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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
누가복음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24).
탕자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누구나 잘 아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 멋대고 이 말씀을 해석하여서 예수님께서 원래 의도하시고 말씀하셨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기도 합니다. 즉 회개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은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어떠한 행위를 해도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의 택한 자녀는 성령님께서 반드시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회개없이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외치셨던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라는 말씀이었다는 것을 안다면 천국과 회개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말씀을 제대로 보았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에는 죄인의 회개와 거듭남과 구원 그리고 천국잔치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형제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자신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유산이라는 것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 받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었고, 둘째 아들은 그 재산을 받아서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돈으로 사업도 하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뜻대로 돈이 쉽게 벌어지지 않았고 그가 갖고있던 모든 돈은 그에게서 사라졌습니다. 결국 오갈데 없는 그는 유대인들이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면서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했으나 그것 조차도 먹을 수 없는 형편 가운데 살았습니다.
먹을 것조차 없어진 둘째 아들은 문득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집에서 일하는 일꾼들을 대우하시는 것과 현재 자기가 대우받는 것을 비교하면서, 아버지의 집과 같은 곳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비록 아버지께 죄를 지어서 아버지의 아들로 떳떳하게 돌아갈 수는 없지만, 아버지의 성품을 보아서 자기를 품꾼의 하나로 써달라고 하면 써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용기를 내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회개를 한 뒤에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게 왠일입니까? 자기의 생각보다 더 극진하게 아버지께서 대접해주셨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를 보자마자 달려가서 그를 껴안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에게 예복을 입혀주고 손에는 인장반지를 끼워서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주면서 그를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해주는 파티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눅 15:24)
우리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아들의 비유"를 통하여 젊은이들의 심리상태를 자세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유산 상속을 해달라고 하면서 집을 나간 것은, 그가 더이상 부모님의 슬하에서 부모님의 컨트롤을 받지 않고 자유함을 누리며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가족을 떠나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막연하면서도 흥분되는 그러한 생각 속에서 그는 왠지 그 동안 살아오면서 느낄 수 없었던 쾌감마저 느끼며 금지된 세상에서의 삶을 그려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맛을 보고싶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는 곳에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고 싶은 마음...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가졌던 마음과 동일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컸다고 생각하면 부모의 품을 떠나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를 갖고 하나님의 법을 떠나 살고싶어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성품입니다.
결국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받아 아버지가 없는 자기만의 세상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동안 알 수 없었던 자유로움을 맛보며 반역자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계획하고 꿈꾸었던 아버지가 없는 자유로운 세상에서 죄와 더불어 뒹구는 삶은 그를 결코 만족시키지 못하고 전재산을 날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면서 돼지가 먹는 음식 조차 주는 사람이 없어서 죽지못해 살아가는 비참한 인생의 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없이 잘 살아보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결코 그에게 행복을 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더욱 외롭고 비참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오늘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바로 이런 둘째 아들의 삶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사람은 직업조차도 유대인들이 가증하게 여기는 돼지를 치며 살아가는 비참한 현실을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먹는 음식 역시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이들이 먹는 것은 돼지처럼 돼지가 먹는 것을 먹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강조하시는 '거룩'이나 '성결함'과는 거리가 먼 직장에서 그런 것을 먹으며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삶이란 결국 돼지와 같은 삶이며, 어떤 면에서는 돼지보다도 못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돼지와 같이 아무 것이나 닥치는대로 먹는 잡식의 삶을 자랑하며 돼지를 치는 것과 같은 더러운 일을 하면서 많은 돈을 벌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성경과 반대로 "개처럼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라는 말까지 있는 것입니다.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신 23:18)
하나님 아버지를 떠난 삶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 짐승과 같은 삶입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 품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분 안에서 그분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고 자유함이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러한 삶이 참된 자유함이 있는 삶입니다. 그분 안에 있을 때에 인간은 소망을 갖게 되고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자만이 아버지를 떠났던 삶을 회개하고 다시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아버지의 아들로 살아가면서도 만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그가, 이제 세상 속에서 자기가 생각했던 모든 것을 다 잃고 자유함마저 사라지고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종으로라도 살고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가 아버지와 함께 살면서 아버지께서 종들을 다루시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돈이 있을 때에만 인간 대접을 해주고, 돈이 없으면 그를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종들에게도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그렇게 자유를 누리고 싶고 자기 멋대로 살고싶었던 죄악을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누리고싶었던 자유함보다 아버지 밑에서 종으로 살아가면서 누리는 자유함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17절을 보면,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거듭나게 되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성령님께서 깨달음을 주셔야만 우리는 우리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회개하며 가던 길을 돌이키게 되며,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누가복음15장에 나오는 이 비유를 "탕자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제목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것에 대하여 3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누가복음 15장 1-3절을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먼저 잃은 양을 찾는 기쁨과 한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 그리고 마지막으로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기쁨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탕자의 비유"가 아니라 "잃어버렸던 아들을 찾은 기쁨"이 적절합니다.
24절을 다시 보면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볼 때에 "잃었다"는 것은 "죽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자녀를 예수님께서는 "죽었다"라고 표현하고 계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반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에게 죽음이 임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적으로 죽었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 "잃어버렸던 아들", "죽었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모든 인생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렇게 언제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날지 알 수 없는 연약한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항상 세상의 유혹이 우리의 바로 옆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우리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의 귀에 속삭이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으려고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가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유혹했던 마귀의 속삭임은 지금도 모든 인류에게 다가와 속삭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는 장담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 갑자기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도 많이 보아왔고, 우리도 때로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부터는 내 뜻대로 살거야"라면서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는 죽으려고 작정한 것입니다. 마귀에게 "날 잡아잡수~"하며 자신을 마귀의 밥으로 내놓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즉 거듭난 인생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인생은, 그가 비록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즉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택함을 받아서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의 삶은 영생이 없는 삶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라고 주신 가족을 사랑하기는 커녕 원수처럼 미워하고 싸우며 때로는 말도 하지 않고 어둠을 뿌리며 살아갑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요일 3:15, 23)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일 4:20-21)
자기의 직계 가족(배우자, 부모, 자녀, 형제)도 사랑하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인생은 아직 거듭난 사람이 아니거나 영적으로 갓난아기나 어린 아이 수준입니다. 비록 선택은 받아서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살아가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자꾸만 발로 차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려고 하시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복은 필요없고, 자기 자신이 힘써서 무언가를 성취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로 향하는 발걸음보다 세상을 향해 열심히 뛰어갑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의 모임과 세상의 모임 중에 선택해야할 때에는 교회의 모임을 버리고 세상의 모임을 선택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자기가 무언가 성취한 기쁨을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의 무기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고백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가득차면 찰 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고 열심히 뛰어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반드시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복으로 주신 돈을 다 날려보고 돼지처럼 살아보고 돼지가 먹는 더러운 음식을 먹으며 비참하게 살아보아야만 아버지의 품안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깨닫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멋대로 살고싶어하는 이들을 그들 뜻대로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터닝포인트가 있게 되어 회개도 하고 새롭게 거듭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다가 교회를 떠나거나 아예 하나님을 부인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자라고 단정지어서는 안됩니다. 교회 안에는 가라지도 있지만, 아직 거듭나지 않았거나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선택받은 자들 중에서 그가 진정으로 거듭난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자기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두고 계실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 또는 다른 이들을 하나님께서 내버려두고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우리 주위에 그러한 사람이 있다면 그가 속히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나 자신이 현재 그러한 상황에 놓여있다면 더이상 돼지울타리 안에서 돼지처럼 지내지 말고 속히 회개하고 사랑하는 가족에게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돼지가 무얼 상징합니까? 겉은 쪽발이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겉만 크리스천이고 속은 거듭나지 않은 가짜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돼지와 같은 삶을 살고싶지 않다면,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반역의 길이 아닌 순종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되찾아야만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하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는 고백을 하며 한몸같이 살았던 것처럼 서로 아껴주며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길의 과제이며 그 길이 바로 성화의 길이며 거듭난 이들의 삶입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 그립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거듭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빛의 자녀인가 아니면 어둠의 자식인가? 빛의 자녀라면 세상 속에서 자기 뜻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결코 만족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가정을 소홀히 하며 세상 속에서 자신만의 즐거움을찾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잃어버렸던 아들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뒤에 아버지와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이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다 탕진하기 전에 가족에게로 돌아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미련한 인생은 즉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지각이 없기 때문에 절대로 지각이 있는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어리석은 행위를 밥먹듯이 하면서도 그것을 절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므로 행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나지 못한 이들의 삶이며 잃어버린 아들들의 삶입니다.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우준한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렘 4:2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2-3)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히 6:4-6)
어둠의 자식이라면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며 성령체험도 하며 가인과 같은 체험적인 신앙생활도 하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이미 살인자 즉 가족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이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결국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를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처럼 모든 것을 다 잃어야만 가족과 하나님 아버지가 생각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록 그때에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거듭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렘 3:40-4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1-3)
우리는 모두 연약한 인간이므로 돼지와 같은 가짜 크리스천의 인생을 살아가지 말고, 항상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사모하며 그 품을 만족하며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며, 인간다운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령충만한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열심을 다해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의 행위인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족과 이웃을 열심을 다해 사랑하는 모가운데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할렐루야!!!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내 아들아 어찌하여 음녀를 연모하겠으며 어찌하여 이방 계집의 가슴을 안겠느냐?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그는 훈계를 받지 아니함을 인하여 죽겠고 미련함이 많음을 인하여 혼미하게 되느니라"(잠 5:18-23)
김 수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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