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가 주님을 엄격한 분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하느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 하늘 멀리 계시는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이 어디에 어떻게 계신다고 생각하는지에 따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본인이 믿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기도의 자세도 달라집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저마다의 영성이 형성됩니다.
서구 그리스도교에서는 주로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중심에 둔 영성이 발전해 왔고, 동방교회에서는 주님의 부활을 중심에 둔 영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바탕으로 다양한 영성이 교회 안에서 발전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영성이 효과적일까요? 두 가지 영성 모두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께 가는 길이기에, 그 효과는 우리의 자세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의 열매는 주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주시는 은총이자 선물입니다.
예수님의 모습과 가르침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느님은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엄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나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가 어떠한 분이신지 가르쳐 주시기 위해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아버지는 엄하기는커녕 인내로 아들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금세 알아보고 달려가서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사랑 가득한 모습입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청하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며 신발을 신겨주시는 자비로운 아빠의 모습입니다.(루카 15,11-24 참조)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는 아버지께 다가가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현실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아빠 하느님께서는 벌을 주기 위해 추궁하거나 따지거나 단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에게서 그런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를 신뢰하며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고 기뻐할 뿐입니다. 죄인임을 고백하는 우리를 품어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자기에게 아무런 잘못이나 죄가 없다고 여기는 오만한 사람을 꾸짖으십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 성전에서 하느님에 대한 공경 없이 소란스레 장사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마태 21,12-13; 마르 11,15-17; 루카 19,45-46; 요한 2,14-16 참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알려주셨고, 당신 또한 그러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시며 새 삶으로 인도하고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로 기도하기 위한 조건과 기도하는 이의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마음에 거짓과 위선이 없어야 합니다. 기도하려면 자신의 죄와 진실을 인정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깨달음은 우리가 하느님께 참된 예물을 드릴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바치기 전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형제와 화해하여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게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고해성사를 통해 은총을 받고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기쁘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을 엄한 분으로 여기고 그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주님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분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영적 여정을 방해하는 큰 걸림돌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하느님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 이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씀들을 하셨지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고생하며 무거운 짐은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이는 우리의 생각을 훌쩍 뛰어넘는 사랑 가득한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이 깨달음이 없으면 큰 죄를 지어 하느님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불쌍한 존재로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알게 된 하느님께서는 한없이 너그럽고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나는 그들의 불의를 너그럽게 보아주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리라.”(히브 8,12)
한편 형제와의 관계가 순탄하지 않을 때 하느님께 벌을 받을까 두려워하며 그분을 엄한 분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다가가기에 앞서 형제와 평온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22-24 참조)
형제를 통하는 길은 하느님께 가는 지름길입니다. 형제를 통해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는 하느님을 맞이하십시오. 실제로 우리의 죄책감에는 두 가자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죄의식과 형제에 대한 미안함입니다. 이 두 가지 차원에서 자기의 현실을 올바로 파악하게 되면 우리는 자유로워집니다. 형제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도 편안함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엄격함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분께서는 다만 군중의 완고함을 보시고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하십니다. 자캐오의 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실 때에도 그를 심판하는 대신 기쁜 구원의 소식을 선포하십니다.(루카 19,9 참조)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고 하시며 아픈 사람을 품어 주셨습니다.(마태 9,12 참조) 그러므로 목마르고 병들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께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요한 7,37 참조) 그분 앞에서는 가면을 쓸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드리면 됩니다. 그분과 함께할 때 우리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43,5)
우리는 실수 앞에서 두려움을 느낍니다. 인간의 용서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완전한 용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며, 인간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용서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의 모습을 스스로 깨닫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려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 곧 복음福音입니다. 우리는 들은 적이 없는 것에 대해 스스로 알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알려주어야 합니다. 복음도 그렇습니다.(로마 10,14 참조)
주님의 은총이 있어야 두려움이라는 걸림돌을 치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깊이 있는 성찰과 성사를 통해서 우리 내면의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변화와 치유는 깊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의 주인이자 창조자이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가는 우리의 작은 움직임마저도 그분의 은총으로 이루어집니다.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사람은 이미 그분의 은총 속에서 걷는 사람입니다. 용기를 내어 그분께 다가가십시오. 그분 곁을 떠난 사람은 진리에서 멀어진 사람이지만 그분께로 다가가는 사람은 진리를 향해 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사람 안에서 이미 하느님의 영의 움직임이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는 마침내 사랑이 많고 따뜻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오늘도 하느님의 기쁨이로 그리스도의 은총만을 믿고 시작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