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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 바람소리 / 이강하 / 서평 마경덕
최초의 본질에 대한 질문
마경덕(시인)
얼마나 많은 비밀이 아직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 의문에 답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으로 감춰진 비밀이 수없이 드러났지만 풀리지 않는 과제가 주변에 널려있다. 과학의 발달로 우주까지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고 우주선이 지구궤도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귀환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지구 주위를 도는 유인위성(有人衛星)까지 등장했지만 정작 머리카락 한 오라기 만들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생명에 관한 권한은 세상을 창조한 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씨를 뿌리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지만 그 씨를 키우는 것은 신의 능력이듯이 봄볕에 새순이 쑥쑥 자라고 꽃봉오리가 활짝 꽃잎을 펼쳐도 그 움직임을 사람의 눈으로 볼 수는 없다. 공기 역시 보이지 않는다. 깃발이 흔들리고 고요한 수면에 파문이 일고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으로 바람을 감지할 뿐이다. 분명한 사실이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듯이 세상엔 보이지 않는 힘이 존재한다. 종교는 인간의 인식을 뛰어넘는 곳에 있는 절대자의 존재로부터 출발한다. 그 힘을 가진 이가 공기, 바람, 햇빛, 물, 바다, 산, 들…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값없이 주셨다. 인간은 맹수처럼 사나운 발톱도 날카로운 이빨도 없다. 초원의 짐승처럼 태어나자마자 걸을 수도 없다.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도 물고기처럼 빠르게 헤엄을 칠 수도 없다. 하지만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으로 지구를 장악하고 만물을 다스린다. 지혜가 없었다면 나약한 인간은 오래전에 멸종되었을 것이다. 신이 창조한 인체는 지극히 정교하고 오묘하다. 사람을 만든다고 가정假定하고 그 비용을 예측해보니 어마어마했다고 한다. 측량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을 그저 당연함으로 받아들여 소홀히 여긴 적은 얼마나 많은가. 아직 신의 존재를 모르거나 신을 부인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시인은 여느 사람과 다르다. 영감靈感을 얻어 시를 쓰는 시인들, 신에게 선택된 사람들이다. 심령의 미묘한 작용으로 하늘의 언어와 눈빛을 기록하는 능력은 편애에 가까운 신의 은총이다. 태양과 바람을 빌려 쓰고 생각을 짓고 허무는 시인들은 신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로 세상은 움직인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인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도 지성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세련된 설교를 할 때는 영혼 구원에 실패했다고 한다. 비논리적이더라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설교했을 때 많은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전영란 시인의 세 번째 시집「바람 소리」는 詩로 하나님을 찬양한 다윗처럼 이 세상을 창조한 유일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시를 통해 믿음을 고백한다. 일찍이 예수도 비유를 사용해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직설적 표현을 피하고 우회적 화법話法을 사용한 예수 또한 빼어난 시인이 아니겠는가. 예수는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태 13:9)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태 13:16)라고 하였다. 들음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니 청각의 감각기관인 귀의 사명은 크다고 할 것이다. 전영란 시인은 세상의 소리보다는 하늘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인다. 태어난 지 사흘 만에 한쪽의 소리를 잃어버린 귀는 하늘을 향해 열려있다.
내게 소리를 먹지 못하는
귀 하나 있습니다
태어난 지 3일 만에
신이 회수해 갔습니다
쓴 소리든 단 소리든 밖에서 맴돌다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주인을 잘못 만난 달팽이관은
다섯 번이나 마취제를 삼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쪽 귀로만 듣다 보니
놓치는 것이 많습니다
남들도 나와 같은 줄 알고
목소리만 커졌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기에
아무도 모릅니다
남편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잘 들리는 소리
나의 귀를 가져가신
그분 목소리입니다
— 「귀」전문
소리를 먹는다고 하였다. 몸에 유익한 소리는 듣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몸으로 가슴으로 삼키는 것이다. 건성으로 들으면 소리는 흩어지고 오독을 일으킨다. 집중하는 것, 무언가에 깊이 빠져드는 것도 몸이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소리를 먹고 살아간다.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 들을 수는 없다. 쓴 소리 거친 소리도 다 들어야한다. 귓속의 달팽이관이 탈이 나면 몸은 중심을 잃는다. 멀미를 방지하기 위해 귀 밑에 패치(patch)를 붙이듯이 마음의 평형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해로운 말은 스스로 걸러내야 한다. 멀쩡한 두 귀로 중심을 놓치고 그것마저 인지 못하는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하는 시인은 남은 한쪽의 귀를 스스럼없이 보여준다. 시인은 한쪽의 귀로 신의 음성과 말씀을 편식한다. 그것은 전영란 시인에게 무엇보다 우선이고 값진 것이다.
세상에 나오기 바쁘게
내 몸에서 가장 먼저 나를 떠나
오랜 고단한 날에도
묵묵히 참고
내 곁에 머물러 있다가
몸이 아프다고
좀 쉬어야 하겠다고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내줍니다
작은 바람에도 가냘프게 떨며
제일 먼저 내게 통보합니다
— 「바람 소리」부분
시집의 표제시인「바람 소리」에서 보여준 한쪽의 귀는 두 쪽의 역할까지 도맡아 작은 바람에도 가냘프게 떨린다. 몸이 아프면 가장 먼저 신호를 보내오는 귀,「바람 소리」는 위험 앞에 노출된 나약한 시적 화자의 모습과 일치한다. 일상의 테두리 안에 견인된 소망들, 기도로 살아온 시인에게 말씀은 위로요 희망이다. 그 신앙의 힘으로 시인은 바람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서 세상을 살아낸다.「이런 날」에서도 화두는 단연 ‘소리’이다.
살아가는 동안
오늘처럼 하늘이
땅이 쩍쩍 갈라지도록 소리치며
야단칠 때가
어디 한두 번이겠습니까
이런 날은 하던 일을 멈추고
겸손히 앉아서 생각에 잠겨보거나
하늘도 한 번 쳐다보고
가슴 저미며 두 손 모으고
천둥으로 내려오는 말씀에
귀 기울여 볼 일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고되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겨 싼 먹구름 물러가면
다시 환하게 밝아 오리니
밤이 깊었다면
새벽은 그대의 것이겠지요
— 「이런 날」전문
이 시를 읽으면 진동이 느껴진다. 언어를 넘어 달려오는 소리들, 물체의 진동이나 기체의 흐름에 의해 발생하는 파동들, 소리의 진폭을 따라오는 두려움, 빛은 소리보다 빨라 ‘번개’가 친 뒤에는 으레 ‘천둥’이 이어진다. 뇌성과 번개를 동반한 대기 중의 방전 현상에 누구나 긴장한다.「이런 날」이 보여주는 굉음은 단순히 물리적인 소리가 아닌 하늘의 경고로 읽힌다. 엄습해오는 천둥소리에 하던 일마저 멈추고 겸손히 가슴 저미며 두 손을 모으는 시인은 먹구름에 둘러싸인 밤이라도 새벽이 있기에 고통의 시간을 견딜 수가 있다고 한다.「이런 날」은 하늘의 경고를 겸허히 받아들여 성찰하며 두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시인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의지로 충만하다. 그녀의 시는 물처럼 스미고 편안한 울림을 준다. 읽히는 것이 읽히지 않는 시보다 더 좋다는 것을 독자는 알고 있다.
수천의 얼굴로 변해온
최후의 열대우림 보르네오 정글 속
아직도 길들지 않은 야생이 공존하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땅, 그곳에
실룽아이가 있다
우주에 막을 친 바람 아래
5백여 명의 무룻종족이
조상 대대로 터전을 잡고 살아온 땅
사방을 둘러봐도 한 줄기 흙탕물이 흐르는 강과
축축한 숲의 향기만 가득하다
하늘을 닮은 눈동자로 웃으며
바람의 꼬리 붙잡고 뛰어 나오는
맨발의 아이들은
줄줄이 생산하는 어미의 후손들
더 나은 삶에 대한 욕망도 없이
수수만년 습관이 붙박이 된 인생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몇 개면 충분하다고 삶으로 보여준다
문명이 결박된 아득한 거리
정글에 가득한 생명의 법칙
땅 끝까지 다스리는
신의 뜻은 깊었다
—「실룽아이 사람들」전문
지도에도 없는 땅 최후의 열대우림 보르네오 정글, 문명이 결박된 아득한 거리에서 시인은 땅 끝까지 다스리는 신을 만났다. 필요한 것은 몇 가지면 충분하다. 이것은 그들만의 생존의 법칙, 가지지 않아 다툴 것도 없고 빼앗길 것이 없으니 평화롭다. 통틀어 500여명의 종족, 한 줄기 흙탕물이 흐르는 강을 붙잡고 살아간다. 태초에 신이 인간을 지을 때 이런 모습이길 바라지 않았을까.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언어를 혼잡하게 한 신의 뜻이 이곳에 있었다. 많이 가지고 많이 누리는 자가 행복한 삶이라고 누가 단언할 것인가.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이 그치지 않는 세상, 평화야말로 지상 최대의 과제이다. 옛말에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고 했다. 한 나라의 거주자가 일정 기간 동안 생산한 모든 재화와 용역을 시장가격으로 평가한 GNP, 1인당 국민소득이 5900$인 가난한 나라 코스타리카는 GNP 순위 69위였지만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에 뽑혔다. 반면 GNP 세계1위 1인당 국민소득 10만4천6백$인 룩셈부르크는 국민행복지수 22위였다. 국가나 개인이 부유하다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증거이다. 걱정이나 근심으로 어떤 문제를 실제로 해결할 가능성은 5%미만이라고 한다. 갈수록 삶은 복잡다단해지고 현대사회는 더 나은 삶의 질을 획득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사회가 되어간다. 물질은 풍부해도 사랑은 식어간다. 이런 문제점은 일찍이 선지자들이 예언했으며 성경에 그대로 기록되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마 6:27)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 6:34)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미국 신경정신학자 엘머게이츠는 사람이 화를 낼 때 나오는 호흡을 모아 액화를 시켰더니 ‘코르티솔’이라는 성분이 나왔는데 이를 쥐에게 먹였더니 30초 뒤에 죽었다고 한다. 전영란 시인은 오지의 여행지에서 하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맨발의 평화를 만났다. 진정 신의 뜻은 깊고 깊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일시에 집어삼킬 듯
광풍이 휘몰아친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온 산야가 울음바다로 엄습해오는 죽음의 공포
혼돈과 공허의 역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는 인간 세상을
용서치 않기로 작정한 시간
무릎 꿇지 않는 생명에
하늘의 경고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택한 백성에게
무지개 약속을 잊지 않으신
지고한 존재여
질곡의 어둠 속에서도
그 모습 만민에게 보이소서
부르면 언제든 대답할
그 거리에 있겠습니다
—「약속」전문
신의 계시에 따라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에도 살아남았던 노아. 그 당시 노아는 신에게 순종하는 단 한 명의 욕심 없는 의인이었다. 하나님은 죄악으로 가득 찬 이 땅을 물로 쓸어버린 후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는 ‘무지개’였다. 물과 빛과 공기로 만들어진 ‘무지개’는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경이로운 무지개의 성질을 과학적으로 규명한 사람은 17세기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였다. 그 이후 대기과학자들에 의해 무지개의 원리가 밝혀졌다. 세익스피어는 “무지개에 다른 색을 첨가하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하였다. 무지개는 모든 기상현상 중에서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었다. 그 무지개가 하늘에 걸리기까지 지구는 죄악으로 인해 멸망을 당하는 혼돈과 공허의 역사로 점철되었다. 19세기 중반 중동까지 뻗어간 고고학의 발굴로 성서에 기술된 일부가 역사적 사실이었던 것이 증명되었다. 구약성서의 무대인 메소포타미아 주변에서부터, 전설상의 장소라고만 여겨지던 성서에 기록된 도시의 유적까지 차례대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신이 인간에게 주신 ‘약속’을 믿고 전영란 시인은 ‘부르면’ 언제든 대답할 그 ‘거리’에 있겠다고 했다. 성서에는 아버지의 곁을 떠난 아들이 탕자가 되어 돌아오는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라는 ‘안전거리’에서 벗어나 걸인이 되어버린 아들은 회개하며 아버지에게 돌아온다. ‘부르면 대답할 거리’로 들어선 것이다. ‘선과 악’의 거리가 멀고도 가깝듯 신과 인간의 관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부르면 대답할 그 거리’는 가장 안전한 거리, 즉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거리인 것이다.
일단 먹고 보는 세상, 먹고 먹고 또 먹고, 선악과를 먹은 조상을 가졌으니 할 말은 없지만,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돈도 먹고 피박도 먹고 광박도 먹고 쓰리고도 먹고 여기저기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변리라도 내서 골고루 먹는다 봄이 온다는데 민주화된 세상이라는데 청렴결백이라는데 아직도 버리지 못한 구시대 근성 지능 높은 꾼들은 여전하고 권력의 단맛에 길들어 뇌물은 재판을 굽게 한다는데 선물도 선물 나름 너무 크면 자기 살 찢을 줄 머지않아 알겠지.
11개월 된 예림이
머리끈도 먹고 종이도 먹고 제가 싼 것도 먹고
강아지 밥도 먹더니 가위도 먹는다
이놈아, 입술 찢어져!
달려가서 빼앗지만 알 턱이 있나
으앙!
먹지 못한 설움만 눈덩이처럼 뭉실뭉실
—「먹고 보는 세상」전문
“먹다 죽은 귀신 때깔도 곱다”는 속담이 있다. 이 말은 '굶어죽은 귀신'의 상대적인 말이니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는 굶어죽고 권력을 쥔 ‘강자’는 넘치게 먹어 죽어도 ‘때깔이 곱다’는 뜻일 것이다. “외상이면 소도 잡아 먹는다”는 속담도 있다. 뒷일은 어떻게 되든지 우선 당장 좋으면 그만인 것처럼 무턱대고 행동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음식에 관한 속담이 많은 것은 그만큼 배고픔에 대한 설움이 많았던 탓이 아닐까. ‘먹는다는 행위’는 생명과 직결된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도 본능적으로 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움켜쥔다. 과거의 어느 지점, 달콤한 유혹이 시작된 에덴이라는 동산에서 불행은 시작되었다. 뱀의 꼬임에 빠져 신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은 대가는 혹독했다. 그 후손들이기에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돈도 먹고 피박도 먹고 광박도 먹고 쓰리고도 먹고… ‘먹고’로 이어지는「먹고 보는 세상」은 권력의 단맛에 길들어버린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가 부지불식간에 뿌리를 내렸다. 이 사회의 비뚤어진 가치관이 사회적 병폐를 부추겼다. 전영란 시인은「먹고 보는 세상」으로 이 시대의 부조리를 신랄하게 풍자하며 비극을 시니컬하게 진열한다.
길들지 않은 야성의
삭막하고 메마른 땅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막 한가운데
기적처럼 펼쳐진 화려한 도시,
뜨거운 숨결 토하는
라스베이거스가 있다
화려하게 수놓은 야경 아래 알몸 무희는
때론 섬세하게
때론 강렬하게
호기심 가득한 여행객을 희롱하고
일확천금 꿈을 안고 찾아온 이방인들은
밤을 잊은 카지노에서
도깨비 방망이를 두들겨보지만
삼키는데 익숙한 게임기는
다고 다고 밖에 모르는
심장이 마비된 음녀다
세계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곳에서
소돔과 고모라만 어른거린다
—「중심 잡기」전문
시 전체에 흐르는 기류가 불안하다. 사막 한가운데 기적처럼 펼쳐진 환락의 도시 라스베이거스. 각국에서 몰려온 이방인들은 밤새 카지노에서 요술방망이를 두들겨 일확천금을 캐보지만 꿈은 무산되고 ‘다고’ ‘다고’ 밖에 모르는 음녀 앞에 비참하게 전락한다. 알몸의 무희가 몸을 흔드는 타락하기 좋은 화려한 도시는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와 무엇이 다를까.
구약성서 창세기에 기록된 악덕과 퇴폐의 도시는 사해 가까이에 있었다고 한다. 신의 노여움을 받아 유황과 불에 의하여 모두 멸망한 소돔(Sodom)과 고모라(Gomorrah)의 폐허가 사해의 동남쪽에서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지붕에서부터 시작된 화재에 의해 불탔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답은 다음의 성경 구절에 기록되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 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과 땅에 난 것을 다 엎어 멸하셨더라” (창 19:24,25)
사해 남부 지역에는 아스팔트와 유사한 역청이라고 불리는, 석유가 기초성분인 물질이 지하에 풍부하게 퇴적되어있는데 일반적으로 높은 비율의 유황이 포함되어 있다. 지질학자인 프레드릭 클랩은 지진 시 발생하는 압력이 지표 밖으로 분출될 때, 불이 붙은 불덩어리가 땅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소돔과 고모라의 터가 발견된 것은 클랩이 이론을 주장했던 바로 직후였다. ‘소돔과 고모라’가 있던 장소는 사해 남쪽 평원의 동편을 따라 단층선 상에 정확히 위치하고 있었다. 구약성서에 기록된 일이 사실로 드러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전영란 시인은 ‘환락’ 뒤에 숨겨진 인간의 ‘추악함’을 짚어낸다. ‘유혹’과 ‘쾌락’이라는 종양을 안고 살아가는 현대인들, 시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타락한 이 시대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시어를 찾으려 동분서주
시도 때도 없이 강변에 나가
흐르는 물에 귀 기울이고
새 소리 꽃 열리는 소리 낙엽 지는 소리 들으며
개미와 지렁이 나비의 춤사위 곁을 지켰다
먼 길 떠나기 여러 번
살아있는 것들에 소리와 냄새의 맛을 보았다
한 겹씩 벗겨지고 알몸 다 드러내니
타고난 꾼은 되지 못해 둔탁한 소리가 괴롭힌다
세월과 함께 시어는 늙어가고
관념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주어와 목적어 서술어만 만지작거리면
은유와 상징은 바위 뒤에서 낮잠을 자고
필요 없는 조사는 수치심도 모르고 설치고 있다
이제 껍질을 벗고 다시 길을 떠나 보리라
바람이 들려주는 해와 달 창공의 언어를 찾아
나무와 꽃에 잠든 벌레들의 말을 들으려
신이 만드신 태초의 언어를 찾아
—「다시, 시작」부분
시인은 산고를 치르며 시집을 엮는다. 시가 발화하는 지점을 찾아 방황한 시간을 들여다보면 한 편 한 편 통증이다. 시인은 시인이기에 내밀한 자신만의 세계가 있다. 그 공간으로 바람과 구름을 불러오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메스를 들이대고 해부를 시도한다. 의미망으로 연결되는 시어를 찾아 밤의 미로를 헤매거나 자연을 받아 적으려 귀를 열기도 한다. 소리와 냄새와 감촉들, 오감을 사용해 그들을 읽어야한다. 하지만 타고난 꾼은 되지 못해 시어는 늙어가고 필요 없는 사족은 늘어간다. 파문으로 번지다가 소리 없이 소멸하는 것들을 언어로 기록하지 못했고 나무와 꽃에 잠든 벌레의 숨결도 아직 만나지 못했다. 시인은 결핍을 끌어안고 다짐을 다그치며 다시 새로운 시작을 꿈꾼다. 현재를 초월하는 힘은 시인의 중심에서 작용한다. 신이 만드신 태초의 언어는 어디에 있는가? 불끈 치솟는 언어의 덩어리들, 여러 시편에서 드러난 절대자를 향한 ‘믿음’이라는 코드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애초에 전영란 시인이 찾아 나선 시어는 지상의 말이 아닌 순결한 하늘의 언어였는지도 모른다.「바람 소리」는 혼돈의 세상에 던져진 인간은 얼마나 ‘최초의 본질’에 가까워질 수 있을까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며 ‘영혼의 깊은 곳’까지 드러낸 필생의 고백서이다.
책의 온도
이강하
귀뚜라미 울음 먹고 자란 닥나무 한 그루
한 권의 유품이 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협곡을 오르내렸을까
유명幽明을 달리한다는 것은 다시 못 부를 이름을 활자화한다는 것
다시 안 잊힐 역사를 농축시켜
빨갛게 타오르는 열병이다 먼 훗날
사람들을 놀라게 할 세상을 평준화하겠다는 불우한 힐책
제 살 떼어 주는 붉은 자전을 그 누가 알겠는가
반항하고 싶어도 속내 감춘 구슬픈 울음들이
계곡 속에 처연하게 섞이는 밤,
얽히고설켜 서로의 단점을 염려한다
문맥 속에 갇혀 있던 자유의 본능은
한 생을 다시 펼친 시간의 갈피에 죽은 영혼들 일대기를 그려내기도 한다
오래오래 닥나무를 분석해
주변 온도를 맞추기 시작한 귀뚜라미 한 마리
4초 동안 서른다섯 번 아랫도리를 벗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알몸을 벗는
시국의 진실을 익히 파악한 안개의 혈맥들
붉은 두족류들과 한판 엎드려 차디찬 생의 한기를 벗어날 심사다
동경하는 힘이 같아질 땐 그쪽으로만 뜨거워질 것이다
내 귓가에 다시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 한 줄 끊길 듯 들려오는
산조 가야금 첫 소절이
시집『붉은 첼로』2014. 시와세계
이강하 시인
경남 하동군 화개 출생, 울산 거주
2010년 <시와세계> 신인상
시집 <화몽> <붉은 첼로>
제4회 백교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