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성성불의 기준점 도성제(道聖諦)》
,
추석이 돌아왔네요.^^
처음에는 형님들 두 분에게 이것을 알려드리고 싶어서 이런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요.^^
지금은 저도 모르게 칠백 명이 조금 넘는 분들이 함게 하게 되었네요.🪷🙏🏻
제가 운영하고 있는 사이트에는 대략 이백 명 좌우가 되는 것 같고요.
다른 선원이나 불교 단체에서도 63곳이 제 글을 같이 공유하고 있는데요.
다들 얼굴은 모르지만 마음만은 항상 여러분들과 함게 하고 있답니다. (진실)
그리고 제가 본래 이런 글을 쓰던 사람이 아니다 보니까 많은 것들이 부족한데요.
예전에는 한국에서 일을 할 때에는 사채업과 야매로 변호사업을 20년 넘게 하다 보니까 법원에 넣을 소장은 정말로 많이 꾸몄었는데요.
사실은 처음에는 소장 쓰는 기분으로 이런 글을 쓰기 시작했었는데요.^^
그러다 보니 글이 너무 직설적인 것이 흠인데요.
이렇게라도 계속 쓰면서 느끼는 것은 이번에는 이런 주제로 써봐야지? 하는 느낌으로 쓰려고 하면 글이 잘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선문염송]이나 옛 어른들의 내용들을 해석하면서 그냥 마음에서 일어나는 대로 글을 쓰게 되면 오히려 글이 잘나가는 것을 느끼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선문염송]을 선물해 주신 스님께 항상 감사함을 느끼고 있답니다.
아무튼 그래도 많은 분들이 부족한 저의 글들을 보시고 호응을 해주시니 많은 힘이 되고 보람을 느끼고 있는데요.
솔직히 처음에는 한 1년 정도 해보다가 반응이 시원찮으면 "내가 갈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포기를 하고 다시 중국으로 들어갈 생각이었거든요.
어차피 저는 중국에서 열심히 살다가 죽으려 했으니까요.
이 법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진짜로 저는 중국에서 살다가 죽으려 했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불교 쪽과 한 1년 정도 같이 지내보니까 영 아니더라고요?
제 경우는 사채업을 오래 하던 사람이고 석탄 쪽으로 일을 하던 사람이다 보니까 무슨 일을 벌이든 항상 사업 파트너들을 본격적으로 일을 하기 전에 이리저리 시험을 해보는 버릇이 있는데요.
아무튼 그래서 처음에는 한 일 년 정도 불교 쪽으로 같이 하면서 이것은 아니다 싶어서 저도 포기를 할까 하다가 저의 글을 보시는 분들이 얼굴은 모르지만 반응이 너무 좋기에?
"아, 이것이 돈은 1원도 안 돼도 내가 가야 할 길이다"
하는 마음이 들어서 혼자라도 해보자 하는 마음을 먹고 하게 된 것이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요?
이것을 하면서 저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은 정말로 많은 분들이 이것을 원하고 있구나 였는데요.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답니다.
처음에는 형제간들에게도 제가 한국에 들어와 있다는 얘기도 안 하고 혼자 방 잡아놓고 당구장 쪽으로만 돌아다녔었거든요.^^
그때 만난 선후배들도 지금 이 글과 함게 하시는 분들이 꾀 되는데요.
지금은 대외적으로는 술도 당구도 모두 끊었지만 그래도 항상 묵묵히 봐 주셔서 감사함을 많이 느끼고 있답니다.💪🏻🙏🏻
아무쪼록 모두들 추석 한가위 잘 보내시고 항상 건강하십시오.😃🪷🙏🏻
나이를 먹어 갈수록 건강 박에 없더라고요?^^~
그리고 모든 분들이 꼭 열심히 정진하셔서 한 분도 빠짐없이 꼭 성불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
[선문염송] 중에서.. (166편) 20240916
제목 : 현산(峴山)
마조에게 정경이 와서 뵈니, 묻되 "어디서 오는가?" 정경이 대답호대 "현산에서 옵니다" 마조가 다시 묻되 "현산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가?" "서근 두 냥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무거운고?" "저울과 자가 제 손에 있습니다" 하니, 마조가 깔깔 웃었다.
주) 1. 저울과 자 운운.. 재량권을 쥐었다는 뜻.
,
(한문 원본)
峴山
馬祖因定慶參 問什麼處來 慶云 峴山來 祖云 峴山重 多少 慶云 三斤二兩 祖云 爲什麼祗重許多 慶云 秤尺 在手 祖乃 啊啊大笑
,
(또 다른 번역본)
【一六六】 마조가 정경(定慶)이 참알(參謁)함으로 인해 묻되 어느 곳에서 오느냐. 정경이 이르되 현산(*峴山)에서 옵니다. 마조가 이르되 현산의 무게가 얼마인가. 정경이 이르되 3근 2량(兩)입니다. 마조가 이르되 무엇 때문에 다만 무게가 허다하냐. 정경이 이르되 칭척(秤尺)이 손에 있습니다. 마조가 이에 하하 대소했다.
.
.
ㅡ♡♡
.
.
안녕하세요.
[이뭣고]의 곁가지 김태현입니다. 😄🙏
한 주일 잘 보내셨지요..^^
8년 전 초기에 글을 쓸 때만 해도 이런 글에 누가 관심을 가져 줄까 싶어서 집안 형님과 지인 형님 한 분에게 이것을 알려주는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왔네요.
※ 이 글은 주로 수행을 처음 하시는 분들을 위주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쉽게 풀어서 설명하느라 글이 좀 길답니다.😅
ㅡ♡
(본문 해설)
여기서 말하는 현산(峴山)은 중국 후베이 성(湖北省)에 있는 양양현(襄陽縣)이라는 곳의 남쪽에 있는 산(山)이라고 되어있었는데요.
그리고 현산정경선사(峴山定慶禪師)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니까 중국 자료에도 이름과 내용들은 많이 나오는데 약력에 대해서는 나오질 않네요?
한국 자료에도 마조도일의 제자로만 나와있었고요?
약력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대로 진행을 하겠습니다.^^~
,
오늘 내용은 스승인 마조와 정경이라는 제자와의 일화인데요.
하루는 현산에서 정경이 수행을 마치고 마조에게 와서 뵈니,
마조가 정경에게 묻되
"어디에서 오는가?"
하니 정경이 대답하되
"현산에서 옵니다"
했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다시 마조가 묻되
"현산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가?"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거기서 수행을 한 후
"얼마나 마음을 비우고 돌아왔느냐?"
또는
"수행을 한 후 무엇을 얼마나 얻었는고?"
라는 뜻이랍니다.
그랬더니 정경의 대답이?
"서근 두 냥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인데요.
그랬더니 마조의 대답이?
"어째서 그렇게 무거운고?"
이 말의 뜻은?
"어째서 마음을 다 비우지 못하고 그리 무거운고?"
라는 뜻이랍니다.
그랬더니 정경의 대답이 아주 걸작입니다?^^
"저울과 자가 제 손안에 있습니다"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한명회가 수양대군과 함께 계유정난을 주도했을 때 했던 말과 같은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천하가 바로 이 손안에 있소이다."
하고 말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저울과 자가 제 손안에 있다"라는 말은?
자기가 마음의 무게를 늘릴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다는 뜻으로 자신의 마음은 자신이 자유자재(自由自在)로 할 수 있다는 뜻이랍니다.
자기 마음을 거침없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쓸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마조가 깔깔 웃었다는 뜻인데요.^^
마조가 정경의 도력을 인정한 것이지요.👍🏻
(끝🤗)
,
(보충 설명)
요즘 들어 제가 깨달았다는 표현을 일부러 자주 쓰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절대로 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고요.
좀 더 적극적으로 이 법을 알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일부러 그러는 것이니 혹시라도 좀 거시기하게 보이더라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특히 오늘처럼 깨달음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에는 따로 예를 들 수도 없고 해서 제 경우를 예를 드는 것인데요.
그리고 법 앞에서는 돌려서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답니다.^^
,
불교에서 흔히 깨닫게 되면 마음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는 얘기를 많이 하잖아요?
오늘은 거기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본성을 깨닫고 증득을 하게 되면 마음이 엄청 고요해지고 마음이 고요하니까 자동으로 마음도 차분해진답니다.
어느 절 책자에서 본 열반경에 이런 내용이 있더라고요?
[마음은 경거망동하여 다스리기 어려우며 날뛰어 도망침이 야생 동물 같으며 번갯불같이 시시각각 변하며 까불고 가만히 있지 않아 원숭이 같으니 온갖 선악행(善惡行)의 근본임이 분명하다. -열반경-]
지금 이 내용은 예전에 꼭 제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좋아하게 된 문구인데요.^^
맞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이법을 깨닫고 증득을 하게 되면 한순간에, 찰나에, 일 순간에 이러한 것들은 싹 없어진답니다.
왜냐하면 중생의 마음에서 보살의 마음으로 확 바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0% 진실)
열반경에 나오는 내용처럼..
마음이 경거망동하던 것도 바뀌게 되고
마음도 잘 다스리게 되고
전혀 마음이 날뛰는 경우도 없게 되고
번갯불같이 시시각각으로 마음이 변하는 경우도 없게 되고
마음이 원숭이처럼 절대로 까불 돼지도 않게 된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깨닫고 증득을 하게 되면 한순간에 마음이 엄청 고요해지고 평온해지기 때문인데요.
그 고요하고 평온한 마음은 정말이지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맛보지 못한 그런 안락한 마음이랍니다.
물론 살다 보면 "어? 이대로 둬서는 안되겠는데?" "중생들(살아있는 모든 것) 마음이 많이 다치겠는데?"
하는 경우에는 본성의 마음에서 스스로 일어나는 마음으로 방편의 일환으로 일부러 와당탕할 때는 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평온한 마음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 거랍니다.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마음은 완전히 평온하고 고요한데 겉으로는 엄청 화를 내는 그런 느낌이요?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많이 웃는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진짜로 화가 나서 날뛰는 경우라면 지금은 화가 전혀 안 나는 상태에서 작전상 방편으로 날뛰다 보니까 이러고 있는 자신이 웃길 수 박에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것이 훨씬 더 무서울 수도 있고요.
왜냐하면 마음이 아주 냉정한 상태에서 감정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 경우는 야차(夜叉)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간접적으로나마 해보곤 했는데요.
아무튼 깨닫고 증득을 하게 되면 한순간에 찰나에 곧바로 마음이 이렇게 완전히 평온하고 고요하게 바뀌게 된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마음이 흔들림이 없게 된답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깃발로도 비유를 한 것이고요.
그래서 깨닫고 증득을 하게 되면 인가를 받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제일 먼저 잘 알게 된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예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뀌니까요.
이런 상태가 되어 있어야 [도성제] 내용들도 할 수 있는 거랍니다.
이것이 안 되어 있으면 자꾸 세상 것에 끌려가게 되거든요.
그래서 100%는 아니더라도 팔정도와 육바라밀 정도는 행할 줄 알아야 깨달았다 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북쪽이고 남쪽이고 지금 어른들을 들여우(가짜)라 하는 거랍니다.
물론 성문사과(聲聞四果)에 따라 차등은 있지만 기본적인 마음 상태는 마음이 비어있기 때문에 마음이 엄청 고요하고 차분해지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고요?
한문으로는 이런 상태를 [여여(與與) 하다]라고 하는 것이고요.
쉽게 말해 깨닫고 증득을 하게 되면 마음이 여여(與與) 하게 바뀌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비어있고 고요하고 차분해지다 보니까 마음도 엄청 넓어져서 자비심도 생기는 것이고요.
이렇게 마음이 비어있고 고요하고 차분해지다 보니까 팔정도나 육바라밀이나 육신통 등도 할 수 있는 것이고요.
자꾸 이런 얘기를 해서 뭐 합니다만 지금 어른들처럼 마음이 좁고 욕심이 많아서 항상 쫓기는 마음으로는 이런 것들을 도저히 해낼 수가 없다는 것이고요.
마음 상태가 자기가 우선이고 자기가 급한데 무슨 수로 팔정도가 가능하고 육바라밀이 가능하고 육신통 등이 가능하겠어요?
자기들 몸이 우선인데요.
그러나 깨닫고 증득을 한 사람들은 마음이 우선이랍니다.
그래서 누차 말씀드립니다만 본성 자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몇천만 원씩 대가를 받아 가면서 천도재다 명패 봉안이다 친견비다 하면서 열들을 올리는 것이고요.
그래서 이들을 들여우(가짜)다 하는 거랍니다.
이것은 그 어떠한 변명을 갔다 붙여도 빼도 박도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고요.
그리고 한국 불교 전체가 이런 쪽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고 그 주된 범인들이 불교계에 최고 어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특히 깨닫고 증득을 하게 되면 무엇을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게 된답니다. (진실)
그저 하루하루 성실히 일하면서 마음 관리에만 치중을 하게 되지요.
솔직히 관리라 할 것도 없지만 경전을 보면서 나머지 공부(후 공부)에만 전념을 다하게 된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텅 비어있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다른 곳에는 의식이 갈 여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는 이법을 깨닫고 지금도 계속해서 새로운 경전들을 보면서 놀라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는데요.
왜냐하면 옛날식 표현이라 여러분들이 아직 못 알아차려서 그렇지 경전 속에는 초기 수행 방법부터 깨닫고 나서 부처가 되기까지 전과정을 아주 세밀하고 자세하게 기록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내용도 "저울과 자가 제 손에 있습니다"라는 내용은 도성제(道聖諦)에 해당하는 내용이고요.
깨닫고 증득한 도인들은 도성제의 내용들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성제의 주 내용인 팔정도(八正道)와 육바라밀(六波羅蜜)과 육신통(六神通) 등은 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통 같은 경우에는 [성문사과]나 [1지 보살~10지 보살]에 따라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긴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깨닫고 증득을 한 사람들은 최소한 팔정도와 육바라밀 정도는 충분히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걸림 없이 할 수 있어야 실제로 깨닫고 증득을 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내용에서 정경도 마조에게 이러한 것들을 자유자재로 거침없이 걸림 없이 할 수 있다는 뜻에서 "저울과 자가 제 손에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고요.
그래서 이런 내용이 나올 때마다 자꾸 이런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고요.
지금 어른들처럼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천도재나 명패 봉안이나 친견비 따위를 받고 중생들을 대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하는 것이고요.
왜냐하면 본성의 마음에는 그 어떠한 것도 달라붙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천도재나 명패 봉안이나 친견비와 같은 것들이 마음에 달라붙는다는 것은 완전히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정말로 그런지 안 그런지 [팔정도]로 한번 예를 들어 볼까요?
어떻게 천도재나 명패 봉안이나 친견비 따위를 받는 사람들을..
① 정견(바르게 보는 사람)
이라 할 수 있을까요?
나머지 내용들도 이런 식으로 비교를 해보십시오?
② 정사(바르게 생각하는 사람)
③ 정어(바르게 말하는 사람)
④ 정업(바르게 행동하는 사람)
⑤ 정명(바르게 살아가는 사람)
⑥ 정근(바르게 노력하는 사람)
⑦ 정념(바르게 기억하고 생각하는 사람)
⑧ 정정(바르게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사람)
안 그런가요?
지금 이런 내용들은 결코 제 이야기가 아니랍니다.
저는 그저 경전에 나와 있는 그대로 옛 어른들 말씀들 그대로 지금 식으로 전해 드리고 있는 것뿐이랍니다.
그리고 또 누차 말씀드립니다만 깨닫고 증득을 했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육바라밀 중 단 하나도 행하지를 못하느냐 이겁니다?
하다못해 그 흔한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도 극히 몇몇 분들만 빼고는 행하는 것을 못 봤고요?
이런 것도 못하는 분들이 무슨 깨닫고 증득을 한 사람들이라 하겠습니까?
말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하나 정도는 행할 줄 알아야지요?
,
지계(持戒)에 해당하는 계율도 마찬가지랍니다.
요즘 출가자들 처놓고 계율을 지키려고 애를 쓰는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시지요?
계율은 고사하고 최고 어른들이라 하는 분들이 천도재다 명패 봉안이다 친견비에 눈들이 벌개있는데요.
어떻게 그런 짓들을 하는 출가자들을 지계를 지키는 부처님 제자라 할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
인욕(忍辱)에 해당하는 참을성도 부족해서 깨달았다고 하는 어른들이 조금만 뭐라 해도 발끈발끈 성을 내기 일쑤인데요.
,
정진(精進)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당연히 선정(禪定)은 물 건너 간 것이지요?
,
육신통도 마찬가지랍니다?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도 못 알아차리는데 무슨 통(通)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잖아요?
자기 자신하고도 못 통(通)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세상과 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도 모르는데 어떻게 중생들 마음을 알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시면 방편이 될 수 있고 통(通)도 할 수 있게 된답니다.
예를 들면
만약에 중생들이 부모나 처자식을 여의고 마음이 힘들어서 혹시라도 천도재나 명패 봉안 등을 통해 마음에 위안이라도 얻으려고 절에 큰 스님들을 찾아왔다고 합시다.
당연히 사랑하는 부모나 처자식이 죽으면 그 마음이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럽겠어요?
이런 불자가 절에 찾아와서 고인의 명복 좀 빌어달라고 하는데 매몰차게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법이 곧 마음인데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나라는 아직 제사문화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화를 무시만 할 수도 없고요.
그래서 불교가 기존에 토속 신앙들을 받아들인 것 아니겠어요?
그러면 이런 사람들을 불교로 승화(昇華) 시켜서 불법을 전해줄 마음을 가져야 할 출가자들이 오히려 자기들이 앞장서서 그런 짓들을 하고 있으면 어떡하냐? 이겁니다.
안 그런가요?
백번 양보해서 천도재나 제사나 명패 봉안 등을 할 수 없이 방편으로 해준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디까지나 방편으로 끝나야지요?
경허 선사도 그렇게 해서 제사를 지내주었었고요.
예를 들면 하더라도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돈이나 재물을 받지 말고 무료(보시)로 하라는 것입니다.
방편으로 제주(祭主)에게 평소에 고인이 된 부모나 처자식이 좋아하셨던 음식이나 몇 가지 구해서 오라하고 쌀과 과일은 절에도 많이 있으니 깨닫고 증득한 사람으로서 중생들의 마음을 위해 무료로 돌아가신 영령들의 마음(본성)을 비추어보면서 혹시라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으면 해결해 줄 수는 있어도?
그런데 중생들의 이런 마음을 악용해서 그것도 몇천만 원씩 받아 가면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짓들을 해서야 되겠느냐? 이겁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나 만약에 반대로?
"어느 절에 가니까 큰 스님께서 천도재나 명패 봉안이나 제사를 무료로 해준다고 하더라"
하면 그 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겠어요?
그래서 이것이 방편이 되려면 공짜(보시)로 해주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마음을 거침없이 쓰는 마음이고 걸림이 없이 쓰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쪼잔하게 깨달았다고 하는 어른들이 재물이나 돈에 의식이 가 있으면 걸리는 마음이 되는 것이고요.
천도재나 제사 등을 할 수 없이 해줄 때에는 공짜(보시)로 해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편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요.
예를 들면 제주에게..
기본적인 음식만 장만해 오라 하고,
음식도 절에서 할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직접 해오라 하고요.
그 정도 성의도 없이 고인들을 위로할 거면 야단을 쳐서 "너네 집에나 가서 하라" 하고요.
절에서 모든 것을 음식까지 다 하려 하니까 인건비도 그렇고 계산이 복잡해지는 거랍니다.
그러지 말고 돈 들어가는 것들은 제주에게 해오라 하고 절에서는 장소와 집기들을 빌려주고 끝나면 설거지와 집기 정리도 제주들이 하게 하고 제사 주관은 큰스님이 해주면서 죽은 영혼을 위해 염불이나 해주면 상주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겠어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절대로 단돈 1원도 제주에게 대가를 바라거나 받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돈이나 재물을 받으면 큰 스님에 대한 믿음이나 존경심 등이 확 떨어지니까요.
스님들 쪽에서는 돈이나 재물보다 더 큰 것을 얻어야 한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 마음이고요.(※)
자연히 입소문이 나지 않겠어요?
"그 스님은 참으로 깨달은 큰 스님이다"
하면서 말이지요.
이것보다 출가자에게 더 큰 영광과 명예가 또 어디 있겠어요?
이런 식으로 하시면 반드시 입소문이 나서 큰스님들 얼굴이라도 보려고 이 절 저 절로 모여들지 않겠어요?
왜냐하면 지금 사람들은 옛날 사람들보다 마음이 훨씬 척박하고 힘들기 때문이랍니다.
사람들이 절로 모여들면 자동으로 돈과 재물들도 모여들게 되어있고요. (교회가 좋은 예)
왜냐하면 중생들의 심리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민족은 그 어느 민족들보다도 군중심리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중생들끼리 놔두면 자기들끼리 잘 뭉치게 되어있답니다.
문제는 절에 사람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야지요?
그나마 있는 것도 스님들이나 절 쪽에서 인위적으로 모임을 만들게 해서 자기들끼리 다툼이나 일으키기 일쑤이고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성들이 강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모임을 만들게 하면 거의가 얼마 못 가고 깨지기 일쑤랍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절 쪽에서 자기들끼리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어울릴 수 있도 장소나 음료수 정도만 제공해 주어도 잘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이고요.
단 주의해야 할 것은 어떤 경우라도 공식적인 자리 외에는 스님들이나 절 쪽에서 나서서 모임에 참견을 하거나 관여를 해서는 안 되고요.
그 이유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어떤 모임이든 모임이 형성되면 반드시 그곳에는 리더 역할을 하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랍니다.
이때 절에서 무슨 행사나 할 것이 있으면 리더들을 모이게 해서 리더들끼리 대화를 나누게 해야 한답니다.
여기서도 주의해야 할 것은 절대로 스님이나 절 쪽이 나서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라" 또는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저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시면 안 되고요.
스님이나 절 쪽에서는 예를 들면 이런 식을 말을 해야 한답니다.
"이번에 우리 절에서 이런 행사나.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데 우리 힘 만으로는 조금 힘이 부치네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고민을 털어놓듯이 도움을 구하는 말투로 하셔야 한답니다.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 하시면 안 되고요.
특히 공양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면 우리 민족의 특징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희한하게 없던 것도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면 있던 것도 하기 싫어서 없애버리는 경우가 많고요.
우리나라 사람들 특징이 그러하답니다.
오죽하면 625 때에도 소대장이 꼴 보기 싫으면 전투할 때 뒤에서 소대장을 총으로 쏘겠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묘하게 청개구리 심리가 있어서 불교뿐만이 아니라 기독교도 누구든 앞에서 설쳐대면 설쳐 댈수록 흩어지는 습성이 있답니다.
물론 강력한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리더를 할 때에는 다르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불교 내에 스님들 중에 이런 리더십이 강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우리 속담에 이런 얘기가 있답니다.
어른들은 어렸을 때 농촌에서 사셨던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시골에서 소를 몰아보셨을 것 아니겠어요?^^
소를 몰 때에는 절대로 앞에서 강제로 끌려고 하면 오히려 소가 끄는 사람을 뿔로 들이받는답니다.
먼 길을 소를 몰고 갈 때에는 항상 여물통을 입 앞에 물리고 뒤에서 살살 몰고 가야 한다는 사실을요.
이 방법이 우리 민족을 그동안 이끌어 나갔던 유능한 리더들의 방법이랍니다.
그리고 이 방법이 우리 민족들의 특징을 잘 표현해 놓은 옛 어른들의 비유이고요.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꼭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이고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천도재를 하든, 제사를 하든, 명패 봉안을 하든 항상 그 자리를 대중들을 위한 축제 자리로 만들어야 한답니다.
그래야 소처럼 사람들 마음을 살 수가 있는 것이고요.
신라나 백제 시대 때 불교가 부흥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답니다.
당시에는 먹을 것도 볼거리도 부족했기 때문에 그나마 절에 가면 먹을 것도 많았고 승무(僧舞)다 뭐다 해서 볼거리도 아주 많았기 때문이랍니다.
어른들은 잘 아시잖아요?
어렸을 때 시장에 약장수만 들어와도 온 동내 사람들이 다 모여들던 것을요?
고려 때까지만 해도 불교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조선이 들어서면서 억불정책으로 시들해져서 그렇지요.
염불도 그 당시에는 지금으로 하면 의미 있는 노래였답니다.
자료들을 찾아보면 우리 고전 무용이나 창(唱/판소리)도 불교문화에서 유래된 것이고요.
왜냐하면 판소리가 무당들의 굿판에서 유래된 것이긴 하지만 본래는 굿판 역시 불교의 승무나 염불을 모방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 다 신라나 백제 때 고려 때까지 대중들을 위한 재미난 프로그램 불교문화를 모방하고 응용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후대 스님들이 계승 발전을 못 시키고 고리타분한 불교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어서 그렇지요.
지금도 보십시오?
불교는 방편인데 방편은 고사하고 조선시대 때 그대로지 않습니까?
사람도 바뀌고 사회도 바뀌고 생활도 바뀌었는데 불교만 고리타분하게 그대로잖아요?
기독교도 개신교가 나오기 전까지는 불교보다 훨씬 더 고리타분했던 종교였답니다.
가톨릭은 그야말로 근엄하고 권위 그 자체였으니까요.
내부적으로도 갈등과 부패도 엄청 심했었고요.
그래도 다행히 기독교는 종교개혁이 일어나서 오늘날과 같은 부흥을 누리고 있는 것이고요.
불교도 지금이 바로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점이고요.
그러려면 젊은 스님들이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서 들고일어나셔야 한답니다.
젊고 유능한 스님들은 지금 이 내용을 잘 새겨서 들어야 한답니다.
어차피 한번 출가를 했으면 이 땅에 뜻있는 일 한번은 하고 죽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젊은 스님들이 앞장을 선다면 뜻있는 재가자들도 뒤를 따를 것이고요.
사실은 불교 개혁을 하기가 가장 좋았던 시기는 경허선사 사후에 그의 제자들 시기가 가장 좋았던 찬스였다고 저는 보고 있는데요.
그 이유는 그 당시가 그래도 가장 유능한 스님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없앴어야 할 천도재 같은 것들은 놔두고 엉뚱한 곳에만 후벼파는 바람에 그 기회를 놓쳐서 그렇지요.
혹시나 경허선사 제자들도 역시 가장 수입원이 높았던 천도재 같은 것들을 손대지 못하고 마음이 걸려서 못했을 수도 있다는 마음도 들기는 하는데요?
자기들 스승인 경허선사처럼 자유롭고 걸림 없는 마음을 쓰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불교계에서는 예전에 있었던 이런 좋은 불교문화들을 다시 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보십시오?
점심때 공양간에 가보면 젊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음식들만 가득 있지 않던가요?
볼거리와 즐길 거리도 그렇고요?
맨날 자기들도 못 알아듣는 얘기만 하고 앉아 있으니 누가 그런 절을 찾아가려고 하겠어요?
시간 날 때 교회에 학생회 점심시간 때 한번 교회에 가보세요?
피자에 햄버거에 콜라에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진수성찬들을 한번 보시라 이겁니다.
음료수도 아메리카 아이스커피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요.
그러나 절은 어떻던가요?
어른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그것도 여름에 뜨거운 중국차를 폼 잡으면서 대중들에게 내놓고 있지 않던가요?
입에서 인심 난다고 지혜를 따지는 불교가 이것이 뭡니까?
불교는 마음을 다루는 종교인데 오히려 무식하게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불교겠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천도재든 명패 봉안이든 어느 행사를 하시든 무료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마음으로 하시면 반드시 젊은 사람들도 모여들게 되어있고 젊은 사람들이 모여들면 반드시 절 안은 생기가 돌면서 풍요로워질 수박에 없다는 것입니다.
돈만 벌 생각을 하지 마시고?
절 안을 젊은 사람들의 안식처로 만들어 주라는 것입니다.
지금처럼 노인들이 절 안을 장악하고 있으면 어느 젊은이들이 절 안에서 모이려 할까요?
천도재를 지내든, 제사를 지내든 무료로 봉사하고 그 음식들을 서로가 나누면서 화기애애(和氣靄靄) 하게 절 안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해 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스님들뿐만이 아니라 모여 있는 대중들이 얼마나 많은 칭찬을 하게 될 것이고 서로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까짓 돈이나 재물을 챙기는 것보다도 요.
그러면 그중에는 젊은 사람들이 나도 불교 공부를 하고 싶다 하면서 수행 좀 가르쳐 달라 할 수도 있고요?
제사 음식을 다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부처님 법에 대해 잠깐 소개를 할 수도 있고요?
이러면 자연스럽게 절에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겠어요?
이렇게 하면 기독교보다 훨씬 유리하게 포교를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어차피 아직은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훨씬 많이 있고 더군다나 요즘 젊은이 들은 제사를 지내고 싶어도 법을 몰라 못 지내는 경우도 많이 있고요.
그리고 지금 시대에는 명상이다 뭐다 해서 젊은 사람들이 마음 둘 곳이 없어서 이런 곳들을 수도 없이 찾아다니는 판에?
이럴 때에 불교 어른들이 나서서 어차피 절 안에는 파리들만 날리고 있는데 이럴 때에 솔선 수범을 해서 봉사(보시)를 한다면 얼마든지 불교가 좋은 이미지로 다시 태어나지 않겠어요?
그런데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재물이나 돈에 눈과 마음이 얽매여서 그것도 부모나 처자식을 잃고 가장 마음이 아프고 힘들 때에 그런 마음을 이용해서 그것도 몇천만 원씩 요구를 하는 것이 불교를 말아먹으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제정신이냐 이겁니다?
이런 사람들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스님들을?
어떻게 마음에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겠느냐? 이겁니다.
앞전에도 같은 내용들 이였고요?
(지난 참고 자료 : 아래의 링크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m.cafe.daum.net/119sh/XASd/271?
여러분들이 아셔야 할 것은 깨닫게 되면 조금이라도 불법에 어긋나거나 중생들에게 해를 끼치는 마음만 먹어도 손오공의 머리띠인 [금고아] 처럼 마음(양심)이 엄청나게 조여온다는 점입니다.
여러분들이 몰라서 그렇지 그 고통은 이루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답니다.
비가 온후 말라죽어가는 지렁이만 봐도 안타까워서 마음이 조여오는데 어떻게?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천도재나, 명패 봉안이나, 친견비 등을 받고 그것도 몇천만 원씩 받고 해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에 들여우(가짜)라 하는 것이고요.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야 더 큰 것들도 얼마든지 할 수가 있겠지요?
살인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깨달은 사람들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런 짓들을 할 수가 없답니다.(진실)
깨닫게 되면 본성만이 쓸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아무 때나 막 쓰는 것이 아니고요.
누차 말씀드립니다만?
쉽게 말하면 본성을 깨닫게 되면 본성 스스로가 하는 일이 있다고 보시면 된답니다.
그리고 그 범위는 아주 다양하고 폭도 넓고요.
이럴 때 본성의 마음을 쓸 때에는 거침이 없고 그 무엇에도 걸리지 않고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불법을 전할 때에는 원효 대사나 경허 선사처럼 그 누구의 윗 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마음을 쓴다는 뜻도 되고,
중생이 위급한 사항에 처하게 되면 예를 들어 도로나 기찻길 위에 위험에 처한 사람이 있거나,
전쟁 등으로 인해 수많은 중생들이 고통을 받고 있거나,
어떤 상황이 닥쳐서 여러 명 중 누구 하나가 대신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 등이 닥치면 본성의 마음이 작용을 하면 바로 뛰어들 수 있는 마음이 거침이 없고 걸림이 없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앞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오줌을 아무 데나 누는 사람이 아니고요.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일이나, 것에 정해진 것이 본성은 아니랍니다.
왜냐하면 마음 법이란 그때그때 인연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본성의 마음이 작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본성의 마음은 정해진 마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옳고 그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말하는 도덕이나 바른 생활 등을 훨씬 뛰어넘는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기 때문에 이것은 해도 되고 저것은 하면 안 된다 하는 것들이 있겠지만?
본성의 마음에는 아예 그런 것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목숨을 초개와 같이 중생들을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바치는 수많은 의인들이나?
나라를 구하는 등의 지혜로운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보통 사람들로 보지 않는 것이고요.
왜냐하면 현생에서는 아무리 본성을 깨닫지는 못했어도 전생에 닦은 공덕들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본성의 마음은 "이럴까?" "저럴까?" 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성은 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본문 내용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해가 잘 안 가시는 부분이 있으시면 복사를 해서 보내주시면 다른 표현으로 다시 설명드려 보겠습니다.😁🪷🙏🏻
.
.
ㅡ♡♡
.
.
(2) 법에 대한 내용, 질문이 있는 경우 질문 내용
이 란은 우리들의 란인데요.
질문이나 세상살이 이야기 등을 자유롭게 나누는 란이랍니다.
그리고 내용 끝에 (진실)이라는 표시는 제가 체험한 내용들과 마음에 느끼고 있는 것들에 대한 [동의] 표시랍니다.
ㅡ♡
오늘도 일전에 질문을 주신 도반 분의 내용인데요.
앞전에 있었던 내용을 보시고 질문을 주신 것인데요.
최근에는 깨달은 분들이라면 꼭 해야 할 것과 꼭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는데요.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이 글에는 일정한 흐름이 있답니다.
예를 들면 수행에 관한 내용을 설명할 때에는 한동안은 수행에 관한 이야기만 쓰고 있고,
본성에 관한 내용을 설명할 때에는 한동안은 본성에 관한 이야기만 쓰고 있고,
이번처럼 천도재나 명패 봉안을 이야기할 때에는 하기 싫어도 한동안 한국 불교의 앞날을 위해 일부러 하고 있는 것인데요.
그리고 다음 주부터는 다시 수행에 관한 내용으로 다시 찾아뵐 예정에 있는데요.
혹시라도 불교에 관한 또 다른 주제를 골라서 보내 주시면 무엇이든 법에 관계되는 것이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면 보내주시면 성실히 답변을 드려보겠습니다.🪷🙏🏻
,
(질문)
그래서 8정도에 정명(바른 생계)이 있군요.
제 소견에 견성을 하셨다는 분들마저 그렇게 본래 성품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건 인간의 한계인 '쉽고 편한 쪽'+ '간사함'(자신의 이익에 쫒아 마음이 바르지 않은 것 또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변하는 성질이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한 결과(즉, 업보)라고 봅니다.
그러니 견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성불이 종착지이군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견성하기 전에 몸에 배인 습에 따라 그렇게 생활에서 표출될 때 8정도를 벗어나는 언행이 선택될 때 본성은 어떤 작용을 하는 것입니까?
본성 입장에서는 '이게 아닌 데...!'라고 분명히 그에게 주의를 줄 것이고, 본인은 엄청난 불편을 겪을 것이라고 보는데 그걸 무시할 정도로 그 습이 그렇게 질긴 것입니까? 선배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ㅡ
(답장)
답장이 늦었네요.^^
중국을 다녀온 후 밀린 일들이 많아서 한동안은 여기저기 다니느라 바쁠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좋은 질문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들(남과 북의 최고 어른들이라는 사람들)은 100%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정도 중 정명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도 전부 꽝이라는 것이고요.
그 이유는 부처님은 이에 대비해서 중생들이 헷갈리지 않도록 저 사람이 진짜로 깨달았는지 아닌지 증득을 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너무나 상세하게 이미 그 기준점들을 정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 기준점에 맞추어서 이런 말들을 하는 것이고요.
제 마음대로 그들에게 감정이 있어서 하는 그런 비난들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그들을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을 비난하겠습니까?
절대로 제 마음대로 감정이 있어서 하는 그런 비난들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들을 대놓고 비난하는 이유는?
첫째로는 자기들 입으로는 자신들은 부처님의 제자라 하면서 언행은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이고
둘째로는 한국 불교에 있어서 이들이 불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 때문이랍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한국 불교에 엄청난 영향과 결과를 주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리고 이들로 인해 그나마 경허 선사가 뿌려 놓은 실낱같은 수행 문화들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있기 때문이고요.
비유를 하면
학교(學校)라는 뜻은 교단(敎壇) 또는 교실(敎室)에서 학문(學問)을 배우는 곳을 뜻하지요?
그런데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허구한 날 자기들끼리 싸움질이나 해대고 있고 밖에 나가 주색잡기나 하고 있고 결정적인 것은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것들이 거의 모두 엉터리들이라면 법우님께서는 이들에게 안심하고 자녀들을 맡길 수 있을까요?
불교(佛敎)라는 뜻도 마찬가지랍니다.
아시다 싶이 [불교]라는 뜻은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익혀서 종국에는 견성을 하고 성불을 이루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宗敎)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가르치는 것도 엉터리로 가르치고 있고 더군다나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불교와는 정 반대의 짓들을 하고 있다면 이들을 어떻게 깨달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가 있고 선생이라 할 수가 있을까요?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본성의 마음과 가까워졌다는 뜻인데 과연 이들이 하는 짓들이 불성의 마음과 결부를 시킬 수가 있겠느냐? 이겁니다.
부처님 말씀(기준점)과 그 어떤 것을 비교해 보아도 단 한 가지라도 맞으면 이런 소리를 안 하겠는데 단 한 가지라도 맞게 가르치고 맞게 행하는 것들이 있어야지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부처님께서는 이미 지금식으로 말하면 불법에 있어서 여러 가지 기준점들을 지정해 주셨답니다.
상대의 공부와 수행 정도가 얼마나 성숙되었는지 등을 말이지요?
제 말은 그 기준점에 이들은 단 한 가지도 해당이 안 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전부가 낙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그것도 선지식인이라는 명칭을 수여하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간다는 것이고요.
법우님도 아시다 싶이 불교는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부님이 하셨던 방법들을 따라 해서 견성성불을 하는 종교랍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 방법에 대한 [사성제]를 가르치셨고..
[사성제]를 시작으로 [성문사과] 나 [1지~10지 보살] 등의 차등을 두어 수행자들의 수준을 엿볼 수 있도록 이미 정해 주신 기준들이 있답니다.
그리고 (도성제)에 해당하는 [육바라밀]이나 [팔정도] [육신통] 등의 기준들을 정해 주시기도 했고요.
이러한 기준들이 모두 비록 깨닫지는 못했더라도 상대의 수행 정도를 점쳐볼 수 있도록 부처님이 일반 중생들이 가짜 도인들에게 속지 말라고 친절하게도 정해 주신 기준점 들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수행자들도 자신이 얼마나 수행을 하고 있는지 점쳐볼 수 있는 기준점이기도 하고요.
불교는 그래서 수행 결과에 있어서 만큼은 아주 냉정한 것이고요.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와이로(가짜)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법우님도 한번 직접 부처님이 정해주신 기준점으로 그들(남과 북의 최고 어른들이라는 사람들)을 한번 비교해 보십시오?
사성제만 하더라도 고제에 해당하는 화두를 간하라는 것 외에 이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집제와 멸제 부분에 대해서 법문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최고 스승이라면서요?
또 육바라밀에 있어서는 어떻던가요?
과연 이들이 하다못해 그 흔한 보시바라밀이라도 행하고 있던가요?
중생들에게 "극락왕생 시켜줄게" 하면서 천도재다 명패 봉안이다 하면서 약장사로 사기 치기 바쁜데요?
그들에게 [정견]이 있습니까?
그들에게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근] [정념] [정정] 등이 하나라도 있던가요?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언어를 쓰고?, 바르게 행동하고?, 바르게 목숨을 유지하고?, 바르게 부지런히 노력하고?, 바르게 기억하고 생각하고?, 바르게 마음을 안정 지키고 있던가요?
이렇게 비유하니까 좀 헷갈리지요?
그럼 이렇게 비유해 보겠습니다.
천도재나 명패 봉안 그리고 친견비 등이?
이것이 바르게 보는 것인가요?
이것이 바르게 생각하는 것인가요?
이것이 바르게 언어를 쓰는 것인가요?
이것이 바르게 행동하는 것인가요?
이것이 바르게 목숨을 유지하는 것인가요?
이것이 바르게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인가요?
이것이 바르게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인가요?
이것이 바르게 마음을 안정 지키고 있는 것인가요?
어떻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굳이 깨닫지 않고서도 누구나 비교해 보고 알 수 있는 것들 아닌가요?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여러 가지 장치들과 기준들을 이미 그 당시에 마련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기준들로 저 또한 평가를 하셔야 하는 것이고요.
저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해당이 되는 거랍니다.
그래서 그들을 들여우(가짜)들이라 하는 것이고 그들 스승들 또한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고요.
왜냐하면 실제로 그들도 도를 깨우쳤다면 거기에 대한 결과물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 결과물들이 모두 무당 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제 말이 심한가요?
아님 부처님이 마련해 두신 기준점들이 심한 건가요?^^
제 말은 지금 그들은 그 어떠한 것에도 해당이 안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직도 어린아이 수준들이라는 것이고요.
저도 한다 하는 도인들을 숱하게 찾아다녀 보았지만 아직도 참다운 도인은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상태이고요.
지금이라도 이런 도인이 계시다면 저는 바로 찾아뵙고 더 높은 단계의 도를 그분에게 배울 것이고 앞으로는 그분 앞에서는 건방지게 이런 말들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
ㅡ♡♡
.
.
(4) 선문답(禪問答)
지난주 선문(禪問)입니다.
[용수대사께서 가나제바가 오는 것을 보고 얼른 시자를 시켜 물 한 그릇을 떠 다가 그의 앞에 놓게 하였는데, 가나제바가 바늘 하나를 바릿대 안에 던지니 용수가 몹시 기뻐하였다.]
ㅡ
(선답)
오늘 내용도 본성에 관한 내용인데요.^^
만약에 용수 대사께서 시자를 시켜서 제 앞에 물 한 그릇을 놓는다면 저는 바로 그 물그릇을 발로 차서 엎어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그릇을 엎어서 다 비워버리면 물을 가둬둘 [바릿대]도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
다음 주 선문(禪問)입니다.
[승가난제가 바람결에 풍경이 울리는 것을 보고 동자에게 묻되 "방울이 울리 는가? 바람이 울리는가?" 하니, 동자가 말호대 "바람도 방울도 울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울립니다" 하였다. 조사가 다시 묻되 "바람도 방울도 올리는 것이 아니면 어느 것이 마음인가?" 하니, 동자가 "모두가 고요하기 때문이요, 삼매의 경지는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조사가 칭찬호대 "옳은 말이다. 나의 법을 이어 받을 이는 네가 아니고 누가 있겠는가?" 하였다.
주) 1. 승가난제 부처님의 제+七세 법손되는 조사이니 번역하면 중희.] 90
,
이 내용에 맞는 합당한 선답을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
.
.
ㅡ♡
.
.
(5) 다음 주 선문염송
[선문염송] 중에서.. (167편) 20241007
제목 : 열반(涅槃)
마대사에게 어떤 중이 묻되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마조가 대답호대 "급하니라" "급하다니 무슨 뜻입니까?" "물 구경을 하라" 하였다.
(오늘은 공간이 부족해서 간단히 적습니다.^^)
.
.
ㅡ♡♡
.
.
(6) 법문 동영상
제목: 서암스님 - 육조단경 강의 (3회). 1,법을 깨달아 조사가 되다(悟法傳衣). 오조스님께서 법을 전하다
(아래의 링크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youtu.be/o9F4hbEunoY?si=9b1kMf7Lfsrd4oab
~♡~
(7)《음악과 함게 수행을.. 》
"지금 음악을 듣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하면서 안으로 의식을 돌려보는 것입니다.^^
,
제목 : The Nolans - I'm In the Mood for Dancing (Official Video)
(아래의 링크를 복사 또는 누르세요..)
https://youtu.be/XbAM2_6jKY0?si=jJYmuSPgCYKCRAB0
.
.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