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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36번 말씀
제목 :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 그 이름은 거룩하다
본문 :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멘.
다음 주 수요일에는 요 자리에서 예배가 없습니다. 양주 비전교회에서 사경회 때문에 양주 비전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니까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음 주에는 요 자리에서 예배가 없습니다.
오늘은 요 구절을 다 하려고 하다가 반만 하기로 했습니다. 조금 다 하긴 너무 길고 좀 잘랐더니 또 너무 짧은 거 같기도 하고 고민하다가 반만 하기로 했는데 그럴 때 마다 꼭 이렇게 미국에서 또 울산에서 여수에서 일부러 이렇게 오시는 분들이 꼭 오세요.
그럼 그분들한테 또 죄송해서 다음 주부터 또 길어지고 또 길어지고 그러는데 결심을 끝까지 가지고 가기로 했습니다. 계속 짧게 하기로. 근데 모르겠어요, 하다보면 또 길어질지도 몰라요.
우리는 지난 몇 주간에 걸쳐서 기도라는 게 무엇이며 그 기도는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인지에 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봤습니다. 기도라는 거, 프로슈코마이 라는 건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깨달아서 그 뜻의 성취를 간구하고 또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최고의 선물임을 고백하며, 깨달아야 고백하겠죠? 그것을 이웃에게 흘려주는 그 전체를 프로슈코마이, 기도라 이렇게 부른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을 막 졸라서 얻어내는 그런 종류의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거죠.
따라서 기도란 하나님에게서부터 먼저 시작되는 것이고 그 기도가 우리에게 당도하여 우리 안에서 성취가 되고 왜냐면 그분이 원하시는 거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는 우리 안에서 성취가 되겠죠? 그분이 원하시는 어떤 것이 먼저 있어야 당여한 거죠.
피조물, 먼지에 불과한 피조물이 원함이라는 걸 먼저 가질 수가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원함, 프로슈코마이, 프로스 유코마이라는 건 어디, 어디를 향하여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가지다, 라는 뜻이니까. 하나님의 기도가 먼저 있어야 그 다음에 우리의 기도가 격발되어 나올 수 있는 거예요.
어떤 분들은 뭐 우리 기도는 필요 없다고 얘기하는 분까지도 계신데 천만의 말씀.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도가 먼저 있고난 다음에 그 뜻을 내가 올바로 깨달아 그 뜻의 성취에 관한 기도를 해야 된다는 것이지 기도가 필요 없다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서 그 뜻이 성취가 되면 우리를 통해 그것이 이제 하나님께 찬양으로 기도로 올려지고 그것이 또 수평적으로 흘려지게 되는 것, 그 전체를 프로슈코마이, 기도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후에, 누가복음 그 병행구절 찾아봤죠? 그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후에 세 떡을 구하는 어떤 친구의 이야기를 그 주기도문에 붙여버리죠? 그리고 이게 이 이야기야, 라고 접속사를 써버린단 말입니다. 그렇게 덧 붙여주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그 선물 그건 그 떡,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의 그 떡, 주기도문의 내용이 그 떡으로 축약이 되거든요.
그 떡. 그 하늘 양식의 그 소중함과 그리고 그 떡은 누구에게 가면 찾을 수 있는가? 그 떡의 소재지를 올바로 파악한 그 떡은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열심과 노력을 부려 얻어낼 수 있는 떡이 아니라 갖고 계신 분이 계시단 말에요. 그분께 찾아가야 되는 거죠?
그걸 아는 분.
누구에게 가면 그 떡이 있다는 것을 올바로 파악한 그걸 중보자, 중재자라고 했죠? 기도라는 단어가 중부, 중재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중보자로써의 그 성도의 모형, 어떤 이가 떡이 필요해서 밤에 찾아오니까 그이가 어떤 이에게 가면 떡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떡만이 이 친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가 문을 두들겨 얻어다가 먹이는 게 전체가 기도란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지금 이야기하는 거, 산상수훈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잖아? 내 얘기를 잘 들어서 그걸 너희들 안에 마음으로 갖고 아가페, 사랑으로 갖고 그걸 흘려주는 거. 그것이 지금 내가 너희들에게 이야기하는 사랑이고 그게 바로 온전함 아니냐? 그 내러티브에 주기도문이 들어간 거고 그 주기도문이 뭔지를 설명하기 위해 세 떡을 구하는 친구의 얘기가 붙어있는 거니까.
그렇게, 그러한 그 중보자로서의 성도의 모형 그거를 주기도문 밑의 비유에 딱 등장을 시켜서 그것을 깨달아 안 그런 성도들의 자세와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 야, 내가 그렇게 구하는데 안 주겠니? 라는 하나님의 반응, 반드시 주지, 라는 그 반응 그것을 잘 설명해주신 거란 말이죠.
주님은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가르쳐주신 후에 그러한 비유를 이렇게 붙여주심으로 해서 진리의 영, 성령에 의해 장악이 되고 간섭받기 시작한 성도에게서는 반드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가 붙어 있었죠? 구함과 찾음과 아이테오 재테오 두드림의 그 역동적 움직임이 이렇게 발동이 되고, 발출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의 요구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반응해주시고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약속해주신 거란 말에요. 그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한 터럭도 땅에 떨어짐 없이 전부 다 응답된다는 얘기에요.
그러니까 주기도문도 하나님의 약속인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께 뭘 먼저 요구하여 얻어낼 수 있는 게 주기도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고, 먼저 그건 하나님의 약속이고 그게 정말 중요한 것인지를 알아 그걸 요구하게 되는 거예요.
그거 혹시, 나는 거기서 제외되면 안 돼요. Pass me Not! 나를 지나가시면 안 돼요, 하나님. 그 이야기란 말에요. 그러니까 주기도문은, 기도라는 거, 기도는 이거야, 라고 가르쳐준 게 주기도문이니까. 기도라는 건 우리가 뭘 요구하여 하나님께 얻어내는 것, 이런 의미라기 보단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것을 내가 성령의 도움으로 깨달아서 그걸 간절히 원하게 되는 거, 그것이 기도란 말에요.
제가 이 비유, 그리고 그 주기도문을 약속으로 보게 된 이유는 그 비유의 설명으로 기술 되고 있는 그 구함과 찾음과 두드림이라는 행위의 마지막 항목인 그 두드림, ‘크루어’ 거든요. 그 두드림이라는 그 단어와 두드리면 어떻게 돼요? 열리죠? ‘아노이고’라는 그 단어를 연구하면서 제가 확신을 갖게 됐어요. 하나님은 그 하늘 존재의 그 존재 매커니즘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지한 이 세상으로 당신의 말씀, 즉 그리스도의 영, 성령을 보내시죠? 깨끗한 영입니다, 그것이. 푸뉴마. 그리고 그 성령에 의해 무차별 폭격을, 은혜의 폭격이에요,물론. 무차별 폭격을 당하게 된 이들의 마음속에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반드시 받아내야 할 어떤 빚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신단 말에요. 그거는 하나님이 먼저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빚이라고 표현하는 거예요. 내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준다고 그랬으니까.근데 알고 보니까 그거 없으면 나는 존재도 아니네? 완전히 영원히 죽는 거네요. 사망이네요. 그러니까 그건 준다고 했으니까 당연히 받아내야죠? 빨리 주세요! 빨리 주세요. 준다고 했으니까. 그거 당신이 먼저 준다고 했으니까 빨리 주세요. 이렇게 구하게 된단 말입니다. 아이테오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이 구해야 하는 그 생명, 그 하나님의 사랑, 그 진리, 그 아가페의 사랑을 무언가에 이렇게 감추어서 모형 안에 담아서, 내용으로 담아서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잖아요? 그게 뭐예요? 그게 율법이고 성전이고 예수고 성경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그걸 껍데기로만 보면 안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게 감추어졌다는 의미라고 했습니다. 그럼 감추어진 건 어떻게 해야 돼요? 찾아야죠? 그러니까 그 찾아라, 가 재테오란 말이에요. 아이테오, 구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안 이들은 하나님이 이미 이 세상에 감추어진 것으로 보내준 어떤 모형 안에 감추어서 보내준 그것을 두드리면서 찾게 된단 말에요. 재테오. 그러면 찾게 된단 말에요. 찾을 수 있단 말이죠?
그리고는 그 보물을 찾게 되는데 그 모든 과정의 한 가운데에 진리의 영, 그 성령이 계신 거란 말에요. 그러니까 그 성령이 아니 계시고는 절대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그리고 발견하여 내가 모든 것을 팔아, 나의 모든 이 호코스모스의 세상 적인 것, 아담 적 행위를 다 팔아 그것을 살 수 없단 말에요. 그 성령이 아니 계시면은.
그래서 예수님이 그런 거죠. 구해라, 구하면 성령을 먼저 주신다, 그러는 거예요. 보세요,
눅 11: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아버지가] 구하는 자에게 [아이테오, 성령을 안 주겠니?]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성령을 주어서 어떻게 한다는 거죠? 하나님의 그 진리 그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시는 거예요. 성령이요.
그런데 그 감추어진 하늘의 보물이 어떻게 찾아진다, 그래요?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 그래야 열려요. 두드려라. 드디어 그 감추어진 밀봉된 비밀의 문이 열리게 되는 거예요. 그게 기도의 내용이요 과정이며 결론인 거죠. 거기에서 두드리다, 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단어가 쿠루어라는 단언데요 그 단어는 히브리어 낙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번역해놓은 거예요. 지금 그 히브리어 사전 갖고 계신 분들 많이 계시죠? 스트롱 코드 한번 찾아보세요. 5221번 그게 낙카거든요. 뭐라고 써 있어요? 두드리다, 치다, 라고 써 있는데
고 다음에 살해하다, 도륙하다, 채찍으로 치다, 벌주다 이렇게 붙어 있어요, 내용이요. 다른 내용이 붙어 있단 말에요.
그러니까 두드리다, 쿠루어, 낙카라는 말은 죽일 목적으로 때리다, 라는 뜻이에요. 노크하다, 란 말이 아니라니까요. 단순히. 그리고 마태복음 누가복음 공히 문이라는 단어는 없어요. 원문 한번 찾아보세요. 문이 열린다, 라고 개역성경에는 적혀 있지만 원문에는 문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문을 두드리다, 가 아니에요. 그냥 뭔가를 ‘두드려라’에요. 죽일 목적으로 두드려라. 이런 뜻이에요. 그러면 뭐를 두드리라는 걸까요? 설마 문을 살해할 목적으로 두드리라는 건 아니겠죠?
그 두드림의 대상은 따로 있어요. 뭘까요? 혹시 이런 생각 안 드세요? 세상 사람들이 살해할 목적으로 두드려서, 구약에 보면 뭘 자꾸 두드리라고 그러죠? 하나님이? 반석을 두드리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반석은 신약으로 오면 예수라고 이야기합니다.
보세요, 세상 사람들이 살해할 목적으로 두드려서, 그 단어는 채찍으로 치다, 라는 뜻도 있다고 했어요. 채찍으로 쳐서, 또 살해할 목적으로 치다, 라는 뜻도 있다고 했습니다. 살해할 목적으로 쳐서 결국 살해해버린 어떤 분을 거기에 넣어보면 어때요? 개역성경은 거기에 문이라고 해놨는데 그거 문 아닙니다. 뭘 두드렸다,에요. 두드려라 그럼 열린다, 그랬단 말입니다.
바로 그 두드림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인거예요. 그걸 두드리면 뭔가가 나와요. 뭡니까? 생수가 나온다고 그랬어요. 반석을 두드리면. 그게 그 단어에요 두드리면. 생수는 뭐래요? 근데?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성령이다, 그런다니까요. 근데 조금 아까 또 야, 어떻게 구하는 자에게 그 성령 안 주겠니? 그랬잖아요?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양의 문이라 그랬죠? 그거 두드리는 거예요, 우리가.
그 자신이 바로 두드림의 대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밝힌 거예요. 그 문은 두드려야 열려요. 그런데 그 두드림은 반드시 그 문인 그 대상을 살해하는 두드림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한번 잘 생각해보자고요.
주님은 그렇게 세상에게 두들겨 맞아서 살해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 맞죠? 원래부터 오신 목적이 그래요. 그렇게 그분이 살해당하셔야 하늘 문이 열리게 돼있어요. 성경은 그렇게 살해당한 주님을 가리켜서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휘장이라고 그러죠?
히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성소에 이제 들어갈 담력을 얻었대요]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 휘장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위에서 아래로 반으로 쫙 찢어졌죠? 근데 그 휘장이 뭐라 그래요? 지금? 히브리서 기자가? 예수의 육체래요. 몸이래요. 그 육체로서의 예수님은 무얼 상징하는 거였죠? 그게 찢어져야 지성소가 보여요. 율법! 예수님이 율법으로 오셨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율법이 빠개져야 두들겨 맞아 부서져야 그 안의 진리가 터져 나올 수 있단 말에요, 밖으로. 그래서 그 휘장이 두들겨 맞아 찢어진 거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그 계명을 상징하는 그 휘장, 그래서 휘장이 열 폭입니다. 그래서 항상 병풍도 열 폭이 진품이에요. 원래 열 폭으로 만들게 돼 있었어요. 뭘 가리는 것, 이런 의미로.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의 지성소로 가는 길을 오히려 막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그게 휘장이었어요. 열 폭으로 막고 있어요. 십계명 의미하는 거죠? 그러니까 성경을, 말씀을 법으로 율법으로 보게 되면 지성소는 막히는 거예요. 감추어진 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 휘장으로 오셔서 열, 십계명, 율법으로 오셔서 언약의 기둥위에 언약의 기둥 위에서 찢어진 거예요. 반으로. 다섯, 다섯으로 찢어진 거라니까요. 그랬더니 율법이 깨져버리고 그 안의 진리인 지성소가 드러났단 말에요. 그래서 다윗이 물맷돌 다섯 개로, 돌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그랬죠? 구약에서. 근데 다섯이에요. 물매가 무슨 말이라고 했어요? 물매. 휘장이란 단어에요, 그게. 그러니까 휘장 다섯 개인 돌로 아무도 무너트릴 수 없었던 골리앗을 쳤더니 그게 무너지는 거라니까요.
자, 그렇게 율법으로 오신 예수가 찢어지고 율법의 문이 부수어지고 지성소의 은밀한 것이 이렇게 드러난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상에 하나님 살해사건이 먼저 일어나야 돼요. 예수가 그렇게 안 죽으면 안 된다니까요. 세상이 그 하나님을 두들겨 패서 죽여 버려야 돼요. 두드려서. 살해할 목적으로 두드려서 그를 죽여야 된다니까요. 그건 필연적인 과정이며 필수적인 항목인 거예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 일어난 게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베드로가 아이, 무슨 소리에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죠! 그랬다가 이 마귀 새끼야! 라는 욕을 먹은 거예요, 하나님에게 사단아, 그게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거야,라고 얘기했다니까요.
그러한 세상의 하나님 살해사건을 통해서 인간과 세상에 그 한계가 폭로되는 거예요. 너희들의 율법적 열심은 결국 하나님을 죽이는 거야. 왜?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거부하는 거니까, 우리도 할 수 있어요, 니까 결국 그분을 죽이는 거야. 살해하는 거야, 라고 그들의 실체가 폭로되는 게 세상의 하나님 두드림이에요. 죽이는 거예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해 생명과 사랑과 숨을 불어넣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한계를 덮어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내는 거죠. 그게 복음이에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예레미야서에 보면 이스라엘의 상태였어요. 그런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야곱을 이스라엘고 바꾸어내는 게 하나님의 일이란 말에요. 야곱이 열심히 연마하고 수련하여 인격을 도야하여 이스라엘이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자, 그렇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홀로 완성하세요. 그런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만이 자기가 하나님을 두드려 패서 살해한 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게 된다는 거예요. 다른 이들은? 내가 언제 하나님 죽였어요? 그러죠? 주님은 뭐라고 해요? 두들겨. 니가 두들겨서 죽였다는 걸 반드시 알아야 돼! 라고 이야기한단 말에요. 그게 두드려라, 그래야 열린다. 에요. 니가 두들겨서 그 하나님 죽였다는 거, 도륙하고 살해했다는 걸 네가 반드시 알아야 돼. 그러는데 세상은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저놈들이 죽였지 나는 안 죽였어요. 내가 만약에 그 자리에 있었으면 내가 살신성인을 해서라도 막았을 거라고, 이렇게들 얘기한다니까요. 그게 오늘날 율법주의이며 인본주의에요. 하나님을 향하여 이 목숨 바치겠다는 거. 그 목숨 바쳐서 하나님을 어떻게 보호하려고요? 그 목숨이 뭔데? 하나님은 그거 죽은 거라고 그러는데 자기는 죽어도 살았대요. 그리곤 이걸 바치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죽었다는데.
내가 죄인 중의 괴수가 맞습니다. 내가 하나님 살해범 맞습니다. 이 고백을 성도는 반드시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 일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돼요.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 폭로가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덮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 수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걸 자기부인이라고 그러죠? 맞아요, 제가 하나님 살해범 맞습니다, 라는 게 그렇게 되면 율법으로서의 예수. 행동강령으로서의 성경, 섬김의 대상인 성전. 그것이 나로부터 사라지게 되죠.
우리가 그걸 모르면 예수나 성전은 나의 섬김의 대상이 되고 성경도 나의 행동강령이 된다니까요. 그러면 그거 열심히 해서 죽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바로 그 하나님 살해범입니다. 그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덮어주셔야죠. 하나님이 나에게 사랑을 부어주셔야죠. 라고 나를 부인하게 될 때 비로소 내가 살아나는 거라니까요. 그걸 두드린다고 하는 거예요.
반석인 예수를 두드려야 생수이신 성령, 그리스도가 터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반드시 예수를 죽여라, 라고 얘기 하는 거예요. 앞뒤 뚝 잘라서 그냥 우리 목사님이 예수를 죽이래 그럼 절대 안 됩니다. 제가 이단 되는 거예요, 그러면.
요일 2:22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니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래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래요. 그럼 예수가 그리스도입니까? 맞아요, 예수가 그리스돈데 섬김의 대상으로서의, 십자가 이전의 그 예수, 그리고 그 예수가 한 말, 그 예수가 행한 일 이걸 여러분이 그냥 막연히 그게 날 구원한 거야,라고 알고 있으면 여러분은 잘못된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거예요.
이게 원문으로 보면요 ‘호 아르네오마이 호티 예수수 우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인데요 호 아르네오마이, 부정하다, 이런 말이죠? 부인하다, 호티가 왜냐하면 예수수, 예수가 우 에이미 그러는데 에이미는 뭐 비동사니까 그 앞에 우가 붙어 있어요. 원문성경 갖고 오신 분 한 번 꺼내보세요. 우 붙어 있죠? 이주홍 집사님 어디 갔어요? 그 우를 클릭해보세요. 사전. 뭐라고 나와 있어요? 절대부정이라고 나와 있죠?
자, ‘우 에이미 호 크리스토스’, 그럼 뭐예요? 예수가 그리스도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호티가 앞에 있으니까. 예수가 그리스도가 절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는 자는 거짓말 장이다. 그렇게 돼 있어요. 근데 개역성경은 그 우를 빼먹었다니까요. 그렇죠? 있죠?거기에. 그래서 보세요. 고거 하나 빼먹으면 성경이 이렇게 완전히 다른 책이 된다니까요.
다시, 예수가 그 그리스도가 우 에이미, 절대 아니기 호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는 자는 전부 거짓말 하는 자다.에요. 왜? 그 예수는 사람들 안에 아버지로 들어갈 수가 없어요. 육체, 율법으로 왔기 때문에. 그러면 그 예수는 죽고, 깨지고 두들겨 맞아 깨지고 그 안에 들어있는 생수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아버지로 우리 안에 들어오죠? 그렇게 되면 내가 생명을 얻는 게 되고 내가 아들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 예수가 아버지로 내 안에 들어와야, 그리스도의 영으로 내 안에 들어와야 내가 아들이 되는 거죠?
자, 이 요한일서가 히브리서 다음에 있어요. 히브리서는, 히브리는 건너가다, 란 뜻이니까 이 히브리서 다음의 책들은 건너간 자들에 대한 얘기란 말에요. 그러면 그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들어와 내가 아들이 된, 히브리서가 아들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전부가 다. 그 아들이 된 그 자에게 있어서 그 안에 들어온 그리스도의 영은 뭐예요? 그를 아들로 낳게 한 거니까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을 부정하는 자. 그리고 그 예수만, 그리고 그 예수가 한 말, 그 예수가 한 기적, 그 예수가 한 일. 그걸 막연히 내 밖의 사건으로 두고 그것이 나를 구원했어, 라고 막연히 그냥 추측하는 걸 믿음이라고 갖고 있는 그 사람들은 거짓말 장이다, 그러는 거예요.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한다, 라는 말이 거기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그들이 뭐라고요? 적그리스도, 사단이라는 거예요, 그게. 예수님 죽으면 안 돼요, 그랬더니 사단아! 그랬잖아요? 그 얘기하니까요.
그러니까 구하고 찾는 이들은 반드시 두드릴 수밖에 없는 거예요. 반석을, 그 예수를. 나카! 죽을 목적으로. 그 율법을 두드려서 살해해버려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노이고, 열립니다. 그 지성소의 문이 열려요. 근데 그렇게 자신이 예수라는 문을 두드려서 살해해버린 자라는 걸 올바로 깨달은 자들은 이 세상 속 아담으로서의 자아, 선악과 따먹고 나는 선악의 주체로 얼마든지 선과 악을 구별하여 선을 추구하고 악을 멀리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삶을 살 수 있어, 라는 이 아담 적 자아를 살해당하는 거죠?
그러면, 내가 예수를 두드려 죽이면 누군가 또 나를 두드리는 거네요? 내가 그 예수 죽인 자 맞습니다. 내가 두들겨서 죽인 자 맞습니다, 라는 이걸 올바로 깨달아 고백할 수 있는 자는 그 아담 적 자아를 살해당하는 거니까 누군가 나를 또 두르려야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내가 두드린다, 이게 똑같은 단어에요. 내가 너 두드리잖아. 열어! 그 단어도 똑같은 단어이고. 그럼 내가 들어갈게 그런다니까요. 따라서 그분이 보배가 되어 내 안에 들어오면 껍데기인 나는 삭제당하는 거예요. 그게 죽음이라니까요.
서로 두드리면서 서로. 우리는 예수님 죽인 자 맞습니다, 라는 이 두드림 예수님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게 참된 고백이야? 그럼 너 죽은 거야, 라는 그 두드림. 성도는 신앙생활에서 이거 하는 거예요. 두드리고 두들겨 맞고, 죽이고 죽는 겁니다.
우리가 이 논리를 좀 더 확실하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아노이고’ 열린다, 라는 그 단어의 용례를 함께 살펴봐야 돼요. 오픈[Open] 이라는 그런 말 아니에요, 단순히. 그 단어 자체가 ‘아노’, 그 ‘아나’ 가 위의 것이라 그랬죠? ‘에피’는 공간적 위지만 아나는 아노뗀 위의 것으로 나야 돼, 거듭남이 아노뗀이잖아요? 그게 위의 것으로 낳아라, 라는 말이라고 했죠? 그래서 아래의 입으로 난 자들은 위의 입으로, 진리로 반드시 나야 돼,가 위의 것으로 나야 된다, 거듭남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 아나, 아노이고의 아나는 위의 것이고 그리고 열린다, 그 이고가 ‘열린다’니까. 위의 것으로 열린다, 라는 그런 말이에요. 위의 것으로 열린다. 그러니까 위의 것으로 열린다, 라는 게 뭐예요? 단순히 문을 연다는 뜻은 아니겠죠?
아나오이고. 위의 것으로 열린다? 아, 하나님이 아래의 것으로 우리에게 모형으로 여러 가지를 주셨어요. 성전, 율법, 예수, 성경, 사람, 세상, 그런데 이것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위의 것으로 열리면 그게 아노이고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반드시 그 전에 뭐가 선행돼요?그 껍데기들이 두들겨져서 깨져야 열린단 말에요.
여러분, 산상수훈이 어떻게 시작되죠? 마태복음 4장에서 마귀의 시험에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거야’ 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그 산’ 에 앉으셔서, 그 산, 호호로스는? 그 성전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딴 데에는 평지라고 하는 거예요, 또, 산이 아니고. 그러니까 어, 산이야? 평지야? 두 번 얘기 한 건가? 그런 말이 아니라, 그 산은, 성경에서 ‘그 산’ 그러면 그냥 그 성전이에요. 예루살렘.
그 산에 앉으셔서 입을 열어 가라사대! 그러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너희를 살리는 거야, 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그 입이 드디어 열리죠? 그러면 무얼 전해주겠다는 거예요? 살리는 말을 주겠다는 거죠? 그게 뭐겠어요? 진리잖아요. 그래서 율법을 예수님이 입을 열어 진리로 설명해주시는 게 산상수훈이잖아요? 그 ‘열다’ 가 아노이고에요. 그렇게 열리는 거예요. 두드리면 그 입이 열리는 거예요. 살리는 말이 나오는 그 하나님의 ‘입’이 열리는 거예요. 두드리면. 근데 주님이 산상수훈을 이야기해줬어도 못 알아들었잖아요? 그러면 진짜 그걸 알아들을 수 있는, 진리로 그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오셔야 되는 거죠? 그래서 두드려야 열린다고 하는 거예요. 예수가 죽어야. 반석이 두드려 맞아 죽어야 열리는 거야. 아노이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율법을 위의 것으로 열어주셔야 돼요. 그래야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 단어는 영적 개안이 필요한 소경들의 눈뜸 사건에도 그대로 쓰여요.
마 9:27-30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쌔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눈이 멀어 정말 봐야 할 것을 못 보는 어떤 이들의 모형이에요. 그러니까 소경, 귀머거리, 절뚝발이, 문둥병자, 중풍병자, 혈루병자 이건 전부 비 진리로 말미암아 꽁꽁 묶여 있는, 죽어 있는 이 세상 전제를 그냥 모형 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게 소경이죠? 정작 봐야 할 것은 못 보고 엉뚱하게 법으로, 그냥 문자, 표피적으로만 보고서 나는 본다, 라고 하는 그런 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보는 자들을 소경이라 그래요. 날때부터 소경이에요. 소경들이 뭘 구해요.]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계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게 하지 말라 하셨으나
여기서 밝아졌다, 라는 게 아노이고에요. 열렸다는 거. 눈이 열렸다. 감춰졌던 진리가 밝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그런 의미로 쓰는 거란 말이죠. 이렇게 감춰졌던 진리가 밝게 열려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둘러싸고 있던 껍질이 두들겨 맞아 사라져야 되는 거예요.그 두드려라, 에요.
마 25:10-12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성경에서요 소녀, 처녀 이런 건 반드시 신랑이 있어야 그 반쪽을 채워 온전한 것이 되는 어떤 존재가 그 신랑을 찾지 못했을 때 불완전한 반쪽으로 있을 때 그걸 처녀라 그래요, 소녀라 그래요. 그래서 성경에서 ‘남자를 알지 못한 자’, 이거 뭐 굉장히 순결하고 깨끗하고 이런 의미로 마리아를 묘사한 거라고 생각하시는데 천만의 말씀. 마리아라는 이름이 쓴 물이란 뜻이란 말에요. 그럼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건 뭐예요? 신랑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하는 이 세상의 죽어야 할 자라는 뜻이에요. 그 자에게서, 그 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게 구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그 처녀, 처녀는 처녀로 있으면 안 돼요. 신랑을 만나야 신부가 돼요. 그래서 처녀와 신부는 항상 대조가 된다니까요.
그런데 여기에서 열 처녀 중에 다섯은 신랑을 만나서 신부가 되어 들어가는데, 기름을 준비한 자들은 나머지는 그냥 어리석은 ‘처녀’로 남아요. 반쪽을 못 만난 불완전한 자. 근데 그들이 처녀들이 와서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그래요.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주세요, 이게 아노이고에요.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는데 내가 처음부터 너희들을 몰랐다, 그래요. 난 너희 못 봤어. 두드리면 열린다 매요? 어떤 이들한테는 안 열리네요? 열어달라고 두드리는데 안 열어줘요. 왜 안 열어줘요?
기름이 없었어요. 기름은 뭐예요? 진리의 말씀입니다. 그게 없으면? 진리의 말씀은 곧 내 신랑이잖아요? 내 안에 그 말씀이 들어오면 그게 내 신랑이죠? 내 생명이란 말에요. 나를 낳게 하는 아비이기도 하고.
그게 없으면, 진리의 말씀이 없으면 첫 남편인, 로마서 7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는 거예요. 첫 남편이, 율법인 남편이 아직 안 죽은 자인 거예요. 그 남편이 죽어야 다른 남자에게 가 그 남자와 연합하여 사람이 되는 거예요. 아들이 되는 거란 말에요. 그 율법을 알지고 못 죽인 자. 그걸 처녀라 그래요. 어리석은 처녀. 그들은? 문밖에서 계속 밤에 속해서 살다가 그 밤의 것들로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다가 결국 밤에 죽어요. 그들은 밖으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갈 일만 남은 거예요. 히브리사람들에게 있어 이를 간다는 건 양식이 아닌데 공갈빵처럼 그것을 양식인 것처럼 씹는 거 있죠? 근데 허풍선이야, 하나도 안 씹히죠? 그럼 뭐해요? 이빨만 갈잖아요?
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를 뿌드득 뿌드득 갈면서 두고 봐! 이게 아니라 양식이 아닌데 그걸 양식인 것처럼 먹고 있는 너희들 그래 밖으로 쫓겨나서 이만 갈 거야. 내가 죽이지 않아도 너희들은 그냥 죽어. 이런 뜻이에요.
근데 성경은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세례사건 후에, 세례라는 게 예수님이 아래 물에 빠져 죽고 위로, 아나바이노, 위의 것으로 올라오는 걸 세례라 그러잖아요? 세례사건 후에 성령이 오시죠? 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십자가의 세례, 세례로 그걸 묘사한 거란 말에요. 죽으시자 성령이 오시죠? 성령이 오신다는 건 뭔가가 열린다는 뜻이잖아요? 그 때 무엇이 열린다고 이야기 하느냐면 하늘들이 열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한번 보세요.
마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물, 아래의 물, 저주의 물에서 아나바이노 위의 것으로 이제 올라오세요. 올라오실 새] 하늘(들)이 열리고 [영어에 Skies, 있어요, 없어요? Waters가 없는 것처럼. 하늘들이 뭐예요? 근데 히브리어에만 하늘들이 있어요. 하늘들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호라호에요, 그게. 영적으로 보는 거죠]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늘들 안에서 소리가 나와요. 어떤 말이 나와요. 그런데 이것이 아들이고 이것이 내 사랑이다, 그래요. 이게 주격이에요. 아가페가.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가 아니라 이것이 내 아들이고 이것이 내 사랑이다. 에요. 내 안에, 하늘들 안에서 소리가 나와요. 하늘들이 열리고 그 하늘들에서 성령이 나오는데 자 생수가 쏟아져 나오는데 그 안에서 그 생수가 어떻게 나오느냐 하면 하늘들 안에서 나오는 소리로, 많은 물소리 같은 소리로 나오는데 이것이 아들이고 이것이 아가페다, 이것이 사랑이다, 라는 소리로 나오는 거예요.
예수가 물에 빠져, 저주의 물에 빠져 죽고 아나바이노, 위의 것으로 올라왔더니 하늘들이 열리고 성령이 나오는데 그것이 소리로 나와요, 말로 나와요. 이것이 아들이고 이것이 사랑이다. 이렇게.
그러면 그 하늘들이 뭘까요? 오늘 우리가 공부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가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거든요. 제가 그 하늘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지금 여기까지 온 거예요. 자, 두드려서 열렸어요. 뭐가? 하늘들이. 근데 그 하늘들 안에서 성령이 쏟아져 나오요 그것이 말로 쏟아져 나오는데 어떻게 쏟아져 나오느냐 하면 이것이 아들이고 이것이 사랑이야, 라고 나와요. 그럼 그 하늘들은 뭘까죠?
대부분의 주석서들이 그 하늘들이라는 단어를 장엄복수형이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신학자들이 그냥 붙여놓은 이름입니다. 장엄복수형. 헬라어나 히브리어에서는 천상적이며 신령한 개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종종 장엄복수형을 써서 표기를 한다는 거예요. 만일 그런 거라면 모든 하늘,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늘이 전부 하늘들로 표기가 되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그 하늘이 그냥 단수로 되어 있고요 관사도 붙었다, 떨어졌다 지 맘대로 해요. 그럼 일관성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그건 그냥 추측이에요. 추론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늘은 하나님의 그 고유한 영역성, 그 영역성과 신성을 상징하는 그런 영적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며 개념이 맞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하늘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 어떤 피안의 공간으로만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하늘들은 요 하나님의 그 처소, 즉 하나님께서 진리로 거하시는, 내용으로 그 안에 거하시는 모든 곳을 가리키는 영적 영역, 그걸 하늘이라 그래요. 그리고 그것들이, 모형이 많기 때문에 그걸 ‘하늘들‘이라고 써요. 성경구절 몇 군데를 찾아서 그 하늘들이 의미하는 바를 제가 추적해드리죠.
히 9:23-24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하늘들입니다. 하늘들 안에 있는 것들의 그 모형은. 자, 하늘들 안에 있는 것들, 그 하늘들 안에 있는 그 어떤 것이 있는데 그것의 모형이 있어요. 어디에? 그 하늘들 밖에 모형이 있는데 그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그러니까 피나 아니면 정결 예식이나 어떤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다는 거예요. 하늘들 안에,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하늘들은 여러분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하늘들 안에 그 어떤 것이 들어있어요. 그를 살리는 어떤 것. 그를 하늘이 되게 만드는 어떤 것. 그 어떤 것이 들어있는데 그건 진짜죠? 참이죠, 그것이? 그것들의 모형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 밖에. 그것들은 반드시 율법으로 정결하게 돼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하늘들 안에 있는 [여기도 하늘들이에요. ] -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그런 것들로 절대 정결하게 될 수 없고 그것과 다른 더 좋은 제물이라고 그랬는데 이건 최상급이거든요. 최고 좋은 ‘그 제물’, 그 제물로만 정결하게 돼, 그래요. 그 안에 있는 그건. 그리고는 뭐라 그러느냐 하면, 그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물이에요. 십자가. 그러더니 갑자기 그리스도가 나와요.]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참 것이 알레떼이아에요, 그러니까 진리의 그림자인 이런 말이에요. 자, 하늘들 안에 어떤 것의 모형이라는 말이 앞에 나오고 참 것의 그림자, 라는 말이 나와요. 그럼 하늘들 안에 어떤 것이 뭐라는 거예요? 참 것의 그림자니까. 진리라는 말이에요, 알레떼이아, 그것. 하늘들 안에 그 진리가 있는데 그것의 모형들이 뭐예요? 성전이고 율법이고 이렇잖아요? 그것들은 율법의 그 정결예식, 율법의 행함으로 정결하게 하나님이 정하셨단 말에요. 그런데 그 하늘들 안에 그 진리, 그것은 그 제물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율법이 원한 그 제물. 더 좋은 제물 그 예수라는 제물로만 그건 정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 들어있는 그것이 뭐예요?]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그거 옛 성전이잖아요? 자, 그리스도가 그 참 것의 그림자인 성소라고 했으니까 참 것은 성소 안에 들어가 있는 거여야 돼요. 그런데 거기가 아닌 어디로 들어갔다고 해요?]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참 하늘이라고 했는데 여기 ‘참’은 없어요, 그냥 하늘들 안에 들어가셨다, 그래요 그러면 진짜 성소가 어디라는 거예요? 하늘들? 나! 나. 그 안에 그리스도가 들어갔대요. 그래놓고 그걸 참 것, 진리라고 그러고 그 위에서는 하늘들 안에 있는 어떤 것, 이라고해요.] 들어 가사 [그렇게 그리스도가 그 하늘들 안에 들어갔더니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그래요?]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뭐,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나타났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프로소폰, 하나님의 그 얼굴이 하나님의 그 하나님 되심이 밝히 드러났다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그 안에 들어갔더니. 비밀이 은밀함이 벗겨졌다,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프로소폰은 파님이라는 단어를 헬라어로 옮긴 거니까. 하나님이 은밀하게 감춰둔 것이 그리스도가 하늘들 안에 들어갔더니 그 안에서 열리더라는 거예요. 진리로 열리더라. 이런 말이에요, 이게. 그렇다면 예수가 제물로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밝히 드러내어 나타낸 그 하늘들은? 바로 우리라는 게 이제 자명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호 우라노스, 해놓고 복수로 쓰잖아요? 그럼 그건 교회, 나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나!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하늘이에요.
너희는 거룩한 나라다, 그러죠? 하늘.
벧전 1:3-4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위로 나게 하사, 아노뗀]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이 기업이 상속물이에요. 자 그렇게 우리를 거듭나게 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이 상속물을 주셨어요. 그게 기업입니다. 뭘 줬어요? 기업, 생명이지 뭐예요? 진리의 말씀. 진리의 호흡. 푸뉴마, 생명을 줬죠? 그걸 줬습니다. 기업을 줬는데 그게 뭐냐면] 곧 너희를 위하여 [너희 안에서, 이런 말이에요. 에이스가. 너희 안에서] 하늘들 안에 두신 거야.
너희 안에, 하늘들 안에 두신 거야. 뭐를? 그 생명을.
그렇다면 하늘들이란 하나님의 생명의 호흡을 공유할 수 있게 되고 그 하나님의 충만한 말씀 안에서 발견된 진리에 눈을 뜨기 시작한 존재들 그 자체의 존재 상태를 하늘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늘이신 하나님을 계시하기 위해서 이 땅에 율법과 예수를 눈에 보이는 것으로 주셨어요. 율법, 즉 성경도 하늘을 설명하고 있고 예수도 하늘을 설명해요. 그래서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 나라라고 한 거죠. 그리고 땅의 것으로 주신 성전이 아, 그 하늘 적인 것,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는 것 그것으로 이 성전이 이해되어지면 그걸 호 우라노스 하늘이라 그래요. 그래서 호 우라노스가 그냥 단수로 쓰이면 그 성전이에요. 근데 그 호 우라노스가 호 호로스라는 단어와 어근이 같다고 그랬죠? 그리고 호 호르니스, 그 산, 그 새, 그 성전, 그 하늘 다 같은 말이에요. 히브리사람들은 그 산, 그 새, 그 하늘 이걸 같은 단어로 쓴다니까요.
자, 그 성전과 예수가 진리로, 그리스도로 깨달아 알아져서 그것이 마음이 되면 그것을 생명이라 그러고 그 생명을 품은 이들을 성경이 그 하늘들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딴 건 다 짝을 맞춰주셨는데 그 하늘만 텅 비어놓은 거예요. 하늘 없잖아요?
파란 하늘 저거 하늘이에요? 언젠간 올라가고 말 거야, 그러고 계속 가다 보면 하늘이 나와요? 하늘은 없어요. 그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느루 황이라고 그랬잖아요. 하늘은 검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바로 그 하늘들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것의 진짜 원형인 그 하늘은 반드시 존재한다. 이 세상적인 어떤 것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 하늘이 만약 뭐 저 멀리 어딘가에 저 우주 어딘가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면 인간들은 반드시 어떤 로켓트를 만들어서라도 거기 갑니다. 그러니까 그 하늘은 여기 어디에 있으면 안 돼요. 그 하늘은 반드시 이 땅과 다른 차원의 것으로 존재한다, 를 보여주기 위해 거길 텅 비어놓은 거예요.
그 하늘만 없어요. 근데 그 하늘은 여러분 안에서 먼저 맛보아 알게 되는 거예요. 그걸 현실천국이라 그런다고 했죠?
자, 그렇게 성전과 예수가 진리로 깨달아져서 그것이 마음이 되면 그걸 생명이라고 그러고 그 생명을 품은 이들을 성경이 하늘들, 이라고 부른다고 했어요. 그러면 그 하늘들 안에 그 생명, 그 진리는 무엇을 설명하는 거다? 그 하나님 아버지! 그죠? 진리는 아버지를 계시하는 거니까. 아버지의 그 아가페 사랑을 계시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그걸 가진 이들이 아들이라 그랬어요. 그 ‘하나만’ 가진 자, 모노게네스, 독생잡니다 그것이. 그 아들입니다, 그것이. 그러면 내 안에 있는 그 진리가 뭐다? 아버지!
그러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 그 아버지, 하늘들 안에 있는 그 아버지! 기도가 이렇게 시작된단 말에요.
그게 뭐예요? 하늘들 안에 있는 그 아버지.
진리의 영을 선물 받은 성도가 구하고 찾기 위해서 율법과 예수를, 물론 성령의 도우심으로, 두드려서 그것이 열리면, 그것이 죽고 열리면 그 율법의 문을 위에서 아래로 찢어버린 후에 어디로 들어가요? 지성소, 골방으로 들어가죠? 그리고 문을 닫으면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기도하라, 는 거예요. 그렇게 되지 않으면 기도라는 거 자체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라는 건 그 위에서 제가 여태까지 설명한 내용들, 몇 주간에 걸쳐서 설명한 내용들, 그걸 한 마디로 그냥 축약시켜놓은 거라니까요. 그게 안 되면, 골방 안으로 들어가 문들 닫고 너희들이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 지성소 안에 그가 되지 못하면 너희들은 프로슈코마이 할 수 없어 이런 뜻이에요.
그렇게 그 율법의 문이 열려버리면 그에게 그 은밀함 안에 감추어진 그 하나님 아버지의 그 프로소폰, 얼굴이 호라호, 깨달아 알게 되어져요. 그 때 그 사람 안에 아버지가 들어있다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 너를 아들로 낳은 그것. 그 진리죠? 근데 그건 하나님을, 진리는 하나님을 담고 있는 거니까 그분이 아버지에요. 그걸 설명해주기 위해 이런 육적 아버지들을 이 땅에 있게 하신 거예요.
근데 이 부자 관계에만 얽혀버리면 안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검으로 왔다, 뭐부터 끊어낸다고 그래요? 가족 관계부터 끊어낸다 그래요. 그거는 사실 원형이 아냐,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 아버지? 진짜 아버지 아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죠.
그 때 그렇게 아버지가 그 안에 들어가 있게 되면 그 사람은 아들이 된 거고 거기에서 그 육적 나의 가능성과 그 육적 자아의 행위가 전부 이제 삭제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몰수당하게 되는 거죠. 따라서 골방의 문이 열리게 되면 예수도 죽고 율법도 죽고 이 세상 속의 나도 죽는 거예요. 예수도 두드려 부수어지고 나도 두드려 부수어지는 거예요. 그래야 문이 열려요.
계 3:19-20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자,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책망과 징계 속으로 던져버린다고 그러죠?] 그러므로 너희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열심히 뭘 하라는 게 아니라 사랑하라, 라는 말이에요 이게. 잴러스라는 단어]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반드시 책망과 징계 속으로 들어간대요. 무엇을 위한 책망과 징계? 죄를 가르치시기 위해 죄를 드러내는, 책망과 징계에요. 쉬운 말로 두들겨서 죽이기 위한 책망과 징계. 그 속으로 들어간다는 거예요. 여기서 예수님이 두드린다, 라고 하셨을 때에 그 두드리다, 가 크러어에요. 똑같은 단업니다. 살해하기 위해 두드려버리는 거. 그 문밖에 서서, 라는 어구를 직역하면 성화같은 거 보면 예수님이 문밖에 초라하게 이렇게 서갖고 계속 이렇게 두드리고 있는데 밖에는 손잡이가 없어. ㅎㅎㅎㅎ
안에서 열어야 돼. 그래야 내가 들어가 ㅎㅎ. 이거 알미니안 주의자들이 잘 써먹는 그림인데 그러니까 우리가 열어야 되는 거라고.
맞아요, 우리가 열어야 되는 건데 그런 식으로 여는 게 아니라 이 말은, 문 위로 이스테미, 굳게 세웠다는 뜻이에요. 문은 누구에요? 양의 문인 예수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예수님이라는 그 문, 그 위로 그 진의가 이스테미, 거기서 스타오로스, 십자가 언약의 기둥이라는 단어가 나왔다고 그랬죠? 그 언약의 기둥이 서면 그게 이스테미 되는 거예요. 서는 거예요. 똑바로 서다.
그 예수라는 문 위로 똑바로 섰다. 완료에요. 똑바로 섰다. 이스테미 되었다. 그게 똑바로 섰으니, 십자가가 똑바로 섰으면 인제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두들겨서 죽여야 하는 자들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가 아니라 내가 그 문 위로 섰다, 세웠다,라는 거예요. 언약을 이제 세웠다. 성취했다. 그러니까 이젠 두드린다. 그 전에는 두드릴 수도 없어요. 두드려봐야 열릴 문이 없거든요, 그 때는. 내가 문 위에 이스테미, 똑바로 세웠다. 이제 두드린다. 두들기면 내가 너희들에게 먼저 성령을 보냈는데 그 성령이 그 안에 들어있는 자들의 문은 열린다는 거예요. 열린다는 것은 그의 육적 죽음 육체의 죽음을 전제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한다그래요? 내 음성을 듣는다, 그래요. 듣고 문을 여는데 그 진리의 음성이 들리면 내 육적 자아, 아담 적 선악과 패러다임 안에 있는, 아래에 있는 아담 적 자아가 삭제당하는 거예요. 너 아니잖아? 이렇게.
그러면 그가 듣는 말은 그건 진짜 양식이네요? 그러니 내가 니 안에 들어가 내 양식으로 너하고 같이 먹을게. 이런 말이에요. 내가 내 양식으로 너하고 같이 먹을게. 이젠 네가 들을 줄 알잖아. 그런 말이죠. 그런데 그 전에 뭐가 전제가 돼요? 그 문 위로, 그 문이 무엇인지 이스테미, 똑바로 세우는 일이 전제 돼야 되는 거죠. 그럼 열려요. 아노이고에요, 이것도.
그렇게 그리스도가 내 안에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 이제 나로 처소를 삼으면 나가 아들이 되는 거죠.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영, 그 진리 그 말씀이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아빠와 아들, 열심히 먹는 거예요 같이. 그래서 나 안의 그 진리를 아버지라고 하는 거고 그 생명을 가진 나 자체가 하나님의 처소인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아브가 뭐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이라고 했죠? 그게 아버지에요. 그래서 예수님도 내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다, 이렇게 이야기한 거예요.
요 14:2- 3: 8-10, 17-20, 23-24.
내 아버지 집에 [내 아버지 집이라는 것은 여기, 성전입니다.]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니고 너희 안에, 에요]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데이크느미] 보여 주옵소서 [보여주세요, 눈에 보이게 보여주세요.]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호라호한 자는, 나를 진짜 내용으로 안자는]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 내 안에 있는 그 아버지를 호라호했을 텐데] 어찌하여 아버지를 [데이크느미 하라 그래? 눈에 보이는 걸로 보이라 그래? 이런 말이에요]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의 일이 뭐예요? 예수님이 하시는 말이라 그러네요? 지금. 근데 그 말이 아버지의 말이래요. 진리의 말이래요. 근데 그걸 그냥 육적 예수의 음성으로 들으면? 그건 아버지의 말이 아닌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그 말을 하고 있는데도 아버지를 보여주세요, 아버지를 보여주세요, 그러는 거죠. 표피적으로밖에 인식을 못하는 거란 뜻이에요.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진리의 영이 온다, 성령이 온다, 아버지가 온다, 그래놓고 내가 온다! 그래요, 또. 그러면 ‘그 예수’는 아닌 거 아니에요? 다시 와야 하는 예수니까. 이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의 영인 예수, 내가 다시 온다. 그 내용으로써의 예수가 온다는 거예요. 그걸 진리의 영이라고 그러고 그걸 아버지라 그래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그 내 안에 있는 게 그게 아버지야, 내가 그걸로 올게. 그러는 거예요. 그걸로 올게]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호 코스모스]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당연히 못 보죠. 그리스도가 오면 세상은 못 봐요. 예수는 온 세상이 다 봐요.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산자만 봐. 그 그리스도는, 진리는요.]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전부 섞어버렸어요. 내가 너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뭐가 겉이고 밖인지 지금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하나라는 거예요.]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지키리니 Keep 하리니, 마음으로 간직하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우리가 뭐예요? 여기서? 내 아버지와 그리스도죠? 그럼 그리스도와 아버지는 하나라면서요? 그러니까 그걸 예수님이 우리라고 해버려요. 그 아버지가, 내가, 그리스도가 너에게 와서 너를 거처 삼겠대요. 조금 아까 위에서 그랬죠? 너희 안에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 그랬어요. 근데 그 처소가 어떻게 발현이 되느냐 하면 예수가 죽고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들 안에 들어가면 그들이 성령의 도움으로 그걸 깨달아 알면 그가 진리를 품은 자가 되어 예수의 처소가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아버지의 처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러는 거예요. 내가 들어간대요.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그래놓고. 그러니까 내가 처소 예비하러 간다는 건 나 십자가에 죽으러 간다는 이런 말이에요. 하늘나라에 맨션 지으러 간다는 말이 아니라. 나 죽으러 간다. 왜? 니들 안에 아버지로 들어갈라고. 아버지로 들어갈라고]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마음으로 Keep 하지]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 이니라
아버지의 말씀, 그것이 내 안에 들어오면 내가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의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기도부터 이제 할 수 있는 거예요. 그 때부터가 청유잖아요. 이렇게 해주세요, 그죠?
주님은 그렇게 당신의 진리의 영이라고도 하시고 다시 오는 나라고도 하시고 아버지, 라고도 말씀하세요. 말씀이라고도 말씀하시고.
그러니까 아버지가 처소삼고 계신 하늘은 ‘나’가 맞는 거고, 교회의 이야기에요, 성경은 다. 예수 안의 교회. ‘나’가 맞는 거고 그 안에 들어있는 진리의 영, 진리의 말씀이 아버지인 거고 그렇게 내가 다른 이웃들에게 그 생명 탄생의 현실을 전할 수 있는 그 존재도 아버지인 거예요. 아브, 아버지. 그러니까 여러분이 ‘그 아버지’가 되지 않으면 기도라는 거 자체가 불가능이란 말이에요.
자 이제 그 하늘들 안의 그 아버지라는 그 어구가 머리 속에 확 들어오시죠? 그래야 주기도문은 시작이 될 수 있어요.
우리가 바로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의 상태로 존재하는 거예요. 그건 이미 이루어진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니까.
주기도문이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이라 메요? 그럼 그 뜻은 이미 이루어졌죠.
그러나 그건 육체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강력한 간구, 구함, 찾음이 된단 말이에요. 그거! 그 기도를 하시란 말에요.
제가 아주 오래전에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라는 책을 통해서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주기도문을 강해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제가 이런 말을 썼어요. 그 때도 제가 헬라어 원어성경을 보고 있었는데 주기도문을 원어성경으로 보다보니까 동사가 전부 과거형이에요.부정과거. 아니 뭘 부탁하는데, 기도를 하는데 과거로 기도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근데 성경에 보니까 원문은 다 과거네? 부정과거. 이미 과거에 영단 번에 이루어진 거. 일어난 거가 과거죠? 그것이 청유형, 이게 명령형이거든요 또. 부정과거면서 명령형이에요.
헬라어에는 부정과거가 명령형으로 쓰일 때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서 아우르는 개념이 돼요. 그래서 그 일은 이미 일어난 거고 일어났고 일어날 것이고 일어나고 있어요,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걸 간절히 구하게 되는 거예요. 아버지의 뜻이 그건지 알았으니까.
정리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늘에서 세워진 하나님의 뜻이 무언인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은밀한 것으로 감추어두신 그 보물을 찾게, 재테오, 찾게 하시며 우리는 그것을 찾는 동시에 율법과 율법으로 오신 예수를 두드려서 삭제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러면 그렇게 두드려서 그걸 삭제하게 되면 드디어 진리의 문이 열리게 되는 거고 우리가 그 안에 들어가 그 은밀한 것 안, 그 골방 안으로 들어가 그 문을 닫아버리면 우리가 그 하늘들 안에 그 아버지 되는 거예요. 그 상태가 되는 거예요. 내 안에 진리를 품은 자가 되는 거죠. 그러면 이제 비로소 기도가 시작되는 거예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다음 주에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나라, 하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하나님은 진리로 뚫고 들어오시어 우리를 처소삼아 살고 계십니다.
이것이 올바로 이해된 이들에게 있어서 올바른 기도가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 그 기도, 우리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시는 그 기도 열심히 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