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의 사랑은 단죄하는 않는 사랑이다
바오로가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만들어 낸 이론이 아닙니다. 그가 성령을 통해 받은 계시입니다. 그가 경험한 사랑입니다. 그가 경험한 하느님의 사랑은 단죄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바오로는 로마서 8장 1절에서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이들은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로마 8,1)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결코 단죄를 받을 일이 없습니다. 죄인은 단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단죄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죄를 짓게 되면 고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를 어느 누구도 고발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단죄를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을 누가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의롭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누가 그들을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로마 8,33-34)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죄인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십니다. 하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바오로는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때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세상의 사랑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의 사랑은 조건적입니다. 사랑할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세상의 사랑은 ‘때문에’의 사랑입니다.
‘얼굴이 예쁘기 때문에, 젊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재능이 특출하기 때문에, 돈이 많기 때문에, 가문이 좋기 때문에, 건강하기 때문에, 배경이 좋기 때문에.’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점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배경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패를 많이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사랑은 신비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우리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와 예수님을 만납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이 간음 중에 붙잡은 여자를 끌고 와서 세운 후에 예수님께 말합니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요한 8,4-5)
그들이 예수님께 이 여자를 고소할 구실을 만들고자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주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이 말씀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이 여자를 떠나갑니다. 나중에 예수님과 여자만 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 8,10)
여자가 아무도 없다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여자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라.”(요한 8,11)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를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 짓지 마라.” 이 말씀이 놀라운 까닭은 여자 안에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믿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자를 신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자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시고 그녀를 믿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단죄하지 않은 사랑을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자 안에 있는 무한한 아름다움을 보셨습니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 안에 있는 나쁜 점을 찾아내지 않습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좋은 점을 찾아내고, 좋은 점만 보게 됩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성녀는 자신의 기도에 하느님의 사랑을 담았습니다. 성녀는 하느님의 사랑의 불을 찬양합니다. 영성가인 성녀는 하느님을 사랑에 미친 분으로 담대하게 노래합니다.
영원하신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 피조물을 언제 창조하셨나요?
제게 알려 주신 대로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으신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사랑의 불이 자신을 강권하신 것을
아버지는 빛 가운데 보셨고,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께 저지르게 될
악행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여,
그러니 아버지를 강권한 것은 불이었습니다.
오,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랑이여,
무한히 선하신 아버지에 대해
피조물이 저지르게 될 모든 악을 보시고도 마치 못 보신 듯,
피조물의 아름다움에만 눈길을 두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취하여 미친 사람처럼
피조물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버지는 불이십니다.
자신이 지으신 것에 미치신 오직 사랑의 불이십니다.
놀라운 표현입니다. 피조물이 저지르게 될 모든 악을 보시고도 마치 못 보신 듯, 피조물의 아름다움에만 눈길을 두셨다는 표현이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죄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이스카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을 곁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너는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1-62)
저는 이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베드로가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했을 때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으시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때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셨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어떤 눈빛을 보여 주셨을까요? 만일 내가 예수님을 세 차례나 부인했다면, 제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포자기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길이 베드로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복음서 기록의 행간을 읽자면, 주님의 눈길에는 단죄의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길을 생각할 때 부정적인 상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눈빛을 생각할 때 단죄의 눈빛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을 찾아내어 불만을 드러내시는 분으로 오해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좋지 않은 이유로 우리를 주시하신다고 하는 그릇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잘못을 찾아내기 위해 우리를 보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만물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 우리를 주시하십니다.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서 무슨 잘못을 찾아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가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그분의 눈동자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는 너무나 사랑하므로 눈길을 돌리지 못하십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힘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힘은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심으로 사랑스럽게 하셨나이다.” - 성 아우구스티노
우리가 단죄를 받지 않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단죄를 받으신 까닭입니다. 우리 대신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대신 단죄를 받으시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벌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죗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단죄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죄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랑하시는 외아드님을 통해 우리를 보시는 까닭에 우리는 더욱 사랑스럽습니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