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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송 기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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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한 해만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사람의 깊이』의 출간에 마음 깊이 축하의 인사를 올립니다. 아울러 박두규 선생의 시집 출간에도 박수를 보냅니다.
저는 한국작가회의의 작가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해집니다. 그래도 믿을 것은 ‘작가들’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작가는 현대의 예언자이고, 오늘의 ‘지성과 양심’입니다. 그 표징의 하나로서, 임성용 시인은 “당선여”를 써서 대통령 당선자를 실랄하게 풍자했습니다.
당선녀
임 성 용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
여기서, 18대라는 서수를 씹팔때라고 읽는 것은
한글 경음화법칙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꾸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근혜를
당선인, 당선인이라고 부른다
선거법에는 분명히 당선자라고 명시되어 있다
놈 者자를 써서 당선자라고 하는 게 옳다
정권교체를 바란다는 의견광고를 낸 젊은 작가들을
선관위가 선거법위반으로 고발했는데
작가들의 성명서에도 박근혜를 당선인이라고 표현했다
언론에서도 그렇고 대학교수님, 정치평론가들도 그렇고
식당 아주머니, 슈퍼마켓 아저씨도 덩달아서 당선인이라고 한다
국회의원 당선자, 시장 당선자, 하물며 동네 이장도 당선자라고 하는데
왜 하필이면 대통령만 당선인인가
나머지는 3인칭으로 그냥 그런 놈이고
대통령은 보통명사를 특별대명사로 승격시킨 사람이란 말인가
제 입으로 여성대통령을 누누히 강조했으므로
그렇다면 그분의 고귀한 뜻을 어여삐 여겨
진심으로 지극정성으로 받들어 모신다면
당선인도 당선자도 가당치가 않다
정확히 말해서 당선녀라고 불러야한다
인구에 회자 되는 지하철녀, 된장녀, 개똥녀는 가고
이제 바야흐로 당선녀의 시대가 오지 않았는가
호부호형도 못하는 서출내기가 아닌 이상
당선녀를 당선녀로 소리 높혀 앙망할지어다
어떤 족속들이 당선녀를 당 선녀로 한 글자 띄어 써서
당선녀가 당의 선녀가 되는 걸 어찌 바라마지 않겠는가
행여, 열두 살 초등학교 내 아들놈처럼 짧은 혀로
대통령을 자꾸 대통년, 대통년이라고 해선 절대 안 된다.
저는 정치비평가나 사회비평가나, 역사비평가가 아닙니다. 다만 철학적 인간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대선에 대한 평가는 전적으로 내 ‘인간화철학’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사람됨의 잣대를 ‘자의식’에 둡니다. 그러나 사람다움은 아무래도 올바른 ‘역사의식’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을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보려하지 않습니다. 나는 본디 “사람다워야 사람이냐, 사람이면 사람이지.”를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나 지난 ‘대선’이라는 반역사적인 사건은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로 되돌아가게 해서, 제 인간학을 다시 고쳐 쓰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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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잊어버리고 있다가도, 반역사의 결정적 사건을 겪으면 마침내 ‘사람’이란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사람이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이것은 사람이 역사를 만들어간다는 전제에서도 그렇지만,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을 평가하는 데에서도 가장 근본 되는 물음입니다.
저는 사람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다만 ‘사람다움’이라는 자리에서 사람을 물어보려 합니다. 사람임과 사람다움의 관계에서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다워야 사람인가”를 물으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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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사람다움’에 있다고 했을 때, 사람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사람의 특성은 단순히 ‘지능’에 있지 않고, ‘자의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자의식이란, 주체성을 가지고 모든 역사적 상황을 꿰뚫어보고 어떤 것이 사람다운 것인가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하여 정성을 쏟는 구실을 합니다. 이처럼 자의식은 저절로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으로 넘어갑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우리는 진정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세계를 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은 자의식을 넘어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만이 물을 수 있습니다. .
그래서 나는 사람다움의 소이는 사회의식, 역사의식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은 하나의 ‘속물’로서,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부르기가 곤란합니다. ‘독재자의 딸’(타임지의 표지 말)을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은 아마도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람들의 역사의식을 가장 강렬하게 깨우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역사적 사건들’입니다. 최근에 5.18운동과 같은 엄청난 민주화운동을 겪었던 국민들이 어째서 독재정권의 세습을 막지 못하고, 다시 우리의 역사를 수난의 시대로 되돌려놓았을까요. 저는 그 까닭을 역사의식을 가지지 못해서 ‘사람다운 사람’을 망각한 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역사의식이 없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데 어째서 자신의 사람됨을 포기했을까요?
말이 난 김에 한 가지 더 물어야 할 게 있습니다. 철권통치에 항거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 했던 ‘문인’이 어째서 그 통치자의 딸을 지지하게 되었을까요. 그의 사상적 소영웅심이 한국문학사에 끼칠 치욕을 차마 잊지는 않았을 터, 우리는 그런 비인간적인 행태를 어떻게 이해하라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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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지난날 결핵요양소를 운영하면서, 사람은 어디까지 사람이고, 어디까지 짐승인가?”를 묻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대답을 나름대로 찾았습니다. “내가 세운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말고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만나자. 사람답지 않아도 사람은 사람이 아닌가.” 그 때야 저에겐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2. 그런데 이번에 우리의 역사에서 진정한 민주화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안고 있었던 정권교체가 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 책임은 우선 반역사적인 유권자들에게 있는 게 확실합니다. 독재체제의 세습을 고착시킨 이들을 ‘사람답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들을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3. 그리스도교나 불교에 따르면, 사람은 모두 ‘존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면 다 사람이다.”는 주장보다, “사람다워야 사람이다.”는 주장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가 신과 같은 궁극적 실재를 지배이데올로기로 삼아서 사람을 억누르고 못살게 구는 지배수단으로 악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신은 새로운 신의 탄생을 위해서 죽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신’이 새로 탄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은 새로운 신의 탄생을 위해서였습니다. 사르트르는 신의 있고 없음에 관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신일 때, 그런 신은 사정없이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말하는 것은 결국 사람을 말하자는 것이라는 뜻에서 ‘신학은 인간학이다’는 말을, 우리가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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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히 사람을 가리켜 ‘이성인’(homo sapiens)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은 이성을 통해서 우주의 원리를 파악하고 자기를 인식하고 모든 것을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성만으로써 사람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성주의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그 특징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철학’에서는, 오늘의 비인간적인 ‘일차원의 세계’는 이성이 그 비판기능을 잃어버리는, 이른바 ‘이성의 부식화’(腐蝕化)로 하여 나타난 현상이므로, 사람다운 세계는 이성의 비판기능을 회복하는 데서 가능하다고 진단했습니다. 이것을 호르크하이머는 ‘이성의 복권’(復權)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이성의 비판기능만 잃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정권교체는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2. 그러나 사람은 이성만의 존재는 아닙니다. 사람은 의욕하고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행동인’(homo faber)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의 위대함은 생각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행동하고 창조하는데 있습니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생각하는 것은 행동의 한 기능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은 본디 행동하기 위해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지성은 행동의 틀 속에서 빚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올바른 행동만 했더라도 우리의 역사를 독재정권의 사슬에서 끊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현대에 이르러 “이성의 사람은 이제 해체되었다.”는 이른바 ‘인간해체론’이 나온 것입니다. 대선 때 보면, 우리나라에는 ‘해체된 사람’이 어찌 그리 많은지, 유권자 52% 가량이 인간의식상실증에 걸려 있는 듯합니다.
3. 한편 사람은 자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을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서 끊임없이 내던져가는 탈(脫)-향(向)의 삶을 삽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실존’이라고 부릅니다. 실존철학에서는 사람은 주체성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주체성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제가 20대 때 두해 반 동안 폐결핵으로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서 맨 먼저 외친 소리가 있습니다. “나는 나다. 내 대신 그 누구도 나를 살아주지 않는다. 내가 나를 산다.”
주체의식이나 주인의식이 없이 어떻게 “나라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우리는 나라의 주인이다.”고 자처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라면 주체를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사람의 구원이 있습니다.
지난 대선의 결과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침묵해야 합니다. 그 결과가 혹여 하느님의 뜻과 섭리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하느님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그런 하느님은 이미 역사에서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은 우리 민족이 얼마나 잘못했기에, 5천년의 역사를 민족수난의 역사로 잇게 하고, 근래 100년 가깝게 온갖 학대와 고난을 참혹하게 겪게 하는 것도 모자라, 나 같은 80대에게서 마지막 희망마저 앗아갔습니다. 정말 잔인하고 무자비한 신입니다. 이제 신은 사람의 역사에서 결코 정당화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일찍이 신정론(神正論)을 포기하고 인정론(人正論)을 제시했습니다. 사람은 제 역사에 대해서 정당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 대답은 ‘아니다’입니다. 사람도 자신의 비인간적인 역사에 대해서 정당화되지 못합니다. 지난 대선이 그 대표적인 실증입니다.
4. 사람은 사회와 역사 안의 존재이므로, 사회가 악의 구조로 짜여 있거나, 독재지배권력의 횡포가 사람을 억누르고 짓밟을 적에, 역사의식이 강력한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고 그 비인간화현상에 맞서 들고 일어납니다.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는 저절로 사회개혁운동이나 역사변혁운동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사회개혁과 역사변혁에 참여하는 것, 그것은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역사적 사명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반항인’으로 나섭니다.
까뮈는 사람의 본질을 ‘반항’에 두고서,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고 선언했습니다.(『반항인』머릿말) 사람의 존재의의가 ‘반항’에 있다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말했다. “맨 처음에 대듦이 있었다.” 사람의 존재의의를 ‘대듦’(저항)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불의와 부정에, 독재권력과 경제착취에, 반통일의 수구세력에 대들 줄 모르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민주보수집단에 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찬성, 지지한 사람들은 분명히 ‘민주’를 모르는 역사의 ‘반동분자’입니다.
5. ‘놀이’의 관점에 따르면, 사람을 ‘호모 루덴스’(homo rudens) 곧 ‘놀이하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Huizinger) 사람의 바탕은 ‘놀이’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하지 않고 노는 것은 진정한 놀이가 아닙니다. 일하는 것도 놀이의 하나입니다. 일은 놀이로써 해야 합니다. 강제노동 따위는 결코 놀이일 수 없습니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노동을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놀이로써 노동하는 자리를 일컫습니다. 모든 경제적인 착취나 문화적인 소외는 사람을 노동의 노예로 보고, 놀이의 사람으로 보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자본주의체제에서는 사람은 끝내 ‘노동의 노예’로 살고, ‘놀이의 사람’으로 살지 못합니다. 해고노동자나 비정규직노동자들은 반(反)놀이의 자본주의체제가 빚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이 체제를 바꿔보겠다는 정치이념을 거부한 사람들은, 사람을 노동의 노예로만 본 것이지, ‘놀이의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일할 권리가 있습니다. 아니 놀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호이징거의 ‘놀이’는 ‘노닐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을 ‘하느님과 함께 노니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폐허 속에서도 사자의 꿈을 꾸는 것, 파멸을 당해도 패배를 모르는 자리, 한없이 자유스러운 경지, 그것이 하느님과 함께 노니는 삶입니다. 동학의 ‘생천주’(生天主)는 ‘유천주’(遊天主)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함께 노니는 일은 사람과 함께 노니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서 홍익인간(弘益人間)이나 사인여사천(事人如事天)으로 나타났습니다. 박근혜정권이 하늘을 섬기듯이 사람(국민)을 섬길 수 있을까요. 사람들과 함께 노닐려고 할까요. 사람을 먼저 생각할까요. 어림없을 것을 알면서도, 그런 세상을 바라는 마음의 반동이 그런 질문을 낳게 합니다.
나는 나이 먹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노닐려고 했다. 아무런 평가 없이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만나려고 했습니다. 사람은 ‘사람답기’ 이전에 먼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 생각은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사람 같지 않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도 사람인가 싶습니다. 사람은 분명히 사람인데,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역시 사람은 사람다워야지.” 합니다. 나는 예수처럼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기란 불가능하겠구나 싶습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사람인가요. 아니면 ‘사람이니까’ 사람인가요? 제겐 다시 ‘화두’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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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2012년 12월 19일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을 보고, 아무래도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의 명제를 고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수도 그랬습니다. 권력자들이나 지배자들에게 “독사의 새끼들아, 저주를 받으라.”고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사람답지 않는 놈들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바닥사람들(소외계층) 곧 민중은 무조건 ‘사람’으로 받들고 섬겼습니다. 그러나 바닥사람들이라고 모두 ‘사람다운’ 사람일까요? 나는 여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바닥사람들 가운데서도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소외계층(민중)이라고 무조건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1970-80년대 한국의 민중신학에서는, 한완상이 민중을 ‘대자적 민중’ 곧 깬 민중과 ‘즉자적 민중’ 곧 깨지 못한 민중으로 구별했을 때, “민중이면 민중이지, 굳이 민중을 구별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서, 한완상의 주장에 깊이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돌이켜 보면 한완상의 민중구별은, 나의「인간화신학」에서 보면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깨지 못한 민중, 특히 역사의식이 없는 민중은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민중이 역사의 주체이다.”라는 말은 옳지만, 모든 민중이 다 그렇다고 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사람다운 행위에서 의미를 지니고, 사람다움은 사람의 존재에 뜻을 매깁니다. 사람은 ‘인간화’에서 존재의미가 결정됩니다. 사람은 사람다워야 사람이란 말입니다. 설혹 사람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사람다움’의 뜻을 내장하고 있습니다.
나는 「민중신학」을 나의 「인간화신학」으로 높였을 때, 민중을 달리 정의 했습니다. 민중이란 단순히 소외계층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계층과 관계없이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들”이고, 따라서 비(非)민중은 “사람답게 살고 있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사람다움을 바탕으로 민중을 규정해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민중이고 비민중이고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저절로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사람답지 않으면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나는, 피지배소외계층을 아무런 평가 없이, 무조건 사람으로 받아들였던 예수와는 같지 않게 된 셈이다. 그러나 예수도 상류지배계층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독설과 저주를 퍼부으면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을 보면, 예수 역시 “사람은 다 사람이지” 하면서도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하는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습니다. 이제 예수의 인간학을 비판적으로 수정해야 하겠습니다.
사람다움은 예수처럼 계층의 문제에 국한할 것이 못됩니다. 가졌든 못 가졌든, 배웠든 못 배웠든, 계층과 상관없이 사람다워야 사람이라는 주장을 버릴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보이는 사람됨의 품격! 그 절반을 넘는 52%는 언제나 사람다워질까요.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자신을 독재체제의 노예로 자처하는 사람들, 그를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다워야 사람이지요.
나는 독재자의 딸이 어째서 대통령 후보로 나왔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사람으로서 감히 대통령 후보로 나올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정신과전문의나 심층심리학자들의 해석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저 생각으로는, 나라의 기둥이 될 인재들을 그렇게 많이 잔인하게 죽인 철권통치자인 아버지의 반민족적, 비인간적, 반역사적 범죄를 두고두고 속죄하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칩거하면서, 참회의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기는커녕 뻔뻔하게도 한국의 역사에 대통령 후보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이것이 가당이나 합니까? 저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나올 바에야 ‘명분’이라도 내세웠으면 조금은 낫지 않았겠습니까. 아버지 박정희의 비인간적인 온갖 작태를 국민들에게 깊이 사죄하고, 아버지가 저지른 범죄를 조금이라도 속죄하기 위해서 대통령으로 출마했다는 성명이라도 냈다면, 나름 얼굴을 세우는 몸짓이라도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사람치고 그럴 수 있습니까. 뻔뻔스럽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어디 정치학자나 역사학자가 나서서 말 좀 해보시라. 천지신명이여! 어디 말 좀 해보시라!
저는 이것 하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독재자의 딸’ 박근혜는 인간화철학에서 보아 결코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사람들도 결코 ‘사람다운 사람’은 못되는 게 분명합니다. 박근혜가 조직한 “인수위원회”를 보십시오. 모두 24사람인데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로 짜여있다는 보도입니다. 그가 끌고 갈 정치체제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가운데 대학교수가 18명이나 끼었다는 사실입니다. ‘대학교수?’, 그들에게는 사람다움의 바탕인 역사의식이 없는 걸까요. 그들은 지식을 팔아먹는 ‘지식인’일지 몰라도, 역사의식을 지닌 ‘지성인’이라곤 할 수 없습니다. ‘행동하는 지성과 양심’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나는 이것을 작가들에게 기대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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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움’이든, ‘그냥 사람’이든 중요한 것은,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삶이 결정합니다. 사람은 곧 삶입니다. 사람과 삶은 같은 뜻의 말입니다. ‘사람’을 줄이면 ‘삶’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물으려면 삶을 물으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이 어떤 것이든 궁극에서는 ‘인간화’를 지향합니다. 그래서 나는 삶이란 ‘인간화 실현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사람으로 살자’는 것이고, ‘사람답게 살자’는 것입니다. 사람다운 세상을 펼치자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이 되는 삶의 기본자세는 성실함과 진실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정치를 하든, 장사를 하든, 가르치든 배우든, 육체노동을 하든, 농사를 짓든, 고기를 잡든, 성직자의 일을 하든, 시민단체에서 일하든, 교수 노릇을 하든, 글을 쓰는 작가이든, 무슨 일을 하든, 사람은 사람을 삽니다. 그러나 사람답게 살적에 진정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는 존재임으로 이왕 사람으로 살 바에야,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질풍노도처럼 생동성이 넘쳐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힘차게 살아가는 데 우리의 존재의미가 있습니다. 니체의 ‘사나이’(살아 있는 사람, 초인)처럼,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사람다운 사람을 끝내 긍정하고야 말겠다는 원동력을 가지고 ‘땅’에 충실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진정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없습니다. 앙드레 말로는『왕도(王都)로 가는 길』에서 “죽음이란 없다. 내가 죽을 뿐이다.”고 갈파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죽음은 삶의 표현이고 삶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나이처럼 살고, 거인처럼 죽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에게 죽음을 선포하면서, 찬란한 삶을 구가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다운 삶을 실현할 때 가능합니다.
사람의 삶은 비인간적인 실체에 사정없이 대들어 싸워 이기는 과정입니다. 그것이 반민주세력이든 독재정권이든 사회 불의이든 경제착취이든 종교의 횡포이든 거기에 맞서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헤밍웨이의 “바다의 노인”처럼 우리는 파멸을 당할망정 패배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패배의 잣대는 무엇일까요. 어떤 일을 했던,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답지 못한 짓거리, 그것은 삶의 최대의 패배입니다. 대선의 패배는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된 선택으로 하여 독재정권을 세습시켰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고무스러운 것은, “사람이 먼저다”를 선택한 사람다운 사람이 48%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일성서(구역성서)에 “의인 열 사람만 있어도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그보다 140만 배가 많은 의인 1400만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에 넘칩니다. 어두운 밤이 너무 길었으니, 밝은 새날이 어찌 빨리 오지 않겠습니까. 80을 두 해나 넘긴 나 같은 사람은 사람다운 세상이 오는 ‘그날’을 보지 못할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앞으로 5년은 저의 생애 마지막 활동기가 될 터인데, 제게는 한없이 불행한 일입니다. 앞으로의 제 일은, 사람다운 사람들이 사람답지 못한 사람들에게 역사의식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함석헌은「우리가 내세우는 것」에서 역설했습니다. “씨은 민(民)의 뜻인데, 우리자신을 모든 역사적 죄악에서 해방시키고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격을 스스로 닦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낸 말입니다.” “씨은 스스로가 역사의 주체인 것을 믿고, 그 자람과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악과 싸우는 것에 제 사명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함석헌은 말합니다. “맨 처음에 ‘대듦’이 있었다.” ‘대듦’을 모르는 사람은 ‘사람다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함석헌은 비폭력 저항을 강조하는 평화주의자였지만, 그가 대중강연에서 흘린 말도 한번 새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나라를 치러온다면, 나라고 부지깽이라도 들고 나가 싸우지 않겠는가.”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모든 정권을 손아귀에 넣었을 때,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외친 함석헌의 말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예언자의 ‘들 소리’(野聲)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그 말은 곧 “생각하지 않는 백성은 죽을 것이다”는 것인데, 그것이 이번 대선에서 실증되었습니다. 「결국 사람」,「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한 2012년 12월 치 달력 뒷면에 적혀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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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운 세상을 이루는 길에는 왕도(王道)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싸워가는 길 자체가 왕도일 뿐입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는 힘쓰는 사람이 빼앗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답게 ‘그날’이 올 때까지 힘써 싸우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이것은 희망이 아니라 실상이며,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증거이다.
순천작가회의의 작가 여러분, 우리가 기댈 곳은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글이, 역사를 바꾸는 예언자의 구실을 똑똑히 할 수 있는 ‘광야의 소리’가 되기를, 두 손 모읍니다.
저의 바람이 당장에 나타났습니다. 문인 20여명이 어제(1. 18) 손홍규 작가를 소환한 남대문경찰서 앞에 모여, “우리는 정권교체를 희망했던 이유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는 주제의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문학은 소외된 자의 절망에 공감하려는 노력인 동시에, 버려진 자의 고통과 동행하려는 의지”라며, “부패하고 부정한 정책으로 인해 고통 받는 모든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고, 패권주의와 개발논리에 더렵혀진 삶의 터전으로 들어가고자 합니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들은 “그 어떤 책임 또한 [‘정권교체’를 알렸던 젊은 문인] 137명과 더불어 삶과 생명의 위기를 절감하는 시인과 소설가 모두가 함께 지고자 합니다.”고 밝혔습니다. (한겨레 2013. 1. 18) ‘대선’ 이래 최초로 독재정권에 단호히 맞서려는 문인들의 저항입니다. 그 누구도 잠잠할 때, 문인들이 ‘예언자의 소리와 행동’으로 일어난 것입니다. 문인들이야말로 우리의 빛이며 희망입니다. (2013. 1. 19)
첫댓글 누가 이 글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셨다고 해서 올립니다. 500원 ~~
아주 귀중한 자료를 챙겨주신 경숙씨, 100원 더 해서 600원 보냅니다.
ㅋ 오지다
샘뿔연구소 카페로 이동해갑니다. 난 400원 더 보태서 900원~~ 인심이 이 정도는 돼야 인호씨 안 그래요? ㅎㅎ
ㅎㅎ 와~~ 이것도 돈이 되겠어요 돈이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