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느님이 진정한 예배자들을 찾아 나서심
하느님은 성령, 곧 진리 안에서 당신을 예배할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하느님은 당신을 바르게 예배하는 사람들을 그저 찾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리번거리면서 열심히 찾고 계신다. 곧 진리의 성령 안에서 예배드리는 이들을 간절히 바라신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날 우리의 예배(미사)는 진리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보나벤투라 성인은 미사의 신비가 하늘의 별이나 바다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미사의 신비를 과연 느끼고 있는가? 만일 느끼지 못한다면 진리의 성령 안에서 미사를 드리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디에서 가장 큰 힘을 얻고 있는가? 미사다. 교우들을 만나면서 늘 경험하는 것은 그분들이 가장 많이 위로를 받는 자리는 바로 미사라는 점이다. 그런데 아무런 느낌도 없이 참례하는 미사가 하루 이틀, 여러 달 계속 될 때 우리 신앙은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삶은 무기력하다.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은 인간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인간만이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이기에 하느님을 예배할 수 있다. 하느님이 창조하신 다른 피조물도 나름대로 귀한 생명체이지만 그들 안에는 진리의 성령이 사시지 않기에 하느님을 예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유일한 특권인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를 진리의 성령 안에서 제대로 드릴 수 있는가? ‘예배하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프로스퀴네오’이다. 프로스퀘네오(προσκύνεω)는 ‘누구에게’란 뜻인 전치사 프로스(προς)와 ‘입 맞추다, 키스하다’란 의미의 퀴네오(κύνεω)가 합쳐진 단어다. 누구에게 입을 맞춘단 말인가?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그래서 사제가 미사드릴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제대에 입을 맞추는 것이다.
‘예배하다’란 종교적 용어가 ‘입 맞추다’란 애정적이고 세속적인 용어와 연결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입을 맞춘다는 것은 육체와 육체가 접촉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면 입을 맞출 수 없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입을 맞출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 가깝다는 것을 뜻한다. 상하 주종관계에서는 입을 맞추지 않고 손등에 맞춘다.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은 상하 주종관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친밀한 관계다.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 곧 하느님께 드리는 입맞춤은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애정 어린 입맞춤이어야 한다. 결혼기념일에 남편에게 장미꽃을 선물받고 아내가 감동해 포옹하면서 “고마워요, 여보.” 했을 때, 남편이 “고맙긴 뭐가 고마워. 의무니까 어쩔 수 없이 사온 거지.”라고 했다면 아내 마음은 어떨까? 의무로 선사한 장미꽃은 모독이고 아내를 비참하게 만든다. 남편에게 사랑과 존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하게 만든다. 장미꽃은 사랑하는 아내를 향한 애정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한다.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 예배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께 드리는 입맞춤은 의무가 아니라 자발적 애정과 기쁨으로 이루어질 일이다. 애정 어린 입맞춤은 상대만을 생각하는 입맞춤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입을 맞추면서 다른 곳을 쳐다보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온 마음을 그분께 드려야 한다. 그렇다면 미사 중에 딴 짓을 할 수 없다. 성가를 부르면서 주보를 본다든가, 내 아이가 어디 앉았나, 누가 성당에 나왔나 두리번거리거나,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느라 머릿속이 바쁜 상태로 몸만 성당에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진리의 성령과 함께 신령한 미사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갖추어야 할까? 여기서 잠시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로서 평소에 신자들에게 바라는 기본자세를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 준비된 마음이 필요하다. 미리 성당에 나와 조배하다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과 미시가 시작된 후 허겁지겁 달려와 숨을 헐떡거리며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의 예배가 같을 수 없다. 토요일 밤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본 사람과 주일미사 독서와 복음을 미리 읽고 묵상하면서 잠자리에 든 사람의 예배 태도는 같을 수 없다. 미사에 참례하기 전에 마음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 영혼이 성령께 조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연주하기 전에 악기를 조율하듯. 우리 영혼이 성령께 조율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미사 전에 조금 일찍 성당에 와서 개인으로 찬미하고 경배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영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Pay it forward>를 보면, 유진 시모넷 선생님이 지각한 학생에게 지각의 의미를 묻자 그 학생은 “뭐,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것을 뜻하죠.”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니다. 지각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었다는 뜻이다.”라고 대답한다. 존경심의 결여는 곧 멸시를 의미한다. 미사에 지각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존경하지 않는다는 뜻이요 멸시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멸시까지는 아닌데 너무 심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만일 대통령을 만나러 간다면 어떨까? 그래도 지각할까? 인간이 인간을 만나는데도 그렇다면, 하물며 만물의 창조주시며 전능하신 하느님을 만나러 간다면 훨씬 마음을 써야 하지 않은가?
둘째,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례해야 한다. 우리는 미사를 구경하는 구경꾼도 관람객도 아니다. 하느님과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 관계다. 그러기에 형식적이거나 의무적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통상 ‘미사를 본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미사는 거룩하신 아빠, 아버지께 우리의 온 존재를 드리는 것이지 보거나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미사의 의미를 깊이 헤아리고 행위 하나하나에 정성을 드리는 것이다. 미사에서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 오가는 경문도 하나하나 다 깊은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사제와 신자들 사이에 오가는 말의 깊은 뜻과 그 기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앵무새처럼 기계적으로 할 수밖에 없다. <미사의 신비>의 저자 오설리반 신부는 말한다. “충분한 이해와 헌신으로 드린 한 번의 미사는 부주의하게 미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드린 몇백 번, 몇천 번의 미사보다 많은 은총을 가져다준다.” 전례에서 오가는 말마디 하나하나가 다 의미가 있기에 그 의미를 생각하며 마음을 모아야 한다.
셋째,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감정이 아니라 의지로 이루어져야 한다. 루이스는 <순전한 그리스도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내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성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내 믿음은 이성에 근거해 있다. 정작 내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감정과 상상력이다. 믿음과 이성이 한 편이 되고, 감정과 상상력이 다른 편이 되어 싸움을 벌인다.”
미사 중에 우리 마음 안에 감동이 넘쳐 하느님을 예배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늘 그러기는 쉽지 않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이 주일 아침에는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어느 정도 늦게 발동이 걸린다. 마치 추운 겨울날 자동차에 시동 걸 때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주일 아침 신자들 마음도 그렇다. 그렇다고 기분 내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의지적으로라도 애정을 다해 하느님을 예배해야 한다.
우리 느낌이 어떻든 손을 들어 올려 하느님을 경배할 수 있다. 우리 느낌이 어떻든 입을 열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다. 손을 들어 올리고 입을 여는 행위는 매우 단순한 행위다. 손을 들어 하느님을 예배하고 입을 열어 하느님을 찬미하도 보면 어느새 우리 마음은 환희로 가득 찰 것이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 제롬 브루너는 말한다. “사람은 감정을 먼저 느껴 행하기보다 행하는 가운데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먼저 실천에 옮겨라. 당신이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을 때는 먼저 그것을 하도록 하라.”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다. 물론 감정은 여러 모로 중요하다. 감정은 진실하고 사실적인 많은 것을 감지하게 한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 뜻을 따라 사는 것이지,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 수시로 변하는 감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시편 저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시온 산 같아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서 있으리라.”(125,1) 하고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해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는 계명을 주셨다. 이 계명은 무엇보다 먼저 미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미사 안에서 우리 존재를 다 바쳐야 한다. 마치 지금 드리는 미사가 우리 생애의 마지막 미사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 봉헌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미사에 참례해야 할지 자명하다. 미사 시작 전에 미리 가 조배하고, 미사 중에 졸지 않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성가를 부르지 않을 것이요, 마지막 절까지 성가를 부른다며 짜증내지 않을 것이요, 성의 없이 봉헌금을 바치지 않을 것이요, 형식적으로 응송을 바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여전히 무성의한 자세로 미사를 봉헌한다면, 당신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을 두리번거리며 열심히 찾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너무나 슬프고 실망스러워 눈물을 흘리실 것이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요한 4,23)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