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화의 본론으로 뛰어드는 사마리아 여인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요한 4,19-20)
이 구절은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 대로 말하였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구절이다.
여인은 자신의 사생활을 정확하게 아시는 예수님의 초월 능력에 놀라면서, 이러한 능력을 갖고 있는 분이라면 ‘예언자’가 틀림없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동시에 자신의 정서적 목마름을 채워주신 분께 자연스럽게 자기 내면 깊이 자리하고 있는 구원에 대한 목마름, 곧 영적 목마름을 드러내며 더 적극적으로 예수님과 대화에 뛰어든 것이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오직 정서적 갈증만을 안고 예수님께 갈 수 있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예수님과 관계가 깊어지면 그분이 주시는 위로와 평화는 물론이요, 그분이 아니면 누구도 채워줄 수 없는 존재의 고독과 영혼의 구원, 곧 영적 목마름을 안고 그분께 달려간다.
심리학자 ‘머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피라미드의 다섯 단계, 곧 생리적 욕구 ․ 안전 욕구 ․ 애정 욕구 ․ 인정에 대한 욕구 ․ 자기실현 욕구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아랫단계의 욕구가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의 욕구를 채우려 하는데, 욕구의 최상위 단계인 자기실현 욕구를 이루기 위한 길 중 하나는 신과의 합일, 곧 구원의 길과 관련된다.
유다인들은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느님을 예배해야만 바르게 예배드릴 수 있고 구원을 얻게 되리라고 믿는데(4,20), 사마리아인들은 정통 종교생활에 참여하지 못하고 천대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 구원도 확신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찬대받으며 고통 중에 산다 해도 저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 수 있다는 확실한 희망이 있다면 이를 악물고 꾹 참을 터인데, 저 세상에 대한 희망조차 막연하기에 답답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절박한 목마름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예언자라 부르며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라고 한 말에는 다음과 같은 속마음이 들어 있다.
“제 삶은 너무나 공허하고 불안합니다. 저에겐 구원해 주시는 생명의 하느님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는 유다인들처럼 정통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제가 하느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 제발 가르쳐 주세요.”
그리스어 성경을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갖고 있는 구원에 대한 불안감을 더 잘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라고 말하는데 ‘예배를 드렸습니다’는 과거시제로, 지금은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과거 동사를 쓴 것은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을 기원전 128년 유다인들이 부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희생제사를 봉헌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사마리아 여인이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라고 한 말에서도 사마리아인들의 영적 불안감을 볼 수 있다. 이 말은 예루살렘 성전 예배가 갖는 합법성과 유일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강조는 예루살렘에서 하느님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사마리아인들의 깊은 아픔을 드러낸다.
여인이 예수님을 가리켜 ‘예언자’라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당대 유다인들이 간절히 기다리던 다윗 가문의 메시아를 가리킨 것인가? 아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성경으로 인정하는 모세오경에는 다윗 가문의 메시아에 대한 예고가 없다. 사마리아 여인이 언급한 예언자는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가리킨다. 사마리인들은 신명기 18장(15-18절)에 근거해서 마지막 시대에 모세와 같은 예언자가 오리라 믿고 있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이 예언자가 오면 하느님의 진리를 충만하게 계시해 주리라 믿었다. 그러기에 사마리아 여인이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주시겠지요.”(4,25)라고 한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기다리던 예언자, 곧 진리의 계시자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