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좀 지난 사진이지만 마침 김붕래 선생님께서 올리신 12월 소곡 글에 박노해 시인에 대해 언급해 주셔서 일전에 그의 사진전에 다녀왔던 사진을 올려봅니다.
잘 아시다시피 박노해 시인은 대한민국의 시인, 노동운동가, 사진작가로 1984년 27살에 쓴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은 금서였음에도 100만 부가 발간되었으며 이때부터 '얼굴 없는 시인'으로 불렸습니다. 전두환 정권에서 장기간 도피생활을 하다 체포되어 1991년 사형을 구형받고 환히 웃던 모습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죠. 무기수로 독방에 갇혀서도 독서와 집필을 이어갔고 7년 6개월 만에 김대중 정부에서 특사로 석방된 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복권되었으나 국가보상금을 거부했습니다. 그후 20여년간 국경 너머 가난과 분쟁의 땅에서 평화활동을 펼치며 현장의 진실을 기록해왔습니다.
1957년, (오원춘의 함평 고구마 사건-1976-으로 유명한) 전남 함평군에서 태어나 보성군 벌교읍 농가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독립 운동과 진보 운동에 참여했으며, 판소리 가수였던 아버지와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16세에 서울로 올라가 낮에는 일을 하고 선린상고에서 야간 수업을 들었습니다. 건설, 섬유, 화학, 금속, 물류 분야에서 일하면서 노동운동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노동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1980년대는 노동시 창작도 가장 활발했죠. 박노해와 백무산의 시가 이 시대를 대표합니다. 박노해는 졸업 후 여러 업종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한편으로 시도 쓰기 시작했는데 1983년, <시와 경제>지에 '시다의 꿈'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하게 됩니다. 이듬해인 1984년에 시집 <노동의 새벽>을 내서 한국 사회에 충격을 안겼는데 노동자가 노동자의 입장에서 쓴 시집으로서는 거의 최초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한국 시문단이나 지식인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미쳤습니다.
당연히 당시 5공 군사독재 정권은 이 책을 금지도서로 지정해서 탄압했지만, 이 시집은 널리 읽혔고 약 100만 부가 팔려나갔습니다. 이때부터 박노해는 '박해받는 노동자(勞)의 해방(解)'이란 문구에서 앞글자를 따서 필명을 지었고, "얼굴 없는 시인"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이후로 박노해는 시인이자 노동자라는 이름에 투쟁가를 더하게 되는데 1985년 김문수(전 한나라당 소속 경기지사. 당시엔 진보운동가), 심상정과 함께 공개적인 노동자 정치조직 '서울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을 창립하여 중앙위원으로 활동했고 서노련이 정권의 탄압으로 와해되자 백태웅 前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함께 1989년 비공개 지하조직인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을 결성했습니다.
<노동의 새벽> 출간 이후 무려 7년여의 수배 생활 끝에 1991년 안기부에 체포되어 24일간의 고문 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이 구형되고 무기징역으로 선고된 그는 법정 최후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사형장에서 사라지더라도 더 많은 박노해가 나타나 노동자 민중이 주인이 되는 사회를 건설해주길 바란다."
2000년, 박노해는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민주화운동에 따른 국가보상금을 거부하고 비영리 사회운동단체 <나눔문화>를 설립해 반전 평화운동에 전념했습니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 곁에 있어주기 위해" 이라크로 향했고 2006년 한국군의 중동 파병을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팔레스타인, 쿠르디스탄, 파키스탄, 아체(인도네시아), 버마, 인도, 에티오피아, 수단, 페루, 볼리비아와 같이 전쟁과 가난으로 고통받는 나라들로 떠나 평화활동을 계속했습니다.
2010년 중동평화활동을 모은 첫 사진전인 <라 광야>와 중동, 아프리카 사진전 <나 거기에 그들처럼>(세종문화회관)을 열었고. 같은 해, 저항, 영성, 교육, 삶, 혁명, 사랑 등의 주제로 한 10년만의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출간했습니다.
2014년에는 27일간 3만 5천 여 관람객이 다녀가 '박노해 현상'을 다시 일으킨 <다른 길>사진전-세종문화회관-을 개최하였습니다. '라 카페 갤러리'(나눔문화 운영, 부암동에서 통의동으로 이전)에서 박노해 상설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데 현재 18번째 전시 <걷는 독서>전이 열리고 있으며, 지금까지 총 3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페이스북과 인스타 계정 <박노해의 걷는 독서>를 통해 매일 아침, 그의 시와 사진을 만날 수 있습니다.
박노해 사진작가의 [티베트 사진전]을 돌아보고 동료 사진작가들과 밖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제 옆에 있는 봉투 안에는 그의 티베트 사진전 전 작품이 실린 책자가 들어 있습니다.
다른 동료들은 지금도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전국을 돌고 있는데 저는 아직도 이러고 있군요.ㅎ
박노해 시인이 탄압을 받고 숨어다니던 당시 그에게는 현상금도 많이 붙었죠. 전두환의 견찰(犬察) 앞잡이들이 당시 제가 일하던 출판사로 찾아와 박노해나 수배자들에 관한 작은 정보라도 달라며 부탁하고 다녔습니다. 현상금 받으면 크게 쏘겠다면서.
그 당시 새 세상이 왔다며 인권유린의 삼청교육대를 환영하고 육참총장 공관을 습격해 김오랑 중령 등 저항하는 총장 경비대를 사살하고 광주를 피바다로 물들인 전두환을 지지하던 생각 없는 사람들은 박노해를 사회주의 빨갱이라며 증오했지만 저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정승화 총장의 부관 김오랑 중령의 부인은 그 충격으로 실명을 하고 실의에 빠져 지내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하고 맙니다.)
설사 수배로 쫓기던 박노해 시인이 저를 찾아와 숨겨달라고 했어도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중범죄자가 아닌 이상 저는 기꺼이 그에게 은신처를 제공했을 겁니다. 양심법에 따라 김현장 문부식 김은숙을 숨겨주었던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처럼.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해찬이나 항소이유서로 유명한 유시민, 관악구 국회의원 정태호나 지금의 총리 김부겸과도 자주 밥을 먹거나 담배도 서로 나누어 태우며 함께 나라를 걱정하던 관계였지만 당시에는 그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맡는 인물들이 될줄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ㅎ
암튼 지금도 친북 종북타령을 하면서 누구를 석방하라며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들어 절로 안도현 시인의 시 구절이 떠오릅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마지막으로 그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이불을 꿰매면서 / 박노해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 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 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 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근로자였었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고양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정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 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첫댓글 범상한 눈에는 그저 연탄재인데 -
알고보면 뜨겁게 타오르던 불덩이 시절도 있었군요.
덕분에 피상적으로 알던 박노해 시인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니 그의 시가 더욱 무겁게 다가섭니다.
박 시인 이야기를 하며
부분부분 무장해제를 한 최대표 얼굴도 볼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쁨니다.
선생님께서 부분부분 무장해제를 한 제 얼굴을 보셨다고 해서
그 철판 벗은 모습을 어디에서 보셨는지 글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만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ㅎ
지금은 차가운 연탄재의 모습이지만 한 때는 뜨거운 시절도 있었는가 가만히 돌아보아도
남는 것은 그런 적이 별로 없었다는 여전한 부끄러움입니다.
과거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져 타올랐던 이들을 비난하는 이들은 지금도 하나같이
변사또의 잔치상에 합류해 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를 누리던 자들입니다.
그 중심에는 국민에게 이간질을 일삼는 조선일보가 있구요.
박노해는 수배중인 인물이라 만난 적은 없습니다만 우리 집으로 피신 왔으면 하고
바랐던 적은 있습니다.
노동의 새벽 이후, 가식적이고 감상적인 부르주아 시들은 가까이 하지 않게 되었군요.
그래도 선생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얼굴이 남아있어 참 다행이다 싶은 시간입니다.ㅎ
언제 다녀오신 사진전인지 대단한 용기를 내어 방한모자쓴 모습을 올리셨군요 1980년대 노동문학을 온몸으로 쓴 박노해시인의 시를 읽으면 감성적 서정시들이 빛을 잃는듯 한데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이제 사진을 통해 사회적 메시지를 주고있군요 찬찬히 읽어보며 다시금 노동의 새벽에 대해 생각을 합니다 감사합니다
지금도 폰 카메라가 저를 향하면 습관처럼 고개를 숙이는 제가
여기에 제 모지방을 올리는 자체가 대단한 용기이긴 합니다.ㅋㅋㅋ
전태일 시대도 그랬지만 지금도 노조운동을 비난하고 재벌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에어컨이나 히터 잘 돌아가는 사무실에서 정해진 봉급 받으며 일 하는 화이트 컬러들입니다.
이들은 직장에 붙어있기 위해 언론사 사주의 이념에 따라 글을 쓰며 삽니다.
그러다보니 사주를 닮아가는 기레기들인 거죠.
저도 80년대 감옥을 드나들었으면 박노해처럼 사진도 잘 찍었을텐데
수배나 감옥 경험이 없어서 박노해만한 인물이 못 되었던 것 같습니다.(저 죽일 놈.)ㅎ
노동자는 이윤을 내는 기계가 아니라는 그의 말이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사진으로 그의 일면을 소개해 드린 것 같아 기쁘게 생각합니다.
관심의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