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에게 올해는 ‘공감과 소통’이라는 측면에서 남다른 도약의 한 해가 될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귀쫑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죠.ㅎㅎ
인문학을 사랑하는 귀쫑회원님들은 열공하는 앞모습과 서로 배려하고 섬기는 뒷모습을 통해
저에게 ‘공감과 소통’의 앞뒤태를 다 가르쳐주시더라구요~^^
혈액순환이 원활한 혈관처럼 정체되지 않는 생명력을 갖는 것이 인문학의 본성이며,
위수와 경수가 만나 황하의 큰흐름이 되듯... 하나로 모인 배움의 열정이 배운대로 살고자 하는 물줄기가 되어
우리 터전을 좋게 바꾸어 나가는 것이 제대로 된 인문학의 얼굴임을 회원님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 ‘공감의 시대’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 소개해 봅니다.
---------♡♡♡----------
저자는 이 책에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단어 ‘공감empathic’의 형성과정을
인문사회철학의 역사속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해줍니다.
사실 '공감'이라는 단어가 사회전반에 통용되기 시작한 것이 오래된 것은 아닙니다.
자아의식이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치는 중 더 진화된 하나의 양태로서 공감이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공감에 앞서 사용되었던 동정sympathy은 유럽계몽주의 시기에 애덤스미스. 데이비드흄 등에 의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동정은 다른 사람들이 곤경을 보고 측은함을 느끼는 감정이죠.
공감과 동정은 정서적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실제 둘의 내용은 전혀 다릅니다.
공감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1872년 독일 미학자 로베르트 피셔의 '감정이입' 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관찰자가 관조하는 물체에 자신의 감성을 투사하는 방법으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원리를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죠.
독일의 철학자 빌헤림 딜타이는 이 미학용어 ‘감정이입’를 빌려와
‘다른사람의 입장이 되어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정신과정’을 설명하는데 사용합니다.
1909년 미국의 티치너가 감정이입을 ‘공감empathy’으로 번역하면서
‘공감’은 지난세기동안 사람들의 의식과 사회 각 영역에 폭발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생물학에서는 우리에게 친숙한 통섭학자 최재천교수님을 사사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윌슨이
‘인간은 다른동물과 친해지려는 동료의식을 유전적으로 타고났고, 자연에서 고립될수록 심리.신체적 박탈감을 초래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과 다른 동물의 본질절 관계에 대한 한세기에 동안의 사상을 뒤엎었습니다.
교육에서는 정서적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이 대두되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되었죠.
법리분야도 공감의 물결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정의를 수호할뿐 아니라 화해의 개념으로 확장되어
범인과 희생자의 관계회복이라는 정서적 부분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1990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
흑인들에게 통치권이 넘어간 후 설치된 '진실화해위원회'는 법에 있어서 공감이 적용된 모범사례입니다.
이 사례는 현재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 이라는 형태로 다른 여러나라에서 시행중입니다.
도덕적문제에서 공정성 뿐 아니라 배려(화해)도 똑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공감의 시대에는 ‘천성에 따라 각자의 이익만 추구한다’는 애담스미스의 경제학 이론도 수정이 필요해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관심을 최대로 활용하는 네트워크사업방식은
노골적 이기심을 바탕으로 하는 기존의 시장가설을 뒤흔들었죠.
리눅스는 오픈소스헙력형태로 경제적 이타주의의 첫 성공사례가 되었습니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각도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이렇게 정의했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생각’은 존재하기 위해서 장소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합리적인 것에 의존하지도 않고, 물질적인 것에 의존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를 나이게끔 하는 영혼은 신체와 완전히 분리됩니다.
‘감정’은 합리적인 측정을 불가하게 한다는거죠.
그러므로 ‘감정’을 인간방정식에서 제거함으로써 인간을 ‘합리적 계측가능한 존재’로 만든 것이 데카르트적 인간입니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존재불가능한 인간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심리학자들은 데카르트의 사고과정을 아스퍼거증후군과 유사하게 봅니다.
신경학자 다마지오는 '데카르트의 오류' 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 정신현상은 일정한 환경속에서 이루어지는 유기체의 상호작용이라는 맥락에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말해, 사고작용은 감각, 감정, 느낌, 추상적논리 등을 실체적인 방법으로 결합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나는 참여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바흐친(러시아 철학자)의 표현을 빌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 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는 것...존재한다는 것은 다른사람을 위해 다른사람을 통해 자신을 위해 있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내면의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은 없다.
그는 전적으로 항상 주변속에 있으면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의 눈을 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본다.
이 얼마나 데카르트와 큰차이를 보이는 세계인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는 다른사람과의 교제를 통해 결정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각자는 다른사람이 우리에 대해 경험한 부분에 속한 실체적 존재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자신이 됩니다.
우리관계가 우리를 만들고 우리의 정체성을 결정합니다
칸트(18세기 독일)역시 실체적 지식을 부정하고 순수한 오성의 영역과 확실성을 추구했지만,
그 희망과는 달리 현실세계에 확실한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몸도 변합니다.
우리가 육체적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계와 끊임없이 주고받는 활동의 한가지 형태에 불과합니다.
우리 각자는 엔트로피의 흐름에 따라 살아가는 확대된 존재에 불과합니다.
현실은 우리가 체득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몸의 감각을 언어로 바꾸어 일차적 은유를 만드는데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종족입니다.
일상대화에서 몸의 은유가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 생각해보면
몸경험이 사고과정에서 맡고있는 중요한 역할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념을 파악 grasp하고, 현실과 접촉 touch을 끊으며,
생각을 펼치며 stretch, 가능성을 움켜지고 grab, 남의 말의 속뜻을 들여다보고see,
입지를 잃고 loose ground, 원칙을 고수 stand up for합니다.
은유적 언어를 사용하면 내면세계를 공유하기 훨씬 쉬워지는 거죠.
데카르트의 아포리오리한 비실체적 진리가 '이성의 시대'에 지식기반을 제공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계시와 신의 은총이 '신앙의 시대'를 위한배역을 정해주었다면,
실체적 경험이라는 개념은 '공감의 시대'의 튼튼한 지적 뼈대를 제공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그러므로 존재한다"에서
"나는 참여한다.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로 대전환하면서
공감은 인간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기주의일까 이타주의일까?
권력이 집중되고 잉여가 축적되면서 제국확대의 문명여명기를 지나 세계가 하나로 연결된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사회경제구조는 고도로 복잡해져서 상호의존적인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지구에 남아 있는 엄청난 매장자원을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인류역사발전에 따라 공감의식이 커져왔고, 그에 따른 에너지자원소비 급증으로
기후변화재앙과 치솟는 엔트로피라는 안타까운 상황을 맞게 된거죠.
우리가 세계적차원의 공감의식에 바짝 다가선 만큼,
우리 자신의 멸종도 가까와졌다는 것은 달콤씁씁한 역설입니다.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의 유대감을 추구하며 복잡한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려는 경향이
우주를 지배하는 에너지 법칙과 만나는 교차로에서 탄생한 역설인거죠.
저자는 인류사의 흐름을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읽어줍니다.
아울러 공감능력의 발전과 엔트로피의 역설적 관계를 고찰하고
그 극복방법을 제시함으로써 문명사의 새로운 해석을 보여줍니다.
저자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은 상당히 희망적입니다.
바로 공감이라는 인류연대가 결국 엔트로피의 악순환고리를 끊어낼 것이라고 전망 혹은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
이 책을 읽고나면
우리가 귀쫑이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공감형 인간(참여함으로써 존재하는)이 되길 원하는
우리 각자의 내적동력이 만들어 낸 필연의 결과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무쪼록 좋은 책과 좋은 사람들이 주는 설렘으로 풍성한 가을 되시길~
첫댓글 좋은책 함께나눔 감사합니다
이런 요약과 정리 소개~~~참 멋집니다
이런 저산맥님이 우리와 함께 귀가쫑긋안에있다는것이 설렘입니다~~^^
모든 모임에서 다른 회원님들 섬기시는 유경샘의 뒷모습에서 ‘공감과 소통’의 인문학을 배웁니다.
한사람의 삶에는 하나의 별이 담겨있다는데...
유경샘의 별은 어떤 진화과정을 거쳤기에 저리 의연하게 빛날깨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귀쫑이라는 이름으로 이 자리에 모인 것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공감형 인간(참여함으로써 존재하는)이 되길 원하는
우리 각자의 내적동력이 만들어 낸 필연의 결과물이 아닐까하는 생각" 에
'공감' 합니다.~~^^
듬직하게 신입회원 챙겨주시는 Comet~총무님 덕분에 귀쫑이 번창하나봐요^^
저도 선배되면 후배 잘 챙겨주는 듬직한 귀쫑인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책의 띠에 둘러진 문구의 '경쟁과 적자생존에서 협력과 평등으로' 가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까지의 상황은 솔직히 암울하기만 한데 저자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하는가보네요.
그 희망을 느껴보기 위해서라도 저산맥님이 추천하는 이 책 꼭 읽어봐야겠네요. *^^*
'공감'이란 단어가 제가 알고 있던 뜻보다 더 확장된 큰 단어였군요. ^^;;
좋은 책 소개 감사!!!
자주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며칠전 모임에서 뵈어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
모두가 낙조에 취해 있는 동안. 홀로 행주산성을 지킨 선조들의 넋을 기억하고
건배를 제의했던 귀희님~ 저도 뵈서 정말 반가왔답니다~^^
세상에 정말 소중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인데, 우린 보이는 것들에 함몰되어 잊어버리고 사는 것 같아요.
정의가 희귀해지니 정의로운 사회가 어떤거더라 기억속에서 가물가물해지고
행복이 희귀해지니 행복이 연구해야되는 학문의 대상이 되는 건 아닌지..
우리를 암울하게 만드는 건 이러한 현실이 아닐런지...
그래도 귀희님처럼 희생이나 얼같이 보이지 않는 가치를 볼 줄 아는 분들이 계셔서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자주 뵙고 배우고 싶어요~ 많이 가르쳐주세욤~*^^*
21세기 동서양의 화두는 바로 관계가 아닐까요?
나는 관계이다~^^
관계는 상대적이고 진리도 상대적이고
나 자신마저 상대적입니다.
그러므로 나와 세상을 연결하고 확장해주는 공감은 당연 필수!
공감은 산소와 같은 존재이지요.
공감이 없다면 세상과 나는 단절로 분절된 파편에 지나지 않다~~!!
사실 동양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공감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겨왔다고 생각합니다.
제 미천한 지식으로도 떠오르는 말들은 이런 것들이네요. 내 마음에 견주어 상대마음을 헤아리는 恕, 늘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敬, 측은지심, 차별하지 말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겸애, 대동단결 심지어 역지사지 이심전심 염화시중 염화미소
같은 사자성어들..........
공감하는 삶, 그리고 관계로 얼기설기 만들어가는 삶의 무늬들.
우리는 종종 이미 우리조상들이 체득해온 문화와 삶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서구의 잘 다듬어진 문화와 세련된 이론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되짚어보게 되는군요.
그러나 뭐 그런들 어떻습니까. 외부에서 들어왔던 내부에서 자생했던 안팎으로 만나 화학작용을 일으켜 더 넓고 깊어지고 섬세해지면 되는 것을....^^
공유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산맥님~^^
존재한다는 것은 교류한다는 것이라는 러시아철학자 바흐친의 말을 기억하면서
앞으로도 쭈욱~아름다운 관계 만들어 나가자구요!
항상 열심히 읽고 열심히 댓글 써주셔서 감사해요~
아 그러게나 말여요~왜 다들 신토불이 냅두고 수입명품만 좋아라하나 몰러~ㅋ
말씀하신 것 처럼 우린 우리 고유의 공감전통이 있으니 더 좋은 토양을 가진 셈이네요
미풍양속을 가진 나라에서 태어난 게 참 감사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가 양분화되고 있는게 참 안타깝습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우리 사회가 다양한 자극을 통해 '공감의 물결' 을 타고 공생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오늘은 좀 지치는 하루였답니다~ㅋ
특히 손가락이.........ㅎ
저두 요즘 손가락에 지문이 없어질듯..
스마트피로 증후군이~
와중에 예쁜 댓글달아주셔서 감사하다는~^^♡
@저산맥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과자를 주면은 코로 받지요
글쿠나........ㅋ
앞으로 코 좀 키워볼까요?
과연
인간의 진화의 끝은 어디인가!!!
룰루랄라
하지만 말이죠, 공감이 안 될 때도 있고 공감하기 싫을 때도 있어요. 그러면 거리를 유지한 채 타자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상황을 이해하면 되겠지요. 응, 그렇구나.....하고.
공감은 근본적으로 아픔 소외 상처 같은 어둠의 자식들을 품는 감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규정하니 공자가 말한 서(恕)의 개념이 가장 공감과 근접하다고 느껴지는군요.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헤아려 상대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관계를 만들어 가라.....는 恕의 속삭임. 이렇듯 恕에 비추어보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그려지겠네요. 그렇게 개인과 개인의 관계, 집단과 집단의 관계도 맺어지겠네요
사실 전에는 恕가 소극적이고 소심한 개념이 아닐까 생각했더랬지요. 하지만 오히려 지금은 그 소극적이고 소심하다고 느끼게 했던 바로 그 점이 관계의 고갱이 신뢰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딱 한 가지 지켜야할 기본적인 덕과 예를 꼽으라면 바로 이 恕를 내세울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나머지 이 세상의 수많은 온갖 법과 도덕은 恕의 변주가 가져온 구체적이고 다양한 항목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방금 가을 장대비가 힘차게 쏟아져내렸 습니다. 도시의 코끼리들이라면 좋아서 코를 번쩍번쩍 쳐들었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