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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속의 이방인
『비밀요원』 이성렬, 『서정시학』刊
허혜정(시인, 문학평론가)
1. 잔혹한 놀이
시인은 외계로 유괴된 외로운 아이와도 같다. 외로운 삶의 귀퉁이에서 세상을 관찰하는 아웃사이더로 고립된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로부터 단절된 순간, 시인은 잊혀진 자신의 영혼에 손바닥을 댄다. 그리고 내면으로부터 세계를 둘러본다. 궁극적으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렇게 얇은 책장 속에서 자신의 심장과 영혼을 보여주기 위해 아무 것도 아닌 언어를 하나의 우주처럼 만진다. 시는 그렇게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지만 얼마나 우리가 사는 공간에 대해 말해주는가. 이것이 시가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이다. 이성렬의 시는 우리가 착실히 살아가는 현실과 이상하게 괴리되어 있는 이방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이방인은 우리 속에 잠들어있는 미개지 혹은 “내 유골을 담은 기억의 상자”(<식물의 사생활>)에서 걸어 나온 존재인지 모른다. 물론 우리는 일상의 균열을 가져오는 이방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거주하는 공간이 다정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을 때, 유리잔을 들고 축배를 올리고, 따스한 사랑의 온기에 어깨를 적실 수 있을 때는 말이다. 하지만 문득 세상이 “컴컴한 빈 집”<(해미에서 돌아오는 저녁>)으로 느껴질 때 이방인은 나타난다. 출신지도 이력도 모르는 ‘비밀요원’처럼 우리가 매순간 통과하고 있는 공포와 외로움, 아픈 삶의 구석구석을 탐지하기 위해 말이다. 이 낯선 이방인과의 만남을 이성렬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시는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다. 오랜 구애 끝에, 에곤 쉴레의 그림 속 여인처럼 치마 속의 은밀한 부분을 슬쩍 드러내어 주는 것. 그러나 구애는 열렬해야 하고, 시인의 삶은 충일해야 한다. 시는 어떻게 나를 처음 찾아 주었을까. 그것은 한 세기가 끝나가는 어느 겨울 호텔방에서였다.”(<시인의 산문-바리키노에서 열 번째 행성까지>)
“한 세기가 끝나가는 어느 겨울 호텔방”에서 ‘시’는 불현듯 그를 찾아 주었다. 무언가 삶의 끈질긴 버팀목이 되었던 논리가 무너지고, 자신이 안착했던 장소에의 회의가 참을 수 없는 깊어지는 순간이었을까. 어쩌면 “너무 지적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던 엘리어트처럼, 노쇠와 고갈, 우울의 황무지에 내던져져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삶의 격변 앞에 당황한 것처럼 보인다. 에곤 쉴레의 방탕하고 나른한 화폭처럼 “오랜 구애” 끝에 찾아온 시의 비밀을 만지기 위해서 “삶은 충일해야 했건만 그의 생은 텅 비어 있었다. 잔인한 열락이 남겨놓은 스케치처럼 시는 은밀한 애욕의 비밀과도 맞닿아 있다. 사랑이란 작은 회오리처럼 존재의 발끝에서 말려 올려간 불의 열기와 흙으로 만들어진 살과 흐르는 체액의 만남과 헤어짐이 아닌가. 에곤 쉴레의 그림 속에 감추어진 비밀은, 애욕처럼 혼란스레 뒤엉킨 필선과 일상의 빛나는 한순간에 있다. 한 때 생의 부조리와 혼돈을 수납하던 순간이 그에게는 있었다. 일상의 균열을 의미심장하게 내보여주는 “아즈텍 증후군”을 나는 유의해본다.
그는 안개 자욱한 아침에 찾아왔다. 멋진 테너를 자랑하는 성악가에게 남모르는 고민이 있었는데 - 사랑스런 여자에게 말을 걸 때 튀어나오는 소름끼치는 음성에, 누구나 질겁하며 달아나기 일쑤라는 것.
살아가는데 별 문제 아니라고 외과 의사는 말했지만, 더 큰 고민은 - 음산한 고백에 이어 목구멍에서 스물스물 기어 나오는, 뱀의 혀를 닮아 끝이 갈라진 붉은 버섯송이였다.
아즈텍 벽화를 깊이 공부한 병리학자의 생각은 달랐다 - 고대 멕시코 사람들의 입에서 굵은 버섯이 튀어나왔는데, 제사장은 뿌리가 없는 버섯 임자의 혀를 뽑아 돼지에게 주었다고.
병원 측의 소견서는 이러했다 - 이 환자의 증상은, 사랑하는 여자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임. 유럽으로부터 도입된 카운터 테너, 가성(假聲)의 바이러스로 간단히 퇴치됨.
<아즈텍 증후군> 전문
다듬어지고 조율된 멋진 ‘테너’는 삶의 연극을 위한 사회인의 ‘가면’이고 지식과 논리의 무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가성’이다. 그러나 훈련된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하는 테너가수의 오만한 아리아는 갑자기 “음산한 고백”으로 흐트러진다. 머리로 심장을 제어할 수 없었던 끔찍한 사랑의 트라우마가 있는 것일까. 강렬한 매혹은 사랑의 희생자를 만든다. 진실을 토로하는 ‘병’을 가진 화자는 사랑의 잔혹한 제물이 된다. 마치 아즈텍의 신화에서 자연의 난동에 의해 인류가 절멸과 격변을 겪듯, 존재는 자연의 제물이고, 사랑이란 심장을 공물로 요구하는 잔혹한 놀이일 뿐이므로. 이성렬 시의 비밀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질 수 있다. “멋진 테너를 자랑하는 성악가”의 고민은 “사랑스런 여자에게 말을 걸 때 튀어나오는 소름끼치는 음성”이다. “음산한 고백에 이어 목구멍에서 스물스물 기어 나오는, 뱀의 혀를 닮아 끝이 갈라진 붉은 버섯송이”는, 현대의 병리학적 소견에 의하면 “가성(假聲)의 바이러스로 간단히 퇴치”될 수 있다. 하지만 “아즈텍 벽화를 깊이 공부한 병리학자의 생각은 달랐다” 마치 아즈텍의 벽화가 증거하듯, 심장이 도려내진 존재는 혀까지 뽑혀나간 잔혹한 희생자로 내던져진다. (우리는 “뱀의 혀”가 지시하는 것이 원초적으로 금지 혹은 어떤 죄악과 섹스에 대한 주제임을 이미 알고 있다) 제물을 환각 속에 잠재우는 버섯의 마취와 황홀, 극단적으로는 잔혹한 죽음으로 언어는 입 안에 통증으로 잠복해 있다. “내 여자처럼 언제나 한 구석에 잠들어 있는 너를 외면하기 시작한 것은”(<사랑니에게>) 언제였던가. 열정과 도취와 자유가 아니라, 회한과 허무로 다가오는 길을 선택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서른 살에 시인이 되었더라면/많은 여자들을 만났겠지/술집에서 못 일어나는 밤이 잦고/우체국 간판이 붉은 이유를 진작 알았겠지/가난한 하늘에서 떠돌이별은 마음에/좀더 가까이 항해했겠고/밤의 푸른 목소리에 반하여/자주 떠나버렸겠지//그러나 마찬가지였겠지”(<늦게 부른 노래>)라고 그는 중얼거린다. 공허한 회흑색의 공간만이 압도하는 곳에서, 그는 꿈의 논리를 좇아가고 싶었지만 언제나 제 장소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시는 영혼을 갉아먹는 ‘악의 꽃’처럼 피 묻은 입술로 독자를 집어삼키고자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뱀의 신중하면서도 무자비한 공격성은, 존재가 안착한 일상의 낙원을 전복하는 시인의 언어를 상징한다. 뱀의 혀는 절대의 권위와 사회적 원리를 무로 만드는 아나키즘적 상징이며 그것은 이성으로 해독되지 않는 여성의 두려운 신비와 결합되기도 했다. 뱀의 ‘갈라진 혀’에 대한 논의는 매우 풍성하지만, 어쨌든 길들여지지 않은 욕망의 말 혹은 열락의 늪지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또 다른 진실을 암시한다.
그녀의 얼굴 변천사를 보면 진실은
바닥없는 구덩이 밑바닥에 있지.
원래 얼굴이란 원래 없는 것,
그녀가 돌잔치에서 화장품을 집어 들었다거나
버는 돈 모두 부모에게 맡긴다거나
소주 한 잔 마시면 병원에 실려 간다는, 등등
사실이 아니면 어떤가, 그들에게
환상을 줄 수 있다면, 가령
그녀의 허리가 굵어지면 포샵으로 깎으면 되고,
젖꽃판 내보인 사진을 흘리며
기자들에게 촌지 좀 쥐어주면
기관원들에게 꼭지 떼였다는 소문은 사그러들지.
무리해서 쓰러졌다는 소문을 보내면 그들은
힘내세요, 사랑해요! 라고 응원하지.
감각의 제왕,
무지개를 뿜는 그림자,
봄꽃 시들면 여름나비로 옮겨가네.
샘솟는 아이디어를 수첩에 올리고
달마다 그녀의 치마 뒷춤을 잘라먹으면 되지.
잠들기 전 냉동실에 입을 넣어두면
아침까지는 산뜻 멸균된다네.
중요한 건 결정적 순간
누구에게 전화 걸 수 있는지!
부드럽고 질긴 괴벨스,
세상을 스토킹하네.
<누구에게 전화하는지> 전문
소문의 안개에 싸여 있는 그녀는 환상의 히로인이다. 그녀가 선사하는 황홀과 도취는 늘 대중의 잡담 속을 흐르고 있다. 거짓이면 어떤가. “샘솟는 아이디어를 수첩에 올리고/달마다 그녀의 치마 뒷춤을 잘라먹”는 시인은 “진실은/바닥없는 구덩이 밑바닥에 있”음을 안다. 그녀는 지루한 일상을 견디는 대중의 관음증과 스토킹의 대상이다. 로케이션을 떠나고, 엄청난 개런티를 받고, 화제의 꼭대기에 올라 욕망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녀는 코브라처럼 대중을 급습하는 클레오파트라다. 아니 심장을 도려내려 포로를 달콤하게 사로잡는 아즈텍의 전사다. 매니지먼트사의 관리를 받으며, 꿈을 공급하는 그녀. 새로운 자본주의의 지시에 따라, 제작사가 꼼꼼히 작성한 촬영대본에 따라 꿈의 언어를 흩뿌리는 그녀는 기사 같은 매니저와 기자와 팬들에게 둘러싸인 천사로 시인의 책상에도 날아와 앉는다. 억눌리고 지루한 일상의 끝자락에 음흉한 욕망의 수수께끼를 던져놓는 그녀. 곰곰이 생각해보면 시도 이러한 생리로 출발한다. 조용한 일상을 시끌벅적 뒤집어놓는 유쾌한 스캔들처럼, 삶이 호기심과 환상을 빼앗아 갔을 때,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남루해지는 것일까? 습관의 미로로 빙빙 감겨드는 차가운 길 위에서, 삶은 그 의미를 끄집어내주는 법이 없다. 시의 도덕은 사회적인 도덕과는 다른 것이다. 시의 도덕적인 근거는 인간의 욕망과 진실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출발하고, 또한 그 철학적인 근거는 인간 내면의 영감의 우주라는 점에 놓여있다. 그래서 시는 사회적 윤리와 확신을 깨뜨리는 낯선 방언으로, 우리 삶의 문법과 잘 짜여진 인식의 지도를 무시할 수도 있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 거리의 문법은 너무 당연하지만 이상한 것이다. 멀쩡히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미친 것이 아닐까.
식구들과 여행을 갈 때마다 밤중에 몰래 빠져나와 집으로 전화를 걸곤 했다. 러시안 룰레트에서 힌트를 얻은 이 놀이에 나는 온 귀의 신경을 팽팽히 곤두세우며 집중했지만, 게임의 규칙을 알지 못하여 번번이 실패하였다. 반복적으로 울리는 신호는 민물장어처럼 귓바퀴를 빠져나갔을 뿐.
놀이의 비밀을 알아낸 것은 엉망으로 취한 대명콘도 지하상가에서였다. 신호음이 아니라 밑에 깔린 미세한 잡음이 모르스 부호로 말하고 있음을. 무작위한 전자들의 움직임이 <적어도, 지금, 여기에>라고 속삭임을 분명히 들었고, 철학책을 뒤져가며 해독하는데 8개월이 걸렸다.
두 번째는 쿄토 금각사 근처 여관에서 <캪슐, 즐거움, 말미잘>이라는 단어들이 흘러나왔는데, 1년 반 후에 대전 술집에서 옆에 앉은 미대 아르바이트생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그 다음에는 진화론의 대가인 스티븐 굴드 교수의 책에서나 읽은 듯한 <우연히, 直立猿人, 치질, 도도새>라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 은밀한 놀이는 그러나 제주 중문단지에서 송화기 구멍 사이로 내 음산한 목소리가 <출구, 덧없음, 不在>라고 내뱉었을 때, 목덜미에 돋은 소름과 함께 끝이 났다.
<그림자 놀이> 전문
‘러시안 룰렛’은 자신의 머리를 과녁으로 삼는 치명적인 놀이이다. 도대체 멀쩡한 정신으로 어떻게 숨쉬며 살았을까 하는 질문이 러시안 룰렛 놀이에는 숨겨져 있다. 화자는 “식구들과 여행을 갈 때마다 밤중에 몰래 빠져나와” 텅 빈 “집으로 전화를 걸곤 했다.” 그 부재의 장소를 향한 “놀이의 비밀을” 눈치챈 것은 “미세한 잡음이 모르스 부호로 말하고 있음을” 느꼈을 때이며, “철학책을 뒤져가며 해독하는데 8개월이 걸렸”을 때다. 마치 하나의 부조리한 말이 우리의 머리가 숭배하던 수천의 문법과 논리, 언어를 과녁으로 삼듯이, 시인이 고수하는 일상의 문법이란 얼마나 미친 것인가.
이렇듯 이방인이 발견되는 곳은 바로 너무나 익숙해진 삶의 장소다. 아무도 쳐다보진 않지만 이 웃기는 세상을 증언하는 개그처럼, 그의 시는 황폐한 두개숭배자인 현대인의 고독에 접속되어 있다. 하지만 멀쩡한 현실의 중심을 관통하는 ‘총알’의 놀이도 “내 음산한 목소리가 <출구, 덧없음, 不在>라고 내뱉었을 때” 끝이 났다.” ‘우연’의 소산인 의식의 돌연변이체처럼 그는 터무니없는 생을 고수해온 ‘충견’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만취한 그 겨울날, 눈 쌓인 트렁크 위에 누군가 손가락으로 새긴 전화번호”를 보고 그는 알았다. “밤늦게 오가는 나를 끈질기게 노려보는” ‘스파이’는 바로 “구차한 생을 찬찬히 보살피던 내 봉분(封墳)”이었다. “썬글래스 속에 조직의 비밀을 안고 죽는 충견”처럼 주인의 문법을 따라 착실히 굴러가던 자동차는 바로 자신이었다. “내장을 내보이며 퀭하게 응시하던 망막”(<비밀요원>)으로 그의 행로를 감시하던 ‘비밀요원’도 자신이었고, 사라진 존재를 추적하던 자 또한 자신이었다. 그의 생을 스토킹하던 이방인은 세계와의 어긋난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렇게 이성렬의 시는, 도대체 우리가 어디까지 제정신인가? 어떻게 미쳐 살아가는가? 하는 질문을 통해 광기와 멀쩡함 사이의 모호한 경계와 자기확인의 몸부림을 보여주는 것이다.
2. 낯선 삶의 안쪽들
시를 쓰는 것은 미친 인간이 아니라 가장 멀쩡한 자가 하는 짓이다. 시라는 것은 우리의 정신이 여과해놓은 현실이 아니라, 영혼과 감정 정신 그 모든 것이 갈망하는 온전한 현실을 더듬기 위해 창조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능한 돈에 심장을 팔고, 정신의 구조 속에 살아남기 위해 성공을 좇아가고, 육체를 피로의 한계까지 밀어부친다. 하지만 세상의 리듬을 따르지 못하는 우리의 몸은 이 세상을 얼마나 비관하고 있는가. 검은 박사모를 쓰고 지성을 과시하며 진실을 얼마나 자주 속여 왔던가. 심장의 ‘자연발화’보다는 부와 성공이 더욱 중요했던 세상에서 “남의 슬픔을 되뇌이”며 ’좇아가는 길만큼 “그렇게 다른 길은 없”(<겨울 숲가에서>)을 것이다. 하지만 이성렬은 말한다. “시를 써야 할 내적 필요성이 존재할 때만 시를 쓸 것. 내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인 시만을 발표할 것. 생시에 인정받지 못할 각오를 할 것. 내가 사라진 후에 너덜너덜한 종이 위에 내 시들이 흩날릴지라도 실망하지 말 것. 시는 사는 만큼 쓰여지니 열심히 살 것, 그리고 철저히 외로워질 것. 내 시를 읽는 독자들의 시간 값으로 돈을 내고 시를 올릴 것!”(<시인의 산문-바리키노에서 열 번째 행성까지>) 그렇게 “총천연색 얼룩말 무늬 스웨터 바지 한 벌”같은 순수한 말을 입고 그는 달려가고 싶었던 걸까.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60년대 아주 추운 날 아침,
유담뽀를 안은 채 잠이 깬 내 머리맡에 놓인,
깊고 따뜻한 주머니를 가진,
질기고 강한 고무줄을 두 겹 넣은,
내 다리보다 한 뼘이나 더 긴,
대바늘 사이로 수많은 한숨이 무늬를 새겨 넣은,
내 가슴 속 깊이 무지개의 화석으로 박힌,
지금 흐린 겨울 하늘에 갑골문자로 눈물겨운,
어머니가 뜨개질 부업에서 남긴 색색 털실로 짠,
총천연색 얼룩말 무늬 스웨터 바지 한 벌
<프리즘> 전문
시는 마악 잠에서 깨어난 성탄절의 아이처럼 존재의 축복을 일깨우기 위해 찾아온 것일까? 무한한 존재의 성장을 예비하듯 “깊고 따뜻한 주머니”와 “내 다리보다 한 뼘이나 더 긴” 털실바지는 기억 속에 비집고 앉아있는 축복의 시간을 순수하게 품고 있다. 위의 시는 경쾌하고 따뜻하고 아릿하다. 그림책마냥 뭉클하고 애틋한 감동을 전해준다. 기억의 ‘프리즘’은 불현듯 “가슴 속 깊이 무지개의 화석으로 박힌,/지금 흐린 겨울 하늘에 갑골문자로 눈물겨운,” 기억의 유적을 들춰내 보여준다. ‘얼룩말’처럼 원하는 길로 뜀박질하던 축복, 유년의 시간은 현대의 작위와 부당한 허위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다. 그 순수한 축복의 기억의 찾아 시인의 시선은 자주 플라스틱 자갈이 깔린 대리석길이 아니라, 낯선 이방의 비포장도로, 바다가 보이는 해안선, 문명의 후방을 어슬렁거린다. 삶은 순간, “왕십리 종합시장에서 십 년을/좌판식당 하던 내 할머니”(<東京抄>) “‘토끼눈’을 가진 ”내 어릴 적 가정부 누나”(<그믐달에게>)같은 우수 어린 얼굴과 합류한다. 스쳐가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은 언제부터 잃어버렸을까. 무엇 때문에 완강한 장소와 ‘나’라는 관념을 고집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그는 “도시로 돌아온 저녁에/지도와 티켓들을 봉투에 넣어/가을밭에 남겨진 이삭처럼/서랍 한 구석에 담아 두었다”(<도시로 돌아와서>) 그의 시는 그가 더듬어온 꿈의 실루엣을 조그맣게 간직한다. 하지만 그러한 흔적조차 완강한 세계를 건너가기 위해 자주 버려져야만 했다. “안개처럼 젖었던 주둥이는/낙엽으로 바스라졌다/그의 잘못이 아니다, 우리의 슬픔 또한/스스로 찾아 온 것이 아니다”. 그의 시에는 갑자기 텅 비어버린 세계를 떠나는 “떠돌이 냄새”(<병동>)가 난다. 우리가 쌓아올린 지식 끝에 경험하는 거대한 허무를 둘러보는 순간 남루한 영혼의 풍경은 바닥을 내보여준다. “곧은 가드레일을 따라 길은 떠났고” 모든 것이 ‘내려앉’고 헐벗은 정적과 슬픔으로 숨죽이는 순간, “눈발은 바람에 날리며 길바닥에/무수한 의문부호로 출렁인다.” (<다시 제야에>
그렇게 생의 질문이 서성이는 곳이 바로 노래의 입구다. “그 겨울의 쓸쓸한 술집들과/뒷골목 여인숙의 새우잠을”(<푸른빛의 기억>) 거쳐 온 방랑자는 얼어붙은 손을 언어의 온기에 적신다,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蓮花역을 지나며>) 생을 속삭이지만 그는 시의 언어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안다. “소매에 감춘 어떤 싯귀도/창밖을 데면데면 바라보는 그녀를/달랠 수 없음을.”(<매산동>) 하지만 “누구도 말을 걸지 않는 분주한 거리에서/가슴에 묻은 시 한 줄과/공치고 있는 여자의 한 조각 기억으로/근근이 살아가게 됨을.”(<매산동>) 안다. 그렇게 “진공 속을 거닐며 반생을 지”냈다. “모든 음향이 끊어진 이곳에는 집 없는 거미가 떠돌고/<제발 이해해줘>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스페이스 워킹>)는 세계를 외계처럼 걸어가고 있다. 분명한 언어들이 분화구처럼 남겨놓은 의문에도 답하지 못한 채, 운명을 다스리는 힘의 정체를 알지도 못한 채, 삶은 도대체 어디에 착지해 있었던 걸까. 마치 “외계를 떠돌다 지구로 돌진할 거대 운석”처럼 그는 어디에 내동댕이쳐진 걸까. 그는 <공증>에서 말한다. “그곳에 가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린왕자, 바오밥나무, 프란쯔 카프카, 벨로시랲터, 티코 브라헤, 따뜻한 별에서 쫓겨난 것들의 단체사진이 국경도시 Gmünd 역에 걸려 있”는 풍경에서, 그는 낯선 행성을 거니는 아이처럼, 너무나 당연했던 세계의 문법을 둘러본다. 그의 삶은 이상한 꿈이다. “멈추면 넘어진다는 가훈만이 삶의 징표인 듯.”(<그림자 도시에서>) 완강하게 고수하던 제자리에서 그가 더듬어간 텍스트, 혹은 “노베 흐라디”(체코 南보헤미아의 작은 마을), ‘프라하’같은 이방의 도시에서 잠시 맛보는 “갓 구운 빵에서 허무의 냄새를 맡”(<저녁에 길을 묻다>)는 것이다.
벌새는 언제부터 곡선비행을 싫어했을까
해와 달은 날마다 조울증을 보이기로 결심했을까
무궤도전차가 푸른 스파크를 일으킬 때마다
성가대 트럼펫 주자는 반음씩 낮춰 연주했지, 그리고는
눈이 퉁퉁 부은 새들을 피해 지하병동을 통과하는 지름길로 귀가했네
검은 안경을 쓴 레고 군대가 티비를 점령했을 때, 동물원에서
펭귄을 오래 노려보면 가랑이에 품은 알을 계란 대신 건넬지,
악어가 갑옷을 벗어 코끼리 형상의 여류정치가에게 헌사할지 가늠했네
너는 영문 크로스워드를 풀고 있었지, 빈 방에서 울며
<separate &unequal>이란 용어가 그리도 야속했던가, 교수는
<아웃소싱의 미래>라는 책을 오래 씹어보라고 했지
시집 표지에 얼굴을 박은 시인은 반드시 파시즘으로 가데
누구는 세포의 이면마다 화성과 금성의 음모가 보인다고 하던데, 아직도
침몰한 여객선 캡틴이 정복을 벗고 먼저 구명보트에 올랐다고 생각하는지
전쟁 대신 치르는 축구경기에서 누가 처진 스트라이커인가 면밀히 관찰하는지
흑백영화에서 붉은 연기를 굴뚝 위로 피워 올린 최초의 감독이 누군지, 이젠 아는지
지붕 위에 앉아 누군가 노래 부르네, 그대
아직도 날 모른다고, 그러나 진실로 미치게 하는 건
그토록 많은 나날, 너의 집으로 들어가는 그리운 골목과
나오는 아득한 골목이 같다는 걸 왜 몰랐을까?
<그 모든 나날이 지나도록 나는 아직 미쳐있네> 전문
위의 시는 투명한 현대의 우주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 어떤 ‘결핍’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제자리로 돌아와야만 하는 ‘곡선비행’을 혐오하는 벌새, 아무도 몰래 ‘지하병동’을 통과하는 우리의 삶, “<separate & unequal>”란 말 하나로 이방인이 되어버린 삶의 문법들을 화자는 문제삼는 것이다. 미지의 우주를 자유로이 더듬기는커녕, “시집 표지에 얼굴을 박은 시인은 반드시 파시즘으로 가”고, 사랑의 이름으로 우리는 분리되고, 찢겨지고 외로워한다. 사랑하는 이의 육체, “세포의 이면”조차 “화성과 금성의 음모가” 가득한 ‘여객선’에서 ‘구명보트’를 타고 탈출할 순 없을까. 공격적인 국가적 스포츠에 열광하는 군중들, 잿빛의 “흑백영화”와도 같은 세계에서 ‘아웃소싱’하기 위해 누군가 “지붕 위에 앉아” 질문을 던지듯 노래하는지도 모른다. ‘영문 크로스워드’를 풀듯 의미의 텅빈 공간을 채워가고 있는지도. “너의 집으로 들어가는 그리운 골목”처럼 세계의 균열과 틈서리를 통해 화자는 무한한 현대세계의 공막을 바라보고 있다.
인간이 무수히 토해놓은 말들이 슬픈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는 자는 “이곳에 남기 위하여” 도리어 무한히 상상의 곁길들을 떠돈다. 때로 “잠언처럼 눈을 감고” 떠올리는 “짧은 노래”(<이곳에 남기 위하여>)를 나직이 들려준다. 우리는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존재가 될 필요가 있다. 숨쉬는 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전생을 바치는 요가승들처럼, 삶을 누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세포의 숨결과 불안한 고백을 따라갈 필요가 있다. 죽도록 돈을 벌기 위해 너무 바빠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나빠도 51%만 옳으면 되는, 게임의 법칙"(<그림자 도시에서>)이 관통하는 세상에서, 적당히 살아가는 존재들은 틀린 길에 전부를 내던지는 법이 없다. 하지만 이성렬의 시는 세계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어울리는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세상을 관통하는 부자연스런 질서를 보여준다. 그의 시에는 인식과 일상의 울타리에 갇힌 존재의 절망과 그 삶의 틀을 넘어서려는 갈망이 동시에 들어있다. 마치 “반쯤 열려 있는 문” 앞을 서성이는 생의 순례자처럼 “낯선 대지의 기척에 귀 기울이는/그 안쪽은 갈 수 없는 나라”지만 “문 밖에서 서성이며 행복하”다고 그는 말한다. “시간의 검은 갈퀴가 언제 목덜미를/채어갈지 모르는 이 운명도 기쁘네/문은 반만 닫혀 있으니”(<반쯤 열려 있는 문에 대하여>)
바로 그 ‘열림’의 가능성 때문에 시인은 반쯤은 낯선 외계를 닮은 삶의 모퉁이에 서 있다. 우리는 이 지상에 왜 태어났고, 또 어떻게 살아가며,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에 대해 시인은 우수 어린 질문을 던진다. 그의 시는 가장 소소한 일상에서 출발하는 듯하지만, 존재와 세계에 대한 물음에서 동시에 출발한다. 언제나 존재를 구속하며 위압적으로 버티어선 세계에서 “지상의 모든 그리움들이 뺨에 와 닿는/아린 꿈”(<흔들림>)을 찾아 우리는 외로이 책상으로 다가간다. 백지 위에 머뭇대던 꿈들이 비록 헛것일지라도, 삶은 그 헛것 속에 깃들어 있다. 중요한 것은 한때 ‘자연발화’한 불꽃처럼 타올랐던 꿈이 기억 속에 뿌리를 내리고 ‘열렬한 구애’의 기다림으로 열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기다림을 선택한 자는 그 대상과 오랜 약혼 중이다. 모든 문법의 끈에서 존재를 풀어놓아준 연인처럼, 하나의 자유로운 언어를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감당해 온 방랑자”는 기다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현실의 공격을 감내하며 담담히 시를 기다리는 시인의 자세에는 겸손과 사랑이 깃들어 있다. 시라는 이방인은 또 얼마나 그를 다른 길로 데려갈 것인가. 반쯤 열린 세계로 존재를 실어가는 마법의 ‘양탄자’는 또 어떤 사랑의 바다로 그를 실어갈 것인가. 이성렬의 시는 삶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아버린 강대한 것들을 외면하고 흐릿하게 살아오는 꿈의 흔적들을 좋아간다. 그 아름답고 민감하고 차가운 우울의 이미지는, 채 마르지 않은 잉크로 반짝인다. 그 글자들은 자신이 흐르는 반짝임이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리라.
허혜정(시인, 평론가)
1966년 경상남도 산청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국문과 졸업 및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7년《한국문학》 신인작품상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1995년 《현대시》 평론상에 당선, 199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부문에도 당선되어 시인이며 평론가로 활동. 계간 '시와 사상'과 '서정시학' 편집위원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