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기둥이 둥글다외2편 / 윤은영 / 2010년 겨울 미네르바 신인상
나무는 기둥이 둥글다 (외 2편)
윤은영
연필이 깎인다
가가가가 소리
한글을 처음 떼기 시작한 아이처럼
조물조물 글자에 사무치는 것 같다
문득 연필깎이 구멍을 들여다본다
칼날 입구가 뾰족해지기 편하도록
둥글게 맞춰져 있었다
육각 삼각 사각 그 어떤 모양도
연필 속에 까맣게 맺힌 흑연과 함께
둥글게 깎인다
그러니 나무는 깎이기 위해
둥글게 슬픔을 말아놓은 형극이다
또르르 톱밥마저 둥글게 말려나오는 걸 보면
벌목만 한창인 세상에서
슬픔을 돌돌 말아놓은 나무는 생각할 것이다
들고 있던 낙엽을 어느 끝에 뉘어야 하나
한 움큼 자란 생각이 가지 끝에 걸려
뾰족하게 깎이고 있었다
소요 산행
역마다 풍경을 가진다
성북 월계 녹천
그 사이에는
기차를 타는 굴곡 많은 인부들과
밭이 있고
밭 사이에 허리가 굽은 낡은 집들이 보이고
산길의 꽁무니가 보인다
방음벽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소음들
과연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손으로 꼽아본다
그러다가 또 전철이 떠나고 경계가 생긴다
이제 곧 남은 풀밭에 꽃가루가 날리고
날벌레가 공중에서 윙윙 엉길 것이다
점차 갈아타야 할 노선 없이 곧게 이어지는
간이역 같은 들꽃이 다문다문
들고 일어서는 때
졸면서 떠나는 소요산행 열차
신촌길 63번지
아침에 집을 나오면
맞은편 초록색 대문이 열려
유리병이며 캔 신문지 종이박스
묶이는 몸뚱이들
보인다 할머니 굽은 등도
바람 드나드는 무릎의 문도 열린다
동네 한 바퀴를 벌써
느린 물처럼 흘러
계곡을 만들고
물길을 틀어
이윽고 돌아온 것들
할머니를 따라 대문 안으로
출렁거리는 생계다
다 읽히지 못한 신문에서 올라온 글자들만이
구석에서 열없이 서성이다
열린 대문의 등허리를 똑똑 두드린다
▲ 윤은영 / 1962년 인천 출생. 숭의 여대 문창과 졸업. 경기도 의정부시 가농1동.
이메일 jk-ey@hanmail.net
-------------------------------------------------------------------------------------------------------------------
청춘만화 (외 2편)
이정민
겨울 내내 피운 석유난로,
기름 냄새에도 금방 배고파지던 노량진 사거리 만화방
나일론 끈으로 묶은 만화책들 반쯤 허물어진 신전의 기둥처럼 쌓여
우리는 모여 앉아 새로 발간되는 신호를 뒤적거리곤 했다네
오래된 책장 어디에서나 눈도 없이 기어나오던 책벌레
그가 물고 다니는 영웅담은 끝이 없고 악몽처럼 둥글게 떠오르는 말풍선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분노를 배웠네
하루아침에 사라지던 언니들
권수가 모자라던 유년의 시리즈와
몰래 가방에 넣던 만회책을 통해
소유의 비겁함도 알았지만
금세 녹슬어버리는 청춘의 속성은 알지 못했네
닳고 닳은 페이지 속에서
진부한 대사를 몰고 기어나오던 만화방 사내는
정말 어른이 되지 않았을까
우리 모두의 안식처 노량진 사거리엔
재떨이 위로 민들레꽃이 놓은 순정의 날들이 더 많았네
청춘의 번지수가 적힌 외상장부가 모두 닳기 전에
자리를 떠 다시는 돌아오지 않던 우리들
나는 아직도 만화방 한구석에서 낄낄거리네
낡은 소파에 누워 만화를 읽네
홍수
지난여름 창원 할머니 댁 물에 잠기고
무릎을 걷어붙인 할머니는
닫히지 않는 냉장고를 열어
막걸리를 꺼내 마시고 있었습니다
강물들이 범람으로 스스로의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바가지나 밥 솥 떠내려가면 다행
사람 잃고 우는 여편네도 있어서
할머니는 사발 가득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넘치듯 붓는 사발은 수위를 조절하는데
답답한 복장은 발칵발칵 뒤집어져서
동네 사람들은 눈물바다
이러니 홍수가 그칠 리 없지요
구조대원들은 뒤집어진 돼지와
헤엄치는 누렁개를 태우고
시내로, 시내로 나갑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울음소리로
세상 길을 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상패는 반쯤 물에 젖어 마냥 즐겁고
쭈글쭈글해진 벽지에 밀물의 수위가 그어집니다
할머니가 달아오른 얼굴로 비틀비틀,
다라이로 물을 퍼냅니다
일흔 번을 굽이친 강물이 저리도 깊습니다
태평양 고시원
운곡동 태평양 고시원은
낡은 백촉 전구 알을 매달고 밤을 항해 한다
출렁거리는 배는 닻을 내리고 정박한지 오 년째,
고시원은 태평양 한복판에 좌표를 그렸으나
출렁거리는 물결에 뱃멀미를 하는 중이다
찌든 때로 누렇게 물든 벽은 비밀이 없었고
가끔 서로의 방이 털리기도 하지만
열아홉 개의 문들은 쉽게 열린다
싸구려 패물을 털린 조선족 부부는
머리맡에서 낯선 말로 더듬거리며 밤새도록 싸우고
눈이 큰 몽골 여자는 얇은 벽을 발로 차는데
키잡이 선장이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동안
반쯤 열린 조리실에선 다국적 요리 비법이
잃어버린 국적을 확인하며 시큼한 냄새를 풍긴다
밤마다 각기 다른 언어로 꿈을 꾸는 사내들이
이정표 없는 잠을 청하는 밤
태평양은 넓고 돌아가는 길은 멀어서
배낭 속에는 아직 풀지 못한 짐이 있고
풍랑에 젖은 옷들을 방 한구석에 넣어두는 사람들
뱃멀미 같은 생에 자꾸만 이마를 짚는다
태평양 고시원의 저 배 한척
무너진 좌표를 덧그리며 섬처럼 고요해진다
오늘밤 닻별이 이국의 밤하늘에도 번져온다
심사위원 : 문효치, 홍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