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다 버려라, 떠나라!(눅 5:1-11)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마ㅊ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오늘 본문은 갈릴리 호숫가를 배경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갈릴리바다를 호수라고도 부릅니다. 이곳을 구약 시대에는 '긴네렛'(כִּנֶּ֔רֶת, 민 34:11, 신 3:17, 수13:27)이라고 불렀고, 신약시대에는 '갈릴리 바다', '디베랴바다'(요6:1, 21:1) 또는 '게네사렛 호수'(눅5:1), 등으로 불렀습니다. 구약시대에 '긴네렛(Chinnereth)'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이 바다가 하프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리고 '디베랴'라는 명칭은 로마황제인 티베리우스(Tiberius)를 딴 것입니다. 당시에 헤롯 안디바스는 갈릴리 서쪽 해안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 이름을 티베리아스(Tiberias)라고 했는데, 거기에서 비롯된 이름입니다.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자 말씀을 전하기가 마땅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때마침 그곳에 고기잡이를 마치고 들어온 배가 두 척이 있었고 예수님은 시몬의 배에 오르셔서 거기에 앉으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를 호숫가에서 약간 떨어지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배를 강단으로 삼으시고 해변가에 몰려선 사람들을 향해 효과적으로 말씀을 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신 뒤에 제자들을 다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를 처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 1장35-42절에 보면 그의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이미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던 베드로였지만, 현재 그는 원래 자기가 하던 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대표적인 모습을 시몬에게서, 또한 제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그들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성경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실수와 실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누군가를 처음 사랑할 때에는 그 사람을 위해 죽기까지 할 것 같은데, 막상 세월이 지나면 사랑은 아니더라도 원수처럼만 되지 않으면 다행인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처음으로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게 되면 너무나 감동이 되어서 열심히 하지만, 오래 하다보면 만성이 되어서 감동도 사라지고 소명도 사명도 온데 간데 없어진지 오래되어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나를 써주기만해도 나를 알아주었다는 것에 감격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 또는 "내가 정말 그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등의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서 감격하고 감사했던 그 마음은 사라지고 "이 사람이 혹시 나를 갖고 장난하는 거 아니야?"라는 엉뚱한 생각에까지 미쳐서 결국은 아무 일도 하지않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예전과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도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기에 교회에 다니고 있을텐데, 지금 교회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얼마나 열심을 다하여 교회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베드로처럼 교회 일은 나몰라라하고 여러분의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서 열심히 세상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고 분주하지는 않습니까? 교회의 일은 멀리 불구경하듯 구경꾼의 자세로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석하고, 아무 생각도 없이 무엇을 하라고 하면 하라는 것만 하고있지는 않습니까?
시몬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의 소개로 이미 예수님을 알았고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자기집에까지 모셔와서 장모의 열병까지 치료를 받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그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이지만, 자신의 직업과 생활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이 하시는 것을 보기만 하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진정한 제자로 변해가는지를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어부들이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고 있다고 했는데, 이는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고 돌아와서 뒷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 배는 헛탕을 치고 돌아와서 물고기가 없는 배였습니다. 그 배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신 뒤에 시몬에게 고기를 잡으러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 장면에서 우리는 시몬 베드로를 보지말고, 우리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먹고살기 위하여 돈을 벌어야 하므로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 혼자 열심히 말씀을 전하십니다. 이런 그림이 좋은(선한) 그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계시면,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이 어디를 가건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그분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현재 베드로는 어떻습니까? 그저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겠다고 하시면 그것을 옆에서 구경하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빌려달라고 하시니까 배를 빌려드리고, 또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하시니까 그러겠다고 합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에피스타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누가'가 누가복음을 쓸 때에 로마의 고위관리인 데오빌로에게 쓴 것이며 또한 이 책은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쓴 글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히브리어로 선생을 뜻하는 '랍비'라는 단어보다는 이방인들이 더 알기 쉬운 용어를 쓴 것 같습니다. 이 '선생님'이라는 용어는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갖추고 또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쓴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는데 어떻게 부르십니까?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해도 잡지 못하고 들어온 사람에게 다시 나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그것도 목수 출신 즉 오늘날로 말하자면 해양산업과 관계도 없는 건축가 출신이 깊은 데로 가서 물고기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같으면 열심히 나가서 일을 했지만, 아무 수고의 댓가도 없이 헛수고만 하고 돌아왔는데 여러분의 분야에 대하여 전혀 알지도 못하는 제가 여러분에게 다시 나가서 제가 하라는대로 일을 하라고 한다면 그 말에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도 말도 안되는 조언을 해주면서 완전히 상식에서 벗어나는 일을 하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조건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당신이 배(물, 생선의 섭생 등)에 대해 알기나 합니까? 그렇게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려면 저리 가십시요. 그렇지 않아도 밤새 일하고 와서 피곤해 죽겠는데, 그런 말도 되지 않는 말을 들어준 것 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요.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당신에게 욕이 나갔을 겁니다. 알겠습니까?" 등의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그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베드로가 순종했던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예수님은 어부출신이 아니라 목수 출신입니다. 목수가 바다에 대해 무엇을 알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생선을 잡기에 좋은 시간은 밤이기 때문에 그들은 밤에 나갔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물고기잡는 기구가 발달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그물로 잡을 수 있는 한계가 있어서 밤에 물고기들이 위로 떠오르는 시간에 나가서 고기를 잡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시간에도 하나도 잡지 못했는데, 이제 태양이 중천에 떠서 고기가 잡히지도 않을 시간에 나간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그 당시 기술로는 대낮에 깊은 데에 가서는 고기를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해가 떠있으면 물고기들은 아랫쪽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그물로 잡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이제 피곤해서 쉬기 위하여 그물을 깨끗이 정리한 뒤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이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크게 쓰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뉘어집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여기에서 베드로를 크게 두각시키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형제와 요한의 형제 4명을 부르시는 장면인데(마 4:18), 여기에 안드레는 나오질 않습니다. 누가의 관점은 베드로가 어떻게 예수님께 반응하며 어떻게 변화되어가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순종하는 태도를 기록하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순종의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면서 그래서 그가 3천명과 5천명이라는 사람을 회개시키고 주께로 돌아오게 한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사역은 오직 성령님께 순종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아를 죽이지 못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님께 순종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순종의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5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는 밤새 자기들의 고기잡는 기술과 지식과 체험에 의지하여 열심히 수고하였지만 헛수고뿐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그 말씀에 의지하여 깨끗이 씻어서 정리해놓은 그물을 다시 꺼내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에게 어떤 지시를 했는데, 베드로처럼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여러분은 그 자녀에게 어떻게 해주고 싶겠습니까? 여러분이 갖고있는 것을 모두 다 주고싶지 않습니까? 빚을 내어서라도 그 자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해주고싶지 않겠습니까? 아마 우리 주님의 마음도 그러셨을 것입니다.
6-7절에 뭐라고 기록되었습니까?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주님께 순종한 결과는 여러분이 생각했던 것을 초월합니다. 베드로는 이미 피곤하고 쉬고싶은 상황 속에서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순종하며 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릇은 큰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순종하자 그는 자신의 그릇이 너무나 작다는 것을 깨달았고, 깨닫는 즉시 그릇을 넓혔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던 다른 배에 있던 사람들에게 배를 갖고 와서 도와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순종의 결과 생선이 너무나 많이 잡혀서 그가 준비한 그물이 찢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느꼈던 것입니다. 자기 혼자서는 도무지 주님의 은혜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 한없는 자비하신 은혜를 자기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그것을 함께 감당할 수 있는 동역자들을 불렀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배'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물고기'는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베드로 혼자서는 교회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드시 교회에는 동역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교인들이 너무 많아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가 되었을 때에도 역시 혼자서만 욕심을 부려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그 물고기들이 하나라도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함께 합력해서 선을 이룰 사람들과 도구와 심지어 다른 교회까지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들이 상호간에 서로 협력하고 도와서 어린 소자 하나라도 그물이 찢어져서 즉 교회가 감당하지 못해서 상처를 받고 빠져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순종의 결과는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주님의 복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상상을 초월하는 복을 받은 베드로의 태도가 어떻습니까? 보통 사람들 같으면 그런 복을 받았을 때에 목에 기부스를 하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8절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보자마자 기뻐서 그것을 장사해서 이윤이 남으면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무릎 아래 엎드렸다는 것은 예배를 드렸다는 표현입니다.
베드로는 갑자기 잘 되자 교만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참된 예배는 자신이 피조물이며 주님은 창조주이시며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그것을 깨달을 때에 감히 죄인이 거룩하신 주님앞에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회개"가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한 자의 태도는 어떻습니까? 11절에서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잘먹고 잘살기 위해 애써왔던 그들의 모든 사업과 세상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10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심으로 회개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즉 그에게 비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서 그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사람, 진정으로 자신이 거룩하신 주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는 사람만이 주님으로부터 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을 마음 속 깊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주 안에서 비전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자아가 내 우상이 되어서 내 생각과 내 뜻과 내 감정과 내 취향과 내 의지를 따라가기 때문에 주님의 비전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습니다. 내 몸과 정신이 피곤하면 절대로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밤새 일하고 들어와서 피곤한데 어떻게 주님의 말씀이 들어오겠습니까? 절대로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오직 내 몸이 피곤한 것만 생각하며 "어떻게 내가 그렇게 밤새 일하고 왔는데, 나를 위로해주지는 못할망정 또 나에게 무엇을 하라고 할까?"라며 속으로 원망을 하면서 결코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자들의 삶은 원망과 불평 속에서 주께서 "덤으로 주시는 복"을 받아누리기는 커녕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무성한 삶 속에서 땅을 경작하느라 정신이 없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에게 사랑의 주님께서는 원망 대신 비전을 주십니다. 베드로는 언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까? 배 위에서 주께서 말씀을 전하실 때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주의 말씀을 들은 뒤에 주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무조건 순종하고 났을 때에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절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없습니다. 불순종하면서 죄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아도 고백하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불순종하는 사람은 몇십년을 교회생활을 할지라도 결코 참된 예배를 드릴 수도 없으며 진정한 회개자의 자세로 주님앞에 엎드릴 수도 없습니다.
또한 그가 순종한 뒤에 자기 배로는 부족하여 다른 사람의 배까지 동원하여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는 말씀대로 먼저 주의 말씀에 순종하자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덤으로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복을 받으면 너무 좋아서 그것을 누리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복을 받자마자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먼저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며 회개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사도 베드로의 싹이었습니다. "될성 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이 있듯이 땅속에서 올라오는 그의 새싹은 주님을 위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있는 그러한 순종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그는 물위로 걸어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정말로 물 위를 걸었던 사람입니다. 비록 그는 예수님께 너무나도 실망하여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욕까지 했지만,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밖에 나가서 통곡하며 회개했던 회개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역시 회개의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것이지, 그가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울왕과 비교할 때 다윗이 더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회개를 하지 않아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던 것이며 다윗은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했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사람이 되어 그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제 선택을 해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수고를 하고 애써도 아무 댓가도 없는 삶 속에서 이젠 좀 쉬려고 하는데 주께서 다시 일어나 나가라고 하십니다. 과연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일어날 수 있습니까? 나가는 것은 둘째치고 일어날 생각이라도 있습니까?
만약 일어날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의 우상은 여러분의 육체입니다. 육체가 힘들기 때문에 육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만약 몸은 괜찮은데 마음이 상해서 나갈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여러분의 우상입니다. 만약 몸도 마음도 다 괜찮은데, 여러분에게 지시하는 상대(주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명령하십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의 말에 순종하고 싶지 않고 자존심이 상해서 나갈 마음이 없다면, 여러분은 아직까지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즉 제자로서의 삶과 관계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자의 삶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자존심이 상해서 할 수 없다면 자기를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겸손하신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그분 앞에 겸손히 엎드려 무릎을 꿇지 못합니다. 겉으로는 돼지처럼 가짜 중생한 크리스천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을 절대로 속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겸손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며, 우리 스스로 자신을 부인하며 자신을 죽일 수 없기에 우리를 죽여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을 결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가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면 그것을 되갚아 줄 때까지 결코 용서하지도 않고 복수의 칼을 가는 것이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어떠한 사람도 용서할 수 있으며, 자존심 따위 때문에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존심이 밥먹여 주는 것도 아니며 자존심이 구원을 얻게 해주는 것도 아니며 자존심은 지옥에 가기에 안성맞춤인 길로 인도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의 자존심 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복을 받는 순간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배와 고백이 우리의 삶 속에서 흘러나올 때에 그러한 사람은 그 동안 그렇게 복을 받아 살고싶어했던 그 복에 연연해 하지 않고 그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만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 지금 기도하면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아직까지도 자존심을 내세우며 교만한 자세로 주님의 부르심에 불순종하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무릎 아래 엎드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의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겠습니까? 주께서 나가라고 하신 그 배를 타고 즉 교회 안에서 주께서 주시려고 하는 수많은 물고기인 수많은 죄인들을 건지기 위하여 주위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합력하여 교회를 세워 나가겠습니까?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부르실 때에 반응해야지 반응하지 않으면 그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습니다. 1년 전에 제가 무엇을 기도하다가 잠시 잠이 들었는데, "내가 기회를 줄 때 반응하라"라는 물소리처럼 큰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깨었습니다. 그때 제가 무엇을 부탁받고 제 자신이 너무 부족해서 그것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기도하는 중이었는데, 그것이 주님께서 주시는 기회였다는 것을 알고 부족하지만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저에게 말씀하신 그 말씀을 지금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내가 기회를 줄 때 반응하라!!!"
그런데 반응은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기회를 잡기 위하여 명령에 순종할 수도 있고, 안 하겠다고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반응하는 사람이 있고, 적당히 반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반응을 하시렵니까? 적당히 기회를 엿보아 여러분의 마음이 가는대로 순종하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순종하겠습니까? 아니면 불순종의 길을 선택하겠습니까?
순간의 선택이 영생을 좌우합니다!!!
오늘 받은 은혜와 감사의 제목은?
김 수 경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