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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남 시인의 시집 『꽃을 물었다』 서평
천수호
꽃에 대한 질문은 꽃향기만큼이나 아뜩하다. 꽃을 물고 있는 허공에다 꽃을 물었다. 허공은 대답 대신, 허공의 윗니와 아랫니 사이 또는 양 입술 사이에 끼워진 꽃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세게 누르고만 있다. 단단한 허공의 턱뼈가 꽃을 물었다. 무엇을 밝히기 위해, 혹은 무엇을 알아내기 위해 꽃은 저토록 붉게 피어 생의 대답과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가. 지금 내다보이는 창으로 봄꽃이 피는 순서를 익힌다. 봄날이 다 지나가고 있는 지금까지도 바통을 건네주며 피었다가 지는 봄꽃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산수유가 피고 목련이 피고 개나리가 피었다가 졌다. 하얀 살구꽃이 피고 있을 때 벚꽃도 함께 피었다. 벚꽃 잎이 유리창에 몇 마디 입술을 갖다 붙일 때 바닥에는 꽃마리, 민들레, 봄맞이, 냉이꽃, 쇠별꽃, 봄까치꽃, 남산제비꽃이 흩어져 피었다. 이제는 그 혈기와 열기를 다 끌어 모아 영산홍이 끓고 있다.
花開昨夜雨 花落今朝風 可憐一春事 往來風雨中.
(화개작야우 화락금조풍 가련일춘사 왕래풍우중)
어젯밤 봄비에 꽃이 피어나더니,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고 마는구나.
슬프다, 봄에 일어나는 한 가지 일도 바람과 비 속에서 오고가버리다니.
이것은 ‘우음(偶吟)’ 혹은 ‘작야우(昨夜雨)’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조선 선조 때 학자 송선필의 시다. 활짝 피었다가 이내 지고 마는 꽃을 덧없는 인생에 비유했다. 박정남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꽃을 물었다』는 ‘우연히 읊다’는 뜻의 이 ‘우음(偶吟)’이란 시의 부연설명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우연히 읊었지만 결코 우연이 아닌, 이 세상에로의 ‘오고 감’과 ‘피고 짐’의 이야기들이다. 꽃이 피는 시기는 꽃의 생체시계에 의하여 조절된다. 놀랍게도 식물은 주로 밤낮의 길이 (光주기)로 그것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시집 속에서의 개화 시기는 인간의 삶과 꽃의 생태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바로 그때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네 가지 고통인 생로병사(生老病死)가 꽃의 행위로 보여지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생은 꽃그늘 아래서의 노숙이 아닌가. “오늘밤도 느릿느릿 달팽이는 기어서/어느 꽃그늘 아래 잠드는가.”(「노숙」 부분) 달리 말하면 이것은 시집 자서에 있는 “그 낭떠러지 끝에 이제껏 매달”린 생의 간절함이기도 하다.
아, 복수초!
무릎 꿇고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환한 얼굴 하나는 지나가버렸다
발에 밟히지도 않았다
눈밭을 뚫고 나오는 복수초는
하얀 눈 속에서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
노란 꽃잎을 하나하나 내놓았다
눈과 코와 입이 움푹 들어간 얼굴
섣달 그믐밤 타는 종짓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애
설연 또는 얼음새꽃이라지
세배하러 갈 때 화분에 담아
안고 가고 싶은,
-「복수초」 전문
복수초는 ‘식물의 난로’라고 한다. 눈 속에서 꽃을 피워서 식물 자체에서 나오는 열기로 주변의 눈을 녹여버린다. “눈밭을 뚫고 나오는 복수초는/하얀 눈 속에서/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처럼/노란 꽃잎을 하나하나 내놓았”으니, 이것은 섣달 그믐밤을 보내고 새해를 맞는 마음이거나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와 같다. 이러한 모습은 인간이 평생 거치게 되는 네 가지 큰 고통(苦痛) 중 태어나는 고통이 아니고 무엇이랴. “세배하러 갈 때 화분에 담아/안고 가고 싶,”은 이 복덩이 같은 꽃이름이 ‘복수초’이지 않은가. 마치 인연의 불협화음을 연상하게 하는 이 이름으로 인간의 탄생 자체가 고통이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버들꽃이 필 때도 고통이 있으리라. 더구나 수양 정진의 몸을 가졌기에 더욱 그러하다. “맑은 물과 수양버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봄이 오면 들판에는 모래흙을 적시며 맑은 물이 흐르고/수양버드나무에서 연둣빛 잎이 돋아났다/중략/허리가 가는 버드나무가 가장 어둡고 깊은 물을 지키고 섰다/물이 없는 사막에 버드나무를 심으로 갔다/맑은 물과 수양버드나무는 네 속에 있다”(「정병(淨甁)이 있는 풍경」 부분)는 시에서 목이 긴 형태의 정병(淨甁)은 곧 수양버들이다. 본래 정병(淨甁)은 깨끗한 물을 담는 물병으로서 승려의 필수품이며 부처님 앞에 정수를 바치는 공양구이기도 하다. 맑은 물을 뿜어 올리는 수양버들이야 말로 이 세상의 정병(淨甁)인 것이다. 물이 없는 사막에서는 맑은 물과 수양버들이 사람의 영혼 속에 있다. 새로 태어나는 영혼이라면 그것은 더욱 분명한 일이겠다.
눈 사이를 비집고 피는 복수초나 맑은 물만 담는 정병(淨甁)인 버드나무나 모두 새로 태어나는 영혼의 모습을 가졌다면, 뭇 사람에게서도 이런 투명한 영혼을 볼 때가 있다. 생각해보면 마을마다 한 명씩은 꼭 있었던 것 같은 여인네, 머리에 꽃을 달거나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함박웃음으로 다니는 여인은 영혼이 덜 닳은 푼수이다. 아니, 정신줄을 놓은 환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는 마냥 따뜻하다. “햇볕을 온몸으로 받아 한 겹 두 겹의 겉옷으로 껴입고는 마냥 행복해하는 꽃님이”(「꽃님이 이야기」 부분)가 바로 그런 여인이다. 그러나 “동네 아줌마들한테 병신같이 제 돈도 떼이고, 병신, 병신, 하는 말도 좀 덜 듣게 되어 훨씬 편안하게 웃는 얼굴이” 된 그 여인이 “갑자기 내 손을 끌고 가”더니, “눈이 여기 피었다기에 가만 들여다보니 몇 송이 벌어지고 있는 매화꽃이었”던 것이다. 그녀가 말하는 눈의 환생, 그것은 ‘매화꽃’의 일만이 아니다. “향기를 가졌지만 제대로 향기를 꽃피워 전하지 못하는 그녀”가 바로 그 눈의 환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박정남 시인의 시에서 이 맑은 영혼들만이 꽃에게 질문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곧 늙고 병드는 고통이 찾아온다.
안동을 떠나오며 꺼내 본 부재중 전화 한 통에는 안동 조탑리를 꼭 찾아보라고 재촉하고 있는데 저곳이 조탑리인지 조팝리인지 온 들이 조팝꽃으로 하얗게 물들었다 마침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권정생 선생이 종지기 하던 교회가 보이고 댕그랑댕그랑 종소리가 운다 들 한가운데 단아한 5층 전탑 하나가 모양을 드러낸다 누가 찾아오면 선생은 옆구리에 불편한 오줌통을 차고 집 뒤 골짜기로 숨어들었다지만 마을 뒤쪽 생이 집 옆 작은 집은 보이지도 않고 수돗가에 앵두나무 한 그루가 서있어 몽실 언니가 친정 와서 물 한 그릇을 떠서 아버지께 바치듯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몽실언니」 전문
『몽실언니』는 분단시대 한국문학의 가장 사실적이고 감동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아온 권정생의 소년소녀소설이다. 권정생 작가는 2007년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이 시는 그 이후에 쓴 것 같다. 작가의 오두막을 찾으니 그의 생전 모습이 그려진 것이다. 권정생 작가는 평생 만성신부전증으로 고생을 했고 말년엔 “옆구리에 불편한 오줌통을 차”고 있었다한다. 그래서 누가 오면 “집 뒤 골짜기로 숨어들었다”는데 누가 방문하는 것도 잘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늙고 병든 작가의 모습은 ‘조팝꽃’에 투사된다. 그래서 시인은 권작가의 마을인 ‘조탑리’를 ‘조팝리’ 라고까지 명명해본다. 조팝꽃의 꽃말은 ‘단정한 사랑’이다. 생전 권정생 작가의 모습과 흡사하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인세를 어린이들에게 써달라는 유언을 남긴 그의 어린이 사랑 또한 단정하다. 이렇듯 4월의 들판을 하얗게 뒤덮는 조팝꽃은 이 시에서 인간의 늙고 병든 고통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다.
봄날에 도화밭을 열 번 찾아가도 본체만체하더니 쉰이 넘은 친정 동생이 이혼하고 아파트와 자식들도 다 빼앗기고 거지가 되어 돌아와서 남이 버려둔 복숭아밭 농사짓겠다고 복숭아꽃핀 밭으로 들어갔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며 안겨 오던 오래된 복숭아밭
그도 적조해서 사람이 그리웠다며 핏빛 영혼으로 호리고 또 호리어서 일손을 놓고 한참을 바라보다가도 꽃을 따는 일이 일이라서 똑, 똑, 꽃들을 솎아내며 봄철이 다 가도록 사랑해서 상품이 되는 복숭아를 만드는 게 일이었지 태풍이 와서 나뭇가지 부러져 나가고 빗물 속으로 떨어져 누운 상한 복숭아 동생의 더운 눈물 흥건할 때 복숭아나무 상처 만나려고 너 여자와 이별했니?
-「복숭아 만나려고」 부분
늙고 병드는 게 어디 몸뿐이겠는가. 상처받은 영혼 또한 병이 든다. 위 시에서는 복숭아꽃나무의 상처가 바로 동생이 겪은 이혼의 상처다. “태풍이 와서 나뭇가지 부러져 나가고 빗물 속으로 떨어져 누운 상한 복숭아” 같은 동생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은 착잡하다. 아니 화가 나서 “이 어리석은 것아,/여자의 살 속같이 물이 많은 이 복숭아밭 골짜기에 들어오려고/여자와 이별했니?/복숭아 물고 한 세상 잘 보내려고 여자와 이혼했니?”라며 한없이 질타한다. 뿐만 아니라 “공단 주변 여편네들과 농 지껄이”하는 동생에게 “그 여자들 수작에 놀아나는 복숭내 나는 동생이 또 위태위태해 버럭 소리를 지”르기까지 한다.
이렇듯 박정남 시인의 시는 인간의 사고(四苦) 중 태어나는 고통, 늙는 고통, 병드는 고통까지 꽃을 통해 겪어왔다. 이제 죽음이 남았다. 이 네 가지 고통 중 가장 인간이 두려워하는 것이 죽음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난제였던 이 죽음이 모든 종교와 철학과 문명을 불러내었다. 과학이 발달한 현재까지도 죽음은 어떤 명확한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해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고 공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주검은 새색시 때 입다가
농 밑바닥에 고이 간직해둔
녹의홍상을 꺼내 입고 간다
여름비 그치고 난 뒤 후끈한 홍초 꽃들의
줄지어 선 가장 끝줄에
오래전에 죽은 당신의 여자를
거기서 만난다면?
초록 저고리에 붉은 치마
주검이 입은 그 섬뜩한 옷이
겨우내 꽁꽁 언 채로 무덤 속에 누워 있다가
삼월 삼짇날 제비 등에 업혀
연지곤지 찍고 붉게 입술도 그리고
돌아와 아직 꽃도 피지 않은 검은 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아무리 찾아도 자개함에 넣어둔
녹의홍상이 보이지 않는다
홍건한 꽃물 흘리는 봄이
내 죽은 몸의 사타구니에도 와서 꽃이!
-「녹의홍상」 전문
이 시를 읽으면 서정주의 「신부」가 생각난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중략/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는 서정주의 「신부」는 첫날밤에 오해가 생겨 그 차림 그대로 앉아 있던 신부가 40~50년이 지나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는 비극적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반면 위 시는 “아무리 찾아도 자개함에 넣어둔/녹의홍상이 보이지 않는”것이 시의 발현점이다. 그때 화자는 검은 나무 밑에 붉게 핀 홍초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녹의홍상의 주인이 여름비 온 후 홍초꽃으로 다시 피어난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홍초의 푸른 잎이 초록 저고리이고, 붉은 홍초꽃이 다홍치마였던가. 홍초꽃의 선명한 붉은 빛은 “주검이 입은 그 섬뜩한 옷이”된다. “홍건한 꽃물 흘리는 봄이/내 죽은 몸의 사타구니에도 와서 꽃이”되는 이러한 봄의 환상은 ‘죽음’을 ‘홍초꽃’으로 사물화하고 “오래전에 죽은 당신의 여자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사람이 죽을 땐 먼저 혼불이 빠져나간다 아침에 화장실에서 나온 어머니는 덜컥 방문 앞에 주저앉으며 “왜 이래 다리에 힘이 다 빠져 나가노”하고 혼줄을 놓으셨다 그럼, 어머니의 혼불은 쓰러지실 당시, 다리로 쏜살같이 빠져나간 것일까 남자의 혼불은 빗자루 모양으로 길게 빠져나가고 여자는 접시나 간장종지 크기로 빠져나간다더니 그 빠져나간 혼불은 그럼 어디 가서 사나, 사흘이 걸려 무덤이 다 완성되면 그 속에 다시 들어가 불 켜놓고 살다가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환한 종달새 노래 띄우고 제비꽃 자그맣게 앉혀놓나
-「혼불」 전문
“남자의 혼불은 빗자루 모양으로 길게 빠져나가고 여자는 접시나 간장종지 크기로 빠져나간”다고 한다. 그러나 이 혼불은 아무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파장이 의식에 와 닿아야 만이 볼 수 있다. 화자는 어머니의 혼불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서러움 같은 것이어서 그 혼불의 행방을 쫓는다. 결국 “사흘이 걸려 무덤이 다 완성되면 그 속에 다시 들어가 불 켜놓고 살”아 간다고 믿게 된다. 그렇다면 무덤 안은 온통 파란빛일 테고 봄이 되어 언 땅이 녹는 틈으로 그 빛이 새어나오게 될 것이다. 그 파란 혼불이 제비꽃으로 피어난다. 제비꽃이 빛의 핏줄을 가진 이유를 알 것 같다. 이런 동화적인 상상력은 어머니를 죽음의 세계로 보낸 화자가 스스로를 위무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화자는 마침내 제비꽃으로 형상화된 어머니의 혼불을 보게 되고 어머니 영혼과의 접신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비꽃은 참으로 애틋한 혼불의 고형체다.
죽음은 이렇듯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과 초월적 세상에 살게 될 옛 인연을 갈라놓는다.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는 순간에 보이는 혼불을, 미처 보지 못한 산 자의 안타까움, 그것을 우리 전통 장례식에서는 상여의 장식으로 만들어낸다. 이 쪽과 저 쪽의 경계에 있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꼭두’라는 인형이다. 이것은 마치 서양 종교에서 천사와 같다. 박정남 시인의 시 「김성수의 꼭두」와 「내 안의 꼭두」에 등장하는 이 꼭두는 “내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무수히 많은 얼굴들이/나무로 깎여져 시시각각 다른 눈동자를 하고/슬픔이거나 한숨 까르르 웃음소리 내며/바람소리 나는 허공을 보고 있”(「내 안의 꼭두」 부분)다. 꼭두는 상여에 매달린 흰 종이꽃, 붉은 종이꽃과 함께, 이승을 떠나는 영혼들의 안내자이기도 하면서 떠나보내는 자들의 위안부이기도 하다.
인간의 고통은 동료인 인간의 비극을 함께 느낄 것을 가르친다. 어디 인간이라는 동료뿐이겠는가. 이 세상에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동료이며, 그들의 비극을 함께 느낄 수 있다. 박정남 시인은 꽃으로써 인간의 고통을 읽었다. 시인이 호명한 수많은 꽃들의 이름이 태어나면서 고통 받고, 늙고 병들면서 고통 받고, 죽음으로 고통 받는 인간 비극의 상징이다. 생의 고통을 묻듯이 꽃의 안부를 물었다. 꽃을 베어 문 허공은 꽃의 덩치만큼 피를 흘린다. 허공이 꽃을 또 물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허공의 턱뼈는 딱 그만큼만 물고 있다가 놓는다. 꽃에게 물었다. 우리의 고통이 지금 어디까지 와 있냐고, 고통의 실재가 삶이었냐고. 대답을 않는, 고요한 꽃을 물었다. 지금 창밖에는 영산홍이 흘리는 피가, 허공의 입술에 낭자하다.
천수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