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집념
38년간 병고로 누워 있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막 태어난 아기가 40년 가까운 세월을 병석에 누워 보냈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예수님이 살아온 세월보다도 훨씬 긴 시간을 병석에 있었떤 것이다. 우리는 이 병자가 언제부터 못가에 나와 있었는지 모른다. 이 병자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젊은이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스라엘 민족이 대대로 기다려 온 그리스도란 사실을 모른다. 그저 처음 보는 젊은이일 뿐이다. 그런데 이 젊은이가 자기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묻는다.
잠시 우리 자신이 38년 동안 병을 앓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38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 병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웬 낯선 사람이 와서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만일 나라면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묻는 낯선 젊은이에게 냅다 욕을 퍼부었을 것 같다.
또 어떤 사람들은 38년 된 병자가 낫고자 하는 노력은 하지 않고 불평만 한다고 말한다. 조엘 오스틴이 바로 그 중에 한 사람이다. 그가 쓴 <긍정의 힘:믿는 대로 된다>는 미국에서는 물론이요, 우리나라에서도 엄청나게 많이 팔린 책인데, 그 책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못가에 계속 누워만 있었다. 그가 건강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일어나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신세 한탄만 하며 누워 있었다. 축복 받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믿음의 언어, 곧 긍정적인 언어만을 사용해야 하지만, 그 병자는 부정적인 언어만을 사용했다.”
그렇지 않다. 38년 된 병자는 신세 한탄만 하며 누워 있지 않았다. 병자가 예수님에게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너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라고 한 것은 이런 뜻이 담긴 말이 아닐까? “물론입니다. 선생님. 저는 정말 낫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 혼자서는 안 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어 너무 답답합니다.”
그는 계속 말한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이 말은 병이 나았으면 하는 그의 집념을 잘 드러낸다. ‘제가 가는 동안에’의 그리스어 원본 문장 시제는 현재형이다. 이 얘기는 그가 물이 출렁거릴 때마다 못을 향해 불편한 몸을 끌고 갔다는 뜻이다. 첫 번째로 못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집념이 아닌가.
교부 크리소스토모는 그의 이러한 면을 칭송하면서 우리의 게으름을 반성하라고 촉구한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우리의 큰 게으름에 대하여 통곡해야 한다. 이 병자는 벳자타 못가에 누워 있으면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낙심하지 않았다.” 38년 된 병자에 대한 조엘 오스틴의 해석은 언뜻 이해는 되지만 중요한 것은 성경본문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위해서 성경본문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모든 말씀 전파자의 의무는 성경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지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믿음을 강조하고 긍정적인 언어 사용을 강조하는 것은 신중하고 통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일방적으로 왜곡하면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아이를 죽였다>의 저자 파커 부부는 어린 아들이 심각한 당뇨병에 걸렸는데도 인슐린 주사를 맞히지 않았다. 주님을 믿고 긍정적인 언어만을 사용하면 나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넌 정말 아무 문제가 없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은 나을 거야.” 결국 이 부부는 아들이 죽고 난 다음 고의적인 살인과 아동학대죄로 기소되어 유죄 선고를 받았다.
현대의학을 통한 치료도 하느님 치유의 손길인데, 왜곡되게 오직 믿음과 긍정적 언어만을 강조한다면 하느님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