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은 우리에게 친숙한 글자지만, 우리가 한글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은 여전히 많지 않다. 아래의 문제를 풀어보자. 첫째, 언문과 훈민정음, 한글은 비슷하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이 세 가지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부터 순서대로 고른다면 아래 보기 중 몇 번이 답일까? 그리고 두 번째, 소리를 받아 적는데 가장 정확한 글자부터 순서대로 고른다면 아래의 보기 중 몇 번이 답일까?
<보기 : ①언문→훈민정음→한글, ②훈민정음→언문→한글, ③언문=훈민정음→한글>
위의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있는 한국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첫 번째 문제의 답은 ①번이고 두 번째 문제의 답은 ②번이다.
언문(諺文)은 일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훈민정음을 낮춰 부르던 말이 아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우리의 말글을 세종대왕이 새롭게 정비한 뒤 직접 붙인 이름이고 훈민정음보다 먼저 만들어졌다. 세종대왕은 언문을 창제(創製)한 것이 아닌 신제(新制)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혹자는 언문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나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글 학자들은 모방이 아닌 독창적인 창제로 본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한반도 고유의 글자가 언문의 기원이라는 증거도 있다. 언문은 1443년에 만들어졌으며 자음 16자, 모음 11자를 합쳐 모두 27자로 추정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훈민정음은 자음과 모음을 합치면 28자인데, 27자의 언문을 수정 및 보완한 것으로서 1446년에 해례본으로 공식 출판되었다. 지금의 한글은 1910년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24자로 축소된 것이다.
세종대왕이 언문을 만든 이유는 우리 고유의 글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말과 중국의 글자가 서로 달라서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컨대, 세종대왕 이전에는 한자에 대한 표준음이 명확하지 않아서 하나의 한자가 여러 가지로 발음되기 일쑤였다. 일반 백성도 한자를 제대로 읽고 발음을 통일할 수 있도록 만든 최초의 문자가 언문이었고, 훈민정음은 언문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었다. 세종은 당시의 동북아 공용 문자였던 한자와 한글의 병용을 원했기 때문에 훈민정음 반포 이후에도 궁중의 문서는 한자 중심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권위 있는 한국학 석학들은 한국어를 잘하려면 한글 전용이 아니라 한자와 한문교육을 같이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한자음의 정확한 발음을 위해 만들어졌던 훈민정음은 오늘날 어떤 언어의 소리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글자로 인정받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인 찌아찌아족이 자국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고 있으며, 아프리카의 피그미족도 사라져 가는 자신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 한글 문자를 사용하기로 했다. 앞으로도 훈민정음은 문자가 없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문자 체계를 가진 나라들이 자신의 언어를 지키고 문맹률을 낮추는데 계속 활용될 것이다.
훈민정음은 발음이라는 실용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융합이라는 정신적인 가치로서 한류의 뿌리와도 연결되어 있다. 훈민정음(한글)의 모든 글자는 천(天), 지(地), 인(人)의 삼원론에 입각해 있다. 또, 자음과 모음의 두 가지로 구성된 글자들은 많아도 초성, 중성, 종성의 세 가지로 분해할 수 있는 글자 체계는 훈민정음밖에 없다. 삼원론, 혹은 삼분법은 우리나라 고유의 가치관이며, 오늘날 세계가 열광하는 한류의 주요 코드는 삼원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원론이란 이 세상에는 선도 있고 악도 있지만, 동시에 선악이 중첩된 제3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상 체계를 의미한다. 서양의 사고 체계가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는 이분법 체계라면 한국의 전통 사상은 물질과 정신의 통합적 측면을 강조하는 삼분법, 또는 삼원론 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삼원론 체계는 하늘(환인), 땅(환웅), 사람(단군)의 세 주인공이 힘을 합쳐 세상을 만들었다는 ‘단군 신화’로부터 시작되어 삼신할미, 삼재, 삼족오, 고스톱, 삼세판과 같은 3수 문화로 우리의 생활 곳곳에 깃들어 있으며, 오늘날에는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은 ‘오징어 게임’이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처럼 선악의 대립을 초월적으로 극복하는 한류 콘텐츠의 핵심 코드로 이어지고 있다.
세종대왕이 한글과 한자를 조화롭게 사용하여 한국어를 더 풍성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 오늘날 문자가 없는 다른 민족들의 문화를 살리는 데 활용되고 있는 것처럼, 또한 세상을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 조화와 통합으로 이해했던 우리 민족의 사고방식이 오늘날 한류 콘텐츠로 재탄생하여 세계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세종대왕의 후손인 우리들은 앞으로도 전통문화에 내재된 K-code를 올바르게 이해함으로써 문화로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나 역시 뜻있는 사람들과 힘을 합쳐 훈민정음의 정신을 살리고 한류 콘텐츠를 확산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생각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정교한 후기 올려주셔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