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피에르항의 농무 <8>
8.
귀국할 때의 기쁨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군복을 벗고 제대를 할 때보다 더 감격적이었다. 군복무 기간에는 휴가라도 나올 수 있었지만 원양어선에서는 고향냄새를 맡을 수도 없었다. 얼마나 기다리던 시간이었나. 후임 선장에게 선박을 인계하기 위해 포르투갈 아베이루로 갔다. 이미 현지에 도착해있던 후임에게 선내 구석구석을 안내하고 인계 인수서에 날인을 했다. 모든 짐을 챙기고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천정을 바라본다. 이제는 임무가 끝난 것이다. 선원들은 먼저 항공편으로 귀국시키고 혹 미진한 일을 더 살피기 위해 5일간을 더 머무르기로 했다.
이튿날 다시 배에 올라 정성으로 기르던 아스파라가스를 매만져보기도 하고 폭풍우 속에 사경을 헤매면서도 생명줄처럼 지키던 브릿지의 기기들을 쓰다듬었다. 2년 반 동안 선박 어느 구석에도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선교에서 갤로우스 쪽을 바라볼 때는 윈치가 돌아가는 우렁찬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24시간을 망망대해에서 조업을 하는 선원들에게 윈치소리는 긴장감을 더해주었다. 어떤 때는 혹시 고장이 날까 마음 졸였고, 고기를 가득 메운 어망을 끌어올릴 때는 그 소리가 그렇게 정다울 수가 없었다. 때로는 파손된 빈 그물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고, 뜻밖의 안전사고로 선원들이 다쳤을 때는 부주의를 탓하기 전에 윈치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막상 인계를 하고 떠나야할 시간이 되고 보니 울고 웃던 선상생활이 추억처럼 아련히 지나간다. 공장에 들어가면 활력이 넘치던 선원들의 모습, 생선비린내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던 그들의 모습이 안쓰러워질 때도 있었다. 톱브릿지로 올라가니 풍어를 위해 선원들이 매달아 놓은 돼지 코가 파랗게 곰팡이가 쓴 채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선수에서부터 선미까지 하나하나 돌아보며 작별인사를 했다.
정확히 27개월 만에 C.S호를 떠난다. 항해사 시절 24개월을 합하면 4년 3개월 동안 젊음을 불태우며 천성호와 함께 바다에서 살았다. 흰머리가 여기저기 돋아나고 대머리가 된 것은 바다가 그에게 안겨준 마지막 훈장이기도 했다. 리스본을 떠나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마지막까지 고생한 선원들의 몫을 살들이 챙겨 주리라.’ 그동안 중간에 귀국한 선원도 16명이나 있었지만 끝까지 선장과 회사를 믿고 부지런히 일한 그들에게 마지막 정산을 잘 해주어야 선장으로서의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다.
후임선장은 박 선장이 선박을 지휘할 때는 1항사였고, 2항사로 일하던 사람이 수석1항사로 임명되었다. 후임선장 추천과정도 무난히 이루어졌다. 눈감으면 살아서 돌아간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커다랗게 어른거린다. 지금은 통신시설이 잘 발달되어 어느 나라에서든지 입항하면 국제전화로 가족의 안부를 물을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국제전화란 감히 생각조차 못하던 때였다. 대부분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편지로 소식을 주고받고 했었다. 선원들의 침실에 들어가면 벽과 천정에 온통 사진과 편지들이 가득 붙어있었다. 머리맡에는 사랑하는 연인과 처자식, 부모형제들이 보내준 편지들이 수북했다. 하루 4시간의 수면을 취할 때도 그 아까운 시간을 쪼개어 사진을 들여다보고 편지를 읽고 또 읽는다. 어떤 이는 편지에 애인의 체취가 묻어난다면서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고, 사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뽀뽀를 하니 사진이 견뎌낼 수가 없다. 오래도록 한바다위에 떠있는 동안은 계절의 감각도 무디어져 버린다. 그렇게 오랜 기간 가족과 떨어져있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한 가닥 위로를 주는 것은 오직 목돈을 만져본다는 것이었다.
돌아와 정산을 할 때는 너도나도 큰 기대를 갖지만 한편으로는 실망으로 괴로워하기도 한다. 정산에는 중간정산과 최종정산이 있다. 바다위에서 조업을 할 때 하는 것은 중간정산이다. 수고의 대가를 기다리는 정산 때면 선원들은 큰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쓰는 것은 없고 모으기만 했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어려울 그때는 승선하게 되면 우선 한사람의 먹는 것이 해결된다. 술·담배 등 기호품에도 지출이 없고, 한 달에 한번 씩 지급되는 급료는 전액 가족의 통장으로 들어간다. 평소 한 달간 쓰던 용돈이 고스란히 저축되는 것이다. 승선계약 30개월 중 15개월~20개월 사이에 이루어지는 중간정산은 그동안 올린 어획고에서 발생한 경비를 공제하고 나머지 금액을 선박과 선주 간의 계약비율에 따라 나눈다.
선장은 선박 분으로 나누어 받은 금액으로 선원들 각자에게 배당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작업능률이 떨어지거나 혹, 선장의 눈 밖에 나면 좋은 배당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때로 선장이 선원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항변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선원들은 악전고투하며 묵묵히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들 또한 그 목돈을 만져보기 위해 남편과 떨어져 오랜 인고의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떤 가족은 남편이 벌어온 돈을 제사상에 올려놓고 절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그 돈으로 구입한 논밭에 드러누워 흙을 어루만지며 감격해하는 아낙네도 있었다고 한다. 또 어떤 가족은 남편이 목숨을 걸고 벌어주는 돈을 아끼기 위해 콩나물과 소금으로만 반찬을 했다는 것이다. 한편 오랜 세월동안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한두 번의 외도를 했던 여인들은 평생을 두고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가족의 행복과 내일의 꿈을 안고 귀국한 그 선원 남편은 아내의 배신에 울부짖었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면서 그렇게도 그리던 고국에 도착하고 있었다. 육중한 기체가 활주로를 벗어나 공항 출구 쪽으로 다가가자 기내는 짐을 챙기느라 분주했다. 통관수속을 마치고 김포공항을 빠져나오니 아내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앞서 귀국한 선원들은 뜻밖에 푸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통례적으로 승선기간을 마치고 귀국하면 회사에서는 버스 한두 대를 대절하여 공항에서 서울역까지 선원들을 바래다주었다. 그것은 그동안 수고한 선원들과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러나 굴지의 어업회사로 자부하고 있는 천성수산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고 한다. 박 선장은 공항에서 이런 푸대접을 받으면서 서운해 했을 선원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선장의 책임은 승선을 마치고 최종정산을 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보다 앞서 마지막 항차가 되기 전에 1항사를 훈련시켜 후임선장으로 손색이 없도록 만들어야 했다. 그리하여 사전에 회사와 연락을 취하여 그가 선장으로 발령을 받도록 먼저 귀국을 시킨다. 후임으로 예정된 선장은 선원구성을 비롯한 출어준비와 함께 어장에 대한 연구를 미리 하게하는 것이다. 회사 측에서도 1항사가 선장으로 발탁되었을 때는 유익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2년이 넘도록 선상생활을 함께 했으므로 그 배의 특수성을 잘 익혔고 회사의 시스템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다음 항차를 잘 대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후임선장과 기관장을 발탁하면 선장의 임무는 50% 완수되는 것이다. 귀국 후에는 정산을 완료하고 다른 배로 옮기고 싶어 하는 선원이 있으면 각 회사에 추천하여 승선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박 관장의 임무는 오늘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그가 원양출어를 마감하면서 구상한 것은 열악한 선원들의 복지문제를 증진시키고 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10년 전 오늘의 어선원종합복지회관이 우뚝 서게 된 것은 이러한 그의 집념의 결실이었다. 3년 전 한국어선원복지센터 이사장으로 위촉된 그는 복지관부설 어선원 상담소를 개설하여 연근해·원양어선 선원들이 당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해주고 보다나은 고용의 안정을 위해 회사들과도 잦은 교류를 가졌다. 지난해는 외국인선원관리지원단을 출범시켰다. 지원단은 외국인선원들의 고충을 해결하고, 이들의 인권보호와 권익신장을 위해 종전의 고충상담 콜센터를 확대 개편하여 만들어졌다. 기존의 콜센터에는 인도네시아인 상담사뿐이었지만 인도네시아 선원 다음으로 그 수가 많은 중국과 베트남 선원들을 위한 상담사도 뽑았다. 지원단은 임금체불 등 급여 관련 문제나 재해보상, 퇴직절차 등에 대한 상담은 물론 언어소통 문제, 문화적 갈등 등에 대해서도 안내를 해주고 있다. 모두 결혼이주여성인 상담원들은 특히 원만한 언어소통과 문화적 갈등의 완충역할을 잘 해내는 것으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새해에는 선원가족 장학 사업에 비중을 두었다. 그 결과 고등학생 151명과 대학생 209명 등 총360명이 장학금을 지급받게 되었다. 지난해까지는 3억 원에 불과하던 장학예산이 올해는 그 배인 6억 원으로 늘어났다. 대상자 선정기준은 일정액 임금 미만으로 정하고 있기 때문에 상선선원 자녀보다는 연근해 어선원 자녀에게 해택이 더 많이 돌아가도록 배려를 했다. 센터의 주요 업무 중 또 하나는 인천과 광양, 부산남항, 울산 온산항, 포항 등 5개 항만을 연계하여 복지관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전국 8개 항만에서 9대의 무료셔틀버스도 운행하고 있다. 선원들이 보다 쉽고 빠르게 부두와 시내를 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원양어선원 가족에게도 신경을 쓰고 있다. 선원가족들이 남편의 조업 현지를 방문할 수 있도록 왕복 항공료와 숙박비를 지원하도록 대책을 마련했다. 지난해 1억2,000만원이었던 예산이 올해에는 1억5,000만원으로 늘어 70가족 정도가 해택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선원 결혼예식비용도 100만원 한도 내에서 지원을 하고 있으며, 본인 결혼은 물론 자녀에게까지 확대하는 방안도 연구하고 있다. 한편 바다에서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선원들의 장제비도 작년보다 20만원을 올려 50만원으로 지원하도록 했다.
어선원종합복지회관 5층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 초대 관장으로 시작해서 오늘 한국선원복지센터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복지관에는 그의 헌신이 가득 쌓였다. 원양어선이 출항하기 전에는 고국을 떠나는 선원들에게 격려의 말과 함께 해상생활의 팁을 전해준다. 이러한 선원교양교육은 그의 오랜 해상생활의 체험을 통해 터득한 것이기 때문에 특히 초보 선원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태풍이 밀려올 때는 여전히 망망대해에서 파도와 싸우던 기억이 떠오르고, 선반의 물건들이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생각에 손으로 붙잡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봉사로 인해 작년에는 해양수산부 장관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그는 오늘도 책장에 세워진 여러 감사패와 표창패를 바라보며 더 나은 내일의 선원복지를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