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1, 2위가 바뀌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 설문 조사를 하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중에서 세종 대왕에 이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2위를 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전쟁(승전)을 꼽으라면 필자는 살수 대첩에 이어서 명량대첩을 꼽고 싶다.
12척의 배로 왜선 133척(필자의 기억으로는 그렇다)을 대파한 명량대첩은 살수대첩과 마찬가지로 역사에 보기 드문 뛰어난 장수가 이끌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명량대첩은 한국사 3대 대첩으로 꼽히는 한산도 대첩보다도 인상적이었고 충무공의 진가를 보여준 승리였다.)
작가 고정욱의 소설 <원균 그리고 원균>을 보면 난중일기에서 찢겨나간 페이지가 여러 곳 있다고 하면서 충무공의 과오를 덮기 위해 덕수 이씨 가문의 후손들이 충무공에게 불리한 부분을 훼손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필자가 어렸을 적인 박정희 정권 시절에 충무공에 대한 사극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이순신 장군(탤런트 주현 분)이 칼을 높이 쳐들면 햇빛에 반사되어 칼이 번쩍하면서 왜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곤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 필자는 이순신 장군을 마징가제트같은 존재로 알았다. 칼을 쳐들기만 해도 적군을 쓰러뜨리는 신적인 존재가 이순신 장군이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 사극은 당시에 논란이 되었던 박정희 정권의 충무공 신격화와 연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한 신격화, 우상화 논란과는 별개로 충무공은 매우 어려운 입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전란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명장이었다.
그런데, 충무공이 뛰어난 명장이었지만 충무공에 버금 가는 명장들이 우리 역사에 즐비한데, 왜 유독 충무공이 존경하는 인물 설문 조사에서 1, 2위를 다투는 것일까?
지난 번 카페에 글을 올린 어느 회원분은 충무공의 극적인 죽음이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 의병장들처럼 전쟁 후 살아남았다가 썩어빠진 조선 지배층들에게 모함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면 적군의 공격으로 전사하느니만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그러한 앞길을 예견한 충무공이 일부러 적군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갑판에 서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장군으로는 계백 장군도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이민족(뿌리를 따져보면 꼭 이민족이라고 할 수만도 없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국가가 되었으니)인 일본군의 침략을 물리치고 전사한 충무공의 죽음이 같은 민족인 신라와 싸우다 전사한 계백 장군의 죽음보다 평가되는 것일까?
외침을 막아낸 구국의 명장이라면 을지문덕(또는 연개소문)과 강감찬 장군도 빠뜨릴 수 없다. 을지문덕의 살수 대첩은 정말 우리 민족에게는 통렬한 승리였으며 우리 겨레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역사상의 사건 중에서 소설화, 영화화해서 세계에 알려야 할 매우 중요한 소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살수대첩의 재판이었다. 그런데, 왜 충무공만?...
충무공이 랭킹 2위에 올라 있는 것이 어쩌면 박정희 정권의 우상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충무공은 우리의 영웅이다.
필자는 '성웅 이순신'이라는 표현은 좋아하지 않는다.
충무공이나 을지문덕이나 강감찬이나 또는 계백이나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자기 나라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 한 사람은 똑같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물을 신적인 존재로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위대한 인물이라도 단점이 있고 결함이 있으며 실수가 있고 과오가 있기 마련이다.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의 사생활이 훗날에 밝혀지면서 큰 충격을 안겨 주는 경우도 볼 수 있다. 미국의 어느 대통령이 그랬고 유럽의 어느 음악가가 그랬고 세계적인 어느 대작가가 그랬다. 하지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완전하고 흠이 없는 존재는 오직 하느님 뿐이 아닌가?
세종대왕이나 충무공이 위대한 인물이고 또 그 밖에 존경받을만한 인물들이 많이 계신 것은 틀림없지만 신격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다른 시대의 인물들도 똑같이 존경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그 분들은 흠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통 사람보다 그릇이 더 컸고 이상이 더 컸던 사람들이기에 역사의 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별과 같은 존재가 많다.
양천구 신정동 SOS 마을에서 결혼도 하지 않고 수십 명의 고아를 키우고 있다고 언론에 보도된 적 있는 이름도 모를 어느 여성, 수많은 제자들에게 학비를 대주고 사랑을 베풀었다가 소문이 나서 신문 기자가 찾아가자 이름도 못 밝히게 하고 뒷 모습만 사진찍도록 허락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선생님. 이 분들도 세종대왕이나 충무공, 또는 광개토태왕이나 을지문덕 장군처럼 영웅이며 별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