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중력장과 닮아있다. 시공간이라는 매질이 가진 정보를 빨아들이고 흡수한다. 그 과정에서 휘어지고 왜곡되어 흘러들어온 모든 것들은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재정리되어 과거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된다. 그것을 열어보는 아니 열어야만 하는 순간들이 있다. 내가 당신이 되었을 때 그때의 당신은 나와 얼마나 다르고 닮아있나를 확인해야 할 때다. ‘애프터썬’은 기억이라는 입자와 파동을 그러모아 빛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만들어 낸다. 샬롯 웰스라는 신인 감독은 영화라는 마법을 통해 기억은 증명이 아니라 퀼트처럼 조각들을 모아 이전에 있던 것들 고유의 성질은 있되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보는 방식을 전하려 한다.
31살의 생일을 맞이한 소피는 31살의 아빠를 떠올린다. 자신의 꿈속에서 우두커니 서있던 모습과 함께 11살의 나와 함께 했던 순간들을 담은 캠코더를 열게 된다. 조악한 화면 속에 어린 자신과 뭔가를 초탈한 듯한 모습의 아빠를 보면서 기억은 20년 전 그날의 튀르키예로 데리고 간다. 소피의 플래시백은 현재의 감정과 자신이 놓쳤던 부분들에 대한 회한이 뭉쳐져 만들어진 세계다. 불안 속에서 무너질 것 같은 자신을 감춰야 했던 아빠를 그때의 소피는 알지 못했다. 여행은 즐거웠고, 자신은 어렸다. 성장하는 10대 소녀의 눈에는 모든 순간들이 자양분처럼 빨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아빠의 나이가 된 소피는 기억 속에서 자신이 놓친 것이 무엇이었나를 상상으로 채운다. 영화는 소피의 기억이 사실에 근거한 추억이 아닌 상상으로 축조된 것임을 암시하기 위해 영리한 장치를 심어둔다. 노란색으로 표현되는 물건들이다. 춤을 추던 리조트 직원들의 유니폼, 아빠가 손에 들고 있던 수중 카메라, 소피가 입던 스킨 스쿠버 복장까지 영화 속에서 노란색은 상실과 바람이라는 이미지를 품고 있다. 소피는 아빠에게 휴가가 끝나면 어디에 정착할 거냐는 질문을 한다. 그는 런던에 갈 예정이고 방이 여유가 있으니 네 방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소피는 그 순간 엄마가 이루어주지 않았던 소원을 말해본다. 그 방을 노란색으로 온통 칠해도 되냐고 그러나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휴가가 끝나고 소피는 다시 아빠를 만날 수 없었다. 회상 속에 노란색은 이루어지지 않을 간절했던 소망과 상실했서 찾을 수 없는 것들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소피의 상상으로 구축된 기억이라는 지점을 염두하고 본다면 영화가 보여주는 모든 장면들은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감정을 대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벽을 사이에 두고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가지만 서로가 바라보는 시선은 다른 곳에 있고 서로의 마음에 어떤 무게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엔딩에서 소피는 아빠가 찍어주는 캠코더 화면에서 환하게 웃으며 안녕을 말한다. 튀르키예를 떠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에서 작별을 하는 모습으로 아빠가 남긴 영상은 끝을 맺는다. 거기서 카메라는 패닝을 하며 공항 문을 열고 나가는 아빠의 뒷모습과 소피의 꿈속으로 짐작되는 곳에서 절규하는 장면을 붙인다. 다시 시점은 소피에게 돌아오고 결국 그 20년을 자신의 방식으로 되짚어 보고 이해하려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아마도 소피는 허우적거리는 아빠의 꿈을 계속 꾸게 될 것이고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던 그때의 자신으로 멈춰있을 것처럼 보인다.
애프터썬은 어떤 형태로건 상실의 경험이 있을 모두에게 말을 거는 영화다. 우리는 기억과 상상을 아무리 동원해도 잃어버린 것에 대해 감정적으로 패배 할 수 밖에 없는 태생적 슬픔을 지닌 존재이기에 상영되는 순간 내내 공감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지금 이순간 거울속 자신에게 위악의 침을 뱉고 있을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태극권과 명상, 글쓰기를 권하는 대신 나는 자라 고작 당신이 될 거란 그 별거 아닌듯한 말을 전해 주고 싶다.
첫댓글 오랜만의 소대가리님의 리뷰가 더없이 반갑고 감사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이 영화를 추천하던데
저도 함 봐야겠네요
소대가리님 리뷰를 읽고나니 가슴이 먹먹한것이 꼭 한번 보고 싶어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이 영화를 만난건 작년 부국제때였습니다
저의 일년은 부국제를 향해 달려요
왠만하면 곧 개봉될 거장감독의 작품보다는 개봉되지 못할 보석 같은 신인감독의 첫작품을 픽하는 저만의 관람법에 따라~월드시네마 플래시 포워드 와이드 앵글 뉴 커런츠를 선호함요~ 픽한 작품이었죠
저는 이 영화가 가진 특유의 질감에 꽂혔어요
쨍한 휴양지에서 부녀의 여행이라는 해사함 밑에 가라앉아 있는 왠지모를 슬픔과 우울의 투톤이 이 영화를 다른 영화와는 다른 특별한 영화로 만들었어요
글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