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빈 자리
김대원
아내가 동남아를 향해 떠날 채비를 마쳤다.
나는 그녀의 양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오른손 검지를 펴 그녀의 넉넉한 뱃살을 꾹 찔렀다.
“나 요새 운동 다녀서 배 들어갔어요!”그녀가 엉뚱한 말을 했다.
“잘 다녀와, 아깝다 생각 말고 물은 꼭 사 마셔야 돼! 수돗물이라고 그대로 마시면 배탈 나기 쉬우니까.”
그제 저녁 마루에서 딸애와 함께 여행 가방을 챙기는 그녀에게 했던 말이지만, 다시 한번 다짐하듯 상기시키며 그녀의 가방을 들고 배웅을 했다.
아내는 오랜 친구들끼리의 친목 모임에서 그동안 조금씩 모아 두었던 돈으로 단체여행을 가는 거였다. 언젠가 그 기금 사용에 대해서 각자 얼마씩 나눠 갖자는 등 의견이 분분하다며 어쩌면 좋을지 물어왔다. 어떤 모임이든지 기금이 많으면 그만큼 잡음도 많아지는 법이니 다 비우는 방법도 좋을 것이라며, 단합대회 겸 해외여행을 다녀오도록 해보라며 말해 주었는데 그대로 관철시킨 모양이었다.
떠나기 전 아내는 공항에서 전화를 했다.
“갔다 올게요, 고마워요 여보! 그리고 애들하고 싸우지 말고 잘 지내요.”
그리 멀리, 오래 가는 것도 아니고 기껏 5박6일 동남아 여행길에 오르면서도 걱정이 태산이다. 정작 나는 늘 그녀에게 미안했는데 그녀는 이번에 여행 경비 조금 보태 준 걸 고맙다는 것이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는 출근시간 늦을라 곤히 자는 애들 마구 깨우는 실랑이를 두고 싸우지 말라는 얘기다.
간밤 아내가 없는 첫날 밤, 자정이 다되어 갈 무렵 보던 책을 덮고 눈을 비비는데, “여보, 그만 자요. 아침을 생각해서...〮”그녀의 채근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오늘은 일요일이지만 여느 날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시원한 물 한 컵을 마시고 딸애와 아들 녀석 방을 열어보니 아직도 꿈나라다. 나도 다시 침대로 돌아가 누워봤지만 더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서 거실로 나왔다. 맨손 체조와 제자리 뛰기로 몸을 풀었다. 잠자던 온몸의 세포들이 기지개켜며 제자리 찾기에 바쁘다. 등허리부터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혀 흐르는 걸 느낄 즈음 팔다리 정리 운동을 끝으로 아침운동을 마치고 청소기를 들었다. 안방으로 마루로 윙윙 소리 내며 구석구석을 밀었다. “아빠, 왜 그래!”하며 더 자려는 애들에게 짓궂게 굴며 딸과 아들 방으로 쳐들어갔다.
모처럼 애들과 아침 식탁에 함께 앉았다. 보통 때 같으면 아들 녀석은 늦었다며 아침밥도 거른 채 뛰어나가기 바쁘고, 방송 모니터링과 글쓰기로 새벽 2~3시까지 노트북을 두드리던 딸애는 아직도 한밤중 일 시간이다. 애들이 다 시집 장가가면 이런 일도 끝이 날까, 주방을 오가며 아침식사 준비로 바쁜 와중에서도, 애들 이름 부르며 일어나라고 소리치던 아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 왠지 더럭 겁이 났다.
카세트 레코드버튼을 눌러 흘러간 팝송을 들으며 볼륨을 높였다.<더 로즈(THE ROSE)>의 애잔한 선율이 흐르고 때맞춰 환하게 밀려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무수한 꽃잎들로 사뿐사뿐 온 집안에 내려와 앉는 듯하다. 4인용 식탁에 셋이 앉아 아침밥을 먹었다. 그녀의 빈자리가 당장 느껴지는 순간이다. 딸애가 제 딴엔 정성껏 차린다고 했지만 제 엄마 솜씨만이야 하겠는가. 하지만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후식까지 맛있게 먹었다. 아내의 귀띔이 생각났기에.
“애가 나 없는 동안 아빠 식사를 어떻게 챙겨야 할지 걱정이 태산이에요.”
일요일이라 등산을 할까 하다가 그냥 집에서 쉬기로 했다. 애들은 밀린 잠을 보충이라도 하려는 듯 각자 방으로 가더니 꿈속 바다에 잠겨 단잠을 즐기고 있다. 나는 하릴없이 거실을 서성이다가 다기(茶器)를 꺼내 들고 창가로 갔다. 이제 내 마음은 깊은 산 속 고즈넉한 암자를 찾아간다. 하늘 구름 떠있는 돌샘(石泉)물을 받아 차를 끓여 자그마한 찻잔에 한 잔 따라 마신다. 법당 처마 끝 풍경 소리에 지그시 눈 감으며 쪽마루를 돌아 불어오는 솔바람과 한 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도 찻잔을 나눈다. 무성한 숲 속에 날아드는 작은 새들이 우리는 왜 안 주느냐고 투정부리듯 지저귀며 툇돌에 내려앉는다. 좁쌀 한 줌을 뿌려 준다.
“여보, 수박 줄까요, 참외 줄까요?”
아내의 목소리에 뒤돌아보니 그녀의 그림자도 없다.
방으로 들어와 T.V를 켰다. 쿠션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 프로 야구 중계를 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빠, 아빠!”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야구중계를 보다가 그만 잠이 들었었나보다.
아들은 인라인스케이팅 모임에 간다며 나갔다 하고, 점심을 차리겠다는 딸에게 냉면이나 먹으러 나가자고 했다. 딸애는 더운데 그냥 배달시켜 먹자고 한다. 나는 비빔, 딸애는 물냉면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가끔씩 휴일 낮에 아내가 손수 말아주던 냉면이나 칼국수가 더 나은 것 같다. 고소한 냉 콩국수도 참 좋았었는데 그미가 여행에서 돌아오면 그것부터 해 달라고 해야지.
더워서 밥 먹으러 나가기 싫다던 딸애마저 친구의 전화를 받고 나갔다. 모두 외출한 집안엔 덩그마니 나 혼자 남게 되었다. 갑자기 적막감마저 감도는 것이 정말 깊은 산골 어느 암자에 와 있는 기분이다. 이제 누구에게나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혼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자유스럽기까지 하련만, 갑자기 고립무원의 외딴 섬에 남겨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전에도 가끔씩 아내가 딸애와 같이 시장엘 가서 한참 만에 올 때 나 혼자 집에 있었던 날도 더러 있었지만 오늘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고즈넉한 적막이 흘렀다. 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신문을 뒤적이다가 T.V를 켰다.
아내는 늘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는 신문을 보거나 T.V를 보는 내 앞에 넙죽 엎드리면서 뒷목줄기부터 주물러 달라며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이렇게 해 달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좋은 거예요. 그러니 있을 때 잘 하라고요.”
난“응!”하는 대답과 함께 뒤에서 인기척을 느껴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불현듯 안방이 덩그라니 크게 보였다. 난 미아가 된 듯한 심정이 되면서 서글퍼지고 말았다.
2004. 6. 27.
*** 심사평 (수필과 비평 주간 김종완)
가부장제란 유습孺習에서 자란 세대가 이 정도 솔직한 글을 쓴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해외여행을 떠나는 아내와 작별하면서 ‘검지로 넉넉한 뱃살을 꾹 찌르는 것’도 우습지만,‘잘 다녀올게요’가 아니라 ‘나 요새 운동 다녀서 배 들어갔어요’라는 경어체의 대답은 금슬 좋은 부부의 안방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아내가 없는 빈 집에서 차를 마시며, 고즈넉한 암자에서 차를 마시는 듯한 착각에 빠지고, 휑한 안반에서 혼자라는 것에 미아가 된 듯한 기분에 싸인다는 설정은 이 신인이 이미 작품을 만들 줄 아는 기술을 습득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얼마 후면 잠시의 고독마저 견디지 못하는 현대인의 심리 또한 이 작가의 주제가 될 것이다. 적절한 어휘 선택과 긴축미 있는 구성 등은 글을 쓰면서 습득될 것이다. 신선한 발상의 능력을 지닌 신인을 얻었다는 것은 여간 기분 좋은 일이 아니다. 건투를 빈다.
첫댓글 두분 참 다정하시네요.. '있을 때 잘 하라고요.'.. 김대원 선생님,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잔잔한 감동입니다. 글이 요란스럽지 않아서 좋네요. 7년 전 글이 이정도이니 <빈 현관?>이란 수작도 나올만 하지요.
알콩달콩한 부부애가 깔린 글 잘 읽었습니다. (여기는 에세이문학카페인데.....^^*)
두 분 참 사이좋게 사시는 것 같네요.
그러니 빈 자리가 더 느껴지셨겠죠.
그래요. 있을 때 잘 해주면서 즐겁게 살 일입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무수한 꽃잎 같은 햇살이 글에서 느껴집니다. 다정한 부부, 따뜻한 가정...
아내의 빈 자리가 그냥 쓸쓸한 게 아니라 은근한 정으로 오히려 충만해 보이는 이 느낌,
역시 김대원 선생님의 역량 아닌가 싶어요.
참으로 자상한 남편입니다. 이런 남편이랑 사는 부인은 얼마나 행복할까요!!!
우리 양반은 첫애 가져 식빵 먹고 싶다 했을 때 "여자가 자기 입 섬길 수가 있느냐?"며 끝내 사다주지 않아던, 철두철미
경상도사나이
그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곁에 없어 보아야 깨닫게 되지요. 적막도 종류가 다르고요. 쓸쓸함이 오히려 따뜻해보이는 글, 잘 읽었습니다.
공기 같은 아내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글이네요.
정말이지 질투가 나서 못 살아요, 그냥..ㅎㅎ..참 순수한 느낌을 받은 글입니다.. 에세이문학 등단작도 있으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