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쫑긋’은 누가 지었는지 이름이 참 좋다. ‘쫑긋’이라는 단어만으로는 무엇에 귀를 기울이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경청하고자 마음이 잘 드러난다. 시(詩)도 비슷하다. 시는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고 공감하고 싶은 마음을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 더 많이 말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말하지 않은 부분을 더 자유롭게 채울 수 있도록 하는 신통력을 지녔다.
시인은 말하지 않는 것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채우도록 하고 싶은 걸까? 김용기 철학자는 “시는 사람을 사랑하는 노래”라고 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와 같다. 세상 사람들이 결국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없던 길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길을 발견함으로써 서로 공감하고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죽을 수도 있었던 수술을 받으면서 주위의 걱정과 격려를 많이 받았고 누군가의 사랑 덕으로 살고 있다는 점을 다시금 깨달았다.
시의 장점은 단지 연결하고 공감하는 데에만 있지 않다. 생각하는 데에도 있다. 나는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쓰노라’라는 시를 좋아한다. “오막살이 푸른 털 담요 포근하여라 / 매화나무 꽃그늘이 창문에 비낀 / 달 밝은 밤이구나 / 긴 긴 이 밤에 / 등잔불 돋워 놓고 / 향불 피워 놓고 / 이 세상 사람들은 보지도 못한 / 이 글을 한가로이 쓰노라 / ...(후략)....”
김시습은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공감할 수 없는 시들을 썼다. 그는 새로운 것들을 생각하기 위해 수많은 시를 썼을 것이다. 오늘날 생각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가축이 사료를 먹는 것처럼 지식을 소비하며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강박관념을 안타까워했다. 김용규 철학자는 그의 책 ‘생각의 시대’에서 “AI 시대에 지식의 수명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생각은 AI가 쉽게 만들어내는 지식과는 다르다. 생각은 자신의 삶과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힘을 가졌다. 막스 베버에 의하면, 미국의 프랭클린 대통령이 “시간은 돈”이라고 처음 말하기 전까지는 ‘시간 낭비’라든가 ‘시간 투자’처럼 시간과 자본주의를 연결하는 표현은 없었다. 프랭클린의 입을 통해 “시간은 돈이다”라는 은유가 처음 생겨난 이후 비로소 시간을 돈에 빗대어 표현하는 무수히 많은 하위 생각들이 생겨난 것이다. 은유는 생각을 창조하며, 시는 은유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어떻게 은유와 생각을 창조할 수 있을까? 내게 찾아오는 만남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 소동파는 ‘거문고 시’(琴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에 거문고에 소리가 있다고 하면 / 갑 속에 두었을 땐 어이 해 안 우는가. / 그 소리가 손가락에 있다고 한다면 / 그대의 손끝에선 어째서 소리가 안 들리나.” 거문고의 아름다운 음은 거문고의 줄과 연주자의 손가락이 만날 때 비로소 생겨난다.
사람들은 ‘샤프란’ 꽃을 왜 쓸쓸하다고 말할까? 나는 꽃과 마주할 때마다 이런 질문들을 던진다. 질문은 생각을 얻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사물에 대한 끈질긴 관찰도 생각을 끄집어내는 힘이 된다. 나는 젊었을 무렵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화살표’라는 습작 소설도 발표했다. 이후 소설가 되는 것은 포기했지만 소설 제목이었던 ‘화살표’에 대한 집착은 놓지 않았다. 나는 마주치는 모든 것에서 화살표를 찾는다. 도로 표지판에서, 부석사 무량수전 팔작지붕에서, 심지어 피격된 천안함 근방에서 발견된 ‘1번 어뢰’를 뒤집어 놓은 글자에서도 화살표를 찾아냈다. 글자를 포함한 모든 사물을 뒤집어 보고 상하좌우를 바꿔 보기도 한다. 그런 습관 때문에 내가 사는 강화도의 어느 모텔 앞 과일 노점에서 “참외 수박”이 아니라 “외박 참수”로 보이는 표지판을 발견하기도 했다. 나는 관찰을 토대로 ‘화살표’에 대한 연작 시들을 발표했다.
시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그래도 사람과 사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연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강화도 해안 뻘밭에서는 조개를 캐다가 밀물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죽은 시체는 발견되기도 하지만 바닷물에 쓸려가면 영영 찾을 수 없다. 어느 날 한평생 뻘 속 조개를 캐던 어느 할머니가 그만 때를 놓쳐 바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 할머니는 자식들이 시체를 찾아 헤맬까봐 바닷가 말뚝에 있는 줄로 자신의 몸을 단단히 묶은 채 사망했다. 나는 할머니의 마음을 ‘모시조개’라는 시에 담았다. 시인이 아니면 할머니의 그 마음은 누가 전달할 수 있을까?
(추신) 어제 강의를 듣지 않고 이 후기를 보신 분들은 “좋은 강의”였다거나 후기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별로였네”라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의를 직접 들으신 후 이 후기를 보신 분들이라면, 확신컨대 모두가 너무나 아쉽다고 할 것입니다. 강의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탓이 크고, 게다가 그 좋았던 함민복 시인의 시를 하나도 인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가 보석 같아서 도저히 한두 편만 골라 여기에 적을 수 없었음을 양해 부탁드립니다. 함민복 시인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글로 옮길 수 없다는 점 역시 무척 아쉬운데, 아래 기사를 통해 시인의 한조각 삶을 살펴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면 좋겠습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0407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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