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많은 분들이 '낙랑군(樂浪郡)'과 '낙랑국(樂浪國)'을 혼동하고 있는데요...
삼국사기 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경 고구려 왕자 호동과 낙랑국의 공주(최리의 딸)의 '자명고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설화에 의하면 기원후 32년경에 고구려가 낙랑국을 공격하여 항복시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본기나 신라본기에 의하면 낙랑국은 기원후 37년경에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에 의해 멸망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설화적인 내용의 열전보다 연대기적 사건관계를 기술한 본기가 사실과 더 가까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어 낙랑국은 37년경 고구려에 멸망당한 것은 틀림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랑국'에 대한 내용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낙랑'이라는 명칭 자체는 전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군현의 이름과 동일하여 그 실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리하여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까지 전통적으로 '최리의 낙랑국'과 '한 무제의 낙랑군'을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위치도 현재의 평안남도와 황해북도 일대로 추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낙랑과 대방의 위치를 한반도에 잘못 비정하므로서 잘못 전달되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낙랑과 대방은 314년까지는 요동에 있었으며 그 이후 미천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여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한반도의 낙랑과 대방은 314년에서~ 주로 346년 대방과 낙랑에서 쫒겨온 무리들이 한반도에 정착하면서
옛날 자신들이 살던 지역의 환경과 비슷하여 한반도에 낙랑과 대방의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한반도에는 낙랑국도 낙랑군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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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은
BC37-AD3 홀본, 추모왕 <<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광개토태왕릉비문; 至卒本川-沸流水上居, 삼국사기>>
AD3-209 국내위나암성(집안), 유리명왕 <<遷都於國內築尉那巖城, 삼국사기>>
209-247 환도성(집안), 산상왕 <<移都於丸都, 삼국사기>>
247-342 평양성(평양), 동천왕 <<築平壤城移民及廟社平壤者本神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險, 삼국사기>>
342-343 환도성(집안), 고국원왕 <<移居丸都城, 삼국사기>>
343-427 평양동황성(평양), 고국원왕 <<移居平壤東黃城城在今西京東木覓山, 삼국사기>>
427-586 평안도(평양), 장수왕 <<移都平壤, 삼국사기>>
586-668 장안성(평양), 평원왕 <<移都長安城, 삼국사기>>
등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를 의미합니다.
이중 현재의 평양이 장수왕때 천도한 곳이라고 보여집니다.
조선 옆에 진번이 있었고 그 결과 한이 조선과 진번을 멸하고 그 고토에 "진번군"을 설치했다면
"낙랑군"도 조선 옆에 낙랑국이라는 정치체가 있었고 조선을 멸할때 낙랑국도 침략을 받아 한이 그 고토에 "낙랑군"을 설치하지 않았을까요? 단군조선이 크게 "진번, 임둔, 낙랑, 현도, 아사달"의 다섯부족이 연맹한 나라가 아니였을까요? 낙랑은 본거지를 빼앗기고 동천하거나 남천하여 오래도록 명맥을 유지하였고 최리낙랑국이 고구려에 멸망하자 최씨집단이 신라로 편입되어 경주최씨 부족으로 남게 된 것이 아닐까요?
평양 정백동 낙랑구역 내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낙랑 무덤들은 그럼 어떻게 봐야할까요? 묘제의 변화를 보면 기원전 1세기를 기준으로 그 이전은 토착식 목곽무덤이 나타나고 그 이후는 귀틀무덤과 중국식 벽돌무덤(전실분)이 나타나는데요. 묘제가 매우 보수적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묘를 쓰는 집단에 어떠한 변화가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전국시대와 진한교체기 화북과 산둥쪽에 거주하던 동이족과 한족의 이동의 결과로 남겨진 묘제가 아닐런지...
최리의 낙랑국은 중국유이민이 남긴 무덤일 수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