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이 부르는대로 가 보려하는데
이제 아버지 이야기를 하려한다.
불후의 명곡 시간에 트로트가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막걸리 한잔을 불렀다.
그가 말했다.
막걸리 한잔은 영탁이 부르면서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하지만 가사를 살펴보면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사모의 정이 듬뿍 들어있는 슬픈 노래라, 그랬다. 막걸리 한잔이 알려지기로는 유쾌한 아버지의 추억이 담겨져 있는 노래 같지만 어머니에 비해 뭔가 뒤로 밀려나있는 우리들의 아버지의 애잔한 기억이 떠오르는 존재가 아닌가.
이런 詩가 있었다.
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의 반 틈은 아버지의 눈물이 깔려 있다고. 그래서 세상의 아버지는 일찍 퇴근하기를 끔찍이 싫어하여 선술집에서 하루의 스트레스를 한 잔 술에 담아 자기의 눈물을 마시는 허허로운 존재라고.
내 청춘은 그랬다.
내 푸른 청춘의 시작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으로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래, 기껏 아들이라고 키워놓으니 세상으로 나아가는 포부를 아버지한테서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하다니.
누구는 가소로운 청춘이라고 비웃을지 몰라도 그때 나는 진지했다. 누구처럼 대통령이 되겠다는 벅찬 포부를 지닌 청춘도 있었지만 고작 내가 한 일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하루바삐 벗어나려고 목표를 두다니.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때는 멋있는 표현이라고 스스로 감탄을 했다. 허클 베리핀이 미시시피강을 뗏목을 저어가는 상상을 하고 있었는지 몰라.
그래, 네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데?
이제와 생각하니 어처구니없다. 아버지가 자식들 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될 정도로 가난했던 것은 아니다. 나라가 가난했던 그 시절, 육 남매들을 다 대학교에 보내지 않았던가. 성실하신 분이시었다. 비록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부자 소릴 듣진 못해도 공납금, 끼니 걱정 시키지 않으신 분이다. 다섯 살에 할아버지를 여위시어 청상이셨던 할머니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신 분이다. 가난했던 집안에서 다섯 살에 소년가장이 되신 분인데 무얼 탓하는가 말이다. 진외가, 아버지의 외갓집 따라 건너가신 일본에서 고등학교까지 공부하다가 해방 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오신 분이 내 아버지셨다. 아래로 세 살 터울 고모님과 고향에 돌아와도 논밭전지도 없는 살림에 행방후의 피폐한 살림 일으키려 온갖 고생 다 하신 아버지를 배신하다니 네가 인간이냐? 하면 할 말 없다.
이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아버지 이야길 더 해보자.
아버지에 대해 자긍심을 가진 것은 잘 생긴 외모가 아닌가 싶다. 영화배우 뺨칠 정도로 잘 생긴 인물로 고향에선 젠틀맨이라고 인정해 주신 분이다. 외모가 밥을 먹여주는 건 아니라 해도 인물이 뛰어난 것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은 거 아닐까? 잘 생긴 사람이야 영화배우 따라갈까? 고모님 말씀에 따르면 신성일보다 훨 잘 생기고말고.
6 25 전쟁이 끝나면서 고모부와 시작한 책장사가 히트를 치면서 살림은 펴졌다.
서울 가서 떼 온 책을 시장통에 펼쳐놓고 팔았는데 성황이었다. 육이오 전쟁이 지나간 뒤 무슨 장사건 벌려놓은 사람은 다 돈을 가마니로 끌어 담았다는 말이다. 경제용어로 당시 전후 공급이 딸렸기에 장사를 한 사람들은 물건이 없어 못 팔정도로 공급자 우위의 경제란 말이다. 위기란 위험한 상황이지만 또 다른 기회를 준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 우리나라 재벌도 전쟁 중에 생겨났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보따리 장사꾼이었다가 가게를 세내어 장사를 이어가다가 중심가에 떡 하니 가게를 마련하고 내가 대학 다닐 땐 고향에서 제일 번듯한 콘크리트 삼층 건물을 지어 책장사를 이어갔으니 장사꾼으로 성공한 편이다.
다들 나를 보곤 부잣집 아들이라고 추어 줘도 우쭐했을까?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서점 주인은 고모부였지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버지를 사장으로 알았지만 사실은 전무님이었을 뿐. 하긴 그렇게 오해할 만 했다. 고모부님은 큰 병치레하시곤 거의 서점에 관여하시지 않고 친구분들과 바둑을 두시거나 소일 하실 뿐 서점 경영은 아버지 몫이었다.
책방 하나가지고 경영은 무슨? 모르는 말씀. 옛날에 교통이 불편할 때 지방 상권이 얼마나 컸는지 몰라서 그래. 한강 이남에서 대구 팔달교까지 서점으론 최고 컸다니까. 강원도 남쪽에서 경북의 반틈은 우리 서점의 상권이었다. 지점도 여럿 거느리고 있었으니 대단했다. 전국 서점 매출액 4위까지 했으니 그때로는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쉽게 말하면 화물자동차로 서울에서 우리 고향까지 내려오는 것도 하루 꼬박 걸릴 정도로 교통편이 낙후되었던 시절이었다. 그랬다. 나라 사정이 나빴을 때가 지방 상권은 번창했다는 말이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고속도로가 뚫리고 전국에 걸쳐 포장도로가 좍 깔리는 70년대부터 서울에서 대형 도매상이 지방에 내려왔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시간이 하루면 충분하니 지방 상권이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고속도로가 뚫리고 서울 상권이 지방으로 내려오는 대학시절이 끝날 무렵엔 상권도 쪼그라들고 그저 시골치곤 커다란 서점 하나가 남았을 뿐이었다.
아버지가 서점에 계신 것은 나한테는 엄청난 혜택이었다.
원 없이 책을 볼 수 있었잖은가. 당시에 친구 집에 가 봐도 교과서와 참고서를 빼면 책이 없었다. 소설 책 하나 변변한 거 읽어보려면 나한테 잘 보여야 했으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 “세계명곡365” 같은 노래책을 갖춘 친구들은 더러 있었다. 참 신기한 일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방학을 하면 소설책이든 아동문학이든 한 보따리 집에 갖다놓고 읽었으니. 아마도 나만큼, 아니 내 형제들만큼 교양서적을 읽은 친구들이 있었을까? 요즈음 형제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가 바로 “금수저 출신”이 아니었을까? 했더니 공감하는 형제보다 부자라고 오해 받았던 기억만 난다고 하더군. 돈이 수저의 구별법이라니.... 유감이다. 없는 시절 책을 원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이 최고의 혜택이자 금수저가 아닌가 말이다.
내 독서 편력 이야기를 해볼까.
아마 중학생이었을 때였지 싶다. 여름방학에 서점 뒤 창고에서 일어난 에피소드 한 자락을 꺼낼까 한다.
서점 옆에 건물을 사들여서 창고로 썼다. 온전한 기와집 한 채를 몽땅 창고로 썼으니 대단했다. 책선반을 꽉 채운 창고는 아주 컸다. 좁은 통로를 빼고 전부 책으로 채웠으니 규모는 대단했을 것이다. 사각형 나무 괘짝 같은 것으로 높은 선반에 있는 책을 꺼내기 위해 군데군데 놓여있으니 내게는 책 읽기 딱인 의자인 셈이었다.
작정을 하고 채 읽지 못한 책을 꺼내어 읽기 시작했는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마침 창고 옆에 화장실까지 있으니 책 읽기 안성맞춤이 아니었을까? 창고 통로에는 백열전구가 실내를 비추어 줄뿐 고요한 실내에는 내가 책장 넘기는 소리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시계? 고등학교 3학년 말에 시계를 사주신 터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몰랐다. 거의 몰아지경에 빠진 것이다. 졸리면 책 선반에 기대어 깜빡 자다말다 내가 책 읽는 시간은 멈추었지만 세월의 시간은 여지 없이 흘러갔다. 오금이 저리고 배가 고파서 창고를 나오니 한낮이었는데 눈을 뜰수가 없어 비틀거렸다. 이를 본 점원이 깜짝 놀라 아버지한테 알리니 아버지가 달려오시고. 이틀간 내가 실종상태로 집안이 난리가 났다고 했다. 꼬박 이틀간 창고 안에서 지낸 것이다. 그렇게 책에 빠져 지낸 것이 내 학창시절이었다. 와~ 하시겠지만 대단한 책을 봤을까? 동화책이거나 읽기 쉬운 소설책에 볼 정도가 내 수준이었다.
이제야 밝히지만 내가 부잣집 아들이라고 오해받은 게 싫어서 무작정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게 아닐까? 묘하게도 이게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죽어라고 일해 봤자 부자 되는 건 주인이신 고모님댁이었다. 어머니는 너는 커서 월급날이면 따박따박 월급 주는 큰 회사에 취직하라고 당부하셨다. 왜냐고? 장사란 그렇다. 출판사에서 책을 내려 보내면 어음을 끊어 책대금을 치룬다. 책이 팔리건 안 팔리건 어음 날짜에 맞춰 은행에 어음 액수만큼 입금해야 어음을 회수한다. 어음을 끊을 때야 쉽지 어음 날짜가 다가오면 대금을 맞추는 건 엄청 힘겨워 우리집은 월급날이 따로 없다. 어머니가 필요한 만큼 생활비 달라고 아버지한테 이야기하면 서점 사무실에 돈받으러 심부름을 가는 건 내 몫이다. 요즈음 돈으로 환산하면 2, 3십만 원 찔끔찔끔 받아서 살림 사는 어머니는 많든 적든 정해진 월급을 한꺼번에 받게 되면 살림 계획도 세울 텐데. 맏이인 내게 취직하라고 부추기셨다. 사장도 아니면서 서점 경영하느라 집에 푼도 찔끔 주고마는 아버지처럼 사는 모습이 싫었다. 철이 없는 나는 그냥 뚜렷한 인생의 목표를 세우기보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건방만 떨었던 게 내 청춘의 허상이었다.
그랬다. 뭔가 삐딱하게 시작한 내 청춘을 고백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