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
공자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論語)’ 자로(子路)편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이요,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라고 했다.
풀이하면 ‘군자는 서로 다르면서도 다름을 인정하고 화합하지만, 소인은 서로 같은 듯 무리지어 다니면서도 어울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 말의 원문을 토대로 파생해 생긴 용어가 구동존이(求同存異)다. 중국 시진평 주석이 외교용어로 자주 인용하여 사용하는 말이다.
구동존이(求同存異)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같은 점을 찾는 것’ 즉, 협력해 함께 이익을 얻어야 함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뜻이다.
중국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하는 두 사람을 언급하라고 하면 대부분 ‘공자와 관우’를 언급한다.
중국에 있어 공자(孔子)는 공부자(孔夫子)라 존칭하며, 문왕(文王),문성(文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이다. 이외로 무장인 관우(關羽)를 관부자(關夫子),관제(關帝),무성(武聖)으로 칭하며 추앙하고 있다.
공자가 중국 사상계에 끼친 영향은 누구와도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하다. 그러나 민간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는 관우가 공자를 훨씬 능가하여 제왕의 차원을 넘어 천신(天神)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에는 공자를 모신 사당보다 관우를 모신 사당이 훨씬 많다.
중국인들은 관우의 충의(忠義)정신과 신의를 토대로 흔들리지 않고 의리를 지킨 신념에 매료된 것이다. 그것이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깊숙이 자리하여 정신적인 위안과 희망을 준 것이다.
관우는 10년간 형주를 통치하면서 형주 사람들의 절대적인 존경과 신임을 받을 정도로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였다. 때문에 진작부터 형주가 속한 호북(湖北) 지방 도처의 주점에서는 모두가 관운장 떠받들기를 좋아했다.
예화 1 : 관우가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살려줌
관우가 한때 위급함에 처해 조조에게 몸을 의탁한 적이 있다. 그때 조조가 어떻게든 관우를 회유해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자 온갖 재물과 관직, 명마인 적토마를 하사하면서까지 환심을 사러했다. 관우는 모든 재물과 관직을 물리쳤으나 적토마만을 기쁘게 받았다. 그것은 유비에게 빨리 돌아가기 위해서다.
조조에게 의탁해 있는 동안 관우는 조조를 도와 전장에서 적장의 목을 가져오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유비의 거처를 파악한 뒤엔 미련 없이 그곳을 떠났다.
‘삼국지연의’에는 적벽대전에서 관우가 화용도에서 조조의 목숨을 살려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군사 제갈량이 촉오 연합군에 의해 패주하는 조조의 퇴로를 예측하고 화용도로 관우를 보내 조조의 목을 가져오라 명령했으나, 끝내 관우가 그를 살려 보냈다. 삼국지의 수많은 명전투 중 으뜸으로 꼽힐만한 적벽대전,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화용도에서의 이 이야기는 관우의 의리와 제갈량의 리더십, 지모를 잘 드러내주는 대목으로 유명하다.
중국 양자강 일대 붉은 절벽이 늘어선 적벽. 삼국시대 통일을 목표로 계속 영토 확장을 하는 조조의 100만 대군과 양자강 일대 동오의 왕인 손권이 팽팽하게 맞섰다.
손권은 유비와 동맹을 맺었다. 유비의 신하이자 ‘지혜의 신’으로 불리는 제갈량은 조조의 100만 대군의 뱃머리를 쇠사슬로 묶고 화공을 퍼부었다. 도망가는 조조의 군사들은 육지에서 유비의 군사가 공격하자 상당수 목숨을 잃었다.
조조의 군선들이 불에 타 없어지고 전세가 기울었다. 조조도 전쟁터를 벗어나려 했다. 유비와 제갈공명은 흡족한 마음으로 패잔병을 쫓아가 이들을 섬멸할 작전을 세웠다. 제갈량은 장군들에게 자신이 지시한 장소에 숨어 있다가 조조를 기습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천하의 명장’ 관우에게만은 유독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관우는 발끈했다. 그런 관우에게 제갈공명은 조건을 붙인다. 잘못을 범하면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 그런후에 화용도 지역을 맡는 의무를 그에게 부여했다.
제갈량은 관우에게 화용도에서 기다릴 때 ‘반드시 모닥불을 피워놓으라’는 단서 조항을 달았다. 기습작전이라면 숨어있어야 하는데도 오히려 모닥불을 피워놓고 있으라니? 하지만 관우는 명령을 따르기로 하고 천하의 명마 적토마와 수많은 기병들을 이끌고 화용도로 나아갔다.
같은 시간 조조는 소수의 기병들을 이끌고 적의 포위망을 뚫고 있었다. 이때 화용도 방향의 먼 발치에서 모닥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조는 이를 보고 제갈량을 크게 비웃었다. 모닥불을 일부러 화용도 방향에 피워놓고 강 포구 방향에서 매복하게 하는 계략일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조조는 화용도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관우를 맞닥뜨렸다. 조조는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뒤 급히 말에서 내려 관우의 말을 더듬었다.
조조는 적토마를 쓰다듬으며 관우에게 ‘예전에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나에게 은혜를 베풀라’라는 메시지를 은연중에 전한 것이다. 조조의 부탁에 결국 남아의 기개와 의리를 소중히 여기는 관우는 조조를 살려 보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진영에 돌아온 관우에게 제갈량은 사형에 처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유비와 장비의 만류에 마지못해 관우의 목숨을 구해준다. 그 날 저녁 관우가 조조를 살려 보낼 것을 알면서도 그를 전장에 내보낸 이유를 묻는 유비에게 제갈량은 “제가 어제 저녁 밤하늘 별자리를 보니 조조의 명이 다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관우는 조조에게 은혜를 입은 바 있어 마음에 부담이 되고 있었을 터, 이번 기회에 관우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던 것입니다.”라고 답한다. 이 한 마디에 유비의 불편한 심기는 풀어졌다.
예화 2 : 원수(怨讐)를 은혜(恩惠)로 갚은 화합
스페인에서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지역(地域)의 주민들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怨讐)처럼 경쟁하며 지낸다. 세계 최고의 프로 축구팀 레알마드리드와 바로셀로나가 경쟁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원수처럼 지내게 된 원인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바르셀로나는 1492년 스페인 통일 후, 마드리드 정권으로부터 엄청난 압박과 차별을 받으며 살았다. 자존심이 강한 바로셀로나는 언어(言語)도 자기들만의 언어를 고수(固守)하고, 지금(只今)도 분리(分離) 독립(獨立)을 꾸준히 주장한다.
경쟁은 축구뿐만 아니라 음악의 세계에서도 엄연히 존재 했다.
동 시대에 세계 최고의 반열에 오른 테너가수 두 명이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에서 한 명씩 나왔다.
이른바 마드리드 출신의 플라시도 도밍고와 바르셀로나의 호세 카레라스다. 두 사람은 라이벌 인데다가 배타적(排他的)인 지역 정서(情緖)가 있으니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결국(結局) 두 사람은 상대방이 나오는 무대(舞臺)에는 절대 서지 않겠다고 선언(宣言)하기에 이른다.
1987년, 카레라스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그는 플라시도 도밍고보다 훨씬 더 상대하기 힘든 강적(强敵)을 만났다. 불행(不幸)히도 백혈병(白血病)에 걸린 것이다.
생존확률은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다.
백혈병과의 투쟁은 심신을 고갈(枯渴)시켰고, 더 이상의 활동(活動)이 불가능했다.
그동안 상당한 재산을 모아 놓았지만 한 달에 한 번씩 해야 하는 치료를 위해서 스페인에서 미국의 시애틀을 왔다 갔다 하니 비용(費用)이 많이 들었다.
결국 그의 경제(經濟) 형편은 극도로 열악(劣惡)해 졌다. 골수이식이며 치료에 많은 재산을 다 쏟아 부었건만 쉽게 병에서 회복(回復)되지 못했다.
그 즈음, 그는 마드리드에 "헤르모사 재단"이라는 자선단체(慈善團體)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헤르모사 재단"은 백혈병 환자를 돕는 단체였다.
그는 신청서(申請書)를 보냈고, "헤르모사 재단"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건강(健康)을 되찾았다.
그는 질병(疾病)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뒤, 테너 가수로서 활동을 재개(再開) 했다.
호세 카레라스는 다시 세계적인 테너 가수에 걸맞은 많은 수입을 벌어 들였다. 그는 "헤르모사 재단"에 기부금(寄附金)을 보내 감사의 뜻을 전하기로 했다.
재단의 정관을 읽어 보던 그는 놀랍게도 재단의 설립자이자 이사장(理事長)이 다름 아닌 플라시도 도밍고라는 것을 발견(發見)했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병든 카레라스를 돕기 위해, 그 재단을 설립(設立)했다는 사실(事實)까지 알게 되었다.
플라시도 도밍고는 카레라스가 경쟁자(競爭者)의 도움을 받는다는 수치심(羞恥心)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줄곧 익명(匿名)을 고수(固守)했던 것이다.
크게 감동을 받은 카레라스는 어느 날 마드리드에서 열린 플라시도 도밍고의 공연장(公演場)을 찾아 그를 놀라게 했다.
카레라스는 공연도중 무대로 올라가서 도밍고의 발 앞에 겸손(謙遜)히 무릎을 꿇고 공개적(公開的)으로 감사(感謝)의 말을 건넨 뒤에 용서(容恕)를 구했다.
도밍고는 그를 일으켜 세우며 힘껏 끌어안았다.
위대(偉大)한 우정(友情)이 싹트는 순간(瞬間)이였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따뜻한 배려(配慮)가 음악가의 세계에서 라이벌을 이렇게 배려하고 자신의 물질(物質)까지도 내어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릎 꿇은 카레라스 보다 더 커 보이는 이유(理由)입니다.‘
폴J마이어는 그의 저서 ‘용서의 심리학’에서 그렇게 기록했다.
한국의 정치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가혹함으로 법을 마음대로 유린한다. 전직 박근혜대통령을 정적으로 엮어 3년 2개월이 지나도록 감옥에 가두어 놓고 재판도 끝내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인권 유린이다. 이념으로 결집된 종북좌파 집단이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훗날 역사는 그들에게 어떤 단죄를 할지 그것이 궁금하다.
정유라 경우 편법이었다고 이화여대 입학이 취소되었다. 그런데 조국의 딸과 아들이 허위 경력으로 의학전문대학원과 로스쿨 입학한 것과 비교했을 때 어느 것이 더 무거운 범죄에 해당되는지 생각하면 정유라는 새발에 피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조국의 자녀에게는 아직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최순실과 윤미향을 비교해 보자. 누가 더 치졸하고 더러운 범죄 연루자인가를....
정의가 살아있는 사법부라면 아마 결과는 명약관화(明若觀火)라고 본다.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국민을 결집시키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 지도자들은 분열을 조장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데는 귀신들이다.
국민을 화합시키지 못하고 분열 정치로 내모는 정치 모리배들은 공자가 말한 소인배 즉, 동이불화(同而不和)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