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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伯山의 視角>최근세사의 재인식(1)
朴暎根 논설고문ㆍ신중년사관학교 명예총장
최근세사의 재인식
Ⅰ. 머리말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한다. 왜냐하면 과거라는 카테고리 속에는 수많은 경험이 농축되어 있고, 이 농축된 경험이 집약되어 하나의 역사를 형성하기 때문에 역사의 정확한 분별력이야말로 공동체가 선택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일부 계층에서는 우리 역사를, 특히 최근세사를 일방적으로 폄하하고 왜곡하는 것이 지식인의 당연한 책무인 것처럼 행위하고 국민을 오도하는 패배주의적 사관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우리 역사는 부정적인 것만이 전부일까? 국토의 분할, 친일파 문제, 민족 간의 전쟁, 군사 혁명, 독재체제, 광주사태, IMF 경제 환란 등이 우리 것의 전부일까?
어느 민족이나, 어느 국가에서도 그 역사의 중심에는 부정적 요소와 긍정적 요소가 언제나 공존하기 마련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도 예외가 아니다. 따라서 긍정적인 요소가 부정적인 것을 압도할 때, 그 역사를 성공적 역사로 선택하여야 하며, 그 역사는 그 민족이나, 국민에게 자랑스러운 긍지의 역사가 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신생 독립국가 중에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있어 한국보다 후진국은 인도, 한 나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정치적으로 민주화를 성취한 나라는 지구상에 어느 나라도 없으며, 전 세계는 한국의 발전을 “세계사적 성공의 전형”으로 인식하고 이러한 한국을 부러워하고 있다.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국이 오늘의 성공을 어떻게 이룩할 수 있었는지를 최근세 사실(史實)에서 찾았으며, 오늘의 시대 상황에 그 포커스를 접목하여 우리 국민에게 가장 교훈적이고 역동적 역사의 실존을 ‘60년대의 개발사’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최근세사의 재인식’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지적 결집이며 양심이라고 단정하였다.
필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역사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일 수 있으며 잘못하면 오도를 범할 가능성이 짙기 때문에 주저해왔다. 하지만 감히 용기를 얻은 것은, 이 역사의 한 가운데서 필자가 실제로 살아왔기 때문에 이 체험 이상 중요한 증언이 있을까! 하는 자신감으로 필을 들게 되었다. 필자가 우리의 최근세사를 연구하면서 느낀 가장 큰 감동은, 한 국가를 책임지는 최고지도자의 정책판단과 그 지도자의 사심 없는 가치관에, 국민들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지지와 참여가 어떻게 조화롭게 분출되느냐에 따라 그 위대한 역사가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하나 양해를 구할 것은 1965년 이후 한국 경제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포항제철’ ‘울산화학공업단지’ ‘창원기계공업단지’ 등의 약사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글은 각주를 생략하였다.
Ⅱ. 한국 발전과정 동력
1. 광부와 간호사가 차관 담보
우리가 언제 이렇게 커버렸나? 한국이 어떻게 50여 년 만에 세계에서 12번째로 잘사는 나라가 되었나! 1960년대만 하더라도 북한은 1인당 국민소득이 260달러였고, 필리핀은 800달러였으며, 인도네시아가 280달러(일부 통계는 240달러), 그 위로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은 물론 아프리카 어느 나라도 한국보다는 가난한 나라는 없었다.
ⓒ 경상매일신문
그때, 124개 국가 중 세계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는 인도로 1인당 국민소득(GNP)가 70달러, 그 다음 가난한 나라가 한국으로 1인당 국민소득이 83달러였다.
1962년, 혁명에 성공한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 국정 전반을 진단한 결과, 이대로는 전 국민이 전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서 경제 개발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선정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하였다.
경제를 개발하려면 첫째, 자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한국 화폐가 아니라 달러가 있어야 한다. 둘째, 자원이 있어야 하는데, 남한에는 소량의 중석과 석회석뿐이었고 산업개발에 필요한 자원은 전부 북한에 있었다. 셋째,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의 우리 국민들의 기술이라야 소달구지 끄는 것이 고작이고 최고의 기술은 자전거 수리공 정도였다. 넷째, 가장 중요한 것이 당위성의 목표를 지향하는 국민적 의지다.
그러나 경제개발에 필요한 4대 요소는 하나도 없었다. 특히 일제 36년간, 일본은 한국의 경제를 수탈하면서 그들의 경제권에 예속시킴으로써 자생적 가동 능력이나 민족 자본은 전무 한 상태였다. 더욱이 1950년,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된 3년 반 동안의 전쟁은 국가를 잿더미로 변하게 함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생산 시설은 80% 이상이 파괴되어 우리는 무일푼의 나라가 되어버렸다.
외국에서 기계와 자원을 구입하고, 공장을 짓고 상품을 생산하여 수출하려면 달러가 있어야하는데, 1962년, 한국은행에는 외환보유고가 2400만 달러(2018년 9월 현재 4055억 달러) 밖에 없었다. 이것을 갖고 경제개발 한다는 것이 몽상이었다. 해결방안이 없자, 자존심을 깔아뭉개고, 박정희 의장(이하 대통령)이 차관을 얻기 위하여 미국으로 갔다.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으나, 군사 쿠데타를 한 나라에 차관을 줄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온 박 대통령은 수십 번의 회의 끝에 내린 결론이 ‘과부사정은 과부가 안다’고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의 처지인 서독에 사정을 이야기하면 도와줄 것이란 순진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경제사절단을 구성하고 차관단을 파견키로 하였다.
최근세사의 재인식(2)
朴暎根 논설고문ㆍ신중년사관학교 명예총장
이 때 서독은 이미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간 상태로 차관이 가능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협상도 하고 구걸도 할 수 있는데, 독일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한국에는 한 사람도 없었으니 당시의 우리수준이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독일 대사관에 연락하여 수소문 한 결과 한 사람을 발견하였다.
그 분이 현재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백영훈 박사다. 전북 김제 출신으로 26세 때,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독일 뉘른베르크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귀국 후 중앙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최고회의에서 찾아 갔으나 병력미필자라 하여 논산훈련소에 입소, 훈련 중이었다.
정부는 훈련병이던 백영훈 박사를 특진시켜 상공부에 파견, 장관 경제 고문 및 특별보좌관으로 임명, 이미 구성되어 있던 ‘차관 교섭 사절단’과 함께 1961년 11월 서독에 갔다.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단장으로 한 차관단은 도이치뱅크를 비롯하여 민간은행, 정부 기관 등에 차관을 타진하였으나 제3국의 지불보증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당시 한국을 상대로 지불보증 할 나라는 이 지구상에 한 나라도 없었다. 결국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독일에 빌리려는 차관은 1억5000만 마르크, 달러로 환산하면 3500만 달러 정도였는데, 격세지감을 금할 수 없는 것은 2019년 1월 현재, 한국은 총 외환 보유액 4055억 달러를 넘어섰다.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차관단은 독일에 체류하면서 딴 방법은 없을까 하여 백방의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백 박사는 모교인 뉘른베르크대학의 은사가 본 대학에 재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가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였으나 한마디로 불가능하다는 답변이었다. 사실 한국이 독일에 차관을 받겠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날부터 백 박사는 지도교수님의 부인에게 매달렸다.
매일 아침 출근 시간 전에 문 앞에 대기하다가 교수님 떠나고 나면, 사모님을 만나서 교수님이 앞장서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다. 너무나 간절하였든지 부인의 간곡함과 제자의 딱한 사정을 외면하지 못한 교수님이 앞장섰다. 교수님이 연락이 왔다. 3일 후에 다시 오라는 것이다. 약속한 날, 희망은 없지만 그래도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가니, 대뜸 하는 말이 “너의 나라에 실업자가 얼마나 되느냐” 묻는 것이었다. 백 박사는 “전 국민이 실업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사실 당시에 우리 실정이 농ㆍ어업 인구가 전 국민의 85%나 되었고, 그것도 손바닥만 한 토지가 전부였으니 실지로 전 국민이 실업자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안이 제시된 것이 광부와 간호사의 독일 취업이었다. 당시 독일은 이미 선진국 경제로 진입한 지 오래되었고 따라서 노동 인구가 부족하였으며 특히 3D 업종을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광부나 간호사가 절대 부족한 실정이었다.
우리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받는 한 달 임금은 400마르크, 미화 100달러였다. 이들이 받는 월급을 1개월간 은행에 예치하였다가 한국에 송금하도록 하였으니, 즉 광부와 간호사의 월급이 보증금이 되었던 것이다. 제1차로 지하 1,300m에서 일할 광부 5천명, 야간에만 일할 간호사 2,000명을 선발하는데 광부로 지망한 사람이 4만 명, 2,000명 선발하는 간호사직을 지망한 사람이 2만 명, 광부로 지망한 사람의 태반이 고등학교 졸업생이며 그 중 35% 정도가 학사학위를 가진 대학 졸업생이었다.
광부모집에 왜 대학 졸업생이 지망하였을까? 첫째는 대학을 나와도 취직할 직장이 없으니 광부라도 하겠다는 것이고, 무엇보다 임금이 국내 최고의 직장보다 4~5배가 많았으니 지하 1,300m, 용광로 같은 곳에서 일하겠다고 아우성을 친 것이다. 합격의 조건은 손에 굳은살이 얼마나 있느냐가 기준인데, 합격하려고 강가에서, 밭에서 손에 피가 나도록 삽질, 곡괭이질을 하여 굳은살을 만들어 합격하기도 하였다.
1963년 11월 28일, 제1진 150명이 떠나는 김포공항은 눈물바다였다. 제2진, 제3진 서독에 간 광부들은 하루, 근로기준법에 의하여 하루 8시간을 일하게 되어 있는데, 우리 광부들은 모두가 16시간을 계약하였다. 어떤 사람은 24시간 하겠다고 하여 매니저와 다투기도 하였는데 ‘당신은 잠도 자지 않고 일하느냐’ 하니까, “우리 국민들은 6 ᐧ 25 전쟁 때, 눈뜨고 자는 버릇이 생겨, 자면서도 일할 수 있다고 고집을 피웠다”는 웃지 못 할 기록도 있다.
지하 1,400m, 막장에 내려가면 불덩어리다. 팬티만 입고 일하는데 30분마다 물을 먹지 않으면 탈수현상이 오는 최고의 열악한 환경에서 이를 악물고 일하는 것을 보고, 독일 사람들이 이런 지독한 민족은 처음 봤다면서 감독이 감독할 필요가 없다고 철수하기도 하였다.
최 근세사의 재인식(3)
朴暎根 논설고문ㆍ 신중년사관학교 명예총장
독일은 우리나라에서 광부가 가기 전에 유고슬라비아, 터키, 아프리카 등지에서 많은 광부들을 데리고 왔었다.
이들은 아주 나태하여 결국 광산을 폐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온 광부들이 투입되면서 생산량이 엄청나게 높아지자 독일 신문들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였고, 이렇게 근면한 민족을 처음 봤다면서 한 달 급여 120달러에 보너스를 줘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한편 왜, 간호사가 필요하였느냐?
국민소득이 올라가니 3D 업종이나 힘든 일은 기피하는 현상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특히 야간에는 일할 간호사가 없었다. 특근수당을 많이 준다 하여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한국 간호사들에 대하여서는 아주 후진국에서 왔는데 일을 맡길 수 없다 하여 일부는 죽은 사람 시체를 알코올로 닦고, 수의를 입히는 일도 하였으며, 일부는 임종이 가까운 환자들을 돌보도록 호스피스 병동에서도 근무하였는데, 한국 간호사들은 환자가 사망하면 그 시신을 붙들고 울면서 염을 하는 것을 보고 독일 사람들이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담당 간호사가 자리를 비우든지 아니면 갑자기 간호사가 없을 경우면
주사도 놓고 환자를 다루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한국 간호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의료 분야를 맡기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위급한 사고환자가 피를 흘리면서 병원에 오면
한국 간호사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그 피를 온몸에 흠뻑 적시면서도 응급환자를 치료하는가 하면, 만약 피가 모자라 환자가 위급한 지경에 빠지면 한국 간호사들은 직접 수혈을 하여 환자를 살리는 등 이런 헌신적 봉사를 하는 것을 보고 “이 사람들은 간호사가 아니라 천사다” 하면서 그 때부터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하였고, 이런 사실이 서독의 신문과 텔레비전에 연일 보도되면서 서독은 물론 유럽 전체가 "동양에서 천사들이 왔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우리 간호사들의 헌신적 노력이 뉴스화 되자,
서독 국민들은 이런 나라가 아직 지구상에 있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라며,
이런 국민들이 사는 나라의 대통령을 한번 초청하여 감사를 표하자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특히 도시에 진출한 간호사들의 실력이 독일 간호사들 못지않다는 인정이 일고 있던 시기,
한독협회 '바그너 의장'은 병원에 오면 꼭 한국 간호사만 찾는데 왜 그러느냐고 기자가 물으니 '주사를 아프지 않게 놓는 특별한 기술자'라 하여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는 것이다.
서독 정부도 '그냥 있을 수 없다'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하였다.
이것이 단군 이래 처음으로 우리나라 국가 원수가 국빈으로 외국에 초청되는 첫 번째 사례였다.
우리로서는 안 갈 이유가 없었다. 오지 말라고 해도 가야 할 다급한 실정이었다.
그래서 모든 준비를 하였으나 제일 큰 난제는 일행이 타고 갈 항공기였다.
한국이 가진 항공기는 일본만을 왕복하는 소형 여객기로 이것을 갖고 독일까지 갈 수 없어, 아메리칸 에어라인을 전세내기로 하였는데, 미국 정부가 군사 쿠데타를 한 나라의 대통령을 태워갈 수 없다 하여 압력을 가해 무산됨으로 곤경에 처한 것이다.
그래서 연구한 것이, 어차피 창피는 당하게 되었는데 한번 부딪쳐 보자,
이래서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최두선 선생이 특사로 서독을 방문하여,
<뤼브케>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각하!' 우리나라에서는 서독까지 올 비행기가 없습니다.
독일에서 비행기를 한 대 보내주실 수 없습니까?
당시를 회고하는 백 박사에 의하면 그들이 깜짝 놀라 말을 못하더란 것이다.
결국 합의가 된 것이 홍콩까지 오는 여객기가 서울에 먼저 와서 우리 대통령 일행을 1 ‧ 2등석에 태우고 홍콩으로 가서 이코노미석에 일반 승객들을 탑승케 한 후
홍콩, 방콕, 뉴델리, 카라치, 로마를 거쳐 프랑크푸르트로 간 것이다.
1964년 12월 6일, 루프트한자 649호기를 타고 간 대통령 일행은 쾰른 공항에서 뤼브케 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총리의 영접을 받고 회담을 한 후,
다음 날, <뤼브케> 대통령과 함께 우리 광부들이 일하는 탄광지대 '루르' 지방으로 갔다.
그곳에는 서독 각지에서 모인 간호사들과 대통령이 도착하기 직전까지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탄가루에 범벅이 된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강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새까만 얼굴을 본 박정희 대통령은 목이 메기 시작하더니 애국가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였고, 연설 중 울어버렸다.
광부들과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부둥켜안고 통곡의 바다를 이루었으니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독일 대통령도 울었고 현장을 취재하던 기자들마저 울었다.
떠나려는 대통령을 붙들고 놓아주지를 않았던 광부들과 간호사들은 "대한민국 만세", "대통령 각하 만세"로 이별을 고하였다.
돌아오는 고속도로에서 계속 우는 우리 대통령에게 뤼브케 대통령이 자신의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기도 하였는데 대통령을 붙들고 우는 나라가 있다는 이 사실에 유럽의 여론이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선 것이다.
박 대통령 방문 후 서독은 제3국의 보증이 없이도 한국에 차관을 공여하겠다는 내부결정을 하였지만 국제관례를 도외시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한국 광부와 간호사들이 받는 월급을 일개월간 은행에 예치하는 조건으로 당초 한국이 요구하였던 차관액 보다 더 많은 3억 마르크를 공여하였다.
서독에 취업한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이 본국에 송금한 총액은 연간 5000만 달러,
이 금액은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의 2%를 차지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으며,
이 달러가 고속도로와 중화학공업에 투자되었다.
이후 한국과 서독 간에는 금융 문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진정한 우방이 되었다.
서독에서 피땀 흘린 광부와 간호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조국근대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위대한 '국가유공자'들임에도 우리들은 그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국가는 당연히 그들에게 '국가유공자'로 대우하여야 한다.
아우토반, 1920년대 말, 히틀러가 만든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다,
히틀러는 이 도로를 전쟁을 위하여 만든 것이지만
이 도로가 있었기에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경제부흥의 초석이 된 것이다.
이 도로를 달리던 우리 대통령은 세 번이나 차를 세우고서 도로 상태를 면밀히 조사하면서 울었다는 것이다.
경상매일신문=2020년 0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