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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백산맥 원문보기 글쓴이: 山白
『내가 뽑은 나의 시』 詩選
2013 한국작가회의 시분과
거미
황지영
가는 외줄기
끈에 온몸을 맡긴다.
10월의 바람, 흔들 수 있는 것은
손아귀로 잡고 있는 나일뿐
내 가슴의 한 자락도 건드리지 못한다.
남들이 만들어놓은 길 버리고
가지 않은 길 벼랑에
외줄을 건다.
스스로 자신 안에서 뽑아낸
한 줄에 온몸을 던진다.
무수한 번지점프
바람으로 황홀한 그네를 탄다
굳어지고 낡아진 나를 벗어던지고
여린 바람에도 걸리지 않는
이음으로 양식을 만든다.
허공, 발자취 없는 길
섬세하고 끈질긴 그물망
부목 살이
홍사성
퇴직하면 산속 작은 암자에서 군불이나 지피는 부목 살이가 꿈이었다
마당에 풀 뽑고 법당 거미줄도 걷어내며 구름처럼 한가하게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요즘 나는 신사동 어디쯤에서 돼지꼬리에 매달린 파리 쫓는 일 하며산다 청소하고 손님 오면 차도 끓여내는데 한 노골이 보더니 굽실거리는 눈매가 제법이라 했다
떫은 맛 조금 가시기는 했으나 아직 덜 삭았다는 뜻인 듯해 허리 더 구부리기로 했다 들개처럼 지나온 길 자꾸 뒤돌아보면 작은 공덕이나마 허사가 될 것 같아서다
南濟州
현택훈
시인들은 모슬포에 모였다가 뿔뿔이 흩어진다
모질게 푸른 족보를 펼친 하늘 보며 슬퍼하다 마라도 가는 배 바라보며 귀퉁이 닳은 수첩 꺼내 끼적인다
흩어진 시인들 몇은 서귀포 정방폭포 부근에서 주왁거리고, 몇은 보목포구에 가서 느릿느릿 정박한 어선처럼 흔들린다
시외버스 정류장 옆 국수집 유리창에 부딪치며 일호광장의 저녁을 맞이하는 시인도 있다
거센 바람은 종려나무 잎사귀를 쓰다듬으며 순해지고
산남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젖무덤 속으로 파고들고
이중섭 머물던 단칸방까지 솜이불 같은 바닷바람, 밀물로 밀려온다
멀리 가지 마
섶섬, 문섬, 범섬 불러보는 한 가지들, 섬이라는 항렬자를 쓰는구나
포구 조긋디에 그리움의 닻을 내리고서 섬들을 붙잡아 둔 마음들
바닷게 한 마리 내 발가락을 물어준다면 여기가 산남이라는 것을 어떻게 잊으랴
쇠소깍 가서 종이배 띄우듯 편지 쓸까, 물 좋은 강정천 가서 발 담글까
나는 무명 시인, 키 작은 바람
516 호출 택시 외롭게 반짝이는 빈차 불빛에 어리는,
혜초선사의 본명
차영호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큰맘 먹고 모셔온 왕오천축국전을 들여다보았네 치성 드리듯 공들여 쓴 한 글자 한 글자에 취해 넋 놓고 있다가 믄득, 혜초선사의 본명이 궁금해질 찰라
혹시 차영호 아니냐고
불쑥 내 귓바퀴를 잡아끄는 목소리
사십 년쯤, 아니 사백 년쯤, 아니 아니 사천 년쯤 돌돌 말아둔 두루마리가 무턱대고 펼쳐지고
그리운 갈래머리가 찰랑찰랑
서울 하늘 저녁놀이 우리 열일곱 살 적보다 더 붉디붉고
하행열차 차창에 어룽이는 이내는
두어 뼘만 펼쳐놓은 진본처럼 눈 시리더군
다리에서
정주연
강물이 햇살보다 더 반짝이는 건
풀어놓은 사연들이
흘러가지 못하고 앙금이 되어 비추기 때문
江岸 갈대숲에 물새들이 모여 있다가
일시에 허공을 하얗게 차오르는 건
거리를 떠난 사연들이
강바닥에서 모래알 되어 아프게 쓸어내리는 걸
보다 못한 물새들이 바람에 풀어놓으려는 때문
다리에서 누군가 눈길도 없이 서 있는 건
모래알 같이 쓸리던 날들이
금빛 물살로 되쏘여
아득하다면 눈멀게 하는 날들이
바람 불어와
가슴 구석구석 제자리 찾아드는 때문
인도 없는 녹슨 철교에서 시간 잊고 서 있던 적 있으신가
[감상] 차분하게 좋은 시다
시는 이래야 한다
뻘
정운희
처음부터 바다는 없었네
구름이 몰려오는 오후 세 시의 반대쪽으로
불판에서 조개는 쓸쓸한 유언을 뱉어내고 있었던 거지
가령, 너의 영혼처럼 차가운 젓가락 끝에서
죽음이 잠시 들어 올려지는 순간
앞에 앉은 여자의 아랫도리는 꿈틀거렸을지 몰라
뻘 속의 조개가 허공의 바다를
찰나에 되물고 들어가는 캄캄한 순간처럼
감쪽같은 널 감출 수 있어서 다행이야
이곳은 어제를 그리워하는 미래가 자꾸 깊어져서
어느 곳으로도 흘러들지 못할 거야 우린
뻘은 여자가 숨기에 적당한 장소일 테고
뭍에서 조개를 굽고 있는 남자의 성별은 바다일지 모르지
어쩌다 이름이 바뀐 행성에서
가끔은 벗은 몸을 가슴 높이로 비춰보며 아프다고 말하자
저 곳을 바라보며 슬며시 이곳을 바라보는
눈물을 훔칠 수도 있는
구름의 자세를 닮은 이곳은
소리 없이 한 몸이 되는 언덕이 생겨나고
나는 네가 빠지기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
서쪽에서 세 번째 구름을 꺼줘
부평 4공단 여공
정세훈
늘 그녀들로부터 위축되어 있었다
맘에 드는 상대가 나타나도
내 처지만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질 못했다
가까이 접근을 하면
공들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면박을 줄 것만 같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펜팔을 했다
펜팔 업체로부터 소개받은 그녀는
부평 4공단에서 여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연장 작업, 휴일 특근작업, 36시간 교대작업,
공장생활의 고단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아프지만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이 오고 갔다
“아프지만”이란 소식에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감상] 시란 사람의 마음이다. 잔잔한 마음이다.
청춘들의 애틋한 사랑의 감정은 대지를 푸르게 한다.
꽃과 사랑
정성태
꽃들이 피고 지는 이면에는
무슨 내밀한 신호가 있을까
저기 저 하늘 아래
시절의 전갈을 온몸으로 받아
간절한 순간을 살고 지나니
사랑의 연원 또한
영혼의 가장 깊은 촉수로부터
온갖 부호를 해독하는 일
사연이 참혹할수록
거기 사랑의 역사도 깊다
잠수함을 만들다
정선호
주위의 문인들은 모임에 자주 빠지는 내게
잠수함 만들고 있느냐 물었다
내 직장은 방위산업에 많은 비중을 두었다
나는 군함과 경비정을 만드는 일을 한다
일하는 이들은 방산법을 지켜야 한다
밖에서 제 업무를 타인에게 발설은 금지며
파업이나 단체 행동도 할 수 없다
하여 나는 어떤 모임에도 참석을 꺼려 왔다
대신 잠수함을 열심히 만들고 있다
철판을 잘라 선체를 완성하고 엔진을 달아
(더 이상은 보안상 적을 수 없음을 양해바람)
잠수함 타고 시운전을 다니고 있다
바다 속에서 늘 온갖 시詩를 읽고 있으며
물고기며 수초들과 작품 토론하고
수초에 시화詩畵를 묶어 시화전 열었다
가끔은 물고기들을 불러 시낭송회도 열었다
앞으로도 계속 잠수함을 만들어
해저 생물들과 문학의 천국을 만들 거다
(앞으로 내가 문학 모임에 보이지 않으면
해저의 문학 모임에 참석한 줄 아시길)
종소리 한 잎
장상관
영국사 입구에는 범종이 되어버린 고목이 있다 큰 울음으로 재앙을 알렸다는 전설을 품고 천 년을 넘게 서서 종소리에 골고루 햇살을 찍어바르는 은행나무가 있다
나비 날개 같고 황금 부채 같은 소리 살결을 만지면 금빛 바람이 건너와 삭신에 쌓인 먼지 털어내고 잘 마른 볕 한 장 가만가만 핏속으로 날아든다
맥놀이가 뭇 가슴을 열어젖혀 아망스러운 우울을 달래는가 하면 말랑말랑한 소리가 데워놓은 온기가 혓바닥이 덧낸 생채기까지 핥는다
눈부처까지 노랗게 물들여 놓은 종소리에 휩싸여 바람이 머물다 간 소리 한 잎 쥐어보면 은행나무 범종이 밟아온 축축한 뒤안길이 저릿하다
악필
이지호
철거장 받아 든 두 손
명징한 서체書體
관官의 냄새가 아직도 글자를 떠나지 않은 내용들
구불구불해서 읽을 수 없다
집들을 키우던 기슭과 길의 눈금마다 결치 같은 빈터가 생겨났다 길이 허물어진 골목은 몇 개의 발걸음도 받아내기가 힘겹다 크게 쓰여진 붉은 글자는 벽에 붙어 펄럭이듯 눈에 띄지만 눈 밖에 나앉은 처지야 서로 같다 안과 밖이 사라진 벽들 덜 지워진 글자 위에 새로 쓰여진 글씨들 흔적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악필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몇 개의 받침이 빠진 듯 버스는 먼 길 돌아 아직 도착하지 않고 기울어진 정류장 표지판은 어지럽게 잡풀 키만 키웠다
일필휘지一筆揮之 장맛비
일직의 빗줄기가 풀어진다
으름장 한 번 놓고 바닥으로 자음 모음이 제각각
방향 없이 흩어진다
군데군데 물웅덩이에 받침들이 엉겨 있다
물이 잔뜩 들어 있는 봉숭아 그늘 아래
지렁이가 구불구불 제멋대로 기어가고 있다
김 서린 철거장 닦는 손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지렁이가 써놓은 악필뿐이다
단속사 터에서 3
이숙희
내가 이곳을 찾을 때는 방금 실내화를 빨아서
창틀에 가지런히 세워놓은 듯한 아침이었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외발 수레를 끌던
농부도 없고, 동탑 앞 정자에 전기밥솥만
놓여져 있다. 세상일이란 한잔으로 고민을
풀 수 없고 마른 미역 불린 것처럼 억눌러도
넘쳐나는 울분도 있다 보니 어젯밤 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단속사 터의 암탑과
수탑은 세상과 가장 가깝다. 고기 맛도 알고
술맛도 알아 부처님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져
속세 맛이 베었다. 정자에 걸터앉아 커피
한잔을 나누면 뒷품에 숨겨둔 매화 이야기
밭에서 나는 거름 냄새. 담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까지 무조건 놀다 가라고 붙잡는 곳이
단속사 터 탑골이다.
식물들의 사생활*
-모두가 꽃을 보기 위해 안간힘으로 허공을 버티고 있다
이설야
호박
저 여자
달동네 담벼락에 기대어
저토록 뜨겁게 웃는 걸 보니
무슨 슬픈 일이 있는가 보다
사랑받지 못해도
여자는 배가 불러
둥근 아이들을 낳는다
난 꽃이 아니야
넓은 잎사귀로 얼굴을 가린
호박꽃
양귀비
옥상에 숨어 피고 있었다
노을이 붉어지자
선홍빛 꽃잎을 크게 벌리고
노란 꽃술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누군가 어미 개와 새끼 개를
양귀비꽃 앞에서 흘레붙였다
개 줄이 심하게 흔들리다 조용해지자
축 늘어진 어린 수캐
그 옆에서 어미 개가 울고 있었다
목련
매 맞은 여자의 자줏빛 얼굴이
땅바닥에서 밟히고 있다
물거울처럼 너는 헛것! 헛것이었다고,
잠 든 물고기처럼
모두가 눈을 뜨고
겨우 보는 듯 안 보는 듯 그렇게 살고 있다
바람이 여자의 얼굴에 금을 긋고 지나간다
종이꽃
신발에 꽃이 피었다
스물두 켤레의 신발
죽은 작업화에 꽃을 피워놓고
진혼굿을 한다
먼저 간 신발들에게
찢어지고 밑창이 다 떨어져나간
아직 살아 있는 신발들이
*이승우의 장편소설
압록강, 창덕하구에서
이선균
창덕하구 중국 호텔 뒷마당엔
고기 굽는 냄새 젓가락 남녘 장단에 흥청 흐르는데
압록강 건너 세상에서 가장 후미진 마을,
산그늘이 허기처럼 덮쳐오는 빈집 울 밑
제 살 찢으며 악다구니 짖는 개
강물 속 국경을 헤엄쳐 건너간
순례네 뒷소식 되묻는 소리
끊어진 철교 가슴팍 지나
국경수비대 주린 눈망울 지나
젓가락 남녘 장단을 컹컹 물어뜯는데
바위 절벽마다 수령님 만세 진달래빛 혁명 아로새겼네
발 걸고 싶은 지척의 경계 창덕하구에서
앳된 수비대 한 컷, 금지된 셔터 누르는 순간
초고속 돌팔매 답신이 무섭게 날아드네
카메라 셔터와 돌팔매의 슬픈 교신 사이
압록강은 흰 쌀알처럼 흥청 흐르는데
시래기
이상인
뒷산에 오르다가 팻말 따라 간
배추밭, 몸통들은 다 팔려가고
입다가 벗어놓은 헤지고 찢긴 겉옷만
즐비하게 널려 있다.
주섬주섬 주워 모아 한 아름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신호등 근처
주위 사람들이 나를 시래기 쳐다보듯 한다.
끈으로 엮어 뒷베란다에 매달고
시들시들 마르길 기다린다.
김장배추로 맛있는 김치가 되지 못한 것들
대롱대롱 매달려
문 열면 파리한 모습으로
서걱서걱 삶을 서걱댄다.
몇 달 동안의 바람과 햇살이 스며서 만든
가쁜 숨결, 푹 우러나온 시래기국
밥 한 그릇 거뜬히 말아먹고 나니
그동안 그네들이 즐겁게 맞았던 빗방울들이
내 콧잔등에 송송 맺힌다
국민을 계도하다
이상국
나는 어느 날
본의 아니게 국민을 계도했네
<올바른 음주문화 정착> 팻말 들고
아는 사람 만날까 봐
고개를 있는 대로 숙이고
음주 단속하는 경찰 옆에서
딴전을 보며 두어 시간 버티면
면허정지 기간에서 깎아주는 열흘을 벌려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국민이란 걸 계도했네
그렇잖아도 조잔하고 비굴하게 허겁지겁
어떡하든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을
국가라는 게 참 더럽고 치사하게
고작 점심에 소주 몇 잔 한 걸 가지고
정말 이렇게 못살게 굴어야 하는지 어디
두고 보자며 국민을 계도했네
근무 끝나면 한잔하자며
새파란 경찰들은 음료수를 나눠 마시고
하루벌이를 마친 선량한 국민들은
그들의 커다란 경례를 받으며
사뭇 거만하게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두운 고가도로 아래서
나는 외롭게 국민을 계도했네
민들레 처형
이덕규
다연발의 총소리가 드르륵 드르륵, 이른 봄 뒷동산 골짜기를 따라 자욱하게 울려 퍼지고
무더기, 무더기로 낭자하다
노란 탄흔 속에 박힌 싸늘한 총상이 깊어
사경을 헤매는 자들이 꾸는 꿈속의
위독한 꽃밭에 누워 나도 또 다른 전선의 나에게 피 묻은 편지를 쓴다
서산 마애삼존불
이경호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날이면
골짜기 하나 먹고 싶어진다
알면서도 모든 사연 폭포에 묻고
모르는 척 하늘을 여백으로 둘 줄 아는
풍경 하나 먹고 싶어진다
느티와 붉나무가 언제 눈이 맞았는지
그 후손이 누구인지
무지개 피라미가 누구네 돌담으로 들어갔는지
서론이 긴 사람이 어떻게 본론으로 걸어갔는지
태양의 말씀을 누가 차근히 받아 적었는지
다 알고 있지만 침묵하는 여기에서
바지도 젖고 가슴이 젖는, 그렇게
옛 스님들도 젖다 갔을 여기에서
아침을 알리던
닭 모가지 자른 중생이 누군지 알면서도
탓하지 않는 여기에서
아침이 그렇게 사라져도
냉수 한 사발 찾지 않고 그저 웃기만 하는 여기에서
내가 무슨 말을 참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 여기에서
다 알고 있어서 붉어지는 초록에게 눈짓하면서
미소 한 덩이가 먹고 싶어진다
호수여인숙
이강산
그러께 늦가을 201호실에 첫 발 담가둔 내 몸에서 꽃이 피려는지 무릎이 결린다.
낡은 책가방 같은 호수의 방, 이 호수는 지름길이 없어 누구라도 숫돌처럼 살점 잘라내고야 간신히 닿는다.
그러께 늦가을 내 발 닦아준 신 양은 왼쪽 엄지발가락이 잘려 가까스로 호수에 떠 있다.
내 손목 끌고 온 늙은 청둥오리는 밤길이 두려운지 저만치 문밖에 앉아 쉰다.
청둥오리도 신 양 같이 호수 밖 어디론가 떠나려는 방향으로 물갈퀴를 숨겨두었을 테지만
꽃만 보아도 무릎이 결리는 쉰 넷, 지금은 청둥오리처럼 잠시 쉬어가는 모습이 아름다운 때.
이 호수를 무사히 건너려면 나는 호수 벽지의 목단꽃만큼은 꽃을 피워야 한다.
계란의 반란
유희봉
시골 오일장에 내다 팔아 가족의 필수품 사오곤 했던 계란, 닭장 안 암탉 소리 울면 할무이 어김없이 꺼내 오라던 닭의 알, 다시 씨암탉이 돼 낳은 닭의 알, 장바구니 속 꼭 하나만 바늘구멍 내 흰 살 약간 양심적으로 빨다 가슴 두근두근 노른자 출렁출렁하니, 조심스럽게 쭉―쭈우욱 힘겹게 흡입한 닭의 알.
타원형의 지구 두꺼운 지표를 뚫고 유황불 솟구칠 때마다, 그 닭의 알을 생각한다 노른자가 나온 후 극히 빈약한 껍질 속 생명의 혼 공전과 자전을 할 때 계란의 각도를 생각한다 하얀 표면 번지던 유황불의 두려움처럼 노오란 병아리 목 내밀 때마다 심장이 뛰는 지구의 박동음
오! 일 점 일획도 가감이 없다는 성경 구절 “다음에는 꼭 불로써 심판이 있으리라” 바다 건너 고베에는 수천의 생명 불의 반란 때문에 큰 난리가 일어났다 아! 오늘밤 마음의 고배苦杯라도 들어야 할까 한 줄 한 알의 생명이 자동차처럼 흔들리다 깨져버린 무정란의 달걀 더미.
내 고향 온천을 파낼 때, 어린 시절 바늘구멍으로 퍼내던 달걀을 생각한다 빗나간 계란의 각도를 느껴본다 우주선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 민초들의 한숨 속에, 지구의 무게 축이 흔들려 흘러나온 노른자 계란의 반란을 생각한다 나는.
형제간
유용주
겨울 신무산에서
고라니똥을 만났다
쥐눈이콩처럼 반짝이는
무구한 눈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완벽한 채식만이
저 눈빛을 만들 수 있으리라
쌓인 눈 위에 찍힌 황망한 발자국들……
똥 누는 시간마저 불안했구나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다
나도 그저 한 마리 채식동물에 불과한데
미안하다
미안하다……
어느 도공의 하루
우미자
고향의 논둑길을 거닐며
평생 심장이 뛰는 일을 하고 싶다고
첫사랑을 고백했다는 남자
미대를 나와 꿈을 찍어내듯
도자기를 굽기 시작했다는 남자
도자기 하나하나에 혼을 넣어
가마터에서 구워질 때에는
불꽃 속에 심장이 타오르듯 했다는 남자
―흙으로 빚었으나 숨결을 담고 나온
새로운 생명들, 꽃불 속을 걸어 나와
천상에서 지상으로 막 내려온 몸들―
그러나 정작 돈벌이가 되지 않아
생활 도자기 찻잔들을 빚어내어서
하루는 장터에 좌판을 벌인 남자
온종일 펼쳐놔도 사가는 사람 하나 없고
밥티처럼 눈이 내려와 찻잔 속에 쌓이는데
저물녘 옆자리 동태 파는 아저씨와
물물교환 하자며 슬며시 마음을 보였더니
하하하 웃으면서 그러자는 동태 아저씨
찻잔 세 개를 주고 받아 온 동태 열두 마리
집에 와 쑥스럽게 내어놓으니
오랜만에 동태전, 동태탕 맛있게 먹는다는
어머니 눈물겨운 한 말씀으로
온 가족 두레밥상에 함박꽃 피어난다
埋木
박희호
족히 몇 세기는 웅크리고 있었던 매목이 그늘에 누워있다
細工의 날렵한 손끝에서 돌처럼 굳은 새소리를 솎아내자 그 자리에
미리내 바람이 퇴적 시간으로 환생하고
천막 밖에 어둠이 내릴 때쯤, 알전구는 서서히 지질 연대기를 예측하고 있다
흙으로 귀환하지도 못한 채
나이테를 메우고 시간의 귀착점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제 몸에 스민 化石의
갈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에는 길이 있다>
埋木에 옹골차게 들어찬 새소리와 햇빛, 물길과 바람을 대패질하면
이제 하나의 틈서리 쐐기가 될 것이다
바람은 전기톱을 가동시키고 새소리는 맞댐을 전송하려 할 때 물길은 허공으로 몰려간다
細工이 검은 먹줄을 치고 매목의 입관을 준비 중이다
나무는 몇 세기 전 여전히 죽지 않았다
※ 埋木 : 오랫동안 흙이나 물속에서 돌처럼 굳은 나무. 화석이 되기 직전 상태. 맞댐 사이나 나무의 틈새를 메우는데 쓴다.
金江里
박희용
몇 학년이니 오학년이라고 남자친구 안 만나고 엄마 일 거드는구나
이집 반찬이 맛있지 저 봐 삐졌잖아 아 우리 딸도 있는데
자 빨리 먹고 오후 공사 해야지
우리 신가가 4대째 살고 있는데 반대도 많이 했지만 이젠 다른 수 없고 이주단지나 잘 되면 거기 가서 살고 산이나 확 밀어 시설채소 같은 생계대책이나 해 주면 좋지요 강동리 석씨네 문중산인데 밀면 한 이만사천 평 투기꾼이 달려들어 난릴시더 고시 되면 덜 하겠지요 예고개는 생계대책이 없어요 해발 200이란데 160까지 물 찬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니 관광객들이 많이 오면 점빵이나 잘 되면 좋고요 이주단지 그 거요 교수들이 와서 제일 낫다고 평가한 곳인데 공무원과 오운리 사는 모씨가 장난치는 바람에 투표한다는데 무어 순리로 안 될리껴 젊은 사람들이 앞장 서 일하다보니 여러 소리 듣니더 머 욕심낸다고 일보다도 그런 소리 들으면 힘이 빠져요 안동댐 예안단지 꼴 안 나도록 생계대책도 수자원공사와 시에서 세워줘야 해요
나라에서 하는 일 어찌 할 도리 없지만 당최 시끄러워 살 수가 없어 저기 솔 솔 사이로 뵈는 저놈의 쇳덩어리들 하루 종일 강바닥 긁어대니 금강마을 성황 되어 산지 오백 년인데 이제 사람들 떠나고 물 들면 어떡해 따라 갈 수도 없고 물귀신 되어야지 그래 맞아 나도 자네와 같은 신세 우리 인동장씨 여기 터전 잡은 지 오백 년 저놈의 영주댐 때문에 자손들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져야 한다니 누워 있어도 잠이 안 와 그 스님 이곳 터 잡아주며 천 년은 넘긴다더니 반 토막 내 뼈가 어디로 갈지 겨울시인 한 잔 더 주게 강산을 저리 깎아대면 끝이 안 좋은데 업보는 나중 일이고 서울 사는 지주들이야 쌀 도지보다 보상금 목돈이 훨씬 좋고 묵은 산밭 갈아엎어 사과나무 촘촘하게 심은 산주들이야 횡재해서 좋지만 남의 땅 부쳐 먹던 농꾼들이 낭패여 낭패 가솔하여 어디 가서 뭐해먹고 살꼬 한숨 소리 깊이 아파 내야 바위를 미륵불로 만들어 줘 한 사백 년 해마다 공양 받으며 편히 살았고 지방문화재이니 새마을로 안 데려가겠나 거기 가서도 장씨들 복 지켜주며 살면 되겠지
성황당신 한잔 남 조상신 한잔 미륵불 두잔 겨울시인 석잔
안주는 마른 벌레집 묘 이장 공고 묵은 기와집 낯선 간이역
상처
박선욱
자카리아 무함마드와 나는
7년 전 제주에서 처음 만났다
제주 4 ․ 3이 비로소 제자리 찾은 날
산굼부리도 중산간마을도
느껴 우는 돌멩이도 흙더미도
모처럼 더운 가슴들 만나 숨통 트였다
오래전 제주민들 지수화풍 되었지만
우리는 저마다 그 무엇이 되어
돌하르방 아래 모였다
자카리아 무함마드와 나는
머나먼 팔레스타인과 코리아
라말라와 광주를 품고 왔다
그의 가슴속에는 거대한 분리장벽이 서 있다
내게는 수십 년 넘게 둘러쳐진 철조망이 있다
아픈 사람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
7년 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반갑게 손 맞잡고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는 나의 친애하는 벗이여, 나직이 말하며
두 팔 활짝 벌려 포옹해주었다
상처가 또 다른 상처와 만나고
벌어진 틈이 또 다른 틈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에게
오래 묵은 아리랑 한바탕 불러주었다
노래하는 동안 황토마루와 고부의 산길 들길
아우내 장터와 명동촌의 평야와 언덕이 넘실거렸다
나의 친애하는 벗이여
부디 이 곡조를 타고 모든 굽이를 넘어가기를
부디 이 곡조를 품고 모든 고개를 넘어가기를
거미에게 무릎 꿇다
문창갑
쌀 씻으러 가다가
주방 창문 안쪽을 점령하고 있는
거미줄을 또 만났다. 이제
내 손은 자동이다.
신문지 돌돌 말아 단번에 후려치니
거미줄에 걸려있던 아침 햇살들
바닥에 후두둑 떨어진다. 상황 끝.
아침은 다시 환하게 밝아지려고 하는데
어라? 어딘가에 숨 돌리며 숨어 있었을
거미 한 마리 어느새 기어 나와
막가파의 우둔함으로 이제는
당당하게 거미줄을 치고 있다.
갑자기 저 작은 生의 무모한 전의戰意가
무섭고 안쓰럽다.
어떤가, 맑고 찬 한 잔의 얼음물처럼
내 마음 가라앉힐 수만 있다면
거미줄이 불러내는 스산함도
견디어볼 만하지 않겠는가
정말 안 될 일인가, 벼랑 끝에서 버티는
저 작은 生의 전의戰意 앞에 한 번쯤은
내가 먼저 무릎 꿇어주면.
나는 지금 거미줄 못 본 척 흥얼흥얼 쌀을 씻고
거미는 지금 뻘뻘 땀 흘리며 튼튼한 거미줄을 치고
거미줄 있으나 없으나 아침은 환하고
점화點話
문정영
보고 듣지 못하는 그는 손가락에 눈과 귀가 있다.
상대방의 손가락 위에 자기 손가락으로 점자點字를 쳐서 대화를 한다.
눈물 한 방울이 점자처럼 손등에 떨어지기도 한다.
보이거나 들리는 것은 화려함이 먼저라고 척추 장애인 아내에게 배운다.
눈과 귀를 닫고 마음으로 보면 세상은 눈물방울보다 작다.
아내의 손끝에서 꽃향기와 별빛을 읽는 그는 부드러워지고 부드러워진다.
그는 불안과 고통에 이르는 것도 달팽이만큼 느리다.
일 년처럼 읽으며 십 년처럼 느낀다.
문장이 단순해진 것은 모르는 것까지 일일이 적기 위해서이다.
그는 손가락으로 풀잎과 공기를 더듬어 쓰는 작가이다.
새벽의 연우煙雨가 막 깨어난 꽃잎을 감싸는 것처럼 손끝이 별빛에 가닿는다고 쓴다.
그가 점화點火되는 것은 아무도 모르는 한밤중의 일이다.
물고기자리
문정
물매 매끈한 골짜기들을 거느리고 엎드려 있는
산맥들을 바라볼 때마다
하늘에는 이 지상으로 강물을 흘려 내리던
호수들이 있었음을 알겠다
바람이 산맥들을 헤집고 지나갈 때마다
모천으로 헤엄쳐 가던, 수많은 연어나 송어 같은
물고기들이
거슬러 오르다가 뛰어 오르다가
떨어뜨린
비늘들이 파닥거린다
저 깊고 짙푸른 하늘에는
옛날 옛적 강을 거슬러 올라간 물고기들이
신화도 말라버린 달력 속에 갇혀
오도 가도 못 하고, 눈물마저 바닥난 눈동자들을
소금처럼 반짝거리며 살고 있다
아직도 모든 산맥에서는 강물 냄새가 난다
묵호, 등대 텃밭
문인수
묵호 등대 오름길의 산비탈 동네엔 작은 집들이 아찔, 아찔, 화투짝만한 난간에 붙어 있다. 밤중에, 험한 잠결에 그만 굴러떨어질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 어지럽던 차에 빈 집도 더러 생겨났다. 그 빈 집마저 헐린 데가 어, 여기저기 새파랗다.
어디로 인도하였을까. 누군가 떠난 자리에, 누군가 또 제때 새파랗다. 새파란 부추며 상추며 쑥갓……. 묵호등대, 묵호 씨는 대낮에도 참 별 걸 다 밝힌다.
바나나
류정환
저것은 바다를 건너온 몸이다.
젖몸살을 앓던 열여섯 달뜬 꿈을 버리고
아버지 같은 남편을 따라온 어린 신부들같이
조금만 기다려라, 돈 벌어 오마
노잣돈 빚 얻어 입국한 오라버니 같이
고향 집 떠나던 날, 그 밤에 달은 떴을라나
초승달처럼 주춤주춤 뒤를 돌아보며
칠흑 같은 바다를 건너온 몸이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먼 나라는
가도 가도 검은 물결만 일렁이는 삼만 리 길.
말로만 듣던 코리아는
하루하루 몸을 갉아먹어야 견딜 수 있는 나라.
아파트 주방 한 구석,
단 것으로 가득 채웠던 몸도 지치고
샛노랗게 단장했던 꿈도 시들어
아침저녁 다르게 거뭇거뭇 까무러치는데
오오 어머니의 얼굴색, 내 한 몸 헐값으로 가난은 가렸을라나
아무래도 나는 못 가요, 쪽지도 한 장 없이 일생을 마치는
이것은 바다를 건너온 몸, 그리운 고향 들판을 추억하는지
너덜너덜 껍데기만 남은 그릇에 단 내음이 가득하다.
물이 쏟아지는 붉은 컵
류인서
이것은 네 입술이 닿기 전의
컵이 가지고 있던 목마름
컵의 목구멍을 타고 혀처럼 쏟아져 내리는 목마름
쏟아져 금요일의 안부가 들리고 발목이 들려 내게로 건너오는 목마름
컵의 목구멍 속으로 되넘어 가기도 하는 딸꾹질 소리 같은 목마름
네 등산 배낭에 달려 벼랑을 오르는 스테인리스컵 하나 분량의 목마름, 천 개의 컵에서 출렁이는 한 입의 목마름
이것은 내 입술에 붙들려 공중에 멈춘
천둥보다 무거운 컵
청사포등대
동길산
누가 저런 불을 지폈을까
알아서 켜지는 불
당신이 오면
내 안의 불
알아서 켜지리
아무리 젖어도
절대로 꺼지지 않으리
누가 저런 불을 지폈을까
알아서 꺼지는 불
당신이 떠나면
내 안의 불
알아서 꺼지리
아무리 불붙여도
절대로 켜지지 않으리
당신이여 오라
젖어도 환한 청사초롱
저 불을 따라서 오라
분수
나해철
쏟아져 내리고자
솟구친 게 아니었어
나를 밀어 올리는 너의 안간힘이
가여워
몸을 띄우기로 한 거야
네가 원한다면 나는 새가 되어서라도
푸른 하늘로 가버릴 생각이었어
너는 왜 나를 힘껏 올리다 말고
주저앉아 우는 것이냐
나의 자유는
네가 끝까지 떠밀어 줄 때 오는 것
나는 솟아오르다 말고
이제 너에게로
산산이 부서져 쏟아져 내린다
별
나종영
별은
제 자신이 별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몇 억 광년 떨어져 빛나던
그대를 별이라고 부르듯이
그대도 나를
별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몇 억 광년 떨어져 기별도 없이 살아온
그대를 티끌이라고 생각하듯이
그대도 나를
한 톨 티끌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너무 슬퍼서
검푸른 하늘에 그대가 눈물을 흘릴 때
사람들 여윈 어깨 위로 무수히 별빛이 쏟아지고
나도 눈물 그렁그렁 또 하나의
별이 된다
마두금
고영서
초원지대 어느 나라에서는 시신을 매장하고 표시를 하지 않는 풍습이 있다
지하 깊숙이 시신을 묻고, 수백 마리의 말이 달리게 하여 단단히 다져진 흙 위에 어미 낙타와 새끼 낙타를 세운 뒤,
어미가 보는 가운데 처참하게 더 잔인하게 목을 내리쳤던 것인데
일 년 뒤, 흩뿌려지는 피를 본 어미 낙타만이 그 냄새를 맡으며 온다
끝없는 초원을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지나간다
몇날 며칠을 걷던 그들의 발길이 멈추어버린 곳에
포효하는 낙타,
대륙을 지배한 칸의 죽음도
살해된 새끼 낙타의 어미를 길잡이로 삼는다
어미
고증식
이쪽 숲을 떠난 고양이 일가족 줄줄이 아스팔트길 건너 저쪽 숲으로 간다 앞장서 가던 어미 고양이, 차가 달려오자 화들짝 온몸을 날려 여섯이나 되는 새끼 고양이들이 길을 다 건널 때까지 바퀴를 막고 서 있다 어디서 많아 본 풍경이다 홀어미 손으로 키워낸 우리 오 남매
[감상] 시는 뜻이기도 하다.
담장을 허물다
공광규
고향에 돌아와 오래된 담장을 허물었다
기울어진 담을 무너뜨리고 삐걱거리는 대문을 떼어냈다
담장 없는 집이 되었다
눈이 시원했다
우선 텃밭 육백 평이 정원으로 들어오고
텃밭 아래 사는 백 살 된 느티나무가 아래 둥치째 들어왔다
느티나무가 느티나무 그늘 수십 평과 까치집 세 채를 가지고 들어왔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벌레와 새소리가 들어오고
잎사귀들이 사귀는 소리가 어머니 무릎 위 마른 귀지소리를 내며 들어왔다
하루 낮에는 노루가
이틀 저녁은 연이어 멧돼지가 마당을 가로질러 갔다
겨울에는 토끼가 먹이를 구하러 내려와 방콩 같은 똥을 싸고 갈 것이다
풍년초꽃이 하얗게 덮은 언덕의 과수원과 연못도 들어왔는데
연못에 담긴 연꽃과 구름과 해와 별들이 내 소유라는 생각에 뿌듯하였다
미루나무 수십 그루가 줄지어 서 있는 금강으로 흘러가는 냇물과
냇물이 좌우로 거느린 논 수십만 마지기와
들판을 가로지르는 외산면 무량사로 가는 국도와
국도를 기어 다니는 하루 수백 대의 자동차가 들어왔다
사방 푸른빛이 흘러내리는 월산과 성태산까지 나의 소유가 되었다
마루에 올라서면 보령 땅에서 솟아오른 오서산 봉우리가 가물가물 보이는데
나중에 보령의 영주와 막걸리 마시며 소유권을 다투어 볼 참이다
오서산을 내놓기 싫으면 딸이라도 내놓으라고 협박할 생각이다
그것도 안 들어주면 하늘에 울타리를 쳐서
보령 쪽으로 흘러가는 구름과 해와 달과 별과 은하수를 멈추게 할 것이다
공시지가 구백만 원짜리 기울어가는 시골 흙집 담장을 허물고 나서
나는 큰 고을 영주가 되었다
[감상] 시 같다. 이 책에서 가장 반짝인다.
장롱에서 기어 나온 누에 한 마리
김성규
꿈자리가 사나워 저것 좀 버려라
이것도 손때 묻은 건데 자식들에게 물려주어야지요
어머니가 버리자는 장롱을 옆방에 옮기고
물을 마시러 나는 부엌에 걸어갔다
늙고 살찐 사람만 한 누에 한 마리가 싱크대를 더듬고 있었다
눈이 먼 누에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뒷간이 어딘지 찾지를 못하겠구나
쌀 것 같다, 빨리 뒷간 좀 데려가다오
얼굴과 목소리는 영락없는 외할머니인데,
눈이 먼 것을 봐도 외할머니가 틀림없다
돌아가신 지 이십 년도 넘었는데 어떻게 오셨어요?
물컹한 외할머니누에를 데리고 화장실로 갔다
타일 바닥에 오줌과 똥을 누고
수많은 발을 움직여 화장실에서 걸어나왔다
제사 음식을 장만하러 시장에 간 어머니는 오지 않고
그런데 왜 누에로 환생하셨어요?
밤송이가 음부처럼 벌어지는 계절이었을 거다
시집가는 외동딸이 보고 싶어
장롱을 지고 산 너머 섣밭까지 걸어온 시국을 따라왔는데
뽕나무밭에 숨어 장롱을 지고 내려가는 모습만
몰래 보고 있었다는 외할머니
하긴, 합판을 잇대 만든 장롱도 그땐 귀했지
어찌나 니 에미가 밉고 서러웠던지
에미가 너를 낳은 해부터는 햇볕에 고추 말리는 것만 봐도 좋았지
음악회에 초대된 사람처럼 외할머니는 조용히 웃으셨다
꽝꽝 언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는데 손이 하나도 안 시려웠다
웃을 때마다 오줌이 조금씩 장판에 흘러내렸다
그래서 엄마는 금반지를 아직도 장롱에 숨겨두고 있어요
화장실에서 장롱으로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누에
저승이 좋다지만 거기 가면 뭐하겠어
내 자식 있는 데서 눈치 보여도 사는 게 좋지
눈이 안 보이고부터는 이렇게 기어 다니기만 하며 산다
하긴, 더 살아서 뭐 하겠어 몸뚱아리가 이런데……
어머니 발자국 소리가 들려요
에미에게는 나 봤다고 말하지 마라
늙고 살찐 누에는 꿈틀거리며 장롱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 꿈자리가 사납다고 어머니는 걱정을 하시고
다음 날 장롱을 열어보니 몇 개의 허물과
크고 하얀 고치만 남아 있었다
외할머니는 왜 누에로 태어나셨어요?
다음엔 뭐로 환생하시겠어요?
물어보아도 코골이 소리만 작게 들릴 뿐이었다
새
나기철
살던 집
문 닫히고
제주 바다 하얗다
청천강 옆 마을로
날아가신
어머니
안개
권위상
누굴까 저 푸르스름한 동굴 안에서 바람을 가르듯 얼핏 나타났다 사라지는 재빠른 저것은 무너져 내린 강둑 사이로 튕겨 오르듯 나무를 찌르고 숲을 갈라 회오리 일으키는 저 광풍 그 중심에서 굳은 살 손아귀로 던진 그물을 힘차게 당기는 저것은 무엇인가.
빠르게 포위해 오는 안개 군단 그들의 습격을 피해 달아나다 또 맞닥뜨리는 안개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너는 불가사리 촘촘한 방충망을 뚫고 일제히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다 허파 같은 낙하산이 펴지고 몸을 굴려 풀섶으로 숨어드는 낙뢰
건져 올린 시신은 몸에 돌을 묶고 있었다 가지런히 놓인 구두와 희디흰 유서 그 위에 내려놓은 핸드폰이 아직도 몸을 떨며 문자를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폴리스 라인 안에는 과학수사대가 연신 카메라를 눌러댔다. 흑백으로 찍히는 안개, 그림자
시신을 수습한 앰뷸런스 떠난다 차마 살아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안개에 스며든다 안개가 끝나면 무수한 뼈들만 남을 것이다. 머리칼 헤쳐 푼 숲 속에서 육중한 무엇이 다가온다 바로 그들, 해독 불가한 난수표, 이 사건의 배후는 안개다
느티나무 고목
김기홍
내 품 안에서 불장난하지 마라.
나도 뜨겁단다.
내 마당에선 비록
풀도 나무도 자라지 못하지만
무더운 날엔 모든 이들이 편히 쉬도록
차양을 펼쳐주지 않느냐.
장난처럼 내 가지를 꺾지 마라.
나도 아프단다.
누가 내 뜨락에 뜨거운 눈물 쏟았는지
누가 내 발등에 불을 피우고 개를 끄슬렸는지
누가 자식 이울 걱정에 잠을 설쳤는지
누가 자식 학자금 구하려 사방팔방 뛰었는지
달빛 고요한 푸른 4월의 어느 날 밤
누가 누가 은빛 보리밭으로 살금살금 들어갔는지
캄캄한 밤 뒷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누구 소를 어떻게 몰아갔는지
허가 없이 나무를 베었다고
누가 면서기에게 고자질했는지
알고 있지, 다 알고 있지
니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전부터
그 모든 것 감싸주려고 하다 보니
내 속이 다 썩어버렸지. 썩어
껍데기만 남아 근근이 버티고 있지.
나도 갈 때 되면 가야지.
내 발등에 불을 놓지 마라.
나도 주체할 수 없이 뜨겁단다.
내 남은 팔을 함부로 부러뜨리지 마라.
나도 참을 수 없이 아프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