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민의 도전
역사를 고증하는 영화를 만드는 작업은 숙고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다. 기록을 해석하는 일이니 문장에 담긴 조사 하나도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그 뉘앙스는 천차만별이 된다. 더군다나 다큐가 아닌 극영화라면 어떤 이야기를 가저와 각색하고 장면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민의 무게는 상상도 하기 어렵다. 더욱이 수 없이 많은 글과 영상물을 통해 해석되고 재연된 이순신을 만들어내는 일은 엄청난 부담감과 책임이 동반되는 작업이다. 거기에 어떤 시기에 영화를 만들고 상영하는 가 역시 시대적 맥락을 함께 갖게 됨으로 단순히 역사극을 만들어내는 것을 넘어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어떤 것을 구현하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전쟁과 전투
영화의 주 배경이 되는 시점은 1592년 한산도 대첩이다. 전작인 명량보다 1597년, 즉 5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명량에서 보여주던 12척으로 기적을 일궈냈던 영웅의 심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한산은 수세에 몰린 조선 수군이 전황을 뒤집었는 가를 비추고 있다. 이미 배워온 역사적 사실을 통해 결과를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한산대첩의 스펙터클을 구현해 보여준들 감흥이 덜할지도 모른다. 한산은 영리하게도 이 놀라운 해전이 만들어지기 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설명하는데 영화에 3분에 2를 할애한다. 세작이 오가는 첩보전과 전략전술을 두고 벌어지는 갈등, 윗선에서 전달되는 위기로 상황을 몰고 가서 긴장감을 끓어 올린다. 전쟁은 전투만이 아니라, 명분과 실리가 어떻게 발생하고 사람의 몸과 마음을 흔들어 놓는 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벌어지는 최후의 격전은 그 지난했던 과정들을 상기하게 한다.
틈을 매우는 상상력
실제 구선의 설계도는 명확하게 남아있는 것은 없다. 몇몇 그림의 형태로 남아있긴 하지만 2층인지 3층인지, 내부 구조나 충파의 활용이나 화포 장전 방식 등 기록이 전무하다. 영화는 이점을 상상력을 동원해 역사적 빈틈을 매운다. 도입부에 사천해전에서 활약하는 구선과 초기 모델이 가진 약점을 보여주고 그것을 극복해 가는 과정 역시 이야기와 함께 빌드업한다. 학익진을 구현하는 장면 또한 압권이다. 마치 신비한 진법처럼 대단한 전력으로 묘사하지 않고 필요한 타이밍에 펼치는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사실에 기반한 고증에 영화적 각색을 더해 유연한 서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명량을 보완한 한산
명량의 패착은 두루뭉술한 캐릭터에 있었다. 복잡한 감정을 가진 이순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를 둘러싼 인물들을 단순화시키고 적군을 바보로 만들었다. 그 결과 위대한 아군은 승리하였지만 관객은 오그라드는 손발을 어쩌질 못했다. 속편인 한산은 많은 것이 변했다. 이순신을 연기하는 박해일은 거친 바다의 조류를 묵묵히 견디는 한산섬 같았다. 전작에서 소모되던 조연들 역시 캐릭터가 부여되어 이야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오브제처럼 활용한 것이 놀라운 변화다. 발포하라 같은 명령 한마디도 무겁게 느껴질 만큼 진중하고, 어떠한 동요와 혼란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순신을 그려냈다. 영화는 감정 대신 그가 쌓아 올리는 성벽으로 시선을 집중시킨다. 견내량 앞에 펼쳐진 학익진에 담긴 것은 승리에 대한 간절함과 동료에 대한 믿음, 불의에 맞서는 의가 만들어낸 성벽이 주인공인 동시에 명량에서 보여주지 못했던 서사를 계단처럼 높여가는 구조이기도 한 것이다.
물과 불의 대결
또 하나 주목할 포인트가 있다면 각 진영의 수장들이 서로 상반된 성격의 소유자라는 점이다. 왜군의 와키자카는 불처럼 뜨겁다. 정복과 승리에 대한 야욕으로 가득해 아군조차 사용될 도구로만 보고 사기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수하들의 목을 벤다. 반면에 조선군의 이순신은 그야 말로 물과 같다. 잔잔하고 무겁게 상황을 주시하고 다음을 준비한다. 뿜어내고 태우며 진격하는 와키자카를 상대하는 이순신은 맑은 호수처럼 전세를 담아낸다.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의 주장과 내세우는 전략들을 모두어 적재적소에 배치하려한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고요하게 버티는 이순신 덕본에 다른 인물들의 서사가 살아나는 지점도 무시할 수 없다. 구선의 새로운 새로운 면모를 드러낸 나대용, 적당히 비겁하고 이해타산적인 원균, 불의한 전쟁을 의로 막으려는 항왜 사헤에 등을 통해 영화가 한 인물의 일대기를 넘어 각자에게 전쟁과 정의는 어떤 의미를 갖는 가를 조망하고 있다.
여전히 아쉽다.
명량에서 한산이 나오기까지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170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지만 명량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영화였다. 장면이 붙지 않는 컷 분할과 과잉된 주인공과 소모되는 인물들 때문에 아쉬운 영화로 기억되었다. 그로부터 꽤 긴 시간이 흘러 다른 최민식에서 박해일로 이순신이 바뀌고 명량에서 거슬러 올라 한산으로 무대를 옮겼다. cg의 발달로 놀랍도록 실감 나는 해전이 연출되었고 섬처럼 어울리지 못했던 인물들 역시 감정선이 연결되어 연출적으로 훌륭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부분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그중 몇 가지를 말하자면 전투 장면을 포함한 어떤 장면도 쇼트 진행이 평이해서 전체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두 번째는 음악이다. 선체의 움직임과 포가 발사되는 사운드를 사실감 있게 표현했지만 과하게 들리는 금관악기 음악은 거슬리게 들린다. 거기에 많이 빠졌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덜 빠진 국뽕이 뒷맛을 쓰리게 한다.
칼이 아닌 거울
영화 속에서 이순신은 무엇과 싸워야 하나 대신 무엇을 지켜야 라는 가를 말한다.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 지금 우리에겐 칼을 들고 진격하는 장수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과 살아가는 터전을 투영하는 거울을 제시하는 이가 영웅이 아닐까 싶었다. 파도에 흔들리고 넘어질지언정 포기하고 주저앉지 않는다. 지금 거울 앞에 서 보시라 어제를 짊어지고 내일로 진격하는 오늘의 영웅은 거기 있다.
첫댓글 마지막 줄에서 큰 감동을 받고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 멋진말이네요
아쉬운부분은 분명한 작품이었으나
역사물의 특성상 결말을 관객들에게 다 오픈한상태에서 재미를 만들어내야하니 어려운부분인거같기도 합니다
크~~~멋진 후기 감사합니다. 글 마지막 줄이 내맘을 울컥하게 했어요♡ 감사해요^^
여윽시~~~ 소대가리님 리뷰는 언제나 감동입니다.
발포 명령에 답답할 정도로 진중한 이순신의 박해일이 전 좋았어요.
대사로 풀어내는것이 아니라 작전의 성공을 위해 어긋나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장군.
와키자카의 연기가 뛰어나 오히려 박해일이 조연처럼 보였다고는 하지만, 와키자카 원균등의 캐릭터로 더 믿음직한 우리 장군으로 돋보이기도 했다 라고 생각했네요.
스토리 빌드업 되는 지점까지 자칫 지루하다 할 수도 있었지만
단점을 보완해 나타난 복카이센이 흐트러짐 없는 학익진과 함께 뚜까 팰때의 쾌감을 위해 복무했다 생각합니다. ㅎㅎ
그럼에도 세작역의 두 배우는 좀 아쉬운감이 드는건.. ㅡ.,ㅡ
'어제를 짊어지고 내일로 진격하는 오늘의 영웅은 거기 있다.'라는 문구가 너무 멋있네요. ㅎㅎ
잘 읽었습니다.~~
아~!!!
배우들의 전작이 막 생각났다는 분들의 얘기를 들어서인가 저는
생각보다 그렇지 않던데요.
특히 나대용역 말이 있던데
전 약간 눈물도 나고
고정된 이미지를 조금 벗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바다 해 자를 쓴다는 박해일 배우는 바다와 잘 어울리네요. ㅎㅎ
극 영화 사극 중에 남한산성을 가장 인상 깊게 봐서 박해일의 사극에 대한 믿음이 좀 있어요. 그러고 보니 최종병기 활도 박해일이 주인공이네요. 사극과 어울리는 배우인가 봐요. 한번 보고싶네요 ^^
소대가리님 보고싶어요~
헤어질 결심과 맞물려 박해일 배우 연기를 계속 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 영화에 감독 자신만의 색을 얼마나 잘 입혀놨는지 궁금하네요..후기 잘 읽었어요~소대님 리뷰는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어 참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