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증조모님과 어머니
11월 22일 개양에 사는 장질녀가 카톡으로 아주 귀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러면서 우리 할머니 곁에 계신 할머니는 누구인지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나는 사진을 보는 순간 어머니와 외증조모님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 사진을 본 기억이 없다. 우리 집 사진 중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
오늘 질녀가 보내 준 사진은 1929년에 촬영된 사진으로 짐작된다.
어머니와 외증조모님 사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짐작컨대 ‘어머니께서는 젊었을 시절 이 사진을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못하고 깊숙이 간직하고 계시면서 시집올 때 홀로 남겨 둔 친정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몰래 꺼내보시고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 분명한 사진이다.’
그 당시만 해도 딸은 일단 시집을 가면 남의 집 사람으로 여겼던 시절이라 친정이야기를 입 밖으로 끄집어내기가 어려울 때다.
나는 이 사진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외가인 陜川李氏(합천이씨) 족보를 구해 외증조부와 외조부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 보았다.
외증조부의 함자는 이규선(李奎煽)이고 출생연도는 1857년 6월 8일생(음)인데 졸의 연도는 알 수 없었다. 외증조모님은 경주정씨로 출생연도는 1862년 이고, 졸의 년도는 1932년 5월 14일(71세)이다.
외조부의 함자는 이경호(李景鎬)이고 출생연도는 1890년 6월 17일생이고, 졸의 연도는 1919년 5월14일(30세)이다.
陜川李氏(합천이씨) 족보에 기록된 외조부의 독립운동 기록은
慷慨好義而己未獨立事死於獄中五月十四日三十歲卒(강개호의이기미독립사사어옥중오월십사일삼십세졸) : 불의를 보면 의기가 복받쳐 원통하고 슬프게 여기고 옳은 일을 보면 그것을 행하기를 좋아해 기미독립운동을 거사했다. 대구 옥중에서 1919년 5월 14일(음)에 돌아가셨는데 나이 30세였다.
1990년 8월 15일 建國勳章愛族章追敍(건국훈장애족장추서), 1994년 9월 8일 國立大田顯忠院合墳(국립대전현충원합분) 殉國先烈(순국선렬) 第2墓域(제2묘역)
외조모님은 연일정씨로서 1890년 1월 11일생이고, 졸의 연도는 1921년 2월 26일(32세)이다.
이렇게 사설을 길게 언급한 것은 그렇게 해야만 이 사진의 의미가 설명되어진다.
나의 외가는 그 당시 명문가였다. 재력도 있고 외조부 학식도 특출했다. 가정이 풍비박산이 나게 된 계기는 외조부께서 하동지역과 남해지역 독립운동 주동자가 되어 직접 태극기를 만들어 거사를 일으키신 데서 비롯되었다.
외조부께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대구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하던 중 고문에 의한 장출혈로 1919년 5월 14일 옥사를 했다. 운구는 독립군들이 직접 행상을 메고 대구에서 하동 고전면 성천리까지 왔는데 우천 시기여서 행상을 다섯 번이나 만들고 시간은 2주정도 걸렸다고 한다.
당시 나의 어머니는 6세, 이모 9세, 외조모님 30세, 외증조모님 57세였다. 외조모님은 충격으로 인해 2년 후에 돌아가셨다. 나이 32세였다.
졸지에 고아가 된 어린 손녀 두 명은 할머니가 길러 출가를 시켰다.
어머니께서는 16세에 결혼식을 올리고 한 해를 묶은 후 17세에 우리가문으로 시집을 오셨다.
아마 이 사진은 어머니를 시집보내기 전에 ‘할머니께서 정표를 남기기 의해 사진을 촬영하여 한 장씩 나눠가진 사진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내가 보고플 때면 이 사진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라는 의미도 숨어 있었을 테다.
1929년에 촬영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어머니 나이 16세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사진을 촬영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쉽지 않았을 때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을 하신 것을 보면 외증조모님도 여장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머니는 생전에 외증조모님 이야기를 가끔씩 들려주시곤 하셨지만 사진 이야기는 하신 적이 없으셨다.
나는 이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쓰면서 어머니의 17세 나이로 돌아가 어머니 입장이 되어 생각하니 눈물이 계속 나왔다.
철부지 17세의 아씨가 67세의 노인을 홀로 남겨두고 사진 한 장 가슴속에 품고 낯선 타향으로 시집올 때 얼마나 불안에 마음 조리었을까?
어머니께서 시집오고 난 4년 후에 외증조모님이 돌아가셨다.
나는 외증조모님 경주정씨 할머니야말로 위대한 한국 여인의 표상이라 생각된다.
아들을 독립투사로 길러 조국의 광복을 위해 바쳤고, 희생된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가산을 정리 해(논 14마지기 매각 : 첫 일곱 마지기는 도둑을 맞고, 다시 일곱 마지기를 매각하여) 장례를 치렀다.
고아로 남은 손녀 두 명을 정성껏 길러 출가시켰다.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역경으로 극복하신 분이다.
끝내 운명하신 날도 아들 옥사한 날과 같다. 제사가 한날이다. 마지막까지 어렵던 시절 손녀의 제참 부담을 배려했는지도 모르겠다.
훗날 어머니께서 이렇게 회상하신 적이 있다.
‘할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올 때 너무나 가슴이 아프니 오히려 눈물이 나지 않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