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조부님 독립운동 행적 기록
외할아버지 독립운동 행적을 이원보(외삼촌)씨께서 陜川李氏中央宗親會(합천이씨중앙종친회)
2022년 江陽會報(강양회보)에 투고하여 수록된 글을 여기에 옮긴 글이다.
순국열사 합천이공 경호 공적
이원보(32세 목사공파)
기미년 3ㆍ1 독립 만세 운동은 대한민국의 한일복국의 투쟁이다.
이때에 고종이 붕어(崩御)하시고 사직은 망은(忘恩) 하니 역중의사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대한독립을 만방에 알리니 전국의 백성이 구름같이 모이고 안개같이 합하여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 하자 일인들이 혼이 나서 군사와 관원을 불러 우리 백성을 확살하니 많은 애국지사가 체포되어 감옥에서 수 없이 죽으니 합천 이공 경호가 그 중 한 사람이다. 공의 자는 기옥이요 호는 농은 성재이다. 그의 선대는 강양군 문충공 휘개가 그의 시조이며 원대손으로부터 31세손으로 1890년 6원 17일에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29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파조는 공주 목사공의 20세손이며 관찰공 휘계경의 16세손이다. 고조휘는 주요, 증조휘는 창근이며 조부는 복휘요 부는 규선이다. 공의 배위는 연일 정씨이니 외모가 단정하고 마음이 착하여 복이 있었고 공의 뒤에 별세하여 대가 없으므로 재종제 영호의 아들 원구를 양자로 삼았다. 공은 22세에 부친을 여의고 어머니 정씨에게 양육되어 가훈을 잘 받아 대의를 잃지 않았다.
기미년에 이르러 전국에서 의거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3월 23일 하동 장날을 이용하여 봉기 할 것을 결심하고 정성기, 정선기, 정이백 등과 같이 태극기를 만들고 인근 부락에 비밀연락망을 취하여 많은 군민이 참가토록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하였다.
기미년(1919년) 3월 23일 전일 장날의 봉기에 놀란 의경은 경계를 삼엄하게 하고 있어 공과 그 외 3인은 태극기를 깊이 숨긴 후 장터에 잠입하여 정오가 조금 지나 장이 한참 성시를 이룰 때 경계중인 왜경의 눈을 피하여 태극기를 장꾼에게 나누어 주고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 독립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이에 따라 800여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니 감격과 흥분에 찬 군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때 경계중인 일경이 출동하여 그 주선자를 체포하고 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하니 흥분한 군중이 응하지 않았으며 군중의 만세 소리는 더욱 높아가고 합류하는 군중이 더 많았으며 이를 본 일경은 사태의 진전을 심상찮게 여겨 총을 휘두르고 닥치는 대로 때리고 차며 총검으로 찌르니 해산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의 만세 소리는 경찰기록에는 하동군의 순사들이 모두 동원되어 겨우 해산시켰다고 한 것을 보면 저항이 완강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과 주동자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난장을 맞고 하동 경찰서에서 심한 심문과 고문을 받은 후 진주감옥으로 이송되어 재판에서 일인 판사가 마지막으로 앞으로 충실한 일본국의 신민이 되겠느냐, 하고 물으니 공은 쓰러질 듯한 몸으로 크게 웃으며 “나는 대한 제국의 개가 될지언정 적국 일본의 신민은 되지 않겠다.”라며 대한 남아의 용기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공은 징역 18개원의 선고를 받자
“잃었던 내 나라를 되찾고자 함이 어찌 죄가 되느냐” 하고 법정투쟁을 전개하여 대구 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원심대로 형이 확정되어 대구 감옥에서 복역하다 간수를 구타하는 등 일인의 만행에 극한투쟁을 전개하였다. 모진 고문과 장독으로 대구 감옥에서 옥사하여 공의 나이 30세로 끝을 맺으니 그 소식을 들은 주민과 군민의 울음소리가 온 누리에 메아리 쳤다 한다. 주민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대구 감옥으로부터 시신을 인수하여 도보로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묘소까지 운구하여 안치하였다.
공을 흠모하는 군민이 결의비를 세우고자 비석까지 마련하였으니 왜경의 탄압으로 중지되어 근년까지도 하동군 양보면 감당리 상쌍마을 앞 도로 앞에 묻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다. 공이 세상을 하직한지 어언 70년의 세월이 흐른 1990년 그 공적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공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제비–485호)을 영정에 드리니 어찌 이르다 할 것이오.
공의 내외분은 1994년 대전국립묘지(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성역에 안장하게 되었으며 이곳을 찾는 이 마다 공의 공적에 옷깃을 가다듬고 참배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대전국립묘지 제2묘역 제197호에 세워진 공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전면에는 순국열사 이공 경호.
뒷면에는 먹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돌풍이 온 누리를 휩쓸 때 백의민족 자주독립을 외치던 우렁찬 만세 소리가 온 누리를 뒤흔들 무렵
“나는 대한제국의 개가 될지언정 너의 나라 신민이 되지 않겠노라.”
호통 치던 그 마지막 말씀이 영원토록 겨레의 가슴 속에 민족의 혼이 되어 이어지리라.
참고문헌
1. 삼일운동실록(1969년) 695면
2. 부산 경남 삼일운동사(동지회, 1979년) 631면
3. 하동군지(1972년) 238면
4. 하동군사(1978년) 272면
5. 고등경찰 관계적록(경남경찰부) 20면
6. 조선소요 사건상황(총독부) 109면
7. 독립운동사(편찬위) 제3권 276, 277
8.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원, 1991년) 제9권 304, 305면
9. 하동지역 항일 애국지사 연구(논문 1995년) 36면
10. 내고장의 맥(하동군, 1990년) 107면
그외 합천이씨 세보
부산일보(1990년 1월 15일), 서울신문 (1990년 8월 15일) 기사
첫댓글 자랑스런 외조부님의 행적을 찾으면서 가슴 뿌듯 하셨겠네요.
그런 조상의 핏줄을 이어받았으니 공의 행동이 모든 면에서 사려깊어
친구들에게도 스승같은 대우를 받는거군요.
조상의 행적 바람직했어도 공 같은 후손이 없다면 찾아내기 힘들텐데...
외조부님 공적을 찾은 성과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