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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 경상도(慶尙道) 성주목(星州牧)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 경상도(慶尙道) 성주목(星州牧)
동쪽으로 대구부(大丘府) 경계까지 26리, 의흥현(義興縣) 경계까지 1백 2리, 인동현(仁同縣) 경계까지 99리, 남쪽으로 고령현(高靈縣) 경계까지 49리, 현풍현(玄風縣) 경계까지 54리, 서쪽으로 지례현(知禮縣) 경계까지 62리, 북쪽으로 개령현(開寧縣) 경계까지 38리, 인동현(仁同縣) 경계까지 20리, 서울까지 6백 27리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 본피현(本彼縣)인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성산가야(星山伽倻)로서 여섯 가야 중의 하나로 삼았으니, 의심하건대 신라가 빼앗아서 본피현을 두었나보다. 김해부(金海府) 산천 아래에 자세히 보인다. 경덕왕(景德王)이 신안(新安)으로 고쳐 성산군(星山郡)에 붙였다가 뒤에 벽진군(碧珍郡)으로 고쳤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경산부(京山府)로, 경종(景宗)이 강등시켜 광평군(廣平郡)으로, 성종(成宗)이 대주도단련사(岱州都團練使)로, 현종(顯宗)이 단련사를 폐지하여 다시 경산부로, 충렬왕(忠烈王)이 흥안도호부(興安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 목(牧)으로 만들었고, 충선왕(忠宣王)이 강등시켜 경산부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인습하였다. 태종(太宗) 때에 어태(御胎)를 부(府)의 조곡산(祖谷山)에 안치하고 승격시켜 목으로 만들었다.
【속현】 가리현(加利縣) 주 남쪽 59리에 있다. 본래 신라 일리현(一利縣)인데 경덕왕이 성산군(星山郡)으로 이름을 고쳤다.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에 붙였다. 별호는 기성(岐城)이다. 팔거현(八莒縣) 주 동쪽 72리에 있다. 본래 신라 팔거현(八居縣)인데, 일설에는 ‘인리(仁里)’라고도 한다. 경덕왕이 팔리(八里)로 이름을 고쳐 수창군(壽昌郡)에 붙였다. 고려(高麗)에서 다시 팔거(八居)로 일컬었는데, 뒤에 ‘거(居)’가 변하여 ‘거(莒)’가 되었다. 현종(顯宗) 때에 와서 붙였다. 별호는 칠곡(七谷)이다. 화원현(花園縣) 주 동쪽 71리에 있다. 본래 신라 설화현(舌火縣)인데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창군(壽昌郡)에 붙였다. 고려 현종(顯宗) 때에 붙였고, 뒤에 대구(大丘)에 옮겨 붙였다가 뒤에 다시 붙였다. 별호는 금성(錦城)이다.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본피(本彼)ㆍ성산(星山)ㆍ가야(伽倻)ㆍ신안(新安)ㆍ벽진(碧珍)ㆍ광평(廣平)ㆍ대주(岱州)ㆍ경산(京山)ㆍ흥안(興安).
【성씨】 본주(本州) 이(李)ㆍ배(裵)ㆍ여(呂)ㆍ백(白)ㆍ전(全)ㆍ차(車)ㆍ박(朴), 임(林) 개경(開京). 강(姜)ㆍ손(孫)ㆍ김(金)ㆍ조(趙) 모두 내성(來姓)이다.팔거(八莒) 도(都)ㆍ현(玄)ㆍ임(任)ㆍ전(田)ㆍ변(卞), 배(裵)ㆍ임(林) 모두 내성(來姓)이다.가리(加利) 윤(尹)ㆍ조(趙)ㆍ이(李)ㆍ홍(洪)ㆍ정(鄭)ㆍ김(金). 화원(花園) 정(丁)ㆍ조(曺)ㆍ갈(葛)ㆍ서(徐)ㆍ석(石), 한(韓)ㆍ이(李)ㆍ백(白) 모두 내성(來姓)이다.
【풍속】 풍속이 화려한 것을 숭상한다 《지리지(地理志)》에, “풍속이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매와 개를 좋아한다.” 하였다. 여공(女功)을 잘한다. 관풍안(觀風案).
【형승】 산천이 빼어나고 특이하다. 정인지(鄭麟趾)의 기(記). 연한 봉우리와 중첩한 병장(屛嶂). 긴 내와 평평한 숲 이숭인(李崇仁)의 몽송루기(夢松樓記). 도(道) 가운데에 있다. 땅이 요충(要衝)에 있다 모두 신숙주(申叔舟)의 기(記).
【산천】 인현산(印懸山) 주 북쪽 9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조곡산(祖谷山) 주 남쪽 35리에 있다. 태종(太宗)의 태를 봉안하였다. 선석산(禪石山) 주 북쪽 28리에 있다. 세조(世祖)의 태를 봉안하였다. 적산(積山) 주 서쪽 25리에 있다. 비슬산(琵瑟山) 화원현(花園縣) 10리에 있다. 성산(星山) 주 동쪽 8리에 있다. 비지산(斐旨山) 주 서쪽 21리에 있다. 공산(公山) 팔거현(八莒縣) 동북쪽 20리에 있다. 산의 동쪽은 영천(永川)ㆍ신녕(新寧)ㆍ하양(河陽), 남쪽은 대구(大丘), 북쪽은 의흥(義興), 서북쪽은 인동(仁同) 경계다. 가야산(伽倻山) 주 서남쪽 48리에 있다. 또 합천(陜川)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가야산 천만 겹을 그림으로는 다하기 어려우리. 연기와 구름은 곳이 없어 뿌옇고, 소나무와 노송나무는 찬 데도 무성하다. 끊어진 석벽은 우뚝 서서 푸른 하늘을 떠받치고, 흐르는 샘은 곧장 쏟아져 흰 무지개를 끈다. 봄 아침에는 꽃을 꺾고, 가을에는 달을 구경하고, 여름에는 얼음을 마시고, 겨울에는 눈을 본다. 가야산의 사시를 뉘 있어 알리. 염공(廉公 안렴사(按廉使))이 일을 좋아하여 험한 산길을 만홀히 여긴다. 2년을 나쁜 진토(塵土)에서 노고할 때, 맑은 꿈 밤마다 하늘 남쪽에 달렸었네. 아름답다 가야산, 참으로 드물다. 하물며 성주(星州)는 나의 고향 선생의 초가집은 산 동쪽에 있고, 상인(上人 승려)의 연사(蓮社 절)는 산 가운데 있다. 시 읊고 설법하는 것, 두 가지 다 맑은 것이 짝 없으니, 언제나 손을 잡아 굶주리고 목마름을 위로하리.” 하였다. ○ 성주 경계에 진산이 되었고, 합군(陜郡) 동쪽에 형상을 뻗쳤다. 푸른 뿌리는 두터운 땅에 서리고, 푸른 빛은 갠 공중에 가득하다. 원숭이와 학은 여러 해 동안 이별하였는데 연기와 놀은 옛날과 같도다. 내가 와서 절정에 오르니 망부산(望夫山)이 제일 높다. ○ 산 돌이 험하고 높아 오르기 어려워, 나귀는 놓아두고 마음대로 지팡이를 짚는다. 구름이 열리니 한자(韓子)의 정성을 감동시켰고, 꽃이 떨어지니 유랑(劉郞)의 물색(物色)이 아득하다. 길고 짧은 등나무 가지는 옛길에 너우러지고, 높고 낮은 나뭇잎은 맑은 시내를 덮었다. 한종일 다녀도 얘기할 사람은 없고, 오직 그윽한 새만이 제 맘대로 운다.” 하였다.
수도산(修道山) 주 서쪽 85리에 있고, 지례(知禮)ㆍ거창(居昌) 두 고을 경계다. 적현(赤峴) 주 서쪽 52리 거창군 경계에 있다. 태자암(太子巖) 주 서쪽 12리에 있다. 둥근 돌이 삼층으로 쌓여 높이가 아홉 자이고, 원(圓)의 직경이 13척인데 매우 기괴하다. 가물 때에 비를 빌면 곧 응험이 있다. 태평촌(太平村) 팔거현(八莒縣) 서쪽 15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시에, “누가 이 땅을 태평촌이라 일렀는가. 부역이 무거워 백성들이 반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두어 집이 있어 손을 재우는데, 솔 껍질을 먹으니 아마도 적송자(赤松子)의 후손인가보다.” 하였다.
동안진(東安津) 주 동쪽 26리에 있고, 소야강(所耶江)의 하류다. ○ 채련(蔡璉)의 시에, “긴 물결은 출렁거리고 푸른 비늘(물고기)은 살쪘는데, 손을 익히 본 모래 갈매기는 가까이 가도 날지 않는다. 만리에 길들이기 어려운 것이 너 하나뿐 아니다. 흙먼지가 사람의 옷을 더럽혔다고 무시하지 말라.” 하였다. 무계진(茂溪津) 주 남쪽 49리에 있고, 동안진(東安津) 하류이다. 소야강(所耶江) 주 동쪽 20리에 있고, 인동현(仁同縣) 칠진(漆津)의 하류다. 이름은 고도암진(高道巖津)이고, 배 열부(裵烈婦)가 순절(殉節)한 곳이다. 마포천(馬舖川) 주 북쪽 11리에 있다. 근원이 대야원동(大也院洞)에서 나와서 고을 동남쪽 15리에 이르러 이천(伊川)과 합한다. 가천(伽川) 주 서남쪽 47리에 있다. 근원이 가야산 동남쪽에서 고령현(高靈縣) 지경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천(伊川)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적산(積山)에서, 하나는 비지산(斐旨山)에서 나와서, 주 서쪽 5리에서 합하여 성을 안고 동으로 흘러 동안진(東安津)으로 들어간다. 방문중(房文仲)의 향교루(鄕校樓) 시에 말한, “뜰 밑의 이천(伊川)ㆍ사수(泗水)에 연하였다.”는 것이 그것이다. 사라지(紗羅池) 팔거현(八莒縣) 서쪽 20리에 있다. 잉화포지(仍火浦池) 주 남쪽 5리에 있다. 정동지(鼎洞池) 팔거현 동쪽 5리에 있다. 동정지(東亭池) 주 동쪽 4리에 있다. 여근내지(汝斤乃池) 주 동쪽 14리에 있다. 박외지(泊畏池) 주 남쪽 24리에 있다. 동만지(同萬池) 주 남쪽 4리에 있다. 거류지(巨留池) 주 남쪽 5리에 있다. 조시지(助是池) 주 북쪽 6리에 있다. 대가곡지(大家谷池) 주 서쪽 15리에 있다. 극지지(極只池) 주 북쪽 20리에 있다. 죽지(竹池) 주 북쪽 12리에 있다. 소이지(所伊池) 팔거현 북쪽에 있다. 수향지(水向池) 팔거현 서쪽에 있다. 효성지(曉星池) 화원현(花園縣) 동쪽에 있다.
【토산】 은어[銀口魚]ㆍ송이[松蕈]ㆍ지치[紫草]ㆍ옻[漆]ㆍ꿀[蜂蜜]ㆍ사기그릇[磁器]ㆍ안식향(安息香)ㆍ잣[海松子].
【성곽】 읍성(邑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4천 52척, 높이가 13척, 나각(羅閣)이 5백 52칸, 안에는 샘 7개 못 2개가 있다.
『신증』 정덕(正德) 경진(庚辰)에 돌성으로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4천 52척, 높이가 9척이다.
【봉수】 성산 봉수(星山烽燧) 남쪽으로 가리현(加利縣) 이부로산(伊夫老山)에, 북쪽으로 각산(角山)에 응한다. 각산 봉수(角山烽燧) 주 북쪽 20리에 있다. 북쪽으로 인동(仁同) 약목현(若木縣) 박집산(朴執山)에, 남쪽으로 성산(星山) 및 대구(大丘) 하빈현(河濱縣) 마천산(馬川山)에 응한다. 말응덕산 봉수(末應德山烽燧) 가리현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화원현(花園縣) 성산(城山)에, 남쪽으로 현풍현(玄風縣) 소산(所山)에 응한다. 성산봉수(城山烽燧) 화원현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대구(大丘) 하빈현(河濱縣) 마천산(馬川山)에, 서쪽으로 말응덕산(末應德山)에 응한다. 이부로산 봉수(伊夫老山烽燧) 가리현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 고령현(高靈縣) 망산(望山)에, 북으로 성산(星山)에 응한다.
【궁실】 실록각(實錄閣) 성안 객관(客館) 동북쪽에 있는데, 본조(本朝)의 실록을 간직하였다. ○ 강희맹(姜希孟)이 《세조실록(世祖實錄)》을 봉안(奉安)하는 시에, “헌원씨(軒轅氏)의 봉력(鳳曆)에 왕춘(王春)을 기록하였다. 구오(九五)의 용이 나니, 대인(大人)을 보았도다. 석실(石室)에 쇠를 잠가 실록을 간직하니, 멀리 활과 칼을 생각하니 마음이 배나 슬프다.” 하였다. 백화헌(百花軒) 곧 동헌(東軒)이다. ○ 신숙주(申叔舟)의 《중영기(重營記)》에, “고을에 관사(館舍)와 해우(廨宇)가 있는 것은 사신(使臣)을 높이고 빈객을 접대하자는 것이니, 고을의 수령이 된 자가 마땅히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고을이 비록 작고 땅이 궁벽지더라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고을이 크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곳이랴. 성주(星州)가 고을로 세워진 것은 신라(新羅) 초기부터 현(縣)에서 군(郡)으로, 군에서 부(府)로, 부에서 주(州)가 되어 지역을 잃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으니, 횟수를 지나온 것이 남방 고을 중에 가장 오래되었다. 또 속현(屬縣)이 셋이나 되어 땅이 크고 백성이 호강(豪强)하고, 고을의 치소(治所)가 도(道)의 중앙에 있어서 역마를 탄 사신이 번갈아 이르고 손과 나그네가 모여드는데, 관해(館廨)가 세월이 오래 되어서 빈객과 사신을 접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근년 이래로 법이 엄하고 백성이 사나워서 고을을 지키는 자가 모두 역사(役事)를 일으키기를 어렵게 여겨 관해(館廨)가 허물어지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기만 하고, 돌 한 개, 기와 한 장이라도 다시 수리하여 정리하지 않고 수수방관(垂手旁觀)하여 교체되기를 기다린다. 우리 동년(同年) 김유선(金有銑) 군이 목사가 된 지 돌이 못 되어 정치가 이루어지고 일이 간략해졌다 하여 탄식하기를, “성주가 남방의 큰 고을이고 땅이 요충(要衝)에 있는데, 관해가 이와 같아도 수령이 된 자가 뜻을 두지 않는 것이 옳은가. 법이 엄하더라도 법을 범하지 않으면 법을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며, 백성이 사납더라도 백성을 귀찮게 하지 않으면 백성에게 꺼릴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에 재목을 모으고 공장이를 명하여 먼저 정청(正廳)의 동헌을 짓되, 예전 제도를 인습하여 넓힌 지 두어 달이 못 되어 준공하였다. 모두 2칸인데, 앞에 횡랑(橫廊)이 있어 밝고 통창하고, 뜰 가에는 화단이 있어 여러 가지 꽃을 심었다. 그리하여 아전을 보내어 편지를 달려 기(記)를 청하였다. 내가 군이 의주(義州) 목사로 있을 때 눈여겨보았는데, 알고는 하지 않는 것이 없고, 부지런하여 게을리하지 않았다. 의주라는 고을은 지경이 중국과 연하여 사신이 모이는 곳이요, 장사꾼이 모여드는 곳이어서 다스리기가 어렵기로 이름이 났는데, 군이 칼을 놀리는 것이 여유가 있었다. 우리 벗 김자호(金子灝) 공(公)이 사람에 대하여 허여(許與)하는 것이 적은데, 영남을 안찰(按察)하고 돌아왔기에 남쪽 고을의 다스림을 물으니, 군을 제일로 들면서 말하기를, “일을 다스리는 데에 부지런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과감하다.” 하였다. 자호씨의 말하는 것이 내가 전날 본 것과 같으니, 지금 어찌 증거가 되지 않겠는가. 자호씨가 세상을 떠나서 다시 볼 수 없음을 매양 슬퍼하며, 그 말을 생각하니 더욱 군을 믿노라. 일 없을 때에도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법을 범하지 않는 자가 오히려 적거늘, 큰 공사를 일으켜[工作] 남이 감히 하지 못할 것을 하면서도 능히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내력이 없겠는가.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것은 인(仁)이요, 법을 범하지 않는 것은 의(義)요, 게으르지 않은 것은 부지런한 것이요, 과감하게 하는 것은 민첩한 것이다. 인과 의는 덕(德)의 부고[府]요 몸을 보전하는 것이니, 이것으로 스스로 처하고 부지런함과 민첩함으로써 행하면 무엇인들 되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하물며 이 동헌이랴! 김군은 자호씨의 알아줌을 저버리지 말고, 내가 군을 믿는 것에 맞출지어다. 숙주(叔舟)는 공명(功名)으로 세상을 속인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벼슬을 그만두고 남방으로 돌아가려 한다. 나의 시골이 성주와 접경하였으니, 만일 한 번 빈객의 자리에 참여하게 된다면 동헌의 좋은 경치를 그대를 위하여 시로 지으리라.” 하였다.
○ 고려(高麗) 이조년(李兆年)의 시에, “부탁하노니, 꽃을 심는 것을 다시 더하지 말라. 수효가 백에 차면 되지. 더할 필요는 없다. 매화와 국화의 맑은 표격(標格) 이외에, 잡되게 붉은 것들이 많은 것은 부질없지.” 하였다. ○ 고려 왕강(王康)의 시에, “세상일 시끄러움 날마다 더해지는데, 정화(菁華)는 그럭저럭 눈앞에서 지나간다. 한 헌(軒)의 꽃 피고 지는 것 흥미없지만, 오히려 맑은 읊조림이 늘그막에 많음을 기뻐한다.” 하였다. ○ 남재(南在)의 시에, “만가지 일이 해마다 귀밑의 눈(雪)만 더한다. 청춘 시절이 마치 망아지가 틈을 지나는 것 같구나. 백화헌(百花軒) 위에 거듭 노는 날에, 금정(金井) 가을 오동(梧桐)이 많은 생각을 자아내리.” 하였다. 흥민각(興民閣) 객관 남쪽에 있다. 좌우에 홍련(紅蓮)ㆍ백련(白蓮) 두 당(堂)이 있고, 모두 연못이 있다. 목사 민영견(閔永肩)이 세웠다.
【누정】 임풍루(臨風樓) 객관 북쪽에 있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記)에, “성주 고을 생긴 것이 산천이 수려 기이하고, 인물이 번화하여 상주(尙州)ㆍ진주(晉州)ㆍ경주(慶州)ㆍ복주(福州)와 더불어 남방에서 서로 상하를 다툰다. 그 때문에 비록 한 지경의 우두머리는 되지 못하나, 특별히 목(牧)으로 일컬은 것이다. 내가 옛날 벼슬하여 돌아다닐 때에 두세 번 이르렀는데, 한없는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고 고운 땅이었다. 그러나 마음에 맞지 않는 것은 객관 동쪽에 주(州)의 청사가 바짝 닿아 담을 연하여서, 구경하고 바라보는 데 장애가 있었다. 좌우들에게 물어보니 지은 지가 이미 오래되어서 연월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헐면 고을 사람들에게 해로움이 닥칠까 백여 년을 지내오면서 고치지를 못한다.” 하였다. 성주는 큰 고을이어서 국가에서는 반드시 진신(搢紳) 가운데의 영준(英俊)한 사람을 뽑아서 목사로 보내니, 이 선발에 응하는 사람은 참으로 강명(剛明) 준걸한 인재가 아니면 칼날이 무디어져서 그 극무(劇務)를 이기지 못하고 명예는 곧 떨어진다. 경태(景泰) 2년 신미(辛未)에 이후(李侯)가 이 고을에 두번째 목사로 나왔는데, 닭을 베는 재능이 있어 폐단되는 것은 제거하고, 이익되는 일은 일으켜서 명성과 공적이 멀리 알려졌다. 드디어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주(州)의 청사를 빈땅에 넓히고 새 다락을 일으키는데, 재목은 폐사(廢寺)를 뜯어오고, 힘은 관청의 심부름하는 한가한 군사들을 이용하며, 기와는 새로 굽지 않고, 돌은 애써서 치지 않게 하여 잠깐 동안에 이루어졌다. 이내 단청(丹靑)을 칠하니 화려하고 높은 것이 꿩이 나는 것 같고, 새가 날개 버린 것 같아서 우뚝하게 고을의 장관(壯觀)이 되어 비로소 영남루(嶺南樓)ㆍ촉석루(矗石樓)와 아름다움을 다투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 한 가지 작은 일로도 후(侯)의 지혜와 용단이 전 사람보다 훨씬 나은 것을 볼 수 있다. 을해(乙亥)년 봄에 후가 전(箋)을 받들고 서울에 와서 본말을 갖추어 말하고 또 이름과 기문을 청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객관과 주(州)의 청사가 서로 붙어 있는 것은 내 눈으로 본 것이다. 예전에 막혔던 것이 지금은 통하고, 예전에 좁던 것이 지금은 통창하여졌으니, 전에는 어찌 그리도 구애되었고 뒤에는 어찌 그리도 통창하게 되었는가. 열자(列子)의 냉연(冷然)한 것과 초왕(楚王)의 쾌재(快哉)의 당함이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이름을 임풍(臨風)이라 하라. 관리가 정무에 분망하다가 막히고 답답한 것을 소창하고 정신을 상쾌하게 하여, 영귀(詠歸)의 흥을 발하는 것도 반드시 여기에서 얻을 것이요, 묵객(墨客)이 시를 읊조리어 꽃과 달을 희롱하고 정회를 펴서 호탕(浩蕩)한 기운을 붙이는 것도 또한 여기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하물며 주인이 술을 내고, 좋은 손이 자리에 앉아 눈을 천리까지 바라볼 수 있어 만가지 경치를 거두어 들이고 젓대[笙]와 피리가 어우러지고 주고받는 술잔이 서로 섞이어 노래 소리는 바람을 쫓아 날고 춤추는 소매는 바람에 나부끼어 들면, 어찌 한 번 조이고[一張] 한 번 늦추는[一弛] 시간이 되지 않겠는가. 생각하건대 강산과 풍월이 그 전에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산만하여 통속이 없다가 지금 이 한 다락을 세우매 모두 궤석(几席) 아래에 집중되었으니, 그런 후에야 풍경에 부끄러움이 없고 후(侯)의 공이 천만 배로 드러날 것이다. 이것을 어찌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증』 강혼(姜渾)의 시에, “비 뒤에 강물이 불어서 노[篙]가 빠져서 오는데, 기둥에 기대어 물결을 보니 장하기도 하다. 첩첩한 물결은 푸른 풀 물갓을 완전히 쌌고, 연이은 봉우리의 반은 흰 구름 무더기에 들어갔다. 짧은 짐대[棹]를 끌고 고깃배에 오르고 싶기도 하고, 긴 낚싯대를 잡아 낚시터에 오르고도 싶다. 10년 동안 강해(江海)의 뜻이 오늘 아침에 흥이 나서 술 석잔 마시네.” ○ “시험삼아 아름다운 시구(詩句)를 읊조리어 하늘이 아끼는[天慳] 것을 발로하니, 마침 다락 가운데에 부서(簿書 공무 처리) 한가함을 만났도다. 붉은 제비가 번갈아 나는데 바람은 버들을 스치고, 푸른 개구리가 어지럽게 우니 비가 산에 어둡다. 일생 동안 훼방을 받으니 몸에 병이 많고, 반년을 달려 다니니 귀밑이 얼룩지려 한다. 황각(黃閣 정승의 집) 친구의 편지가 끊어졌으니, 객의 형색이 쓸쓸하게 시골에 머물러 있도다.” ○ “구름 사다리가 높이 하늘에 기대었는데, 달 밝을 때 다락에 오르니 젊은 나이가 아니로세. 산수의 굴(窟)에서 길이 읊조릴 흥이 있고, 비단 자리에서 한 번 취할 마음도 없네. 아침 정원에는 실 같은 비요, 저문 날 촌락에는 담담한 연기로다. 청천(晴天) 방초(芳草)의 구(句)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부지런히 시를 써두니, 당 나라 시인에게 부끄럽다.” 하였다. ○ 용(龍)이 게으름에서 일어나 기이한 공을 자랑하노라고 여러 날 동안 침침한 구름이 하늘을 막았네. 평지에는 넉넉히 석자의 물결이 더하였고 긴 강에는 누가 반 돛의 바람을 빌릴까. 누대(樓臺)는 꾀꼬리와 꽃 속에 은은히 보이고 염막(簾幕)은 연기와 안개 가운데에 흐릿하도다. 사모(四牡)로 상재(桑梓)의 고을을 물으니, “고향을 생각하는 왕찬(王粲)은 나와 같기 어렵다.” 하였다.
청운루(靑雲樓) 성 동문 안에 있다. ○ 고려(高麗) 안유(安裕)의 시에, “초여름에 절월(節鉞)을 나눠 받아 삼복(三伏) 동안을 바닷가 치원대(致遠臺)에서 읊조리며 지냈다. 역마를 탄 사자(使者)가 번개처럼 달리어 비밀 명령을 전하니, 과거(科擧)에 어진 재주를 뽑으라고 불같이 독촉한다. 성산(星山)의 급한 장마 물을 뗏목으로 건너고, 월굴(月窟)의 맑은 바람은 계수나무 기르는 것을 재촉한다. 미리 상상하노니, 글을 아뢰고 경사를 여는 자리에 봉의 피리와 단판(檀板)이 천 무더기이리.” 하였다. ○ 임춘(林椿)이 잠깐 이 고을에 놀러 왔는데 고을 원이 이름난 기생을 시켜 모시고 자게 하였더니, 밤이 되자 도망하여 돌아갔다가 이튿날에 연석(宴席)으로 바로 가서 시를 짓기를, “홍장(紅粧) 미인이 새벽을 기다려 금전(金鈿)을 붙이는 것은 재촉하는 부름을 입고 비단 자리에 나온 때문이지. 장관(長官)의 엄한 호령도 두려워하지 않고, 공연히 나그네의 나쁜 인연(因緣) 나무라네. 다락에 올라 퉁소 부는 짝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달[月]로 달아나서 약을 훔치는 신선이 되었네. 청운(靑雲)의 어진 학사(學士)에게 말을 전하노니, 어진 마음으로 포편(蒲鞭)을 쓰지 말게나.” 하였다. ○ 박효수(朴孝脩)의 시에, “누(樓) 아래 사는 사람들의 우스개 말 시끄럽고, 다리 밑 흐르는 물에 버들 그늘이 짙구나. 최호(崔顥)의 방초(芳草)를 쓸 수 없는 것이 한이다. 누가 등왕각(騰王閣)을 위하여 낙하(落霞)를 읊으리. 새벽에 산 비는 대순을 구워 먹는[燒筍] 흥을 재촉하고, 들바람은 모 심는 노래를 보낸다. 억지로 졸한 글귀를 써 두니 참으로 운치로구나. 벽에 가득히 용처럼 날치는 취한 붓글씨가 비껴 있다.” 하였다.
몽송루(夢松樓) 옛터가 성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중수하여 정자를 만들었다. ○ 이숭인(李崇仁)의 누기(樓記)에, “홍무 기원(洪武紀元) 8년에 의성(義城) 정후(丁侯)가 선발되어 경산(京山 성주)을 다스리는데, 부임한 뒤에 정사가 잘 되고 풍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즐겁게 여기었다. 그리하여 읍내 북쪽에 다락을 짓는데 재목을 베고 기와를 굽는 것을 농사철 아닌 때를 맞추어 하고, 공장이는 노는 사람을 부리었다. 다락의 구도는 동마루와 처마 끝을 높게 하여 그 바라보는 것을 넉넉하게 하고, 단청을 얇게 하여 검소한 것을 표하였다. 준공이 되자 여러 노선생들을 초청하여 술을 내어 낙성(落成)을 하고 또 이름 지을 것을 생각하는데, 술이 반쯤 되자 후(侯)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다락이 이루어졌으니 이름을 지어달라.” 하였다. 노선생 제공(諸公)들이 다락은 후가 지은 것이므로 몽송(夢松) 두 글자를 들어서 편액(扁額)하였으니, 대개 옛 사람의 사업과 명위(名位)를 후에게 바란 것이었다. 후가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러 선생이 다락의 이름을 지었으니 그대는 기(記)를 지으라.” 하였다. 내가 사양하지 못하여 말하기를, “무릇 놀고 구경하는 누대(樓臺)를 설치한 것은 그 낙(樂)을 붙이자는 것인데, 낙(樂)은 형상이 없으니 반드시 저기에 붙인 뒤에야 형상되는 것이다. 소위 낙이라는 것은 사람이 스스로 얻는 것인데, 그 즐거운 것을 미루어 넓히면 백성은 내 동포 형제이고, 물(物)과 내 무리[與]가 되어서 훈훈[和]한 기운과 무르녹은 은혜의 진액이 이르지 않는 데가 없을 것이니, 한갓 저 놀고 구경하는 것에 힘쓰는 자의 즐거움이란 것이 너무 좁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남의 관장(官長)이 된 자는 그 즐거워하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지금 후가 이 다락에 오르면 다른 봉우리와 첩첩한 멧부리, 긴 내와 질펀한 숲이 연기와 구름 아득하고 흐릿한 사이를 숨었다 나타났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여 바라보기는 하여도 끌어올 수는 없던 것이 궤와 책상에 있는 것같이 되었다. 나무꾼은 숲에서 노래하고, 농사꾼은 들에서 노래하고, 길 가던 나그네가 그늘에서 쉬는 것, 소와 말이 흩어져 있는 것, 새들이 날아다니는 것에 이르기까지 물(物)이 모두 제 낙을 낙으로 여기고, 후(侯)가 물과 함께 하는 것도 또한 한 번 부앙(俯仰)하는 사이에 유쾌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가 여기에 이른 것은 단묵(丹墨) 부서(簿書) 밖에 있는 것이 있으리라. 훗날 후가 순리 명관의 으뜸으로서 재상이 된다면 제공들이 다락의 이름을 지은 것이 더욱 징험이 될 것이다. 나는 원래 후의 정치가 착한 것을 좋아하지만, 이번의 일이 물(物)과 함께 즐기는 뜻이 있기 때문에 기(記)를 짓고 굳이 사양하지 않노라. 혹 말하기를, “《춘추(春秋)》에 공사(工事) 일으킴이 있을 때마다 반드시 쓴 것은 칭찬하지 않는 뜻이다. 그대의 기(記)는 어디에 속하는가. 전(傳)에, ‘때는 굴(屈)한데 일은 지나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나의 기(記)가 춘추의 필법에 있어서는 일은 같으나, 아름답고 악한 것이 다르다는 뜻이다.” 하였다. 동정(東亭) 주 동쪽 5리에 있다. 못 위에 돌기둥을 세워서 정자를 지었다.
『신증』 남정(南亭) 주 남쪽 1리에 있다. 김우(金祐)가 지었다. ○ 황필(黃㻶)의 기(記)에, “성주가 영남 상류(上流)에 있어 호구의 번성한 것과 송사의 번다한 것과 빈객의 모이는 것이 한 도(道)의 제일이니, 참으로 통달하고 민첩한 인재가 아니면 반근착절(盤根錯節)에 시험하여 그 효용(效用)을 보기 어렵다. 정축(丁丑)년 가을에 김우(金祐)가 성주 목사로서 일을 본 지 1년 만에, 정사가 간략하여지고 교화가 행하고, 나그네가 그 길에 다니고자 하며 쇠한 것이 일어나고 묵은 것이 새로워졌다. 고을에 전부터 토성(土城)이 있는데 치첩(雉堞)이 기울어 무너졌고, 나각(羅閣)이 모두 백여 칸인데, 모두 촌 백성을 시켜 보존하고 지키게 하니, 백성들이 심히 괴롭게 여기었다. 김후가 감사 김극성(金克成) 공(公)에게 보고하고 조정에 아뢰고는 경진(庚辰)년 겨울 10월에 일을 시작하였다. 역사가 한 달이 넘지 않아서 성이 이루어졌다. 높이는 선 것과 같고 길이는 끄는 것 같아 천연(天然)으로 세워진 것 같으니, 보장(保障 군사상(軍事上) 방어(防禦))의 웅대한 것이 으뜸이었다. 성의 남쪽 모퉁이를 보니 빈 땅이 있는데, 오랫동안 풀이 우거진 언덕이었다. 올라서서 바라보니 냇물이 삼면에 둘러 있고, 봉만이 사면에서 읍(揖)하는 것 같고, 푸른 눈썹 같은 공산(公山)과 연기와 구름이 낀 가야산(伽倻山)과 창ㆍ칼 같은 금오산(金烏山)을 궤안(几案) 사이에 서로 마주보게 되어 있었다. 생각건대 당시의 산천과 초목이 최고운(崔孤雲)의 해타(咳唾)를 겪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요, 여리(閭里)와 향당(鄕黨)이 길야은(吉冶隱)의 시서(詩書)의 유풍(遺風)에 흥기됨이 있었을 것이다. 개천과 두렁이 서로 얽히고, 벼와 곡식이 들에 가득하며 봄에는 가는[耕] 것을 살피고 여름에는 일을 권하고, 가을에는 거두는 것을 살피는 일을 여기에 앉아서 다 할 수 있다. 후(侯)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여기에 정자를 지을 수 있다.” 하고, 판관(判官) 박주형(朴冑亨) 군과 의논하여 곧 그 땅을 다스려 평평하게 하고 정자 3칸을 지었는데, 제도가 매우 한가롭고 통창하여 손의 자리를 펴고 노래와 춤을 벌이기에 여유가 있었다. 또 부엌 몇 칸을 세우고 측간[厠]과 담을 모두 갖추었다. 재목은 폐사(廢寺)의 것을 취하고 기와는 나각(羅閣)의 묵은 것을 쓰고, 공장이는 잘하는 솜씨에 맡겨 백성에게 빌리지 아니하여 두어 달이 못 되어 정자가 새롭게 되었으니, 그 땅의 웅장함과 경개의 절승함이 진주(晉州)의 촉석루(矗石樓)와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와 더불어 백중(伯仲)을 다투게 되었다. 아, 어찌 그리 신기한가. 고을에 예전에 동ㆍ북 두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남정(南亭)으로 이름 지었다. 정자가 이루어진 뒤에 내가 곤남(昆南)에서 선산(善山)으로 향하는데 이 고을로 지나게 되었다. 후가 나를 정자 위에 앉혀 술을 권하고 기(記)를 부탁하였다. 내가 거칠고 졸한 글로 정자의 벽을 더럽힐 수는 없지마는 생각하건대, 후가 돌아가신 나의 맏형과 동갑이기 때문에 의(義)가 형제의 분(分)이 있으므로 사양하지 못하였다. 토지의 성쇠와 물리(物理)의 성훼(成毁)는 운수가 그 사이에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고을이 성립된 것이 몇 천 년 전인지 알지 못하고, 고을의 목사가 된 자가 전후에 몇 사람인지 알지 못하며,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고 알아도 성취하지 못한 자가 또한 있어서 반드시 우리 김후를 기다렸으니, 이것은 성주의 토지ㆍ성곽ㆍ정관(亭館)ㆍ문물(文物)이 김후를 만나서 한 번 재조(再造)된 것이다. 한(漢) 나라의 공수(龔遂) 황패(黃霸)의 덕을 표창하는 것을 지금에도 바랄 수 있거니와 다른 날 순리(循吏)의 전(傳)을 쓰는 자가 이 사람을 빼고 누구를 쓸 것인가. 이것이 참으로 쓸 만한 것이다. 후의 자는 길부(吉夫)요, 광산(光山) 사람인데, 젊어서 성균관에서 영준(英俊)들과 교유(交遊)하였고, 수령이 되어 가는 곳마다 치적(治績)이 모두 제1이었고, 뒤에 큰 고을 충주(忠州)ㆍ양주(楊州)의 목사가 되었을 때에도 혁혁한 명성 때문에 사람들이 잊지 못한다.” 하였다. 향사당(鄕射堂) 곧 용흥폐사(龍興廢寺)다.
【학교】 향교(鄕校) 주 북쪽 2리에 있다. 문묘(文廟)가 모두 흙으로 만든 상(像)인데,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처음에 향교의 종이 개성(開城) 대성전(大成殿)에 가서 한 번 보고 돌아와서 똑같이 소상(塑像)을 만들었다.” 하였다. ○ 허종항(許從恒)의 시에, “묘전(廟殿)이 높직하여 학교를 누르고 있다. 남으로 향한 초상이 몇 가을을 지냈는고. 은근히 뜰 앞의 은행나무에게 묻노니, 누가 안자(顔子)ㆍ증자(曾子)이고, 누가 자공(子貢)ㆍ자로(子路)인가.” 하였다.
【역원】 답계역(踏溪驛) 주 북쪽 10리에 있다. 안언역(安偃驛) 주 남쪽 28리에 있다. 무계역(茂溪驛) 무계진(茂溪津) 동쪽에 있다. 설화역(舌火驛) 화원현(花園縣) 서쪽 5리에 있다. 고평역(高平驛) 팔거현(八莒縣) 서쪽 5리에 있다. 인화원(仁化院) 주 동쪽 8리에 있다. 사원(蛇院) 주 남쪽 34리에 있다. 동안원(東安院) 동안진(東安津) 언덕에 있다. 공배원(公排院) 주 동쪽 25리에 있다. 이동원(李同院) 주 남쪽 42리에 있다. 약보원(若寶院) 주 북쪽 2리에 있다. 광대원(廣大院) 주 서쪽 20리에 있다. 인원(引院) 화원현(花園縣) 남쪽 20리에 있다. 대야원(大也院) 주 북쪽 29리에 있다. 봉서원(鳳棲院) 팔거현 북쪽 15리에 있다. 숭유원(崇儒院) 팔거현 북쪽에 있다. 예전 이름은 독유(獨儒)인데, 관찰사 손순효(孫舜孝)가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원(院)에 다락이 있다. 다른 이름은 척이(斥異)다. 유원(柳院) 팔거현 남쪽 5리에 있다. 작원(鵲院) 팔거현 남쪽 10리에 있다. 흥왕원(興王院) 화원현 서쪽 1리에 있다. 사읍제원(沙邑梯院) 가리현(加利縣) 동쪽에 있다. 다품원(多品院) 주 북쪽 11리에 있다. 월항원(月恒院) 주 북쪽 18리에 있다. 퇴계원(退界院) 주 서쪽 25리에 있다. 관음원(觀音院) 주 남쪽 22리에 있다. 통신원(通信院) 주 동쪽 30리에 있다.
【창고】 화원창(花園倉) 예전에는 인흥사(仁興寺)를 빌려서 본현(本縣)의 군수(軍需) 미곡을 저장하였는데, 세조(世祖) 때에 현 읍내 남쪽에 따로 세웠다. 왜국 사신이 가지고 오는 동(銅)ㆍ철(鐵)ㆍ소목(蘇木) 등 여러 가지 물건을 여기에 저장하여, 지출하고 사용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불우】 용흥사(龍興寺) 고을 성북 문 밖에 있다. 대장당(大藏堂)이 있는데, 이인복(李仁復)이 기를 지었다. 인흥사(仁興寺) 비슬산(琵瑟山) 북쪽에 있는데,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이 액자(額字)를 썼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흥인사(興仁寺)가 포산(苞山 현풍(玄風)) 기슭에 있는데, 내가 옛날에 놀 때에 눈과 반딧불을 짝 삼았다. 시주(施主)는 때때로 부처에 예를 하고, 중은 맑은 낮에 앉아서 경(經)을 말한다. 뜰에 서 있는 탑은 우뚝하고 희며, 길을 끼고 있는 긴 솔은 낱낱이 푸르다. 가장 생각나는 것은 황금(黃金)의 천상필(天上筆)이 지금도 광채가 빛나는 별빛이 화성(華星) 쏜다.” 하였다. 심원사(深源寺) 가야산(伽倻山) 남쪽에 있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심원의 옛 절이 가야산에 있는데, 소나무ㆍ잣나무 그늘 가운데에 문을 닫지 않았다. 능엄경(楞嚴經)을 듣고 미묘한 뜻을 물어보려 하는데, 이 몸의 한가함으로 빌어 얻을 수 있을는지.” 하였다. 안봉사(安峯寺) 주 서북쪽 10리쯤 되는 곳에 있다. 이장경(李長庚)ㆍ이조년(李兆年)ㆍ이숭인(李崇仁)의 진영(眞影)이 처음에는 선석사(禪石寺)에 있었는데, 세조(世祖)의 태(胎)를 선석산(禪石山)에 봉산하여 그 절을 철폐하자, 이씨의 자손들이 그 진영을 이 절에 옮겼다. 적산사(積山寺) 적산에 있다. 곧 이직(李稷)의 고택(故宅)인데, 지금은 절이 되었다. 용연사(龍淵寺) 비슬산(琵瑟山) 북쪽에 있다. 법수사(法水寺) 가야산 남쪽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에 있다. 『신증』 오성(五聖)과 십철(十哲)을 예전에는 소상(塑像)으로 만들었는데, 목사 강중진(康仲珍)이 위판(位版)으로 고쳤다. 성황사(城隍祠) 주 성안에 있다. 여단(厲壇) 주 북쪽에 있다.
【고적】 성산(城山) 화원현(花園縣) 북쪽 5리에 있다. 작은 산이 큰 강을 베고 있는데 그 위가 평평하고 넓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왕이 꽃을 구경하던 곳이므로 화원현의 이름을 얻은 것이 이 때문이다.” 한다. 그 아래에 예전에 금강정(錦江亭) 오류정(五柳亭)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강 북쪽에 상국리(上國里) 세자지(世子旨) 등의 땅이 있는데 모두 신라 왕의 장전(帳殿)의 터다. 가야산성(伽倻山城)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5천 9백 35척, 높이가 5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서 여섯 시내와 열 개의 샘이 있다. 평탄하고 험한 것이 반반이다. 독용산성(禿用山城) 주 서쪽 3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8천 64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는 시내 셋과 샘 하나가 있다. 팔거산성(八莒山城) 현 동쪽에 있다. 주(州)까지 78리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4백 23척이다. 지금은 반이 퇴락하였다. 안에는 샘 둘과 못 하나가 있다. 도산현(都山縣) 김부식(金富軾)이 말하기를, “본래 적산현(狄山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쳐 성산군(星山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하였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않다. 신곡부곡(薪谷部曲) 주 서북쪽 30리에 있다. 위곡부곡(葦谷部曲) 주 동쪽 30리에 있다. 선남부곡(船南部曲) 주 동쪽 15리에 있다.
【명환】 고려 이총언(李忩言) 태조(太祖) 초년에 본부(本府) 장군이 되어 본성(本城)을 지켰는데, 임금이 친히 쓴 조서로 금석(金石) 같은 친구가 되기를 약속하여 말하기를, “백자(百子) 천손(千孫)까지 이 마음 변하지 말지어다.” 하였다. 총언이 시종 한결 같은 절개를 지키었다. 임금이 명하여 옆 고을의 민구(民口)를 주어 그 호구(戶口)를 보태고 또 소금과 곡식 4천여 곡(斛)을 상으로 주었다. 김황원(金黃元) 선종(宣宗) 때에 부사가 되었다. 아전이 살인 강도를 잡아 오자 황원이 한참 보더니 말하기를, “이것은 도적이 아니다.” 하고, 빨리 석방하게 하였다. 판관 이사강(李思絳)이 힘써 다투기를, “이 도적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마땅히 죄를 다스려야 한다.”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에 다른 도적이 잡혔는데 과연 지난번에 살인한 자였다. 아전과 백성들이 그 신명(神明)함에 탄복하였다. 이영(李永) 숙종(肅宗) 때에 경산 부사가 되었다. 최척경(崔陟卿) 판관이 되었는데 아전과 백성이 사랑하고 두려워하였다. 왕세경(王世慶) 의종(毅宗) 때에 과거에 올라 경산 부사가 되었는데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다. 윤택(尹澤) 사록(司錄)이 되었다. 이보림(李寶林) 부사가 되었을 때에 길에서 여자가 우는 것을 듣고 말하기를, “우는 소리가 슬프지 않고 기뻐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하고 붙잡아서 심문하니 과연 간부(奸夫)와 공모하여 남편을 죽인 자였다. 어떤 사람이, “이웃 사람이 내 소의 혀를 잘랐다.”고 고소하였는데, 이웃 사람이 자백하지 않았다. 보림(寶林)이 그 소를 목마르게 하고 동네 사람들을 모아 물에 간장을 타서 명령하기를, “차례로 소에게 물을 먹이되 소가 물을 마시려 하거든 곧 다시 빼앗으라.” 하였다. 동네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고소를 당한 사람에 이르러서는 소가 놀라 달아났다. 심문하니 과연 자백하였다. 또 어떤 사람의 말이 달아나서 남의 보리 싹을 거의 다 뜯어 먹었다. 보리밭 주인이 고소하려 하자 말 주인이 말하기를, “나도 보리밭이 있으니 너의 보리가 수확이 없거든 내 보리를 너에게 주겠으니 고소하지 말라.” 하므로 보리 주인이 승낙하였었다. 여름이 되어 보리가 다시 싹이 나서 조금 수확할 수가 있었다. 말 주인이 말하기를, “네 보리도 결실하였다.” 하고 주지 않았다. 보리 주인이 고소함에, 보림이 명령하여 말 주인은 앉고 보리 주인은 서게 하고 말하기를, “경주(競走)를 하여 따르지 못하는 자는 벌을 주겠다.” 하였더니 말 주인이 따르지 못하였다. 왜 졌느냐고 물으니 말하기를, “저 사람은 서고 나는 앉았으니 따를 수가 있습니까?” 하였다. 보림이 말하기를, “보리도 그러하다. 뜯어 먹은 뒤에 다시 싹이 났으니 온전한 수확이 될 수 있느냐. 네가 말을 놓쳐서 보리를 먹게 하였으니 죄가 한 가지요, 고소하지 못하게 빌었으니 죄가 두 가지요, 약속을 어기고 주지 않았으니 죄가 세 가지다.” 하고, 곤장을 때리고 보리를 고소한 사람에게 돌려주었다. 정치를 하는 것이 엄하고 밝기가 이와 같았다.본조 권득경(權得經) 목사가 되었다. 정치가 맑고 공평하여 아전과 백성이 사랑하였다. 관(官)에서 죽었다. 손소(孫昭) 목사가 되어 명성과 치적이 있다.
『신증』 윤석보(尹碩輔) 목사가 되어 청렴하고 밝은 정치를 하였다. 김우(金祐) 목사가 되었다.
【인물】 고려 이장경(李長庚) 본래 고을 아전이다. 집에 있다가 귀한 사람이 지나가는 벽제(辟除) 소리를 들으면, 곧 방에서 나와 땅에 엎드려서 지나간 뒤에 일어났다. 뒤에 정승(政丞)에 증직되고 농서군공(隴西郡公)으로 봉해졌다. 다섯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 이천년(李千年) 장경(長庚)의 아들이다.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다. 이만년(李萬年) 장경의 아들이다. 이조년(李兆年) 장경의 아들이다. 충렬왕(忠烈王) 때에 과거에 올라 비서랑(祕書郞)에 옮겨 왕을 따라 원(元) 나라에 조회하였다. 뒤에 충숙왕(忠肅王)이 참소를 당하여 원 나라에 머물러 있는데, 조년이 분히 여겨 원 나라에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바쳐 왕의 죄 없는 것을 하소하니, 조정에서 아름답게 여겼다. 충혜왕(忠惠王)이 원 나라에 숙위(宿衛)하여 있을 때에 자못 근신하지 못하는 것으로 소문이 났다. 조년이 경계하는 말을 아뢰기를, “전하가 천자를 섬기고 있으니 마땅히 하루하루 새로워야 하겠는데, 어째서 예(禮)를 버리고 정욕에 방종하여 스스로 누(累)를 초래(招來)하십니까. 좌우가 모두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니 어디에서 바른 말을 듣고 바른 일을 보겠습니까. 원하건대 행실을 고쳐 경계하고 유아(儒雅)한 선비를 친히 하소서.” 하였다. 왕이 그 말을 싫어하여 담을 넘어서 달아났다. 조적(曺頔)의 난에 백관들이 적에게 붙었는데 조년이 의리로 적(頔)의 당을 효유하여 듣는 자가 모두 감격하였다. 왕이 아첨하는 소인을 가까이하고 충성하고 곧은 사람을 미워하여 조년이 사직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송강(松岡)에서 탄자(彈子)로 참새를 잡을 때 조년이 끓어 앉아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명이(明夷)의 때를 잊으셨습니까? 지금 악소년들이 전하의 위력을 빙자하여 부녀자들을 노략하고 재물을 강탈하여 백성들이 살 수가 없으니, 신은 화가 조석에 있을까 두렵습니다. 이것을 근심하지 않고 도리어 작은 오락에 빠지십니까. 전하가 늙은 신의 말을 들어서 아첨하고 간사한 자를 버리고, 어질고 선량한 사람을 쓰며 다시는 부질없이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신은 비록 죽더라도 눈을 감을 것입니다.” 하였다. 자주 간하여도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탄식하기를, “자주 간하여도 듣지 않으니 책임이 돌아갈 데가 있다. 이미 그 아름다움을 순하게 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 악함만 더하게 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도리가 아니니, 가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다음날에 필마(匹馬)로 고향에 돌아가서 인간의 일을 간섭하지 않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의 직함으로서 죽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이포(李褒) 조년(兆年)의 아들이다. 성품이 순후하여 예법대로 행동하였다. 벼슬이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다. 시호는 경원(敬元)이다. 이승경(李承慶) 장경(長庚)의 손자다. 원 나라 조정에서 벼슬하여 여러 번 옮겨 요양성 참정(遼陽省參政)이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6년에 어머니 상사에 분상(奔喪)하여 환국하였는데, 이듬해에 원 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벼슬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이백전(李百全) 사부(詞賦)로 진용(進用)되어 벼슬이 국자감 대사성 보문각 학사(國子監大司成寶文閣學士)에 이르렀다. 이승휴(李承休) 가리현(加利縣) 사람이다. 젊어서 아버지를 잃고 학문에 힘써서 고종(高宗) 때에 과거에 올라 벼슬이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이르렀다. 성품이 정직하여 세상에 구함이 없었다. 뒤에 두타산(頭陀山) 귀동(龜洞)에 들어가서 몸소 밭갈아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곳에 산 지 10여 년에 안집사(安集使) 이심돈(李深敦)이 권하여 서울에 갔는데, 뒤에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어 소(疏)를 올려 옳고 그른 것을 지극히 말하다가 임금의 뜻에 거슬려 벼슬을 파하고 구동 전날 숨었던 곳으로 돌아와서 따로 용안당(容安堂)을 짓고 《제왕운기(帝王韻記)》를 저술하였다. 10년 만에 충선왕(忠宣王)이 글을 내리어 부르니 승휴가 늙고 병들었음으로써 사양하였다. 왕이 다시 글을 내리기를, “과인(寡人)이 평소에 경의 이름을 듣고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여 지금 경에게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주는 것이니, 창생(蒼生)을 위하여 한 번 일어나시오.” 하니, 승휴가 이에 일어났다.
이인복(李仁復) 자는 극례(克禮)며, 포(褒)의 아들이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과거에 올라 복주 사록(福州司錄)이 되고 춘추공봉(春秋供奉)에 전직되었다. 충혜왕(忠惠王) 때에 원 나라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대령로(大寧路) 금주 판관(錦州判官)이 되었다. 동으로 돌아왔을 때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하였는데, 인복이 명망이 있으므로 네 번 옮기어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삼았다. 공민왕이 원 나라에 아뢰어 정동행중서성 좌우사랑중(征東行中書省左右司郞中)을 제수하였더니, 신돈(辛旽)에게 거슬려 파면되었다. 흥안(興安) 부원군으로 봉하고 조금 뒤에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죽자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인복은 민지(閔漬)의 《편년강목(編年綱目)》, 충렬ㆍ충선ㆍ충숙 세 왕조의 실록(實錄), 《고금록(古今錄)》ㆍ《금경록(金鏡錄)》을 편찬하였다. 인복이 가만히 아뢰기를, “신돈이 훗날에 반드시 변이 있을 것이니 멀리하소서.”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뒤에 신돈이 처단을 당하자 왕이 인복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을 탄복하였다. 인복이 그 아우 인임(仁任)ㆍ인민(仁敏)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패하고 집을 망칠 자는 반드시 두 아우라.” 하더니 뒤에 과연 패하였다. 뒤에 충정왕(忠定王) 묘정에 배향하였다. 이숭인(李崇仁) 공민왕(恭愍王) 때에 과거에 올랐다. 본국에서 문사를 뽑아서 원 나라 서울에 응시(應試)하는데, 숭인이 첫째로 뽑혔으나 나이 아직 25세가 되지 못하였으므로 보내지 않았다. 신우(辛禑) 때에 예문관 제학이 되어 서연(書筵)에 들어갔는데 ‘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 청주(淸州)에 갇혔다가 얼마 안 있어 소환되어 지밀직사사 동지춘추관사(知密直司事同知春秋館事)가 되었다. 또 정몽주(鄭夢周)의 당으로 멀리 귀양갔다가 조금 뒤에 죽었다. 숭인(崇仁)은 자질이 총명 민첩하고 문장(文章)이 전아(典雅)하였다. 이색(李穡)이 매양 탄복하여 칭찬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하여 보더라도 시대마다 이런 사람 흔치 않다.” 하였다. 명 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숭인이 지은 표(表)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어, “표의 문사가 참으로 간절하다.” 하였고, 중국의 사대부들이 숭인의 저술을 보고 탄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도은집(陶隱集)》이 세상에 행한다. 배극렴(裵克廉) 개국공신이고 좌시중(左侍中)이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이직(李稷) 포(褒)의 손자다.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이 되고 태종(太宗)을 도와 좌명공신(左命功臣)이 되어 성산(星山)부원군으로 봉해졌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아들 사후(師厚)는 벼슬이 한성 부윤(漢城府尹)에, 사원(師元)은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사순(師純)은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이견기(李堅基) 포(褒)의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이르렀다. 당시에 장자(長者)로 일컬어졌으며, 시호는 안성(安成)이다. 이함녕(李咸寧) 사후(師厚)의 아들이다. 을묘년에 장원하여 벼슬이 집현전 교리(集賢殿校理)에 이르렀으며, 일찍 죽었다. 이정녕(李正寧) 사후(師厚)의 아들이다. 태종(太宗)의 딸에게 장가들어 성원위(星原尉)가 되었다. 시호는 장절(章節)이다. 배규(裵規) 세종(世宗) 때 사람이다. 아들 윤(閏)과 한(閑)이 모두 과거에 올라 부자가 연이어 간원(諫院)에 들어가니 사림(士林)이 아름답게 여기었다.
『신증』 이집(李諿)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贊成)에 이르렀다. 시호는 공숙(恭肅)이다. 이자견(李自堅) 과거에 올라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이자건(李自健) 자견의 아우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이자화(李自華) 자건의 아우다. 기개가 있고 과거에 올라 벼슬이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우거】 고려 김수(金洙) 선산부(善山府) 조에 자세히 나왔다.본조 김맹성(金孟性) 수(洙)의 후손이다. 과거에 올라 벼슬이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이르고 조행이 있었다.
【효자】 본조 김문상(金文尙) 수(洙)의 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상을 당했을 때 전후 6년을 시묘 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하였다. 김자강(金自强)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는데, 어머니를 봉양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머니가 죽어서 치상하는데 불교 의식을 따르지 않고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의하였다. 장사할 때에 아버지 무덤을 옮기어 합장하고 3년을 시묘 살면서 신을 신지 않았다. 복을 마치고 또 추후로 아버지를 위하여 다시 3년을 시묘하려 함에, 아내의 친정 가족들이 끌고서 돌아오게 하고 그 여막을 불태워 버렸다. 자강(自强)이 연기 나는 것을 돌아보고, 하늘을 부르짖고 땅을 두들겼다. 이에 힘껏 떠밀치고 다시 돌아가 무덤 앞에 엎드려서 3일 동안을 일어나지 않았다. 인아(姻婭) 친척이 효성에 감동되어 다시 여막을 지어 주었다. 자강이 또 3년을 처음과 같이 살았다. 박구(朴矩) 벼슬이 가정(嘉靖) 도총제(都摠制)에 이르렀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을 시묘하고 한 번도 집에 이르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승득(金承得) 벼슬이 대언(代言)에 이르렀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한결같이 가례(家禮)를 좇고 불교 의식을 좇지 않았으며, 3년을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방계(金邦啓) 연이어 부모상을 당하고 또 조부상을 입어서 모두 9년을 시묘하였는데, 한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김신환(金信還) 어버이가 죽자, 장사를 한결같이 가례를 좇고 3년을 시묘하였다. 나라에서 물품을 주었다.『신증』 배경동(裵敬同) 어머니가 악한 병에 걸리자 손가락을 잘라 약에 타서 먹이니 병이 곧 나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이식(李植) 부모가 전염병에 걸려 함께 죽자 조석으로 전(奠)을 드리는 정성을 다하여 6년을 마치었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하였다.
【열녀】 고려 배씨(裵氏) 이숭인(李崇仁)의 〈배열부전(裵烈婦傳)〉에, 배씨(裵氏)는 진사(進士) 배중선(裵中善)의 딸이다. 15세가 넘은 뒤에 사족(士族) 이동교(李東郊)에게 출가하여 내정의 일을 잘 다스렸다. 홍무(洪武) 경신년에 왜적이 경산(京山)에 침입하여 온 경내가 소요하여 감히 막을 자가 없었다. 동교는 그때 합포(合浦) 원수(元帥)의 막(幕)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적병이 배씨의 사는 동네에 돌입하자, 배씨는 젖먹이 아들을 안고 달아났다. 적이 쫓아서 이르렀는데 강물은 바야흐로 창일하였다. 배씨가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어린 아들을 언덕 위에 놓고 강물로 뛰어들었다. 적이 활을 겨누며 말하기를, “나오면 죽이지 않겠다.” 하였다. 배씨가 적을 돌아보고 꾸짖기를, “왜 나를 속히 죽이지 않는가. 내가 어찌 적에게 더럽혀지랴.” 하였다. 적이 화살을 쏘아 어깨를 맞추었다. 두 번 쏘아 두 번 맞아, 강 가운데에서 죽었다. 체복사(體覆使) 조준(趙浚)이 그 일을 임금께 아뢰어 정려하였다. 나씨(羅氏) 감찰(監察) 나상(羅尙)의 딸이고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 배윤(裵閏)의 아내다. 윤이 죽었을 때 나씨의 나이 젊은데 머리를 깎고 3년 동안 무덤을 지켰으며, 무릇 상례와 장례를 한결같이 가례를 좇고 불교의식을 따르지 않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 정려(旌閭)하였다.
본조 눌덕(訥德) 그 남편 정수(鄭守)가 호랑이에게 잡혔는데 눌덕이 칼을 가지고 호랑이를 쳐서 남편이 벗어났다. 일이 조정에 들리어 정려하였다.『신증』 문덕(文德) 서원(書員) 김계하(金戒河)의 아내다. 남편이 물에 빠져 죽자, 곡읍(哭泣)을 끊지 않고 3년상을 마치었다. 부모가 개가시키려 하자 곧 머리를 깎고 시부모의 집으로 가서 15년이 넘도록 마늘ㆍ파ㆍ술ㆍ고기를 먹지 않고 사람들과 더불어 웃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일이 알려져 정려하였다.
【제영】 교목구려회세덕(喬木舊閭懷世德) 이곡(李穀)의 시에, “교목과 옛 거리는 세덕을 생각하고, 낙하(落霞) 고목(孤鶩)은 재주 없음이 부끄럽다.” 하였다. 일렴향무금성퇴(一簾香霧錦成堆) 전 사람의 시에, “다시 백화헌(百花軒) 속에서 자려 하니, 발에 가득한 향기 안개요, 비단이 무더기를 이루었다.” 하였다. 강분낙수천지준(江分洛水天池濬) 이첨(李詹)의 시에, “강은 낙수를 나누었으니 천지가 깊고, 눈[雪]은 가야산(伽倻山)을 눌렀으니 지축(地軸)이 웅장하다.” 하였다. 호산형승갑남주(湖山形勝甲南州) 김수녕(金壽寧)의 시에, “호산의 좋은 경개가 남주에서 으뜸인데, 백 가지 온갖 모양 봄빛이 아직 가을이 되지 않았구나.” 하였다. 교목한연쇄고주(喬木寒煙鎖古州) 강희맹(姜希孟)의 시에, “교목의 찬 연기는 옛 고을에 잠겼는데, 집집의 감과 밤은 서리 가을을 만났도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광해주 7년에 신안 현감(新安縣監)으로 강등시켰다. 고을 사람인 이창록(李昌祿)이 시사(時事)를 논하여 대역죄(大逆罪)로 국문 받아 죽었기 때문이다. 인조 원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동 7년에 성산 현감(星山縣監)으로 강등시켰다. 고을 사람 박흔(朴訢)이 목베어 죽었기 때문이다. 효종 4년에 다시 승격시켰다가 영조 12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읍인(邑人)이 목사를 독살하였기 때문이다. 동 21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방면】 주내(州內)ㆍ강남(舡南) 본래 강남(舡南)의 부곡(部曲)인데, 동쪽으로 20리다. 화곡(禾谷) 동쪽으로 20리다. 오도(吾道) 동쪽으로 30리다. 대동(大同) 동쪽으로 35리다. 용산(龍山) 동남쪽으로 10리다. 산남(山南) 동남쪽으로 15리다. 초곡(草谷) 동남쪽으로 20리다. 두의(豆衣) 동남쪽으로 30리다. 조곡(祖谷)ㆍ다질(茶叱) 모두 동남쪽으로 40리다. 벌지(伐旨) 동남쪽으로 60리다. 남산(南山) 남쪽으로 10리다. 지사(知士) 남쪽으로 15리다. 성법산(省法山) 남쪽으로 20리다. 운라(雲羅) 남쪽으로 30리다. 소야(所也)ㆍ흑수(黑水) 남쪽으로 50리다. 대척(大尺) 남쪽으로 40리다. 사등(沙等) 서남쪽으로 15리다. 대리(大里) 서남쪽으로 30리다. 소건(所件) 서남쪽으로 35리다. 오차(吾次) 서남쪽으로 60리다. 운곡(雲谷)ㆍ본아(本牙) 모두 40리다. 대가곡(大家谷) 서쪽으로 10리다. 명암(明巖) 서쪽으로 30리다. 덕곡(德谷) 남쪽으로 30리다. 금물(今勿) 서쪽으로 40리다. 증산(甑山) 서쪽으로 50리다. 초전(草田) 서북쪽으로 30리다. 신곡(薪谷) 본래 신곡의 부곡인데 서북쪽으로 40리다. 북산(北山) 북쪽으로 10리다. 당소(唐所) 북쪽으로 30리다. 비호석(非乎石) 북쪽으로 20리다. 이물(爾物) 서쪽으로 50리다. 노장곡(蘆長谷)ㆍ유동(柳洞) 동쪽으로 10리다. ○ 위곡(葦谷)의 부곡인데 동쪽으로 30리다.
【성지】 읍성(邑城) 옛날에 흙으로 쌓았다가 중종 15년에 돌로 고쳐 쌓았다. 선조 24년에 또 고쳐 쌓았는데, 둘레가 6천 53척인 둥근 성이다. 청동문(淸東門)에 있는 누는 영춘루(迎春樓)라 하고, 북문 바깥에는 용흥사(龍興寺)가 있다. 독용산성(禿用山城) 본래 도산성(都山城)인데 서쪽으로 33리다. 수도산(修道山)의 동쪽인데 옛날 돌로 쌓았다. 숙종 원년에 고쳐 쌓았다. 둘레가 4천 5백 81보며, 옹성(甕城)으로 일포루(一砲樓)다. 개천 네 개, 샘 두 개이며, 평탄하고 험함이 반반이다. ○ 속읍은 성주ㆍ고령(高靈)이다. ○ 수성장(守城將)이 본래 목사 겸 별장을 겸하였으며 1명이다.
【누정】 호산정(湖山亭)ㆍ쌍도정(雙島亭).
【진도】 동안진(東安津) 동쪽으로 20리, 소야강(所耶江)의 하류다. 무계진(茂溪津) 동남쪽으로 50리, 동안진의 하류다.
【토산】 대[竹]ㆍ닥종이[楮]ㆍ감.
【창고】 읍창 두 개. 동안창(東安倉) 동쪽으로 26리에 있다. 달창(達倉) 서북쪽으로 25리에 있다. 가리고현창(加里古縣倉)ㆍ산성창(山城倉)ㆍ남창 남쪽으로 40리에 있다. 천평창(泉坪倉) 서쪽으로 30리에 있다.
【능묘】 관왕묘(關王廟) 선조 정유년 천장(天將) 제국기(第國器)가 세웠는데, 영조 정미년에 남정(南亭) 아래로 옮겨 세웠다. 관우(關羽) 경도(京都) 동묘(東廟) 편을 보라.
【사원】 천곡서원(川谷書院) 중종 무자년에 세우고 선조 계유년에 사액하였다. 정숙자(程叔子)ㆍ주자(朱子)ㆍ김굉필ㆍ이언적(李彦迪) 모두 문묘편에 보라. 정구(鄭逑) 충주 편을 보라. 장현광(張顯光)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이며 인동(仁同) 사람이다. 벼슬은 우참찬 증영의정(右參贊贈領議政)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 회연서원(檜淵書院) 인조 정묘년에 세우고 숙종 5년에 사액하였다. 정구 충주 편을 보라. ○ 충렬사(忠烈祠) 숙종 기유년에 세우고 정조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제말(諸沫) 선조 임진왜란에 전사하였는데, 벼슬은 성주 목사 증병조판서(星州牧使贈兵曹判書)며, 시호는 충무(忠武)다. 이사룡(李士龍) 본주(本州) 포수(砲手)였는데, 인조 무인년에 청(淸) 나라 징병으로 요동(遼東)에 들어가서 금주(錦州) 송산에서 순절하였다. 성주 목사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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