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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기에 앞서, 내가 종주를 떠나는데 챙겨 나간 것들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는 세상을 향한 불신을, 둘째는 항상 여유롭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셋째는 내 옆에 있는 것들과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이 중에서도 세 번째인 내 옆에 있는 것들과 함께하는 느낌은, 종주 전 날 금요일 밤에 불현 듯 내게로 찾아 온 것이었다.
포항 숙소, 캄캄한 방 안에서 나는 홀로 깨어 있었다. 자전거 여행에 대한 설렘과 막연한 두려움, 낯선 세상을 향해 몸을 내던진다는 실감 등에 빠져 잠들지 않고 잡생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생각은 내일부터 떠나갈 국토 종주를 시작으로 머나먼 미래의 일까지 이어져 갔다. 막연하게, 어른이 되어 스스로의 삶을 꾸려 나가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 낯설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그런 것일까. 어른이 된 나는 여전히 그곳에서의 인간관계에 치이며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평소에 어려워하는 사람들, 관계들이 나타나 나를 어려운 상황으로 내모는 상상을 했다. 평소에는 막연히 나중 가면 나아질 거란 생각을 하기도, 막연히 생각만 하면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자주 했었다.
그러다 불현듯, 어떤 느낌이 나를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따라붙는 일순간의 정적. 방금 전까지도 쭉 이어져 온 한밤중의 정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 색채가 확연히 달랐다. 어둠에도 색채가 있을까? 어둠에도 향이 있을까? 유심히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둠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어둠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던, 잠든 엄마와 아빠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칠흑 같은 밤에 감춰져 보고자 하지 않는다면 볼 수 없는 모습. 마치 그 모습이 지금 내 상태처럼 와닿았다. 바로 옆에 있음에도 이들에게 시선 주지 않는 나. 되려 오지도 않은, 아예 있지도 않은 상상에 사로잡혀 잠든 채 살아가는 나. 불현듯 나에게로 찾아 온 느낌은 지금 잠들어 있는 건 바로 나라고 말해주고 간 것만 같았다. 방금 전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내 옆에는 어둠 속 저편의 엄마와 아빠가 나타났다. 다만 한 순간의 연기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 느낌은 내게 깊은 여운만을 남겼다. 그리고 나는 이 여운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이 여운이 내일 시작 될 종주까지 계속 이어지기를 바랐다. 계속해서 이 느낌을 품고, 국토 종주를 끝마치고 싶었다. 한 순간의 앎은 종종 찾아오지만, 그 순간을 계속해서 기억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이제 나는 어서 빨리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침상에 누웠다. 부디 이 느낌이 내일 자고 일어났을 때에도 계속 가슴에 남아있기를 바라면서.
다음 날 아침, 나는 8시에 일어나 짐을 싸서 엄마 아빠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차에서 자전거를 꺼내, 바퀴를 조립해서 해안 자전거길까지 끌고 갔다. 그곳에서 엄마 아빠와 인사를 나누고, 나는 자전거에 몸을 싫고 페달을 굴리기 시작했다. 발에 걸리는 페달을, 꽉 쥔 핸들을, 피부에 부딪히는 바람을, 폐에 들어오는 맑은 공기를, 그리고 지금 내가 받고 있는 느낌에 집중하며,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시작은 더없이 좋았다.
나는 이번 종주가 여유로운 여행이 되기를 바랐다. 급한 만큼 돌아가라고, 나는 자꾸만 조급해지려는 마음을 제자리에서 빙빙 돌려가며, 첫날은 포항을 공부하며 알게 된 몇몇 관광지들을 구경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길을 잘못 들었을 때도 ‘그럴 수 있지 뭐’하고서 핸들을 돌려 올바른 길에 합류했고, 유명한 관광지나 경치 좋은 곳이 있으면 멈춰 서서 구경했으며, 힘들면 억지로 더 가지 않고 쉬어갔다. 그리고 목이 마를 때는 물통 칸에 꼽아둔 옥수수 수염차를 마셨다. 캬! 옥수수 수염차가 이렇게나 맛있는 음료수였던가? 단언컨대 내가 살면서 먹어 본 음료수 중에 가장 맛있었다. 아마 몸이 힘들고 갈증이 일어났기에 내가 맛있게 먹은 것이었으리라.
어쨌거나 그렇게 나는 꾸준히,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서 종주를 이어나갔다. 그리 요령 있게 잘 이어갔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첫날 치고는 나름 나쁘지 않은 주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별 탈 없이 가고 있던 와중, 문득 오후 3시 무렵에 몸이 갑자기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급격한 변화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딱히 힘든 기색은 없었는데, 갑자기 둑이 무너지듯 피로가 온몸을 맴돌았다. 너무 오랜만에 몸을 써서, 그리고 피로가 축적되어서 일어난 상황이었다. 차츰 페달을 굴리기가 힘겨워져 갔다. 장이 쪼그라들 듯 배가 고팠고, 목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갈증은 어떻게든 가지고 있는 물로 해결을 봤지만, 문제는 당장에 허기를 때울 식당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마침 내가 지나고 있는 곳은 50km 속도제한으로 옆에서 자동차들이 쌩쌩 지나가는 도로 위. 나는 파란 선이 이어져 있는 도로 가생이 길을 따라 가고 있었다. 한 마디로, 정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는 의미였다. 나는 무겁게 페달을 굴리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아니, 이 도로 한복판에 식당이 있으리라고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태 오던 길에 깔려있다시피 한 카페는 어찌 하나가 안 보이는가? 여태 오는 길에 별별 카페를 다 봤는데, 정작 필요할 때는 나타나질 않았다. 제길, 이런 법이 어딨어. 그러던 중 저 멀리에 휴게소가 보였다.
‘장사해돋이휴게소.’
삼무곡에서 경상북도로 여행을 떠날 때, 자주 들렸던 바로 그 휴게소였다. 온갖 석상과 조각상들이 널려있고, 안에는 화장실과 카페가 있으며, 카페에는 빵이 있다. 지금까지는 완전히 이국 땅에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는데, 익숙한 장소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반가움에 젖어있을 만큼 지금의 나는 여유가 없었다. 어서 빨리 휴게소에 들어가 맛있는 빵과 음료수를 먹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휴게소 앞에 도달했다. 나는 자전거를 멈춰 세우고서 휴게소를 올려다 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반갑게 느껴지는 장사해돋이휴게소. 휴게소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왜냐면 장사해돋이휴게소는 남하하는 차선에 있는 휴게소였으니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떻게 저 너머로 갈 수 있는 길이 없을까 찾아보았지만, 휴게소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차들이 쌩쌩 지나가고 있는 도로 뿐이었다. 솔직히 잠깐 도로를 횡단해 지나가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무섭게 달려가는 자동차들이 그 생각을 짓밟고 지나갔다.
그렇게 나는 휴게소를 지나 다시 페달을 굴리기 시작했다. 원래도 무거웠던 페달은 휴게소를 지나자 더 무거워졌다. 하지만 한편으론 오히려 포기하니까 편해지는 부분도 있었다. 분명 힘들었지만, 되려 힘든 걸 받아들이고 나니 마냥 힘겹지만은 않았다.
얼마나 더 왔을까. 나는 삼사리에 제법 큰 동네에 도착했다. 관광객도 많고, 규모도 커 보였기에 나는 더 이상 가지 않고 멈춰서 인근 숙소를 뒤져 보기 시작했다. 내 스스로 묵을 숙소를 찾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휴대폰으로 네이버 맵을 켜서 인근 숙소의 가격대를 일일이 확인해 보았다. 금액이 명시되어 있지 않은 곳에는 전화를 해보았고, 그중에서 근처에 있던 그랜드비치모텔이라는 숙소에는 직접 들어가 보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카운터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카운터 뒤쪽으로 나있는 통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도 안 계세요?”
그러자 주인 아저씨가 나오셨다.
나는 주인 아저씨에게 금일 혼자 묵을 수 있는 방 중에 가장 저렴한 가격대가 얼마인지 물어보았다.
“8만 원이요.”
내 생각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었다. 아마 토요일 밤이어서 그런 거였으리라. 주인 아저씨는 이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이런 말을 하셨다.
“너무 비싸죠?”
“예… 일단 다른 곳들도 좀 둘러 보고 올게요.”
나는 말을 남기고 나왔다. 사실 앞서 전화한 다른 숙소들도 비슷한 가격이었다. 맥시멈 11만 원에서 8만 원 사이. 물론 성수기라 그런 거겠지만, 그래도 너무 비싼 가격대였다. 솔직히 마음 한 구석으로는 ‘내가 앳되어 보이니까 높게 부르는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행을 나올 때 챙겨온 첫 번째, 의심이 싹 피우는 순간이었다. 막연하게 사람들 속은 모르겠고, 낯설고, 혹시 웃는 얼굴 뒤에 또 다른 얼굴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의심의 뿌리가 어디서부터 뻗어 온 건지 그 시작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안에 의심이 이렇게까지 크게 자리잡은 원인 중의 하나를 나는 알고 있다. 과거 내가 세계 여행을 다니던 시절, 웃는 얼굴로 다가와 바가지 먹이던 후진국의 상인들이 있었다. 그때는 그나마 바가지를 먹어도 2~4달러 정도였으니 속만 썩히고 말았다지만, 지금은 내 몸 홀로 떨어져, 낯선 환경에서 큰돈을 가지고 흥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의심을 안 하고는 못 배겼다.
이후로도 나는 이곳저곳에 전화하면서 묵을 숙소를 찾았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정도의 금액을 부르는 곳은 없었다. 나는 점차 정신적으로 힘이 부치는 걸 느꼈다. 생각보다 숙소 구하는 게 쉽지 않았던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 몸이 어서 빨리 밥 먹고 쉬고 싶다 외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아빠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인근에서 숙소를 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아빠는 내 사정을 듣고, 그냥 가장 저렴하게 부른 곳에서 묵으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 그랜드비치모텔로 왔다. 모텔은 카운터가 2층에 있고, 1층은 주차장으로 되어 있는 구조였다. 나는 주차장에 자전거를 대고서 짐을 풀고 있었다.
그때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바로 내가 있는 이곳, 그랜드비치모텔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까 왔다 갔던 학생 맞죠? 주변에 다른 숙소들 좀 찾아 봤어요?”
“네.”
“내가 혼자 자전거 타고 오는 학생 사정이 딱해서 그래. 한 얼마쯤이면 묵을 것 같아?”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생각하다가, 일단 떠보는 심정으로 댔다.
“7만 원이요.”
“그래 그럼 7만 원에 해줄게. 어여 와.”
어쩌면 이때 사장님은 큰 인심을 부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사장님의 인심 쓴다는 말투에 오히려 경계심을 품었다. 마치 실제로는 한 5만 원이 정가인데, 7만 원에 내가 끌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6만 원에 가능할까요?”
외국에서는 내가 먼저 7만 원을 부르고서 6만 원을 부른다? 어림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쓰여 있는 가격대는 4만 원에서 5만 원 사이였기에 내심 탐탁지 않은 마음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7만 원을 불렀을 때 너무 흔쾌히 ok를 해주셔서, 한번 찔러보는 심정으로 던진 말이기도 했다.
아저씨는 곤란하다 말씀하시며, 와이프와 논의 해본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저 곤란하다는 말, 솔직히 외국에서 너무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 말도 안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젓고, no를 외치는 상인들의 모습. 하지만 또 마음 한구석으로는 죄책감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사실 아저씨가 먼저 전화해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냥 8만 원에 여기서 묵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 초년생으로서, 손해는 보기 싫다는 마음에 그런 것이었다.
나는 문득 주차장 천장의 cctv를 보고 슬쩍 비켜섰다. 괜히 양심이 찔려왔다. 그렇게 얼마간 기다리고 있자 전화가 다시 걸려 왔다.
아저씨가 말했다.
“6만 원은 좀 그렇고, 6만 5천 원으로 하자.”
나는 속에서 흔쾌히 나오려는 대답에 살짝 제동을 걸어 대답했다.
“네. 그럼 짐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전화상에서 아저씨는 내심 탐탁지 않은 뉘양스로 전화를 끊으셨다. 나는 또다시 양심이 찔리는 것을 느끼며 자전거에서 짐을 땠다. 그러고는 잠시 주차장에서 시간을 때우다 올라갔다. 바로 올라가 버리면 이미 와있던 걸 들킬 것 같아서 그랬다. 그렇게 카운터에 도착하자 아주머니가 나를 맞았다. 나는 체크인을 하고 객실에 올라가 짐을 풀었다. 그렇게 짐을 품고 잠시 침대에 누웠다. 왠지 내가 나쁜 놈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금방 휴대폰을 꺼내 들어 인근 식당을 찾아보았다. 의외로 식당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식당의 종류가 많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다 횟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식당 중에서 도로변에 있는 갈비집을 발견해 그곳으로 갔다. 가서 보니 최소 주문 양이 500g이었다. 주인 아저씨는 혼자 먹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래도 남자들 중에는 혼자 다 먹는 경우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오늘이 나였다.
내가 자리에 앉자 가짓수가 많지 않게 반찬이 나왔다. 그런데 그중에도 반갑게 오이냉국이 있었다. 내가 오이냉국을 맛있게 먹고 있자, 고기가 금방 나왔다. 양념구이와 소금구이 반반. 나는 공기밥 두 그릇과 함께 고기를 모두 먹어 치우면서 푸짐하게 저녁 식사를 하고 나왔다. 계산할 때 보니 가격이 딱 내가 생각했던 하루치 숙박비가 나왔다.
나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간단한 군것질거리와 삼각김밥, 그리고 오늘 크게 덕을 본 옥수수 수염차를 사 들고 왔다. 그러곤 씻고 나서 짧게 검정고시 공부를 한 뒤, 근래 읽고 있던 웹소설을 읽다가 이만 짐을 정리하고 잠에 들었다. 잠자리는 하루 간의 피로를 녹여내듯 금세 나를 깊은 잠으로 끌고 갔다. 국토 종주의 첫날. 내가 간직하고자 한 것들과 자연스레 새어나온 것들이 고스란히 나타난 여행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생각이 꼬리를 물기 전에, 나는 모든 것들을 끌어 안고 깊은 잠에 빠졌다. 피곤한 밤. 가장 달고 좋은 밤이었다.
첫댓글
😀
여행기에 빨려들어가는 듯~~~ 자전거여행 멋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