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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날과 같은 아침, 나는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 모텔 실외 창고로 향했다. 어제 주차장 구석에 주차해 둔 자전거를 보신 사장님이 도난당할 수 있다며 창고로 옮겨놓았었다.
나는 잠금장치를 풀고 자전거를 인도로 끌고 나왔다. 그러곤 헬멧과 장갑을 낀 뒤, 지지대를 풀고는 페달을 구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 길진 않았지만, 여러모로 느낀 점은 많았던 나의 첫 종주였다. 페달을 조금 구르니 어제 다친 무릎이 아팠지만, 그래도 조금 지나면 통증은 잦아들 것이었기에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나아갔다. 과연 종주 마지막 날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한 마음이었다.
마지막 날 종주 중에는 이런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정말 종주를 마무리 지을 때라고. 왜냐면 스쳐 가는 주변 풍경이, 점차 익숙한 모습을 띠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태 종주를 이어오던 와중에는 마치 판타지 세계에 떨어진 느낌을 받았다. 낯선 환경, 처음 해보는 일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니, 마치 이질적인 세상에 홀로 떨어진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러던 중 간혹 아는 장소가 나타날 때면, 잠시 현실 세계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렇게 삼무곡을 향해 점점 다가갈수록, 내가 아는 장소들은 더 자주 나타났고,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서는 스쳐 가는 장면 하나하나가 낯설지 않고 익숙했다.
오늘 내가 주행할 거리는 약 40km. 그중 호산에서 삼무곡 들어가는 거리를 뺐을 때 바닷길을 따라 주행하는 거리는 고작 25km밖에 되질 않았다. 그러니 오늘 주행하는 거리는 삼무곡에서 오다가다 자주 본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풍경들이 내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종주를 끝낼 때라고. 이제 정말 다 왔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자연스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랬기에 더욱, 나는 주변 풍경을 눈과 피부로 담으며 나아갔다.
이번 종주를 통틀어 내게 가장 의미 있었던 걸 묻는다면, 적어도 가장 소중했던 것은 바로 이 풍경이라고 답할 것이다. 아마 자전거를 타고 가는 국토 종주가 아니었다면, 이 풍경은 내게 그리 의미 있는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허나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이었기에, 그리 빠르지도, 그렇다고 충분히 음미할 만큼 느리지도 않았기에. 내게는 스쳐 지나가는 이 풍경이 퍽 의미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물론 이 일상적인 풍경 외에도 이번 종주를 이야기할 때 퍽 입 간지러울 만한 이야기들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이 풍경을 빼놓고는 이번 종주를 이야기할 순 없으리란 느낌이 든다. 언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준 것이었으니까.
나는 이번 종주 내내 내가 가지고 나온 세 가지, 그중에서도 세 번째인 내 옆에 있는 것들과 함께하는 느낌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잊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랬기에 퍼뜩 자각이 들 때면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고, 주위를 둘러봤다. 물론 그때마다 대단한 무언가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 내게 감흥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항상 비슷한 모습, 비슷한 풍경. 솔직히 그 순간에 있어서는 별 감흥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종주 마지막 날, 지금도 적당한 속도로 스쳐 가고 있는 이 풍경이 없었더라면, 아마 이번 종주는 없었으리라는 느낌이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는 익숙한 향을 풍기는 풍경 속을 나아가면서.
중간에 길을 잘 못들 뻔했다가, 옆에서 오토바이 타고 가던 아저씨가 길을 알려줬던 적도 있었다.
“총각, 어디 가?”
“아, 저 국토 종주 하던 길입니다.”
“글로 가면 길 없어요. 국토 종주 하려면 일로 가야 돼요.”
마침 내가 가려던 길은 한참 내리막이었는데, 아저씨의 말이 조금만 늦었어도 고생고생해서 되돌아와야 할 뻔했다. 나는 아저씨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다시 제대로 된 길로 갔다. 그래, 이 또한 익숙한 풍경 중의 일부였다. 누군가 선뜻 건내오는 선의. 언뜻 보기엔 크지 않을 수 있는 일부분이지만, 이 작은 선의가 계속해서 나의 종주 이야기에 영향을 줬다.
나는 아저씨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핸들을 돌려 올바른 길을 향해 달렸다.
바닷가를 가로막듯 세워진 철조망을 뚫고 물방울들이 올라와 도로를 적셨다. 제 앞길을 막는 것에 힘차게 부딪힌 파도가 그대로 벽을 타고 도로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덕분에 나는 젖은 도로를 피해 좌측으로 주행했다. 우측으로는 파도를 많이 맞아 녹슨 철조망이 쭉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철조망을 따라 계속해서 나아가자, 어느새 철조망은 사라지고 나무 데크가 나타났다. 그대로 나무 데크를 따라 주행하자, 저 앞바다에서 샘솟아 하트 모양을 만들고 있는 동상이 보였다. 저것은 얼마 전에 포항에서 봤던 상생의 손을 연상케 하는 호산의 조형물이었다. 포항에서부터 호산까지. 나는 마침내 끝났다는 느낌을 받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강변을 따라 나 있는 길대로 계속 가니, 저 앞 도로 우측에 자갈밭이 보였다. 그리고 그 건너에는 강 건너편부터 이어져 온 또 다른 자갈밭이 보였다. 예전에 삼무곡에서 도보로 포항까지 나왔을 때 저기로 돌을 던지며 놀았던 것이 불현듯 생각났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바닥에 적당한 돌멩이를 하나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손을 붕붕 돌려 풀어주고는, 이내 온 힘을 다해 강 반대편의 자갈밭을 향해 던졌다.
슈우우우욱, 퐁당.
작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 돌멩이는 자갈밭에 닿지 못하고 강물로 떨어졌다. 불행히도 내게 돌 던지는 재능은 없다. 삼무곡에서 같이 야구하던 민혁이 형이 이런저런 교정을 시도해 봤지만, 안타깝게도 달라진 건 없었다.
“에이, 돌이 안 좋네, 이거.”
나는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은 유난히 실없는 혼잣말이 잘 나오는 날이었다. 어차피 국토 종주 중에는 남이 듣는 일도 없었고, 가끔 차가 지나갈 때는 조용히 입 닫으면 됐으니, 성격대로 혼잣말을 많이 하고 다녔다. 오늘은 유독 혼잣말이 잘 나오는 날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몸을 풀고는, 이내 두 번째 돌을 집어 들어 힘차게 던졌다. 이번에는 스텝까지 밟아가며 던진 돌이었다.
그렇게 날아간 돌은 전보단 큰 궤적을 그리더니, 슈우우욱, 톡. 자갈밭 끝자락에 겨우 떨어졌다. 비록 전에 던짓 것보단 나았지만, 역시 내 던지기 실력은 영 아닌 듯했다.
나는 뻔한 핑계의 말을 남기며, 추억이 깃든 장소도 이만 떠났다.
“오늘은 날이 아니네.”
나는 자전거를 몰고 호산으로 향했다. 곧바로 삼무곡으로 가도 됐지만, 포항에 있는 하나로 마트에서 군것질거리를 사 갈 생각이었다. 앞으로 캠프가 있기 전까지, 빈둥대면서 입가심할 거리는 필요하다고 느껴서였다.
그렇게 마트를 나온 나는 다시 자전거를 타고 삼무곡을 향했다. 이제 바닷가도 안녕, 낯설었던 길도 안녕, 종주도 안녕. 이젠 정말 끝, 길고도 험했던 종주의 끝이라고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부우우우웅.
산골짜기로 들어서자 대뜸 바람 소리부터 귀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불긴 했다.
그러나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나아가고 있었는데, 점점 바람 소리가 더 크고, 날카롭게 들려오는 것이었다.
“…무슨 바람의 왕국인가?”
그 순간.
푸와아아아아악!
앞에서 맞바람이 부웅, 하고 불어왔다. 일순간 바람을 맞은 자전거가 기우뚱하고 방향을 잃었다. 나는 급히 핸들을 틀어 옆 또랑으로 빠지려던 걸 원래 방향으로 되돌려 놨다.
그러나 당황을 틈도 주지 않고, 그 첫 바람을 시작으로 계속해서 바람이 점점 강하게 불어오기 시작했다.
후우웅! 후웅! 푸와아아, 푸와악!
바람에서 파공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바람 방향이 하필 맞바람이었기에, 유독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이 순탄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 견딜만해서, 나는 꾸역꾸역 페달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열심히 나아가다가, 나는 어느 작은 마을로 들어섰다. 물론 아는 마을이었다. 노경1리에 있는 마을인데, 북서쪽으로는 다리가 있고, 마을 위쪽으로는 운동기구가 있는 마을이었다. 이 외로는 크게 눈에 띄는 특색은 없는 마을이었는데, 이번에 새로 와 보니 전과 다른 특징이 하나 새로 생겨 있었다.
바로 마을 중앙의 큰 나무 곁으로 새롭게 콘크리트 바닥과 의자가 깔린 것이었다. 전에 도보 여행을 할 때는 공사 중이었는데, 이번에 와서 보니 공사가 끝나 있었다.
문득 그때 잠깐 말을 튼 인부 아저씨가 생각이 났다. 내게 착하다고, 교장 선생님한테 말 전해주겠다고 했던 아저씨.
나는 내심 반가운 느낌을 받으며, 이곳 벤치에서 잠깐 쉬고 가기로 했다. 물론 맞바람에 지쳐있던 것도 있었지만, 그때 만난 인부 아저씨가 만들었을 벤치에 앉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사물을 본래의 의도대로 잘 사용하는 것이 만든이에게 보내는 보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잘 쉬는 중이었는데, 문득 불청객이 찾아왔다. 물론 불청객의 정체는 바람이었다.
저 멀리서부터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점차 다가오더니, 이내 내가 앉아 있는 곳을 찾아 덮쳤다.
쿠과과과과.
바람에서 날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바람이 정말 미친놈처럼 불어왔다. 바람은 금세 온 동네를 휩쓸었고, 잠시 방심하고 있던 나는 눈에 흙먼지가 들어왔다.
솨아아아아아 솨아아아아.
바람 특유의 소름 끼치는 소리에 더해 과격한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눈을 감고 웅크린 채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옆에서 자전거 덜컹거리는 소리도 들렸고, 수풀 흩날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까보다 자전거를 타고 올 때보다 훨씬 더 거센 바람이었다.
나는 바람이 내 몸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옷 밖으로 나와 있던 얼굴이 따가웠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이렇게 부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 여행 마지막까지 정말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구나.”
꾸역꾸역 바람을 처맞아 가면서도, 나는 속으로 지난 4일간의 여행기 파트 분배와 제목을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 날은 시작, 둘째 날은 펑크, 셋째 날은 낙차, 그리고 마지막 날은 바람. 어떻게 하루하루 주제가 개성 있고 알맞게 딱 주어질 수 있는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쯤, 점차 바람이 잦아들었다.
나는 뜸 들일 것 없이 얼른 자전거를 타고 페달을 굴렸다. 잠시 바람이 잦은 이상, 언제 다시 바람이 돌아올지 알 수 없었기에. 바람이 다시 오기 전에 가능한 먼 거리를 주파할 심보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바람은 다시 돌아왔다. 무슨 정분이라도 난 것일까. 바람의 선빵에 핸들이 훅 꺾이고, 나는 애써 꺾인 핸들을 다시 바로잡아야 했다. 그리고 억지 부려서 더 가려고 하자, 이내 바람이 더 거세지며 자전거를 멈춰 세웠다.
쿠과과과곽.
“으아아아아아아!”
혼자 비명을 지르며 자전거에서 내렸다.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딴청 피우지 않으면, 전방에서 덮쳐오는 바람을 뚫고 가기가 영 힘들었다.
나는 바람이 잦아들면 자전거에 타고, 바람이 다시 거세지면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 어찌저찌 전진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돼지농장을 지나, 다리를 건너기까지 했지만, 이때부터는 도통 바람이 잦아들지를 않았다. 훅, 하고 우측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이때, 나는 그냥 정신을 놔버리기로 했다. 그래, 피할 수 없으니 즐기자. 네가 미친놈처럼 불어오니, 나도 미친놈처럼 뚫고 가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그러지 않나? 그리 마음먹고는 똑바로 고개를 처들어, 앞을 보고 나아갔다.
마침 오른편에 있던 갈대들이 바람을 맞고 내 쪽으로 기울어 왔다. 나는 그런 갈대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네들이 보기에도 내 얼굴이 너무 잘생겨서 그리 고개 기울여 쳐다보는 것이냐? 아, 어쩔 수 없구나. 허나 이 얼굴은 너흴 위한 얼굴 아니며, 날 위한 얼굴 아니다. 먼 훗날, 마법처럼 내 앞에 나타날 내 운명적 사랑을 위한 얼굴이다.”
실제로 그러면서 걸었다. 영 실없는 소리였지만, 이 난장판 속에서도 절로 웃을 수 있었다.
한번은 그냥 이유 없이 크게 웃어 보기도 했다.
“아하하하하하하하!”
기분 좋게 웃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열심히 바람을 뚫고 나아갔지만, 영 바람이 그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끌고 가기를 포기하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일종의 객기. 불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타파할 심보였다.
나는 페달을 구르며 지껄였다.
“그래, 어디 한 번 붙어보자. 고작 네놈 따위가 나를 꺾을 수 있을까? 분명 강적이긴 하나, 암. 내게는 어림도 없다.”
그러면서 열심히 페달을 굴렀다. 페달은 추라도 달린 듯 무거웠다. 거기에 바람이 이리저리 불어올 때마다 자전거는 위태롭게 기우뚱거렸다.
“윽! …윽! …하하, 어림없다! 과연 내 호적수다운 면모이기는 하나, 암! 내 앞길을 막을 수는 없다! 하하하하하하하!”
페달이 무거울수록 더 힘차게 발을 굴렀고, 바람이 자전거를 강타할 때마다 팔에 힘을 주고 방향을 잡았다. 온몸에 힘을 꽉 주고서. 바람 따위에 꺾이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동작 하나하나를 힘차게 이어갔다. 그래도 바람 때문에 나아가기는 쉽지 않았지만, 그럴수록 더 기세 좋게 전진, 전진해 나갔다.
“으으… 하하, 하하하하하!”
그렇게 정신 나간 상태로 계속 전진해 나가자, 도저히 뚫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바람을 뚫고 갔다.
그리하여 어느새 정자가 보이는 곳까지 도착한 나는, 다리를 건넌 뒤 언덕을 넘어, 마지막 스프린트를 속행했다.
“이 마지막 승부로, 승부의 승자를 정하자!”
그렇게 나는 종주의 마지막 페달을 굴렀다.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열정적인 페달링으로 결승선을 넘었다.
“허억, 허억, 허억.”
결승선을 통과한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종종 삼무곡에 있으면서 조깅을 할 때에도, 이 마지막 구간에서 남은 힘을 쏟아내 달리고는 했다. 그리고 그 때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먼 거리를 건너 결승선을 통과한 것이었다.
나는 자전거를 끌고 언덕을 올라 삼무곡에 들어갔다. 마침 저 멀리에서 도끼질 소리가 들렸기에, 올라가 보니 금조가 있었다. 금조와 반가운 마음으로 포옹을 나눈 후, 짧은 얘기를 나누다가 살림 교실로 올라가 현곡과 여공께 인사를 들였다. 마침 소라쌤이 계셨고, 그 옆에는 입학 상담을 오신 분도 계셨기에 나는 구석에서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으로 밥을 먹었다. 밥이 정말 맛있게 들어갔다. 그리고 몸은 구석에 있었지만, 수다는 열심히 떨었다. 당장 종주의 열기가 몸에 남아있었고, 할 말도 많았기에 입이 쉴 일이 없었다. 여행 자체로도 할 말이 많았지만, 그를 통해 느낀 바도 적지 않았다.
나는 달고개 1층에 짐을 풀고, 잠시 쉬었다. 국토 종주 도중에 쉬는 것과는 달랐다. 이건 끝나서 쉬는 쉼이었다. 쉬는 행위에는 색채가 별로 없어서, 전후에 어떤 의미가 있든 간에 금방 무채색으로 만들고 비슷하게 만든다. 나는 쉬는 행위가 주는 익숙함을 느끼며, 집에 왔음을 느꼈다. 적어도 내 몸은 이제야 긴장이 풀리고 종주를 마치고 있었다.
앞서 종주를 시작할 때 챙겨 나간 것들이 세 가지 있었다. 그렇다면 종주를 마치고 온 지금은 무엇을 들고 왔을까? 그것을 나는 당장 알아차리지 못했다. 국토 종주가 일상에 어떤 영향을 변화를 가져왔는지, 적어도 살아가는 순간 중에 딱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지내 오면서, 이제야 어느 정도 논할 수 있을 정도의 이해가 쌓였다.
내가 이번 국토 종주를 통해 배운 건 간단했다. 바로 지금을 산다는 것. 내가 종주를 떠나면서 챙겨 간 세 가지 중 세 번째, 지금 여기 있는 것들과 함께하는 느낌에서 이어진 배움이었다. ‘인생’이라는 말의 실없음을 느꼈고, 내가 당장 오늘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자연스럽게 나의 인생의 길 앞에 있는 것이라 생각되던 것에서 내 옆에 있는 것들로 시선을 옮겼고, 이것을, 이들을 보고자 했다. 어디선가 무언가를 찾으려는 시도를 내려놨다. 단지 마주하려 했다. 습관, 버릇, 관념과 같은 지속적인 것들의 환상에 따라 살아가는 나를 느낄 때면,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찾으려는 시도에서, 마주하고자 하는, 만나려는 시도로 옮겼다. 어떻게 하면 금방 내가 죽을지라도 행복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이라는 가정이, 내가 신봉하던 많은 것들을 실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죽음이 두려웠으니까. 암만 생각해 보아도, 여기가 끝이라는 건 두려웠다. 내가 일구어가는 것들이, 무언가로 일구어지지 않고 여기서 끝일 수 있다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무언가를 위한 시도를 줄였다. 당장에 그 시도 자체로 의미 있다 생각되는 시도를 옮겼다. 이러한 시도가 무엇을 일구어낼지, 나를 현곡 같은 어른으로 만들지, 모른다. 나는 삼무곡에서 스승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나설 때면, 그곳에서 스승님을 만날 때면, 항상 그들이 일구어낸 것에 의미를 두었다. 과정이 대단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생각해 보면 그 과정은 결과가 뒤따르기에 의미 있다고 나도 모른 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내 스스로에 관해서도 무언가를 일구어야지만, 어떤 모습의 어른이 되어야지만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모르던 나의 생각의 형태였고, 이제야 내가 이리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애였다. 어른이 아닌 애. 나는 스스로를 그냥 애가 아니라, 언젠가 어른이 될 애로 생각했었다. ‘나’는 내일의 내가 살아있으리라 생각한다.
첫댓글 당신의 종주 “4일” 나의 남은 종주 “400일”
나의 남은 종주 473일...
수고했어~ 넘 멋지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