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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내리는 강 /안행덕 / 서평 마경덕
안행덕 시집『비 내리는 江』서평 (2014년 세종출판사)
詩의 파원(波源), 탐색과 성찰의 시간
마경덕(시인)
닫힌 창으로 빗소리가 스민다. 유리창에 닿는 순간 빗물은 미끄러지고 소리는 날아오른다. 귀를 열고 가슴으로 자욱하게 내려앉는다. 미세한 틈을 파고드는 소리는 집요하다. 비가 그치면 빗물은 곧 마르겠지만 가슴으로 착지한 소리는 오래도록 마르지 않는다.
빗방울에 졸음을 씻어내는 나뭇잎들, 가로등 불빛에 드러난 빗줄기, 주춤주춤 물러서는 골목의 어둠, 습기에 젖어가는 허공, 빗물에 발등이 젖는 밤거리……
소리에 업혀 집안으로 들어선 바깥들로 집안 내부까지 촉촉한 밤이다. 빗소리의 높낮이에 따라 바람의 강도와 나무들의 흔들림까지 감지된다. 보지 않고서도 보이는 풍경이 방울방울 가슴에 맺힌다. 그동안 눈으로 익힌 체험 때문이다. 보는 것과 듣는 것에서 그친다면 소리는 죽는다. 생생한 느낌을 채록할 때 소리는 살아남는다.
인류가 생긴 이래 언어는 지역에 따라 발달해 왔다. 사람의 발성기관은 수십 개의 다른 소리를 낼 수 있지만 소리란 의미를 가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무한 공간에 흩어진 언어를 조합하고 창조해내는 시인들, 언어의 진화에 일조를 한 시인의 가슴엔 얼마나 많은 파문이 고여 있을까.
파동을 전달하는 물질은 매질이다. 지진파는 땅이 매질이고 수면파의 매질은 물, 소리는 공기가 매질이다. 공기가 없는 우주에 나가서는 옆 사람과 이야기를 할 수 없다고 한다. 진동이 처음 시작된 곳, 그렇다면 詩의 파원(波源)은 어디일까. 감동과 전율을 일으키는 파동, 시인은 그 파동의 매질이 詩라고 믿는다.
시인은 기억의 창고에서 내부의 풍경을 꺼내 백지(白紙)에 진술한다. 온갖 잡동사니가 운집한 기억의 창고는 불빛이 흐린 다락방이나 버려둔 것이 생각나 문득 문을 열게 되는 벽장 같은 것이다. 시인은 선택한 사물의 내면을 파고들어 통로를 열고 대화를 주고받는다. 포착된 존재를 관찰하고 분석하며 추상적인 생각을 끄집어내 실제의 문장으로 발화시킨다. 유연한 사고, 새로운 상상력, 시간의 경험들은 시적 화자와 연결되어 성찰의 계기를 얻기도 한다. 언어로 태어난 글자들, 시집은 곧 ‘시의 집’인 셈이다.
안행덕 시인은 흘러간 시간을 현재로 끌어내어 새로운 감각으로 기억을 재구성한다. 대상을 향한 작법(作法), 즉 흘러간 것을 복원하고 그것을 현재의 삶과 연결 짓는 시인의 태도는 주도면밀하다. 과거와 현재를 결속시켜 시를 끌어가는 시적 호흡이 힘차다. 언어의 질감이 조밀한 것도 체험에서 우러난 치밀함이 배어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작품을 통해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간다.
오랜만에 들른 친정집 건넌방
굳이 지난날 말하지 않아도
오래된 반닫이에서 양반가家 규범이 흘러나온다
보상화형에 제비초리 모양의 경첩
간결하고 절제된 선이 단아해서 친근하다
언뜻 투박한 겉모양 퉁명스럽게 보이기도 하지만
검은 무쇠 경첩 사이마다 나뭇결 사이마다
어머니 손때를 그대로 새겨 놓은 듯
은은한 무늬가 되어 반백 년 세월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주제넘은 욕심 버린 지 오래라는 듯
방 한쪽 벽에 기댄 채 다소곳이 눈 내리깔고 있다
세상의 모든 문, 다 열려도
반만큼은 굳이 열 수 없다는 저 고집
수줍은 듯 입 다문 자물통에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규방 처녀처럼
은밀한 비밀 한둘쯤 남몰래 감춰두고 싶은 여인 같다
무엇이든 믿음이 가는 내 어머니 여기 계시다
생의 고비마다 덕지덕지 찌든 가난
눈물 자국처럼 얼룩져도
아리고 아픈 속 반만은 접어두고
언제나 속내를 다 드러내는 일 없는 여인
과장과 허식은 모른다는 듯 수수하다
—「반닫이」전문
곡선이 느껴지는 기억과 모서리가 날카로운 기억이 있다.「반닫이」는 두 가지의 기억이 중첩되어있다. 시인은 반닫이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불러낸다. 한쪽 면을 여닫는 반닫이는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믿음이 가는 어머니와 같다. 생의 고비마다 눈물자국 얼룩져도 아린 속 반은 접어둔 속 깊은 모성(母性)이다.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보관하는 반닫이는 말 그대로 반만 여닫게 만들어졌다. 옷가지는 물론 제기처럼 무거운 내용물과 서책, 귀금속 등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해 견고하게 제작되고 견고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철재 장석 중 경첩은 가구 몸체와 문판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이 견고함은 고집과 이어진다. 시인은 선이 단아한 제비초리 모양의 경첩에서 강직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발견한다. 시인의 의식에 내재한 체험이 반닫이를 통해 드러난다. 인간의 관계는 언어를 통해 재현되므로 포괄적인 의미의 담론은 인간의 모든 언어행위와 이로 인해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를 포괄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안행덕 시인의 시적 담론은 ‘사물과 인간의 조화’이다. 사물에서 얻어낸 개별적인 경험, 즉 사물의 속성을 시편 곳곳에서 합리적으로 풀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좁은 골목, 트럭 한 대
조비비듯 서둘러 빠져나가는데
누구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가보다
희뿌연 흙먼지로 꽁무니를 감추고
골목길 모퉁이로 얼른 사라진다
방금 버려진 세간살이 몇 개
휘청거리는 흙먼지에 감았던 눈을 뜨고
모퉁이로 사라지는 이삿짐 트럭을 바라본다
전신주 아래 버려진 저 고달픈 상처
가난을 물고 뜯은 흔적이 선명한 사기그릇 몇 개
아무렇게나 포개진 그릇, 통증처럼 이가 빠져있다
버려진 상처를 달래 주는지 서로 볼을 부빈다
둥글게 빈 밥사발
오래전 내가 파놓은 묘혈(墓穴) 같은데
별일 아니라는 듯 텅 빈 그릇에 눈부시게 채워진 햇살
내 시선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평생 주인의 밥상을 지켰을 저 빈 밥그릇
버려진 운명을 원망도 없이
하얀 여백에 쌀밥처럼 햇살을 가득 담고
고스란히 식탁에 오를 것 같다
—「이사 가는 날」전문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 재상 범려의 말에서 유래된 고사성어 토사구팽(兎死狗烹), 실컷 부려먹다가 일이 끝나면 돌보지 않고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정(世情)을 비유해 이르는 말이다. 누군가 이사를 하면서 전신주 아래 버린 사기그릇 몇 개는 이가 빠져있다. 안행덕 시인은 ‘버림받은’ 사물을 향한 일관된 응시와 연민으로 인간의 속성과 삶의 통점을 짚어낸다. 타의에 의해 지나온 시간과 결별하는 일은 고통이 따른다. 전신주 아래 버려진 ‘이가 빠진’ 사기그릇은 화자의 감정과 동일시되어 고달픈 상처로 나타난다. 화자와 무관한 객관적 존재도 화자의 주관적 해석에 의해 관련을 맺게 되는 것이다. 상처를 은폐하려고 좁은 골목을 조비비듯 빠져나가는 트럭은 흔히 볼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조가 마음대로 비벼지지 않아 조급하고 초초하다는 ‘조비비다’는 조를 손바닥으로 비비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마치 쓸모없어 헌 신짝처럼 버려서 미안하다는 몸짓인양 느껴진다. 그것은 ‘버리는’ 것도 ‘버림받은’ 것 못잖게 부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시인은 버려진 상처에 눈부신 햇살을 채워 넣는다. 누적된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이 시인의 몫인 것이다.
자갈치 축제마당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
왁자지껄 인파로 인산인해다
축제마당에 빼놓을 수 없는
걸쭉한 입담 각설이타령
북적이는 인파에 밀리며
겨우 한자리 차지한 사람들
시끄러운 축제
요란한 장사꾼 말(言) 잔치가 화려하다
돈 돈 돈······
돈을 달고 다니는 전어는 불안하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며 전어만 찾는다
어항 속 전어는 언제 잡혀 나갈까
장사꾼 눈치만 살피며
짠물에 풀어내는 슬픈 눈물이 있다
좁은 어항 속 지느러미 흔들며 요동칠 때마다
반짝이는 은빛 비늘 은전처럼 쌓인다
—「전어」전문
‘대가리 하나에 깨가 서말’이라는 전어, 서남해안 수심 30m 이내 얕은 곳까지 오가는 근해성 전어는 여름 동안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난바다 외양(外洋)에서 지내다가 10월경부터 이듬해 봄까지 바다와 민물이 합류하는 조류가 거센 수역으로 돌아온다. 전어가 북상하는 시기가 오면 ‘전어 굽는 고소한 냄새에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온다’는 전어 시즌이 온다. 이때 제철을 만난 전어 주산지는 미식가들로 북적거린다. 전어의 배 쪽은 은백색이라 은전(銀錢)처럼 눈이 부시다. 맛이 좋아 전어를 사는 사람이 돈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전어(錢魚)라고 한다는 유래도 있다. 전어와 관련된 행사들이 다채롭게 펼쳐지는 전어축제, 걸쭉한 입담 각설이타령까지 등장해 시끌벅적 축제는 무르익는다. 전어를 팔아 한 몫 보려는 상술에 돈(錢)을 달고 다니는 전어는 불안하다. 어항 속 전어는 언제 잡혀 나갈지 장사꾼 눈치만 살피며 짜디짠 눈물을 풀어놓는다. 빽빽한 어항 속에서 불안한 지느러미를 흔들며 요동칠 때마다 반짝이는 은빛비늘이 은전처럼 쌓인다. 약육강식의 세상, 전어의 목숨 값은 맛으로 계산되고 상인의 주머니는 두둑해진다. 시인은 수조에 갇힌「전어」를 통해 ‘억압받는’ 약자의 ‘고통’을 보여준다. 접시에 진열되는 약자의 살점은 인간의 미각을 부추기는 ‘음식’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 관계는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여서 죄책감 없이 누구나 당연히 받아들인다. 그들은 신이 인간의 삶을 위해 지어놓은 제물일 뿐이다. 신이 베풀어 준 특권을 누리는 인간들, 화려한 축제 뒤에 숨겨진 전어의 슬픔을 시인은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바람 부는 날에는 차를 마시고
비가 오는 날에는 술을 마시며
세상 이치 거스르지 않고 살아온 사람
바람풍자에 벌레충이 왜 들어 있는지 몰랐지
태풍이 지나간 제 몸을 보고서 놀란 사람
불혹을 겨우 넘긴 나이
뼈에든 바람과 싸우는 저 사내
아침마다 비탈진 등산로에서
힘없이 흔들거리는 왼쪽 팔을
오른손으로 붙잡고 바람풍자를 그리며
한 발짝 뗄 때마다 위태롭다
예고 없는 바람 앞에 무너진 사람
오늘도 바람을 잡고
바람풍을 아시나요
물음표를 던지며 바람풍자(字)를 그리는 사람
—「바람풍(風)자를 아시나요」전문
이 세상을 다스리는 지배자, 완벽하게 지음 받은 인간도 예기치 못한 바람을 맞는다. 몸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세상의 ‘대부분의 편’에서 살아온 사람에겐 불행은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바람風에 벌레蟲이 들어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사내는 바람의 표적이 되었다. 한창인 불혹의 나이에 사내는 몸을 갉아먹는 바람과 싸우고 있다. ‘중풍(中風)’ 혹은 ‘풍(風)’이라고 부르는 바람은 혈기가 왕성한 사람도 쓰러뜨려 제물로 삼는다. 뇌혈관이 막히는 뇌경색과 뇌혈관의 파열로 뇌 조직 내부로 혈액이 유출되는 뇌출혈이 발생하면 혀가 굳고 손발이 굳는다. 바람의 포로가 되어 어눌한 말과 거동이 불편한 장애를 평생 안고 살아야한다. 어느 날 몸을 향해 달려든 바람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風이다. 예정된 궤도를 돌고 돌아야 하는 지루한 싸움이 시작되고 바람의 반경은 확대되어 주변까지 피해를 입힌다. 타인의 도움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 또 누군가는 바람의 시중을 들어야하고 바람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적잖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하다. 바람이 보낸 예고, 전조증상을 가볍게 여긴 사람들은 뒤늦게 땅을 치지만 글자 속에 박힌 벌레충처럼 바람은 몸속에 박혀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다. 시인은 묻는다. 바람풍을 아시나요? 그 바람 속에 무서운 벌레가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다. 이렇듯 생의 모서리는 얼마나 많은 것일까? 건강한 삶을 열망하는 시인은 뒤섞인 ‘삶과 죽음’을 ‘이쪽과 저쪽’으로 확연하게 배열하고 있다.
길을 가다 모퉁이를 만나면
불안이 먼저 내 앞을 가로막는다
보이지 않는 저쪽에 무슨 음모 있을지,
철조망을 뚫고 월경해야 하는 난민의 심정으로
낯선 모퉁이를 돌아가는 동안 심장은 쿵쿵거린다
가슴 깊이 묻어둔 생의 빌밀 문서라도 들킨 양
길 잃은 고양이처럼 두리번거린다.
살면서 모퉁이 앞에 서보지 않은 사람 있을까
생의 골목마다 돌아선 그 사람 등짝 같은 모퉁이
늘 나를 안달 나게 하는 비밀스러운 어둑한 저쪽
바람 등지고 바람을 쫓는 이 간절함
막막하고 아득함이라니
살면서 몇 번이나 돌았을까? 고비 고비 돌 때마다
세상은 늘 어둠과 빛 사이를 방황하게 하고
비릿한 어둠을 날것으로 먹으며 생의 등고선을 넘나들 때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 들으며
나는 또 불안한 모퉁이를 돌다 보면 어느새 환해지는 길
달력 한 장 넘기듯 생의 한 모퉁이 또 돌아간다
—「모퉁이 앞에 서면」전문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에는 ‘불안’이 숨어있다. 전철에 버려진 커다란 가방, 출처를 알 수 없는 음식, 병명이 나오지 않는 질병…, 이것들은 인체에 치명적인 독(毒)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체를 밝혀내기 전까진 의문은 증폭된다. 어둑한 저쪽, 불안을 안고 모퉁이를 돌아야하는 지점, 시적 화자는 예기치 못한 생의 모퉁이 앞에서 철조망을 뚫고 월경해야 하는 난민의 심정으로 서있다. 여기서 ‘어둑한 저쪽’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未知)의 공간이다.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모여 있는 곳은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어 삶의 모서리에 부딪혀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어둠은 죄악이 은폐하기 좋은 곳이다. 화자는 조심조심 달력 한 장을 넘기듯 생의 한 모퉁이 돌아간다. 바람을 등지고 또 바람을 좇아가는 삶의 아이러니에 누군가 삶은 희극이라고 했던가. 그 모퉁이를 무사히 넘기면 또 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어 가슴을 쓸어내리며 또 걸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개인적 취향과 선택된 미학적 개념을 근거로 시는 각각의 옷을 입는다. 시인은 언어의 고리를 단단히 엮으며 불안한 이 시대를 한 걸음 한 걸음 진지하게 나아간다.
아! 살겠다
금방 버무린 김치 한입에
그녀는 변명처럼 입맛을 다신다
음양의 조화를 안다는 듯
무 배추 푸르게 땅심을 자랑하는데
요절낼 속내를 감춘 그녀
요리조리 살피는 척 알찬 놈 골라
단번에 쓰러트리고
조자룡 창도 검도 아닌 부엌칼
열십자로 휘둘러 조각을 낸다
무엇이 그녀를 부추기는지
피도 못 흘리고 아파하는 늑골에 굵은 소금
사정없이 뿌리고 물고문을 시작한다.
기절해 축 늘어진 그에게 뿌린 화끈한 고춧가루에
자백도 못 하고 숨을 거두니
영하의 냉장실에 안치를 시켜놓고
드디어 완전무장 해제를 하는 그녀
김장을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아이고, 죽겠다는 소리 수백 번
그를 다섯 번 죽여 놓고
이제는 살겠다, 한다
—「배추 죽이기」전문
「배추 죽이기」는 말의 재미를 한껏 살린 작품이다. 결말이 빤한 일방적인 싸움 앞에서 칼을 휘두르며 수백 번 지레 죽겠다고 야단이다. 그를 잘 죽여야만 그녀가 살 수 있다. 고된 노동 앞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칼자루를 쥔 자의 응징은 야속하고 매정해서 뿌리를 잘라 숨통을 끊고 그것도 모자라 늑골마다 소금을 뿌려 풀을 죽인다. 시적 화자는 ‘생사’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다가선다. 이 땅의 여인들에게 주어진 ‘노동’은 피해갈 수 없는 과제이다. 사물의 속성을 묘사하고 깊이를 담아내는데 주력한 그녀의 시편들은 비바람에 나무들이 나이테를 늘려가듯 삶의 연륜이 묻어난다. 들뜨지 않고 차분하게 사물을 관조하는 시작법은 비교적 안정을 거두고 있다. 그것은 습작의 기간을 오래전에 넘어온 시인의 ‘시적 관록’이다. 시인이 지향하는 고지를 향해 달려가는 일에 멈춤이 있으랴. 수없이 완성된 풍경에 닿을 수 있도록 명징한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표현한 시인은 나태함에 소금을 치는 일도 잊지 않는다. 삶을 조명하는 진지한 태도는「비둘기의 입몰(入沒)」에서도 잘 드러난다.
해질녘 발소리 죽이고 산 아래로 내려오는 어둠
조붓한 산길 모퉁이 작은 새들 어둠에 쫓기어
일제히 나뭇잎 사이로 파고든다
기쁜 소식 급히 전하려다 어둠에 이마를 받혔는지
산비둘기 한 마리
회전하는 바람과 공중전을 하고 그대로 떨어진다
날지도 못하고 창백한 몸짓으로
잦아드는 가녀린 움직임
봄이 오기 전, 떠나버린 짝을 원망함인가
따뜻한 가슴을 기억해 두려 함인가
천천히 감기는 슬픈 동공
허공처럼 가볍게 누워 어둠처럼 적막하다
저무는 저녁놀이 실루엣처럼 황홀한데
점점 어둠의 빛깔로 변해가는 죽음
푸른 소식 전하려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지
날아오를 듯 꺾인 날개가 움찔한다.
아직도 전하지 못한 메시지 남아 있는지
가녀린 날개 가늘게 떨고 있다
—「비둘기의 입몰(入沒)」전문
어둠은 소리가 없다. 그 어둠에 쫓긴 새들이 둥지로 날아드는 시간,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완강한 바람에 새가 부딪혀 추락한다. 공중을 지배하는 것은 바람이다. 산의 정기(精氣)를 물려받은 산비둘기조차 회오리에 휘말린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이 공중을 장악하고 그 힘에 밀려 추락한 산비둘기의 죽음은 수없이 박차고 날아오르던 지상이었다. 허공은 어떤 죽음도 품지 않는다. ‘날개’라는 말에는 ‘비상과 추락’이 들어있어 날아오른 높이만큼 추락의 강도는 높아진다. 새의 장지(葬地)는 결국 하늘이 아닌 바닥인 것이다.「비둘기의 입몰(入沒)」은 황홀한 저녁놀이 번지는 시점이다. ‘아름다움의 뒤편’에 이렇게 ‘천천히 감기는 슬픈 동공’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때로는 소리 없는 침묵에 목이 조일 때가 있다. 산비둘기의 죽음을 지켜보는 시적 화자도 생의 가녀린 날개를 떨고 있다. 어둠은 모든 것을 덮는다.
서편 하늘에 하얀 낮달이 떠있다
어머니 산소를 내려오면서
눈이 흐려진 탓인지 하늘도 희붐하고
서쪽 하늘에 걸린 낮달도 희미하다
너무 얇아 작은 바람에도 지워질 것 같다
빛나는 가문에 동분서주 바쁜 지아비 그늘
언제나 말없이 조용해도
자식들 가려운 곳 가야 할 길
잘도 짚어 주시던 어머니
조용히 머리 숙인 수도자 같은
지금은 산그늘에 잠드신 내 어머니 같다
하얗게 늙어 윤기 없고
흰나비처럼 애잔하고 바람처럼 가볍던 내 어머니
세모시 하얀 적삼에 조용한 미소로
서쪽 하늘에 떠있는 하얀 낮달
누가 낮달이 지는 걸 본 일 있는가
—「낮달을 보며」전문
태양빛에 가려 하늘 귀퉁이에 창백하게 떠있는 낮달, 마치 낙관을 찍어놓은 듯 하늘에 귀속해있다.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는 달은 저장한 햇빛을 반사하여 밤에 밝은 빛을 낸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평균거리는 38만 4400㎞,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지만 낮달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밀물과 썰물로 해면의 높이가 변하는 조석(潮汐), 그 원인은 주로 지구에 가장 가까운 달이 바닷물에 미치는 인력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저 낮달이 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서쪽은 해가 지는 곳, 많은 이름들이 잠시 머물렀다가 일몰이 되었다. 지아비 그늘에 묻혀 살던 지상의 낮달들. 떠난 후에도 자식이 그리워 낮달로 떠있다. 잠시 썰물처럼 물러섰다가 밀물처럼 밀려오는 애틋함이 저 낮달에게 있다. 시인에게는 모든 생명체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인식된다. 세모시 하얀 적삼의 소박한 낮달은 산그늘에 잠드신 우리들의 어머니를 닮았다.
고창 선운사 대웅전 뒤뜰에 동백꽃 필 때면
전국의 난다 긴다 하는 처사님 보살님들
관광버스 비좁도록 선운사에 모이는데
법당에 부처는 보는 둥 마는 둥
너른 마당을 가로질러 뒤뜰로 달려간다
춘동백 먼저 보겠다고 몰려드는
보살님 등쌀에
법당에 부처님 안절부절못한다
고 고운 꽃잎들 바람날까
가부좌 튼 무릎이
일어설까 앉을까 하루에도 몇 번을 들썩인다
대웅전 법당 뒤뜰에 핀 동백
부처가 떡 버티고 지키면 뭘 하나
예쁘다 예쁘다
저마다 비밀스러운 속내 감추고
애먼 동백꽃만 팔리고 있는데
—「선운사 동백」전문
봄바람이 스치면 창백한 봄은 입술에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일어난다. 가부좌를 튼 선운사도 꽃기운에 등 떠밀려 일어서고 사방팔방에서 몰려든 보살님들 법당 부처는 보는 둥 마는 둥 너른 마당을 가로질러 뒤뜰로 달려가 동백을 한 아름 안고 간다. 부처는 외롭고 애먼 동백꽃만 분주하다. 시 한 편으로 유명세를 탄 ‘동백’이 ‘부처’인 셈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잃고, 그것마저도 모르고 살아가는가. 정작 소중한 것들은 뒤편에 밀려나고 헛된 것들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소유욕으로 삶을 출발한 사람들, 청맹과니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봄은 유혹의 계절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눈이 멀어 살아야할까. ‘눈을 똑 바로 뜨고 살라’고 아름다운「선운사 동백」이 죽비로 어깨를 내리친다. ‘돌무덤’을 다룬「고인돌」과 신문을 30센티쯤 뒤로 당기며 이제야 멀리 보는 ‘아량’이 생겼다는「노안老眼」은 타인과 하나가 되기 위한 깨달음을 보여준다. 삶의 깊은 성찰(省察)이 담긴 수작(秀作)이다.
비가 내리면
강물은 그냥 흐르는 게 아니라네
촉촉한 비를 맞으며 도란도란 속삭이고
작은 동그라미 그리며 노래를 하지
밤 깊도록 비가 내리면
불어나는 강물을 걱정하며
밤길을 걷던 모녀처럼
그렇게 정답게 흘러서 가네
내 어머니 강물처럼 흘러갔어도
내 마음에 새겨진 정 아직 그대로 있네
혼자 걸어도 촉촉이 젖어 오는 정
비가 되어 내 마음에 흘러내리네
아파도 서러워도 끈끈한 그 정 못 잊어
비 내리는 강가를 서성이면
어느새 내 눈에 고이는 눈물
강물 같은 내 마음 비가 되어 흐르네
—「비내리는 강」전문
비가 오면 강은 비의 족적을 문신처럼 새기느라 분주하다. 강물로 뛰어든 빗발들은 찰나의 흔적만을 남기고 강물속으로 사라진다. 아득한 공중에서 낙하를 결심하기까지 몇 번을 망설였을까? 머물지 않고 유장하게 흘러가는 강, 하지만 연어가 모천으로 돌아오듯 추억은 역류한다. 도란도란 강변을 걸으며 불어나는 강물을 걱정하던 그 모녀는 다시 이 강변을 걷고 있다.
시집 표제시인「비 내리는 강」은 비장미(悲壯美)가 느껴진다. 시인의 애틋한 고백이 담긴「비 내리는 강」은 시인의 주관적 정서와 아름다운 내적 세계를 차분하게 보여준다. 안행덕 시인의 시적대상은 ‘사물과 자연’이다. 그 풍경 속으로 독자를 초대하고 닫힌 귀를 열게 한다. 연륜과 관조(觀照)의 힘이 느껴지는 시편들은 모두 나름의 무게를 지니고 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마침맞은 시편의 무게가 흥미롭고 즐겁다. 읽고 나면 맑은 여음(餘音)이 남는다. 그녀의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껴지는 것이다. 사물을 탐색하고 그 특질을 시로 바꾸는 시인의 열정으로 기억하고 싶은 여러 편의 시가 태어났다. 넓은 바다를 향하여 흐르는 강물처럼, 시인의 시선은 끊임없이 시원(始原)을 향해 흘러갈 것이다.
[출처] 안행덕 시집『비 내리는 강』서평 (2014년 세종출판사) 詩의 파원(波源), 탐색과 성찰의 시간 |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