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5일 4강에서는
국가 3부를 읽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공지 확정한대로
이번 4강은 알레프님이 발제를 하십니다.
지난 주 3강에서는
애향님과 떠도는 바람님의 발제로 2부가 대략 마무리되었습니다.
아레테가 돋보이는 탁월한 발제였기 때문에
제가 보충해서 더 쓸거리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저 지난 시간 말미에 했던 마무리 발언 수준으로
몇가지 덧붙일까 합니다.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 트라시마코스가 1부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 파트너였다면,
2부에서는 클라우콘과 아이데만토스입니다. 이들은 서로 형제지간이자,
또한 이 책의 지은이 플라톤의 형제이기도 합니다.
1부의 등장인물 3인이 모두 외국인인 반면
2부의 등장인물 2인은 모두 아테네 시민입니다.
플라톤은 소크의 대화 파트너로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를 각각 등장 시키면서
묘한 차별성을 노출합니다.
또한
1부의 인물들은 세속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인간들입니다.
케팔로스 부자는 물론,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 역시 "학자, 현자"이기 하지만,
세속적인 욕망에 걸쳐 있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딱히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플라톤은 이들의 입을 통해 현실적인 정의 개념을 제시했고,
소크의 탈현실적인 입을 통해 이것을 해체시켰습니다.
2부의 인물은 플라톤의 형제들이고, 소크의 추종자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소크와 비슷한 성향인 인물로서,
이상적인 세계관의 소유자이자 탈세속적인 욕망인 "지혜의 사랑"을 꿈꾸는 인물일 것입니다.
그래서 수사학이 달인 트라시마코스가 반 소크라테스적 인물이라면,
플라톤의 형제들은 친 소크적 인물들입니다.
그래서
전자가 핏대를 올리면서 대들고 있다면,
후자와의 대화는 매우 화기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치 짜고 치는 고스돕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극의 긴장감이 사라지고, 독자들의 흥미를 상당부분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볼 때,
비시민권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대체로 돈을 많이 벌어, 그것으로 현실적인 삶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일 겝니다.
반면에 아테네의 시민권들은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하는 시민의 미덕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고,
따라서 정치의 영역에서 발을 뺄 수 없었을 겝니다.
이런 관점에서 플라톤은 어쩌면
정치적 정의를 본격적으로 논하는 2부 이후에서
친 소크적 성향의 소유자이자 시민권자인 자신의 형제들을 등장시켰을 수 있습니다.
주지하듯이,
2부의 첫번째 주자인 클라우콘은 정의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물음을
아가톤, 좋음이라는 개념과 연관하여 시작합니다.
정의는 좋은 것이지 나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물음방식입니다.
글라우콘은 좋은 것을 세가지로 나누고,
소크는 이것들 가운데,
그자체로도 좋은 것이고, 이것에서 생긴 결과들도 좋은 것에 해당시킵니다.
즉, 정의는 그 자체로 좋은 것입니다. 이를테면 기쁨, 긍정적인 즐거움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정의는 이것에 그칠뿐만 아니라 또한 좋은 결과들을 산출합니다.
따라서 정의는 자기를 원인으로 한 좋은 결과들을 야기합니다.
좋은 원인이자 동시에 좋은 결과를 산출하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좋은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클라우콘이 제시한 첫번째 좋음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지만, "불임의" 좋음입니다.
결과를,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는, 어떤 것의 원인이 될 수 없는 좋임입니다.
반면에 세번째 좋음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 아니지만,
아주 애를 써서 좋은 결과를 산출하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해서,
그 자체로 좋은 부모지만, 좋은 자식까지 만든 부모가 있고,
그 자체로는 좋은 부모지만, 좋은 자식을 낳고 만들지 못한 부모가 있으며,
그 자체로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부모지만, "아주 애를 써서" 좋은 자식을 만는 덕분에 좋은 부모 소리 듣는 부모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플라톤과 소크의 입장에서
정의는 첫번째에 해당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중들의 말은, 트라를 위시한 설득의 전문가들의 말은 다르다는 것,
즉, 세상의 말은 소크의 말과 다르다는 것이 클라우콘의 주장입니다.
세상은 정의란 세번째 좋음에, 결과만이 좋음때문에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해서,
이제 소크의 대화상대는 클라우콘이아니라 대중의 세상입니다.
세상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길을, 플라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링으로 들어가면 필패라는 것을, 세상을 세상 밖으로 끌고 나와야 승리의 여신이 웃어준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소크는 시종일관 세상을 자기 페이스가 먹힐 변론의 공간으로 끌고 나옵니다.
그 출발점으로 정의의 기원과 본질을 묻고 답하게 됩니다.
세상은 정의란 약자들의 약정, 나아가 법률 제정, 이것에 대한 준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클라우콘은 "이것이 실로 올바름의 기원이며 본질이란 거죠"라고 단언합니다.
(여기서 약간 샛길로 빠지자면, 기원과 본질은 '엄밀히 말해' 동의어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창조론의 입장에서, 인간의 기원은 종국적으로 신입니다만, 인간의 본질이 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기 때문입니다.
암튼 이런 어법을 여기서는 엄밀히 구별하지 않습니다.)
이런 클라우콘이 던진 세상이 말은, 통상적으로 사회계약론으로 간주됩니다.
정의란 인간의, 국가의 '자연적인,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약자의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인위적인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플라톤은 이런 입장을 나중에 비판적으로 고찰합니다. '자연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정의의 기원, 본질에 대한 대화에 이어, 정의의 '실천'에 대한 것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수업시간에
"기네스"의 반지의 예와 관련하여 총명하시고 선량하신 우리의 하나님께서 지적하셨던 부분입니다.
어떤 행태를 보일지,
저 역시도 썩 자신 없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늘 그렇듯이, 어떤 삶이 더 낫는가, 더 행복한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 행복한 삶이란 과연 어떤 것에 있는가, 불의로운 삶인가 아니면 정의로운 삶인가?
세상의 돌아가는 현실을 볼 때. "신의 사랑" 역시 불의의 삶에 손을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이때
링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또다른 파트너 아이데만토스에게 바톤을 텃치합니다.
"형제는 용감했다"고 소크라테스는 덕담을 하며 파트너를 바꿉니다.
아이데만이 던진 일구는
주위를 아무리 돌아봐도,
부모가 자식에게 정의로움을 주문할때 ,
못먹어도 정의롭게 살아라는 뜻이 아니라, 정의롭게 보여서, 정의롭다는 "평판 , 명성 소리"를 들어서
이에 따르는 떡고물을 잘 챙겨서 살아라는 의미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들의 주문은 "고귀한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서의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하면서,
이후 내내
화살을 이들 고귀한 분들에게 돌리면서,
끝까지 집요하게 이들을 공격합니다.
아이데만의 얘기는 다소 지루하게 이어지다가,
준비된 질문에 준비된 답변을 고하는 듯한,
말로 끝을 맺습니다.
"최초의 영웅들", "요즘 사람들이르기까지", 어느누구도 아직까지 아무도,
심지어 "신들도"
정의를 그 자체로만 찬양한 자가 없음을 개탄하면서,
"정의가 혼 안에서 그 자체의 힘만으로(신들이나 남들에게 발각되건 그렇지 않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다름 아닌 이문제를 고찰하시면서 온 생애를 보내셨"던 소크님께선 분명한 한 말씀해달라는 칭송입니다.
이 칭송에 우리의 아둔한 소크는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그러면서 정의의 "구원"이라는 말을 하는데, 의미심장해 보입니다.
정의를 해명, 설명하겠다가 아니라 구원, 구조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용어의 차이를 알고 있습니다.
플라톤이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의도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숙고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다음
국가의 생성, 기원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최소의 나라", "돼지들의 나라", "참된 나라", "건강한 나라"를 고찰한 다음,
정의와 불의가 나라에서 생기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호사의 나라", "염증상태의 나라"를 봐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영토확장을 말하고, 전쟁을 말하고, 수호자를 말합니다.
그다음에 수호자의 기능에 대해 말합니다.
"기개있고, 지혜로운" 혈통좋은 강쥐"에 비유합니다.
멋진 수호자는 이런 강아지입니다.
끝으로 수호자의 교육에 대해 말합니다.
아테네 교육제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서서히 그것을 해체시키고, 자신의 제도를 정립합니다.
출발은 아이이고, 아이의 교육은 체육과 시가에서 출발합니다.
둘다 끝내는 심성교육이지만, 특히 시가가 그렇습니다.그래서 시가에 의한 문제점을 비판합니다.
시가, 설화, 이야기들이 주로 다루는 것이 '신들과 영웅들'입니다.
시인들이, 이야기꾼들이 이들에 대해 쓸 때, 어른들이 이 글들을 애들에게 말해줄 때
심성에 악영향을 고려해서
조심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은
"신들과 관련된 이야기에 대한 규범들"에 대해 길게 말합니다.
규범은 두개입니다.
하나는, "신들은 나쁜 것의 원인이 아니라, 좋은 것들만의 원인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사에서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대목입니다.
시인들은 신이 나쁜 것의 원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제우스께서는 우리한테 좋은 것들도 나쁜 것들도 분배해주시는 이로다"(호메로스 왈)
또 하나는,
"신은 마술사가 아니다, 그래서 자기 모습을 요래조래 바꾸지 않는다. 또 신은 사기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신은 마술사가 아니다!
"신들은 ... 온갖 모습을 하고서 나라들을 방문합니다"(오디세이아)
신은 사기꾼이 아니다!
""그 누구도 프로테웃와 테티스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할 것이며".
플라톤은 아이스킬로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3부믈 마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가 신들에 관해 이런 말을 할 경우에는, 우리는 분개하고, .. 교사들이 애들 교육에 이런 이야기들을 이용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을 걸세.
물론 우리의 수호자들이 인간으로서 가능한 한 최대한이로 신을 경배하며 거룩한 이들로 되게 하자면 말일세."
수호자 교육을 빌미로
시인들, 시가들을 위시한 '전통들을 무력화시키는 과정'을 보고 있습니다.
정의에서 국가로, 정의로운 국가의 성립에서 정의로운 수호자 교육으로
담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3부에서
좀더 구체적인 수호자 교육방식이 논의됩니다.
이번 4강은 3강에 이어 일주만에 진행됩니다.
버거움보다는 반가움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휴우~~
그럼
첫댓글 버겁기도 하지만 반가움의 무게가 훨씬 더 나갑니다.
공부는 열심히 못 하지만 출석은 즐거운 맘으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목요일에 뵙겠습니다. *^^*
교수님의 요약을 읽다보니
화기애매..정말 그런것 같습니다ㅎㅎ
수호자의 교육방식에 일정부분 공감하며 3부 읽고있는 중입니다..
저도 공부는 열심히 못하지만 출석은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반가움으로~~~~
19세기 말 데카당스한 분위기에서 매력적인 화가들과 놀라운 작품들이 쏟아졌던 것처럼, 저는 아무래도 원시적이고 과도하며 장식적인 것들에 더 익숙한 모양임돠.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의 대부 플라톤이 보여주는 '세상의 링' 밖을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 열씸히 3부 읽고 있슴다.
플라톤은 케팔로스, 폴레마르코스, 트라시마코스로 부터 글라우콘과 아이데만으로 이어지는 정의에 대한 여러 제시에서, 이는 전통적(개인적)이고 현실적(nomos적)인 또한 대중적인 정의관이다고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글라우콘이 제시하는 세가지 좋은 것을 출발로 하여 소크라테스가 그의 정의관을 설파하기 위하여 사전 정지작업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됩니다. 기술의 탁월함으로서, 아레테로서, 좋은 것으로서, 혼으로서 정의를 주장하기 위해서 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현세의 삶이 현실의 삶이며, 대중들이 어쨋든 영위되어야 할 삶이라면, 앞에서 제시된 노모스적인 정의관은 전제조건적인 성격만 가져야만 되느냐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즉, 정의는 이상만 가져서는 않되고 실천이 중요하다고 볼때에 실천의 정의는 어디에서 찿을 수 있나요?
열성적인 강의에, 또 이렇게 일목요연한 요약정리까지... 감사합니다. 3부도 꼼꼼히 읽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의 열강을 들을때나 글을 읽을때면, 단숨에 다 읽어버릴것 같은데~~
저 역시도 공부는 열심히 못하지만
출석은 그누구보다 잘~~!
목욜에 뵙겠습니다^^
일소정에 머물며 가락에 빠질때가 미궁으로 느껴지지 않고, 나날이 편안 해 지네요
그 편안함이 몹시 그리웠던 지난 주 였습니다.
교수님의 눈높이 교육에 물이 오를대로 올라 농익어가네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지나온 길이 보입니다.
앞길도 훤히 보이면 좋으련만.....
글라우콘이 제시한 좋음을 부모자식간의 좋은 부모, 좋은자식으로 비유해주시니 훨씬 와 닿지만, 가슴이 좀 아픕니다.^^
좋음이란 객관적인 기준을 논하는 것이 우선되야겠단 생각이듭니다. 그렇다면, 과연 동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좋음은 무엇일지요? 자식에게 좋은것들의 원인이 되기를 극도로 갈망하면서 3강을 기다립니다.~
개인적으로 2부 후반부를 읽으며 교육제도에 대해 논의하는 것에 관심이 많이 갔었습니다. 악영향을 끼칠 수 있어서 검열을 했다는 부분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지금 살아가는 시대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 계속 생각해 보고 싶은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