.”
기록의 고통은 무엇을 말하는가. 화장하는 여성의 손처럼 수필작가는 자면서도 기록하여야한다. 연필과 수첩을 들지 않고 문학여행이나 소재를 찾아 나서거나, 집에 들어가서 본 것을 적겠다는 자신의 두뇌를 믿어서는 안 된다. 기록하되 자신 고유의 기록부호를 만들 필요가 있다. 글자, 문자, 기호, 약자, 음악부호 등 나름의 표기술을 총동원하여 가능한 형상화된 부호와 기호로서 자신의 창작 욕망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6. 물리치료사의 손을 가져라.
물리치료사는 외과수술을 한 후 신체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꾸준히 치료해주는 사람을 말한다. 수필이 아무리 좋은 주제와 가치를 지니더라도 문장이 정상이 아니면 원하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여기에 퇴고라는 꾸준한 글 치료가 필요하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의 글에 손대는 것을 권위가 손상당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은 단언하건데 작가가 아니다. 그들의 문장을 읽어보면 유별나게 온전하지 못하다. 부분적으로 표현이 무난하다고 하더라도 전체의 짜임새가 없으면 잘 쓴 글이 아니다. 퇴고에는 문법 교정, 문장 교열, 글쓰기에 대한 컨설팅이 모두 포함된다. 초고를 쓰는 에너지가 50%라면 재교 삼교 등 퇴고를 거듭하는 에너지가 50%라고 보면 된다. 펜혹이라는 말을 아직 기억하는가? 글의 퇴고는 미용성형이 아니라 정형수술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대수필에서는 “신변잡기”라는 일상성과 “붓 가는 대로”라는 소위 인스피레이션이 사라진 지 오래이다. 글의 생명은 언어가 지닌 의미를 잇는 데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창작을 공학 용어를 빌어 디자인하고 공정(工程)한다고 말한다. 항상 정문(正文)을 추구한 수필이 정품의 수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