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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학림사 오등선원 지대방 원문보기 글쓴이: 오등(五燈)
대한불교조계종 제13대 종정 진제대선사 Q&A
출처: http://www.jinje.kr
[질문] 왜 참선을 해야 합니까?
[답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일은 나고 죽는 일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 일을 해결하려고 왕궁 부귀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出家)하여 수도(修道)하셨고, 역대(歷代)의 모든 도인 스님네께서도 이 일을 밝히기 위해 출가 수도하셨습니다.
모든 생명 있는 것이 나고 죽는 데는 언설(言說)로 표현하기 어려운 고통이 따릅니다. 우리가 과거에 무수히 많은 생(生)을 받고 받아왔고, 금생(今生)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 한은 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을 받고 받게 될 터인데, 나고 죽는 이 윤회의 굴레 속에서 받는 고통이야말로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한 고로 모든 사람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사바세계에 온 것이지 달리 다른 일이 없습니다. 만약 다른 일이 있다고 하는 이가 있을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미래제(未來際)가 다하도록 만반(萬般) 고통에서 헤어날 기약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나고 죽는 이 고통의 굴레에서 영구히 벗어나 세세생생(世世生生) 열반(涅槃)의 낙을 누릴 수가 있느냐?
부처님 경서(經書)에는 팔만 사천 길이 펼쳐져 있지만 다 바른 길이 아닙니다. 오직 부처님의 최상승법(最上乘法)인 이 선법(禪法)을 통해서, 인인개개인(人人箇箇人)이 각자 자신의 성품을 바로 볼 때라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 견성법(見性法)은 한 번 분명하게 깨달으면, 나고 죽는 윤회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나고 삼세 인과법(三世因果法)이 다 끊어지는 고로, 세세생생 열반의 낙을 누리게 됩니다.
중생은 생로병사의 고통과 살아가면서도 가지가지의 고통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잘 살고 건강하며 뜻과 같이 만사가 다 성취되기를 바라지만 그렇지 못한 이유는 다겁생에 잘못된 중생의 습기만 익혀온 때문입니다.
"사람이 빈한하게 사는 것은 지혜가 짧아서(모자라서) 그렇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혜는 만복(萬福)의 근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잘 살 수도 없고 출세할 수도 없습니다. 부모가 아무리 높은 자리와 많은 재산을 물려줘도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릇이 적기 때문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나고 날 적마다 출세와 행복을 누리고자 한다면, 이 지혜를 밝히는 선수행을 꾸준히 연마해야 할 것입니다. (*)
* 참선하는 이유
(1) 나고 죽는 윤회의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나 부처님과 같은 열반의 낙을 누리기 위해서.
(2) 지혜를 계발하여 나고 날 적마다 출세와 복락을 누리기 위해서.
[질문] 화두참선 외의 다른 수행법(위빠사나,염불선,묵조선 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위빠사나와 화두참구, 이 두 가지를 수행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위빠사나도 수행의 일종이지만, 무한한 세월이 흐른 후에 설사 깨닫는다 해도 ‘법신(法身)의 진리’와 ‘여래선(如來禪)의 진리’의 눈이 열릴 수는 있지만 최고 ‘향상(向上)의 일구(一句) 진리’를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부처님과 도인께서 법신의 진리나 여래선의 진리를 전한 것이 아니고 향상의 일구 진리를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과 도인께서 전하신 향상의 일구는 활구참선(活句參禪), 즉 간화선이라야 그 관문을 투과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러냐?
깨달음의 열쇠는 일념삼매가 지속이 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의심과 화두가 한 덩어리가 되어 보는 것도 듣는 것도 다 잊어버리고, 앉아 있어도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자기 몸뚱이까지 다 잊어버리는 일념무심삼매(一念無心三昧)에 깊이 들어서 며칠이고 몇 달이고 흐르다가, 홀연히 보는 찰나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나면서 자기의 본마음을 깨닫게 됩니다.
위빠사나는 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관(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힘이 미약해서 일념삼매에 깊이 들어갈 수 없고 대오견성(大悟見性)을 못합니다. (*)
[질문] 왜 많은 사람들이 참선수행을 하는데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까?
[답변] 이 참선법은 참구하는 한생각만 지속된다면 깨달음이 저절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과거생에 지어온 무수 반연(攀緣)과 습기(習氣)로 인하여 온갖 기멸심(起滅心)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고로 깨달음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와서 여러분의 목에다 장검(長劍)을 들이대면서 "화두를 내놓으려느냐, 네 목을 내놓으려느냐?"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거기에서 흔연히 목을 내밀 수 있는 신심(信心)과 용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귀히 여기는 것보다도 화두참구하여 기필코 견성(見性)하리라는 신심(信心)이 더 크면, 누구든지 화두일념이 순숙(純熟)하여 깨달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이와 같은 확고한 신념이 정립되지 않고는 화두일념(話頭一念)이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신념 없이 어떻게 억겁다생(億劫多生)에 쌓아온 중중(重重)의 죄업(罪業)의 산을 넘을 수가 있겠습니까?
암탉은 병아리를 까기 위해서 21일 동안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들을 다 참아가며 알을 품습니다. 배가 고프면 아주 잠깐 모이를 주워 먹고는 온기(溫氣)가 식기 전에 다시 둥지로 올라가서 얼른 또 알을 품습니다.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어야 겠다고 들락날락한다면, 365일을 품고 있어도 병아리를 깔 수가 없는 법입니다. 따뜻한 기운이 지속되어야만 그 안에서 병아리가 형성되어 삼 칠일 만에 "쫄"하고 소리를 내는데, 그 때 어미닭이 "탁" 쪼아 주어야 병아리가 나옵니다.
화두일념(話頭一念)을 지어가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나고 죽는 괴로움에서 영구히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번 생(生)은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오로지 화두참구에만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화두참구(話頭參究)를 할 때는 화두를 의심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의심하여, 화두 전체가 분명한 가운데 의심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화두일념이 현전(現前)되어서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고, 그러다보면 시절인연(時節因緣)이 도래하여 가을 바람에 밤송이 벌어지듯 홀연히 화두가 타파됩니다. (*)
[질문] 부처님께서는 위빠사나 수행법으로 깨치셨으며 화두는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며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답변] 부처님께서 가지가지의 방편법문을 설한 가운데 따로 세 가지 법문을 설한 것이 있으니, 그 첫째가 대중에게 아무 말 없이 꽃을 들어 보인 것이요, 두 번째는 가섭에게 자리의 반을 나누어 앉으신 것이요, 세 번째는 열반하심에 관 밖으로 두 발을 내 보인신 것입니다. 이 밖에 따로 한 관문을 베풀어 놓으셨습니다.
하루는 부처님의 설법이 다 끝나고 모두 자기 처소로 돌아갔는데 한 여인은 정(定)에 들어 깨어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옆에 있던 문수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모든 대중은 다 자기 처소로 돌아갔는데 어째서 저 여인은 저렇게 앉아 있습니까?"
"문수야, 저 여인은 지금 정(定)에 들어 있으니, 너의 신력(神力)으로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끔 한번 해 보아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문수보살이 가지가지의 신통으로 여인을 깨우려 했지만 여인은 꿈적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광경을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백천 문수를 나투고 신통묘용을 다하더라도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하지 못하리라. 하방세계 42국토를 지난 곳에 망명(罔明)이라는 초지보살이 있다. 그이라야 능히 저 여인을 정에서 나오게 할 수 있으리라."
말이 떨어지자 망명보살이 땅으로부터 솟아올라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고 여인 앞으로 나아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여인이 정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면 문수보살은 과거칠불의 스승이었는데 무엇이 부족해서 여인을 정에서 깨어나도록 하지 못했으며 망명보살은 이제 겨우 초지보살인데 무슨 장처(長處)가 있어 여인을 정에서 나오도록 했느냐?
이 법문은 참으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러한 공안이 벌어졌는데, 중국의 위대한 도인들도 이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살림살이를 바로 알았기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은 법을 써서 백천 공안을 베풀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화두가 중국에서 만들어졌다느니, 혹은 죽은 문자 운운함은 잘못된 소견에서 하는 말입니다.
[질문] 어떤 분들은 참선하는데 호흡법을 매우 중요시 합니다. 참선을 할 때 호흡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답변] 산승은 따로 호흡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화두에만 몰두해도 순일해지기 어려운데 호흡장단 맞추랴, 화두 챙기랴 아무 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공부는 앉아서만 하는 공부가 아닙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일을 하나 밥을 먹으나 잠자리에 드나 오로지 화두 한 생각만 간절히 들어야 합니다. 움직이는 가운데 화두 챙기면서 호흡을 맞춘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 공부의 핵심은 화두 의심에 있는 것이지 호흡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화두만 익어지면 호흡은 자동적으로 되니 호흡에 신경을 쓰지 마시고 화두만 간절히 챙기시기 바랍니다. (*)
[질문] 호흡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화두를 챙기려고 하면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합니다. (50대 보살님)
[답변] 호흡은 자연히 되는 것입니다. 내버려두면 자연히 숨은 쉬어지게 마련입니다. 따로 신경쓸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오로지 화두에만 생각을 몰두하세요.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어떤 것이 참나던고?"
화두는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지만, 화두를 챙기려고 하는데 호흡이 신경쓰여 답답하면 입으로 소리를 내면서 챙겨보세요.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
[질문] 화두를 바르게 참구하는 사람이 드물다고 하는데요, 바른 화두 참구법을 자세히 좀 알려주십시오.
[답변] 선지식을 친견하고 화두를 타서 참구하는 법을 배워도 다들 자기식대로 합니다. 선지식이 가르쳐주는 방법대로 제대로 참구하는 사람이 드뭅니다. 금생에 반드시 견성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1. 바른 신심금생에 천만다행으로 사람 몸을 받고 선지식을 만나 화두를 타서 참선을 하게 되었으니, 마치 사선천(四禪天)에서 떨어뜨린 바늘이 사바세계의 겨자씨에 꽂힌 격입니다. 금생에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하고 몸을 버리면 앞으로 무한한 후생에 천갈래 만갈래의 윤회고통을 받아야 하리니, 참으로 두렵고 아찔한 일입니다. 금생에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화두를 타파해서 윤회고통에서 벗어나서 대장부의 활개를 쳐야 되겠다는 철석같은 의지, 이것을 바른 신심이라 합니다.
2. 바른 자세앉아 있는 자세를 보면 화두를 제대로 들고 있는지, 혼침망상에 떨어져 멍하게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이 화두를 참구하는데 있어서 바른 자세가 아주 긴요합니다.(좌선의 90%를 좌우합니다.) "반가부좌를 하고, 가슴을 쫙 펴고, 허리를 곧게 하고, 고개를 반듯이 하고, 두 손을 포개어 배꼽 밑에 붙이고, 두 눈은 보통으로 뜨고(단, 눈으로 꼬나볼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뜨고만 있으면 됩니다.) 2미터 앞 아래에다 화두생각을 둡니다."이것이 앉아서 화두를 참구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3. 바른 참구화두를 지키는 데, 붙드는 데, 외우는 데 시간을 낭비하는 이가 부지기수입니다. 개울물에 비친 달을 보듯이 화두를 지켜 달아나지 않게 하고, 진언하듯이 화두제목을 외우는 것 등은 바르게 참구하는 것이 아닙니다.간절한 마음에서 "어떤 것이 참나던고?" "어째서 개는 불성이 없다 했는고?" "어째서 뜰 앞에 잣나무라 했는고?"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이렇게 하루에 천 번, 만 번 의심으로 밀어줘야 합니다.이렇게 간절히 수천, 수만 번을 밀어주다 보면 '참의심'이 발동걸리는 때가 오는데, 그 때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화두 한 생각이 쭉 흘러가게 됩니다.마치 기계 모터에 시동을 걸 때 수십 번 푸드득 거리다가 어느 순간 시동이 걸리면 몇 시간을 잘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그러니 요(要)는 "참의심이 발동걸리는 데" 있으니, 참의심이 발동이 걸리게끔, "어떤 것이 참나던고?"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하루에 수천 수만 번 의심으로 밀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바른 참구라 합니다. (*)
[질문] 화두를 챙기면 마음 가운데 화두만 한 생각만 있어야 하는데, 망상이 늘 함께 공존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요?
[답변] 그것은 참구하는 화두 한 생각이 간절하지 않아 화두가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삼대독자 외아들이 홀연히 비명에 간 부모의 심정. 거기에는 아들 한 생각 뿐이지 다른 생각이 없거든요. 그와 같이 간절히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하고 또록또록 챙길 것 같으면, 이생각 저생각이 싹 없어지고 화두 한 생각만 쭉 흘러가게 됩니다. (*)
[질문] 이 최상승 법문을 듣고도 바로 행(行)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변] 믿음은 도의 원천입니다. 이 신심(信心)의 여하에 따라서 한 생에 깨달음을 얻어 공부를 마친 한가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수십 생을 공부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무수한 생을 사람 몸을 받아 만나기 어려운 이 최상승 법문을 얻어 듣고도 바로 행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지극한 신심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지극한 신심을 갖춘 다음,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 바른 지도를 받아 나간다면 이 주장자 아래나 한 마디 법을 설하는 즉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법은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가짐으로 한 마디 법문을 받아들이는 그 가운데 묘한 이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
[질문] 활구참선(活句參禪)이란 무엇입니까?
[답변] 우리가 참선을 하는 본래의 뜻은 견성성불(見性成佛)입니다. 그러면, 견성성불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정진해야 되느냐? 활구참선(活句參禪)을 해야 됩니다. 고인(古人)네들, 명안종사(明眼宗師)들도 활구(活句)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다만 활구를 참구할지언정 사구(死句)를 참구하지는 말라.” 또,“활구를 참구하면 부처님과 조사(祖師)의 스승이 된다.”
는 등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그러면, 사구를 참구하면 어떠하냐?견성성불은커녕 자기 자신도 구제하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활구와 사구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활구참선이냐?
'일천 성인(一千聖人)의 정액상(頂額上: 이마 위)의 일구(一句)'를 투과(透過)해야만 활구가 됩니다. 일천 성인의 그 이마 위의 일구를 투과하지 못하면 활구의 세계를 전혀 모른다는 뜻입니다. 활구의 세계를 투과할 것 같으면 불조(佛祖)의 스승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일천 성인의 정액상의 일구를 투과할 수 있도록 참구해야 합니다.
정액상 일구를 투과한 자는 살활종탈(殺活縱奪) 기용제시(機用齊示) 즉,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고 기(機)와 용(用)을 가지런히 쓰는 수완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구(死句)는 도저히 이러한 자재의 수완을 갖출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도 구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든 대중은 이러한 법문을 듣고 천성(千聖)의 사표(師表)가 될 수 있도록 혼신의 정력을 쏟아야 합니다. (*)
[질문] 정(定)과 혜(慧)란 무엇입니까?
[답변] 정(定)이라는 것은 무엇이냐면, 모든 산란심(散亂心)이 다 끊어지고 적적(寂寂)의 일념(一念)이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마음 가운데는 온갖 망상(忘想)이 일초일각(一秒一刻)을 쉼없이 기멸(起滅)하는데, 우리가 선수행을 해서 금강(金剛)과 같은 불괴(不壞)의 정(定)을 얻으면, 모든 기멸심이 다 끊어지게 됩니다. 이 금강과 같은 불괴(不壞)의 적정삼매(寂定三昧)를 일용(日用)중에 항시 수용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의 경지요, 부처님의 살림살이입니다.
이러한 적적(寂寂)의 정(定)이 이루어지면, 자연히 밝은 지혜가 현전(現前)하게 됩니다. 금강과 같은 정(定)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밝은 혜(慧)가 드러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혜(慧)가 뚜렷이 밝을 것 같으면, 금강(金剛)과 같은 정(定)이 지속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定)과 혜(慧)는 이름은 둘이지만, 실상으로는 하나입니다. 정(定)이 곧 혜(慧)이고, 혜가 곧 정인 것입니다. 정(定)과 혜(慧)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수레가 외바퀴로는 굴러갈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둘이 항상 같이 굴러가야 합니다. 정(定)을 여의고는, 혜(慧)가 있을 수 없고 또, 밝은 혜(慧)를 여의고는, 정(定)이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이 둘을 균등하게 갖추지 못할진대는, 불조(佛祖)께서 베풀어놓으신 백천삼매(百千三昧)의 법문을 당당하게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낱낱 법문에 밝은 눈이 열리지 못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만인을 지도할 수 있는 안목(眼目)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둘을 함께 갖추어야만, 모든 부처님과 역대 조사(歷代祖師)의 심심미묘(深深微妙)한 경계와 살림살이에 이를 수 있는 법입니다. (*)
[질문] 차별지(差別智), 차별법문이란 무엇입니까?
[답변] 옛 조사(祖師) 스님네께서, "열반심(涅槃心)은 알기 쉬우나 차별지(差別智)는 밝히기 어렵다."고 하셨는데 바로 가지가지 공안(公案)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부처님의 진리의 세계는 아주 세밀합니다.지금 이 탁자 위에는 꽃도 있고, 녹음기도 있고, 찻잔도 있고, 가지가지가 놓여 있는데, 눈 먼 봉사는 이것을 가리지 못합니다. 눈 뜬 이는 '이것은 녹음기다, 꽃이다, 찻잔이다.' 하고 다 가릴 수 있지만, 맹인(盲人)은 눈이 어두우니 가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의 세계도 이와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종사가(宗師家)가 되려면 차별의 낱낱 법문에 밝아야 합니다. 만일 차별지(差別智)에 밝지 못할 것 같으면 만인의 눈을 멀게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식(善知識) 스님네는 자칭 선지식이라 해서 선지식이 되는 게 아니고, 이러한 차별(差別)의 법문을 다 투과(透過)하여 스승으로부터 인증(印證)을 받아야 선지식입니다. 그 분만이 만인의 눈을 멀게 하지 않을 점검의 눈을 갖추어, 만인에게 최고의 진리를 지도할 수 있는 법입니다. (*)
[질문] 대중이 함께 모여서 수행하는 대중생활에 임하는 자세는 무엇입니까?
[답변] 많은 대중이 모여 함께 수행해 나가는 데 있어서, 각자가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느냐?
여기에는 '나'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개개인이 각자 대중의 뜻을 편안하게 받드는 자세에서 임해야 대중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 대중에게 내 뜻을 따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대중생활을 할 수가 없는 법입니다. 많은 대중이 함께 살아가는 데는 화합이 필수조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행자(修行者)의 기본 자세는 하심(下心)입니다. 이 공부는 '나'라는 것을 다 놓아 버려야 합니다. '나만 잘났고, 나만 위대하고, 나만 똑똑하고' 하는 등의 아만심이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 있으면, 그 사람은 공부와는 천리 만리 밖에 떨어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무조건 하심(下心)하고 서로서로가 부처님을 모신다는 자세로 존중하면서 공부를 지어간다면, 시비(是非)도 끊어지고 화두공부가 날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
[질문] 가장 힘을 덜 들이고 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입니까?
[답변] 이 견성법(見性法)이라고 하는 것은 화두(話頭)를 들어서 바로 참구하는 데 묘리(妙理)가 있습니다.
요즘 제방(諸方)에는 '염불선(念佛禪)'을 주장하는 이도 있고, '무심무상(無心無想)' 즉, 생각 없이 무심(無心)을 지켜서 견성(見性)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의 법을 모르고서 하는 말입니다.
중생(衆生)은 마음 가운데 이생각 저생각 온갖 망념(妄念)이 쉬지 않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또,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심(無心)하려고 해야 무심할 수가 없고, 생각을 없애려고 해야 없앨 수가 없는 법입니다.
이러한 중생의 업(業)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화두참구(話頭參究)입니다. 화두 한생각을 오매불망(寤寐不忘) 간절하게 참구하다 보면, 무수히 일어났다가 없어지는 기멸심(起滅心)은 점점 차단 되어 갑니다. 이를 좇아서 참의심[眞疑心]이 돈발(頓發)할 것 같으면, 기멸심은 완전히 끊어지고, 화두일념(話頭一念)만이 현전(現前)되어 보고 듣는 것을 다 잊고 시간 가는 줄도 모르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도 보리수 나무 밑에 좌정(坐定)하셔서 6년의 세월이 지나간 줄을 모르셨고, 머리 위에 새가 집을 짓는 것까지도 모르셨습니다. 이와 같은 삼매(三昧)가 지속되는 가운데, 중생의 업(業)인 온갖 망념(妄念)은 빙소와해(氷消瓦解) 되어지고, 홀연지간(忽然之間)에 마음땅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
[질문] 인생을 허비하지 않고 값지게 사는 법은 무엇입니까?
[답변] 인생은 이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잠시 머물렀다가 구름과 같이 없어져갑니다. 구름이 허공중에 둥실 떠 있다가 바람이 불면 흔적도 없어지듯, 인생살이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사대육신(四大肉身)의 형상을 이루고 있지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지 못하면 그만 내생(來生)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든 시비(是非)를 다 놓아 버리고 자신의 심성(心性)을 밝히는 이 일을 해야, 한 생(生)을 허비하지 않고 값지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생(來生)이 목전(目前)에 곧 닥쳐오는데 이 귀중한 시간을 시비장단(是非長短)에 다 허비해 버린다면, 또 윤회(輪廻)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다행히 내생(來生)에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게 된다면 또 모르겠지만, 사람몸을 받는다는 것도 지극히 어렵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 온갖 '좋다', '나쁘다'하는 분별(分別)과 '나'라는 허세를 다 벗어 버려야 합니다. 흔히들 돈 있다고 허세 부리고 쥐꼬리만한 벼슬한다고 허세 부리는데, 그것이 다 소용 없는 법입니다. 세간(世間)의 백 년이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사(自己事)를 밝히는 이 일을 행하는 것만이 내생(來生)의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인생 백 년이 길다고 해야 절집 참선수행(參禪修行)의 한나절 한가로움에 미치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여러 대중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자기의 심성(心性)을 밝히는 이 선수행(禪修行)을 꾸준히 하여 남은 생을 값지게 보내기 바랍니다. (*)
[질문] 어떻게 해야 영가를 잘 천도(薦度) 할 수 있겠습니까?
[답변] 천도(薦度)라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한평생 살다가 숨이 떨어지면, 이 세상에는 한 줌 재나 무덤만 남고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영혼은, 죽어서 몸뚱이가 없어졌는데도 죽었다는 관념이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우리가 잠이 들어 꿈을 꾸면 현실과 똑같이 가족이나 친구들과 희노애락(喜怒哀樂)하게 되는데, 꿈을 꾸고 있을 당시에는 꿈이라는 관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몸만 여의었다는 것뿐이지, 그 영식(靈識)은 죽었다는 관념이 없고 생시(生時)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정, 물질, 원한, 명예 등에 집착하여 거기에 머물러 있습니다. 영가는 몸뚱이를 벗어 버리면 의지할 데가 없는 고로 우주 공간에 생각대로 주(住)하는 것입니다.
영가가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애정과 탐착에 붙잡혀 있으면, 다음 생을 받지 못하고 중음신(中陰神)이 되어, 우주 공간에 몇백년을 머물러 있게 됩니다. 중음신으로 외롭게 떠돌면 영가 자신이 괴롭고, 따라서 집안이 편안할 리가 없습니다.
부처님법에 먼저 가신 조상 영가의 천도재(薦度齋)를 올려 드리고 사람이 죽으면 49재(四十九齋)를 올려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가가 염불(念佛)과 독경(讀經)소리, 부처님의 고귀한 진리의 법문을 듣고서 환상에서 깨어나, 모든 애착과 집착을 훨훨 털어 버리고, 다음 생(生)의 좋은 인연을 찾아 태어나라는 뜻에서 재를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이 재(齋)는 공양(供養)이 근본입니다. 삼보전(三寶前)에 공양 올리는 그 공덕(功德)으로 영가에게 큰 복이 되어 좋은 곳에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재를 지낼 때, 수행하는 스님네를 많이 모셔서 대중공양을 올렸습니다. 많은 대중 스님을 청하는 뜻은 그 가운데 최상승(最上乘)의 진리를 깨달은 분도 있고, 대승(大乘)의 진리를 깨달은 분도 있고, 소승(小乘)의 진리를 깨달은 분도 있어서, 그 분들에게 올리는 공양이야말로 한량없는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를 올려드린다고 해서 영가가 다 극락세계에 가고 인도환생(人道還生)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가는 이 고준(高峻)한 진리의 법문을 한 마디만 바로 듣게 되면 그대로 부처님 국토에 태어나지만, 아무리 좋은 법문을 해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절에서 영가 천도를 할 때 으레 금강경(金剛經)을 독송하는데, 만약 독송하는 이가 이 경(經)의 심오한 뜻을 모르고 껍데기 문자만 읽어 내려간다면 영가가 감화를 받지 못합니다. 그 뜻을 바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가를 천도하는 데는 법력(法力) 있는 선지식 스님네의 고준한 법문 한 마디가 천도의 묘방(妙方)이 됩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이는 아무리 염불을 하고 경을 외워 보아야 자신이 그 심오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고로, 상대(相對)의 영가 또한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세계에 눈이 열린 이만이, 한 마디 법문을 하고 한 마디 독경을 하는 데서 영가가 그 뜻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는 법입니다. (*)
[질문] '인신난득(人身難得)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큰스님] 인신난득(人身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생(生)을 받고, 받아오는 가운데 한량없는 죄업(罪業)을 지어온 탓에, 사람몸을 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 사람몸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불법(佛法) 만나기 어렵고, 불법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최상승(最上乘)의 진리를 아는 선지식(善知識)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비유하건대, 깊은 바다 속에서 눈 먼 거북이가 수백 년 만에 한 번씩 쉬러 올라오는데 그때, 그 가없는 바다 위에 큰 나무토막이 떠 있는 것을 우연히 만날 수 있는 것과도 같고 또, 사선천(四禪天)에서 바늘을 하나 떨어뜨려 지구상에 제일 작은 겨자씨에 꽂히는 것과 같이 선지식을 만나기가 어렵습니다.
이 지구상에 여러 나라가 있지만 불법(佛法)이 유포되어 있는 곳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설사 부처님 법이 유포되어 있다해도, 십중팔구(十中八九)는 외도(外道)에 떨어져 있거나, 소승법(小乘法)에 머물러 있는 수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불법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이 소승(小乘)의 불법을 만나 가지고는, 불법의 진수(眞髓)를 알 수가 없고, 십만 팔천 리 밖에서 껍데기 불법만 믿다가 일생을 보내 버리게 됩니다.
부처님 정법(正法)을 만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정법(正法)이란 무엇이냐 하면, 모든 부처님과 역대 도인들께서 비밀히 전하여 오신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정법은 이 법을 아는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는 인연그릇을 갖추어야 배울 수 있고, 익힐 수 있고, 통할 수 있는 법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인신(人身)을 받고, 불법(佛法)을 만나고, 선지식(善知識)을 만나는, 참으로 얻기 어려운 이 세 가지 인연을 얻은 것은 세세생생(世世生生) 이 진리의 법에 좋은 인연을 심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모든 분들은 이 지중한 인연을 소중히 여겨 금생에는 결정코 이 일을 밝히고서 이 몸뚱이를 버려야겠다는 작심(作心)을 하고, 한시라도 정진(精進)의 고삐를 늦추지 말기 바랍니다. (*)
[질문] "생각하면서 의심하고, 의심하면서 생각하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하다 보면 의리선(意理禪)이 되는 것 아닙니까?
[답변] 아닙니다. "생각하면서 의심하고, 의심하면서 생각하라"고 할 때의 '생각하라'는 말의 의미는, 사량(思量)으로 화두를 헤아리거나 이치로 따지라는 것이 아니라, 화두 전체를 분명하게 챙기라는 말입니다.
"조사(祖師)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뜰 앞에 잣나무니라."
"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없느니라."
이러한 화두 제목이 분명하면서 의심이 쭉 지속되면 다시 화두를 챙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화두가 희미해지고 혼침(昏沈)이 오고 이생각 저생각이 떠오르면 화두를 다시 챙겨야 합니다. 분명하게 챙겨야 다른 번뇌, 망상, 혼침이 달려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화두를 챙기고 의심을 짓고, 챙기고 의심을 짓고, 그렇게 계속 애쓰다 보면 진의심(眞疑心)이 발동걸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한 번 화두를 챙겨들면 며칠이고 몇 달이고 흐르게 되므로 굳이 다시 챙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렇게만 화두를 든다면 공부를 바로 지어가는 것입니다. (*)
[질문] 스님께서는 화두를 목전(目前)에 두라고 하셨는데, 목전에 둔 화두 있고 화두 드는 사람 따로 있고 하면 둘로 갈라지는 것 아닙니까?
[답변] '화두를 목전에 두라'는 말은 '온 정신을 목전에다 두라'는 말입니다. 목전에 두는 것이 숙달되면 앉아 있을 때뿐만 아니라, 걸어갈 때나, 누울 때나, 일할 때나, 어느 때건 화두 한생각 모으기가 쉽습니다. 그렇지 않고 생각을 머리에 두면 상기(上氣)되어 참선을 할 수가 없고 또, 시야를 다른 데 두면 견문(見聞, 보고 듣는 데)에 끄달려 화두 한 생각 모으기가 어렵습니다. (*)
[질문] '의심하고 생각하라'고 하시는데, 그러면 의심과 생각은 어떻게 다릅니까?
[답변] 생각은 화두 전체를 떠올리는 것을 말하고, 의심은 그 내막의 뜻을 몰라서 그것을 알고자 간절히 의심하는 것입니다.
"달마 대사께서 서역에서 동토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묻는데, 조주 선사께서 "뜰 앞에 잣나무니라." 하셨습니다.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는데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한 화두 전체가 분명해야 하고, 분명한 그 가운데 '어째서 뜰 앞에 잣나무라 했는고?'하는 의심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그 두 가지가 상반(相伴)되지 않으면 수레의 외바퀴와 같이 아무 활로가 없습니다. 제목이 분명하지 않고 의심만 지으면 나중에는 멍하게 되어 아무 것도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생기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화두 제목만 있고 의심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부에 힘이 없고 아무 진척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고인들께서도 의심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도 크다고 하셨습니다. (*)
[질문] 예전 선지식들께서는 화두를 주실 때, 상대방의 근기(根機)에 맞게끔 고려해 주셨던 것 같은데, 요즈음 스님들께서는 상대방에 대한 고려 없이 그냥 천편일률적으로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마치 기계화되어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의심도 크게 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각자에게 맞지 않는 화두도 많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니 스님, 옛날 그 천 칠백 공안 외에 의심이 굉장히 많이 갈 수 있는 것으로 상대방의 근기에 맞게끔 다른 것을 창조해 주시면 안 되는지, 그것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답변] 의심이 나고 안나고, 의심의 강도가 강하고 약하고 하는 것의 원인을 화두에서 찾는 것은 분별입니다. 선지식이 참학자(參學者)에게 천칠백 공안 중의 한 화두를 주나, 의심을 물어서 한 마디 던져주나, 상대방이 얼마만큼 온전히 받아들이고 십분 신(信)을 갖고 참구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공부가 "화두"나 "선지식이 이것 저것 일러주는 것"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도 고인들께서 납자(衲子)를 제접(提接)하셨던 것과 같이, 참학인이 와서 부처님의 근본대의(根本大意)를 묻는다든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묻는다든가 하면, 응당 한마디 일러줍니다. 그러면 그것을 참구의 분(分)으로 삼으면 되는데, 그러한 자세로 공부하려는 이가 없거든요. 다들 "화두 타러 왔습니다" 하니 계제따라 화두를 일러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참구하는 데 있어서 의심이 일고 일지 않고의 문제는, 일러주는 화두가 어떤 화두인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만큼 신심(信心)있게 받아들이고 실답게 참구하느냐, 여기에 있는 것이지 절대 화두에 비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질문] 화두 드는 방법에서, 스님께서는 화두를 눈앞 2m 아래에다 두라고 하시는데, 상단전(上丹田)이나 하단전(下丹田)에 두면 안 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답변] 화두를 머리에다 두게 되면, 애를 써서 노력하는 중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기(氣)가 위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머리가 천근 만근이 되어 화두 참구하는 데 큰 장애가 와 버립니다. 그러나 힘을 다 놓아버린 상태에서 눈 앞 2미터 아래에다 화두를 두고 생각으로만 참구하면, 상기(上氣)되지 않고 편안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단전(下丹田)에다 화두를 두고 참구하라고 가르치는데, 물론 앉아 있을 때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24시간 앉아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 화두 참구라는 것은 사위의(四威儀) 가운데 무르익어져야 일념(一念)이 지속될 수 있는 것이지, 사위의 가운데 익어지지 않으면 일념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일념이 지속되지 않으면 깨달음이 올 수가 없는 법입니다. 그러한 고로 일상의 모든 생활 가운데서 화두를 목전(目前)에다 두고 참구하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숙달만 되면 아주 간편하고 좋습니다. (*)
[질문]화두를 참구하다가 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
[큰스님] 분별은 아무 쓸 곳이 없습니다. 일념삼매에 푹 빠져서 죽었다 살아나야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 소용 없습니다.
"어떤 것이 참나던고?"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하루에 천번 만번 밀어주다 보면 참의심이 시동이 걸립니다. 참의심이 시동이 걸리면 화두 한 생각이 흐르는 물과 같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밤낮으로 흘러갑니다. 그때는 앉아 있어도 밤인지 낮인지도 모르고, 사물을 봐도 보는 감각이 없고, 소리를 들어도 들은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홀연히 사물을 보는 찰나, 소리를 듣는 찰나에 화두가 박살이 납니다. 그러면 억만년 전 자기의 참모습이 척 드러납니다. 이렇게 일념삼매에 푹 빠져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나야 해결이 되는 것이지, 그러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니 분별은 다 놓고, 일념삼매가 되도록 하루에 의심을 천번 만번 밀어주세요. (*)
[질문]중생의 잘못된 전도망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큰스님] "참나"를 바로 보지 못함으로써 비롯된, "나"라는 잘못된 한 생각 착각으로 인해서, 그로 좇아 8만4천 번뇌가 형성된 것입니다.
[질문]간화선은 어디서 유래한 것입니까?
[답변] 부처님 당시의 삼처전심(三處傳心, 부처님께서 꽃을 들어보이셨고, 자리의 반을 나누어 앉으셨고,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이신 기연)이 그대로 화두이고 간화선의 원류가 됩니다.
보리달마의 9년 면벽가풍, 육조 혜능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을 거쳐, 육조 문하에서 남악회향과 청원행사 선사가 양대산맥을 이루어 그로 좇아 오종(五宗)이 형성되고 그로부터 백천 공안이 벌어졌습니다.
[질문] 법신변사, 여래선, 향상일구 등 깨달음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변] 삼매(三昧)의 심천(深淺, 깊고 얕음)에 따라서 법신변사가 열릴 수도 있고, 여래선이 열릴 수도 있고, 향상일구가 열릴 수도 있습니다. 옛 도인들도 "의심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도 크다" 했거든요. 의심의 심천에 따라서 깨달음의 차등이 있는 것입니다.
[질문]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에서 종교인의 참다운 자세는 무엇입니까?
[큰스님] 내 종교, 네 종교 우열을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앞으로 모든 종교인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세계평화를 위해 어떠한 역할을 할 것인가 하는 데 초점을 맞춰 함께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질문]요즘 젊은 사람들이 많이 힘들어 하는데,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큰스님]본래 중생은 높은 것만 취하고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하는데, 그 생각을 버려야 됩니다. 자기의 직분에 맞춰서 성실하게 하다 보면 자연히 좋아지고, 높이 올라가고, 좋은 자리가 오는 것이지, 대번에 좋은 자리가 오는 게 아니고, 대번에 부와 출세가 오는 게 아닙니다. 건실하고 성실하게 노력하는 끝에 그게 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건실한 생활이 자리를 잡으려면 생활속에 참선을 꾸준히 해야 됩니다. 그렇게 건실하게 하다 보면 직장에서도 (지위가) 더 올라가고, 만 사람이 우리 회사에 오라고 하고, 그리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세의 제일 근본은 바른 행동과 바른 용심,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직업에 어디 귀천이 있습니까. 성실하게 하다 보면 서로 좋은 자리로 이끌어주고 그러는 것이지요.
[질문] 요즘 경제가 어렵다 보니 직장인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직장인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할까요?
[큰스님] 경제가 안 좋은데 집안을 이끌어 나가려니 스트레스가 없을 수가 없지요. 그러나 어려울 때일수록 자기의 심성을 계발하는 참선 수양에 집중할 것 같으면, 스트레스가 봄바람에 눈녹듯이 서서히 녹아지고 마음에 안정을 가져오거든요. 또, 물질이 풍요하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게 아닙니다. 그 용심(用心) 여하에 달린 것이지요.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풍족해도 '부족하다'고 하거든요. 부족하지만 '족하다' 생각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온 가정이 화목해지고 자녀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됩니다. 그러니 어려울수록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에 몰두하기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질문]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국가나 기업, 어떤 조직이든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한데, 선의 입장에서 지도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큰스님] 기업가나 정치인들이나 모든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은 '지혜(智慧)'를 가져야 합니다. 지혜가 밝지 못하면 사업도 번창할 수 없고, 향상이 없어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없어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랫사람을 지도하고 거느릴 혜안(慧眼)이 부족하면 그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그래서 모든 지도자들에게 지혜를 밝히는 선 수행, '참나'를 찾는 선 수행을 꾸준히 연마하기를 권합니다. 선을 수행하면 마음의 번뇌의 구름이 제거되는 동시에 지혜가 밝아집니다.
옛 도인들도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빈한하게 사는 것은 지혜가 짧아서 그렇다." 하셨습니다. 이 밝은 지혜를 좇아 출세와 복이 다 오는 것입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은 선악을 가리지 못해 죄를 짓게 됩니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지혜가 밝으면, 만 사람에게 앞서는 선견지(先見智)의 안목으로 척척 지도하므로 착오가 없어져요. 모든 사람에게 앞서는 선도자(先導者)가 되고자 할진대, '참나'를 밝히는 선 수행을 연마하여 밝은 지혜의 눈을 갖춰야 합니다. 이것이 출세와 행복의 근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수좌] 정진 중에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자꾸 떠오릅니다.
[종정예하]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자꾸 떠오르게 된다. 죽음에 다다를수록 그런 생각이 더 심하게 떠오르는 법이다. 화두 정진에 열심에 몰두해라.
[학생] 어떻게 하면 (학과) 공부를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종정예하] 열심히 하면 된다. 다른 거 없고. 남들 1시간 할 때 너는 2시간 해라.
[수좌] 예하께서는 좌선할 때 화두를 2미터 앞에 두라고 하시는데, 걸어다닐 때도 2미터 앞에 화두를 둬야 합니까?
[종정예하] 아니다. 마음으로 하면 된다.
[질문] 한 철에도 깨칠 수 있습니까?
[종정예하] 그렇다. 일념만 지속되면 한 철에도 깨칠 수 있다.
[질문] 흔히들 조주의 무자(無字) 화두가 의심이 쉽게 일어나는 화두라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종정예하] 아니다.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질문] 남자의 정력 [精力] 이 없으면 깨치기 어려습니까?
[종정예하] 젊어서 혈기 왕성할 때 공부하면 더 잘되니 젊을 때 해야한다. 나이들면 혼침에 빠지기 쉽고 정진하기기 수월치 않다. 그렇지만 신심이 부족해서 그런거다. 신심이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다.
[질문] 신심이 있으면 나이가 70살 이라해도 깨칠 수 있습니까?
[종정예하] 그렇다. 신심이 근본이니 신심만 있으면 된다.
[질문] 지금 하는 화두에 의심이 일어나지 않는데, 다른 화두를 해야 합니까?
[종정예하] 참 의정이 발동 걸리라고 의심을 밀어주는 것이니, 다른 생각 하지말고 지금 하는 화두를 오매불망 의심을 해야 한다. 의심이 안 일어난다 해서 다른 화두를 한다고 하지 말고, 더 화두 의심을 밀어라. 그러면 참 의정이 일어난다.
[질문] 화두를 하다가 갑자기 다른 의심이 일어나는데 그게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종정예하] 아니다. 절대 그거 공부 아니구먼. 그것은 공부라고 할 수도 없고 오매불망 지금 하는 화두를 밀고 나가서, 가나 오나 앉으나 서나 일념삼매가 되어야 하는구먼.
[재가자] 관음기도나 지장기도 중에도 화두를 들어야 합니까?
[종정예하] 기도할 때는 일념으로 기도하고, 기도를 마치고 나면 화두를 해라.
[재가자]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종정예하] 정성껏 하기 위해서 그렇다.
[질문] 저는 의심이 잘 안 일어납니다. 어떻게 해야 의심이 잘 일어나겠습니까?
[종정예하] 조석으로 108배 하면서 부처님 전에 발원을 해라.
[질문] 의심 없이 화두를 이어 나가는 것도 화두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까?
[종정예하] 아니다. 화두는 의심이 생명이다. 의심이 없으면 깨달을 분(分)이 없다.
[질문] 근기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종정예하] 법을 받아 들일 수 있는 그릇이다. 작은 그릇, 중간 그릇, 큰 그릇, 더 큰 그릇이 있다. 그릇 만큼 법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질문] 그러면 육조 혜능 선사는 상근기라고 하던데요.
[종정예하] 그 분은 전생에 공부가 많이 되신 분이다.
[질문] 그러면 종정예하께서는 상근기시라, 향곡 선사께 화두를 받고 바로 공부가 잘 되셨겠네요.
[종정예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질문] 정진 중에 모기 때문에 신경이 쓰입니다. 모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종정예하] 혹 물리기도 하고 혹 쫓기도 하고. 화두삼매에 들면 상관이 없을 텐데...
[수좌] 화두에도 깊고 옅은 차이가 있습니까?
[종정예하] 있지.
[수좌] 저는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화두는 시시해서 못하겠습니다.
[종정예하] 그거 일등 화두구만.
[수좌] "덕산탁발화", "적양화적양화", "여인출정화", "일면불월면불" 이런 화두가 최고 화두 아닙니까?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화두는 좀 낮은 화두 아닙니까?
[종정예하] 똑같구마는. "부모미생전 본래면목" 화두도 바로 보기가 참 어렵구마는.
[수좌] 정진 중에 허리가 서지 않습니다. 잘 먹으면서 몸을 보해야 합니까?
[종정예하] 아니다. 자세만 한 번 바르게 길들이면(=정립되면) 된다.
[시자] 종정예하, 외계인이 있습니까?
[종정예하] 있지.
[시자] 종정예하께서 중생은 무한한 전생이 있다고 하셨는데, 무한한 전생이 지구 생명체에 한정된 것입니까, 아니면 전우주 생명체까지 포함한 것입니까?
[종정예하] 불가설 불가설이니라. 지구만이 지구가 아니라 우주에 무한한 지구가 있고, 지구 안에 무한한 우주가 있다.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시며) 별 중에 지구 아닌 별이 어디 있더냐?
[시자] 현대 과학자들은 빅뱅이론이라고 해서 큰 별이 폭발함으로써 그로 인해 우주가 생겼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종정예하] 아니다. 그건 뭘 몰라서 하는 소리다. 현대과학의 수준이 아직 그 까지는 안 된다.
[시자] 그러면 우주는 처음에 어떻게 생겼습니까?
[종정예하] 일체유심조 아니가.
[시자] 그러면 우주는 원래 처음부터 이런 상태였나요?
[종정예하] 처음부터 이 상태였느니라.
[시자] 종정예하, 과학계에서는 생명체가 진화해서 지금의 모양을 갖췄다는 진화론과, 누군가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는 창조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어느것이 맞습니까?
[종정예하] (웃으시면서) 형형색색아이가. 본시부터 사람은 사람 모양이었다. 유인원이 진화해서 사람이 됐다는것은 틀린 말이다.
[시자] 그럼 모든 만물은 원래 각자의 모양으로 존재해 왔습니까?
[종정예하] 그렇지, 형형색색이다. 말은 본시 말이었고, 개는 본시 개였느니라. 물속의 수 많은 만물들도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다 본시 각자의 모습으로 존재해 왔다. (나무를 가리키시며) 나무도 겉모습은 다들 비슷비슷하지만 분명히 다 각자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느냐.
[시자] 그럼 누군가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는 게 맞습니까?
[종정예하] (고개를 저으시며) 그것도 안 맞는 말이다. 누군가 만들었다는 것은 말짱 거짓말이다.
[시자] 그럼 우주만물은 누가 만든 게 아니라 스스로 원래부터 이렇게 각자의 모습으로 존재해 왔습니까?
[종정예하] 그렇다. 형형색색 아니가.
[폴니터교수] (눈사람을 가리키며) 저 눈사람도 성불했습니까?
[종정예하] 진묵겁 전에 성불했소.
(2011년 1월 1일 동화사에서 법당으로 걸어가던 중)
[질문]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를 모르니까, "하나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하는 의심이 잘 안 일어납니다. 일단 "하나"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종정예하] 그런 분별을 내지 말고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이렇게만 해라.
[시자] 깨닫게 되면 부처님과 같은 무한한 능력이 생긴다고 하는데, 그러면 영어도 잘하고 컴퓨터도 잘하게 됩니까?
[종정예하] (웃으시며) 이치를 아는 것과 익히는 것은 다르지.
[수좌] 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가르치는데, 큰스님께서는 '참나'를 말씀하시니, 혹시 '나'가 있는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정예하] '참나'란 그런 '나'가 아니라, 진리의 근원을 말하는 것이다.
[수좌] 화두를 목전에 둔다는 의미는 목전의 한 점에 집중하는 것입니까?
[종정예하] 아니다. 그냥 이 앞에다 두는 것이다.
[수좌] 화두를 든다는 것이 (화두 제목의) 글씨를 보는 것입니까?
[종정예하] 글씨를 보는 게 아니지. 화두는 의심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생각으로만 의심을 하는 것이다.
[수좌] '만법귀일 일귀하처' 화두를 할 때, 전제(=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는 중요하지 않고,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에 포인트를 맞추는 것입니까?
[종정예하] 그렇지.
[수좌] 하나가 돌아가는 곳이 분명히 있습니까?
[종정예하] 있지.
[수좌] 말할 때 화두 하기는 어려운데, 말은 가급적 안 해야 됩니까?
[종정예하] 본시 화두를 하면 말이 다 끊어진다.
[수좌] 일할 때 화두를 들면 일을 건성으로 하게 되는 게 맞습니까, 일을 더 잘하게 되는 게 맞습니까?
[종정예하] 화두라는 것은 동정(動靜)에 일여(一如)해야 한다. 걷고, 청소하고 할 때는 쉽지만, 서로 이야기 할 때 화두를 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수좌] 그럼, 이야기 할 때에도 화두를 들려고 노력해야 합니까?
[종정예하] 그렇지.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라는 뉘앙스)
[수좌] 이 공부를 성취하려면 큰 신심과 큰 용맹심을 갖춰야 되는데, 그러려면 발원을 해야 되지요?
[종정예하] 무한한 노력을 해야 된다.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수좌] 무한한 노력과 발원을 해야겠네요.
[종정예하] 그렇지.
[시자] (종정예하의 법문을 받아 쓰다가) 종정예하, 이럴 때도 화두를 들어야 합니까?
[종정예하] (웃으시며) 이 때는 화두 들기가 어려울 거야. 상상을 하면서 써야 되니.
[시자] 화두를 챙기다 보면, 법문을 정리한다든가 인터넷에 동영상을 올린다든가 하는 생각이 일어날 때가 있는데, 이때는 화두로 돌리는 것이 좋습니까, 생각을 실천하는 게 좋습니까?
[종정예하] 화두참구가 근본이 되어야지.
[수좌] 화두에 집중할수록 '나'라는 생각(아상)이 강하게 드러나는데요.
[종정예하] 그런 분별이 일체 없어야 된다. 간절히 화두 한 생각이 쭉 흘러가면 다른 생각은 일체 없게 된다.
[수좌] 그러니까, 간절하게 하면 화두 한 생각만 남게 됩니까?
[종정예하] 그렇지.
[시자] 항시 화두를 2미터 앞 아래에 두고 익혀야 합니까?
[종정예하] "2미터"라는 것은 좌선시에 바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앞에 두라"는 것은 행주좌와에 참구하기 위해서, "아래에 두라"는 것은 상기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수좌] 사시 공양 후에 잠깐 자는 것은 어떻습니까?
[종정예하] 그건 못 쓴다. 잠자는 시간 외에는 일체 잠자면 안 된다.
[재가자] 일반인들이 화두 참구를 하다보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지를 못하는 게 아닙니까?
[종정예하] 일할 때 화두 든다고 일을 등한시 하지 말고, 일할 때는 집중해서 착오없이 하고, 그 외의 시간에 가지가지 쓸데 없는 생각이나 TV, 한화잡담 등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열심히 화두를 참구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일할 때도 자연스럽게 화두가 들리는 때가 옵니다. 즉, 일상 생활을 직분에 충실하고, 나머지 시간 - 걸어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목욕하고, 쉬고 하는 가운데 가지가지 생각을 하지 말고 오로지 화두 참구에 전력할 것 같으면 마음의 지혜가 계발되어 직장에서 승진도 하게 되고, 더욱 더 잘 사는 국토가 될 것이고, 온 세계가 일가(一家)가 되어서 발전하고 평화가 오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도 농부도 정치인도 누구든지 참선 수행을 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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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학림사 오등선원 지대방 원문보기 글쓴이: 오등(五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