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력(萬曆) 15년 정해년(1587) 5월 초9일(정유)
흐리고 비. 늦게 출발하여 광녕(廣寧) 왕정(王政)의 집에서 묵었다. <광녕에는> 도어사(都御史), 총병관(摠兵官), 戶部郎中(호부낭중) 등의 관리가 있었다.
陰雨. 晩發 宿廣寧王政家. 有都御史, 摠兵官, 戶部郎中等官.
만력(萬曆) 15년 정해년(1587) 5월 초10일(무술)
흐리고 비. 머물렀다. 장차 무려(無閭)로 놀러 가서 하흠(賀欽) 선생의 유적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비가 와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관음사(觀音寺)가 근처에 있어서 가보려 하였으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요동총병(遼東摠兵) 이성량(李成梁)이 위세를 크게 떨칠 때는 가달(假㺚) 오랑캐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총병(摠兵)은 본래 우리나라 이산(理山) 사람으로 연로(年老)하지만 오랑캐의 사정을 두루 알고 또 산업도 경영하는데, 가법(家法)이 매우 엄격하며, 아들 이여송(李如松)과 이여백(李如伯)도 용병(用兵)을 잘한다고 한다.
陰雨 留 將游無閭 尋賀先生欽故蹟 雨不果 觀音寺在近 欲往見 亦未果 遼東摠兵李成梁威聲大振 㺚虜不敢近云 摠兵本東國理山人也 年老備諳虜情 且營産 家法甚嚴 有子如松如柏 亦善用兵云
《국역 배삼익 조천록》 p166~167, 김영문(세종대왕기념사업회 국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