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한 기도라니요? 그럴 수 있겠네요
R.C.스프룰의 『기도하면 정말 달라질까』를 읽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부분이 보여서 한참 생각에 잠겼다. ‘오만한 기도’가 있다니요? 기도하는 자라면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한 기도’를 드리지 않을까요?
우선 이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둘째, 용서를 겸손히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자매가 죄책감에 심하게 짓눌려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거듭거듭 기도했어요. 그런데도 여전히 죄책감이 들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매는 똑같은 죄를 거듭 짓는 게 아니라 한 번 지은 죄를 여러 차례 고백하고 있었다.
나는 자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다시 기도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세요.” 자매의 눈에 불만과 조바심이 비쳤다.
“이미 그렇게 했어요!” 자매가 소리치듯 말했다. “하나님께 용서해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고요. 하나님께 또다시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나는 고집불통 노새를 다그치듯 자매에게 말했다. “제 말은 자매님이 지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매님의 오만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자매는 귀를 의심했다. “오만이라고요? 무슨 오만 말인가요?” 자매는 자신이 거듭 용서를 구했다는 사실이 자신의 겸손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자매는 자신의 죄가 너무나 커서 한 번의 회개로는 용서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고 그 죄를 평생 회개해야 한다고 느꼈다.
모든 사람들이 은혜로 살아간다. 그런데 이 자매는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로우시더라도 자신은 자기 죄 때문에 괴로워하며 살아갈 작정이었다. 이 자매는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것은 일종의 교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모욕하는 셈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면, 우리가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특권이자 의무다.
R. C. 스프룰, 『기도하면 정말 달라질까』, 전의우 옮김, 55-56쪽
사실 우리 주변에서 이 자매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자기가 대단히 겸손한 것처럼 동일한 죄에 대해 수없이 기도하면서 사실은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스프룰의 말씀처럼 ‘오만한 기도’를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요한 사도가 요한일서의 말씀에서 확실히 가르치는 바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바울 사도의 말씀도 분명한 가르침을 준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2-16)
그렇다. 바울 사도가 믿기 이전에 얼마나 큰 죄인이었던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긍휼을 베푸사 용서해 주시고 직분을 맡기시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크신 용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제부터는 기쁨과 감사로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마땅하다. 마치 신세타령하듯이 항상 내 죄만 들먹이며 한숨 짓고 눈물 흘리는 것이 진리에 기초한 참 믿음에서 나온 것인지, 무지로 말미암은 오만한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한 성경 말씀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자기의 생각을 고집하면서 기도를 계속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기도’를 드리는 것임이 틀림없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눅 5:20).
여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에 나오는 죄는 복수명사로 구체적 죄의 행동들이 용서받은 것을 보여주고,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완료형 문장으로 죄 사함의 효과가 지속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눅 5:25)를 보면 그의 심령은 하나님의 은총과 평안을 깨닫고 평안과 기쁨과 찬양으로 충만했다.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며 용서를 기도한 사람은 이렇게 하나님의 용서를 인정하고 평안을 누리며 기쁘게 찬양을 드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공적 예배에서 대표 기도를 할 때도 ‘오만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목사님이 설교를 준비하실 때는 아주 많은 시간을 쏟아서 준비하시고, 원고를 작성하시거나 설교 대지를 작성하여 기도하면서 계속 보완한다고 한다. 찬양을 준비하는 성가대도 적어도 지난 주일에 한 번, 그리고 이번 주일에 한 번 즉 두 번의 연습 시간을 갖고 예배시간을 맞는다. 그렇다면 중요한 예배시간의 일부인 기도 순서에서 대표 기도를 담당한 분이 사전에 많은 시간을 마련하여 기도를 준비하는 것이 당연히 필요할 것이다. 가능하면 준비한 기도를 글로 써서 미리 해 보고 보완하는 것이 횡설수설하거나 불필요한 머뭇거림과 잘못된 억양의 버릇을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말할 때의 안 좋은 대표적인 버릇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바로 머뭇거림(‘음’, ‘아’ ‘에’ 등 어미가 없는 음과 말을 사용하는 것)과 억양의 버릇(어미를 길게 빼면서 발음하거나 어미를 올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버릇이 왜 안 좋을까? 일단 자신감이 없고 지식이 부족한 인상을 준다. 말을 할 때마다 ‘음’, ‘아’ ‘에’ 하는 불필요한 소리를 내는 사람의 말은 듣는 사람이 집중하기 힘들고, 정신적으로 상당히 긴장되며, 귀에 거슬린다. 의사의 설명을 예로 든 것을 보자.
“음∼ 그러면∼ 일단 오늘 처방대로 약을 좀 먹고∼음∼ 한 이틀 정도 있다가∼ 에∼ 그때도 아프면 다시 병원에 나와요.”
환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했어도, 의사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환자는 알기 쉽기는커녕 귀에 거슬려서 짜증이 날 것이다. 말할 때의 안 좋은 버릇은 많든 적든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지만, ‘이것은 버릇이니까’라고 그냥 방치하다 보면 ‘어떻게 하면 설명을 잘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 쓸데없는 노력이 된다. 환자만 아니라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도, 그리고 기도를 할 때도 좋지 않은 버릇은 없는 편이 좋다.
기도는 엄위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까 책임 있게 준비하여 드릴 필요가 있다. 임금님 앞에 나아가서 무슨 이야기를 한다고 하면 사전에 얼마나 준비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겠는가. 하나님은 임금님보다 훨씬 엄위하시고 크신 분이시니 두려운 마음으로 나아가서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서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다. 항상 하는 것이니 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서 더듬거리거나 중언부언하거나 생각이 안 나면 ‘하나님 아버지’ 혹은 ‘주여’만 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주여” “주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이제” “참” “참으로” “진실로” “아/어/에/음~” 같은 불필요한 말을 반복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이런 말을 너무 자주 반복하면 기도 시간에 그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지 그 수를 세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사전에 잘 준비하여 글로 적어서 하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말 한마디 하고 나서 ‘하나님’을 부르고, 말 한마디 하고 나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집에서 아버지나 어머니와 이야기를 하면서 말 한마디 하고 나서 ‘아버지/어머니’라고 계속 부르면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일반적인 발표의 방법에 대한 좋은 내용을 읽었는데 어떤 것은 기도를 준비하여 연습(?)할 때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 첫 번째는, 원고를 소리 내어 지속적으로 읽는 것이다.
* 두 번째는, 원고의 핵심 포인트를 형광펜으로 칠하는 것이다.
* 세 번째는, 미리 발표 장소에 도착하여 연습하는 것이다.
* 네 번째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 보는 것이다.
* 다섯 번째는 거울을 보고 연습을 해 보는 것이다.
* 여섯 번째는 녹음을 하거나 녹화를 해 보는 것이다.
* 일곱 번째는 발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점을 지적받는 것이다.
* 녹음이나 녹화를 하여 관찰할 때 신경 써야 할 부분은 발음의 명료도, 소리의 크기, 말의 속도, 그리고 소리의 변화이다. 즉 발음이 똑똑한가? 목소리의 크기가 적절한가? 말의 속도가 적절한가? 목소리에 변화가 있는가?를 잘 살펴보고 고칠 부분을 고쳐가면서 보다 완전한 발표를 준비하도록 한다.
일반적으로 발표를 하거나 유튜브를 찍는 사람들의 완성도는 대단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나 대표 기도자의 기도가 좀 더 잘 준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농협대학이나 평생교육원에서 강의를 받을 때도 강사들의 강의가 대단히 훌륭하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교회에서 목회자들이나 직분자들, 교사들의 실력도 충분히 훌륭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기도를 생각하다가 조금 곁길로 간 것 같은데 너무 ‘오만한’ 마음으로 별로 준비가 되지 않은 대표기도를 드린다면 듣는 교인들, 특히 청소년들은 마음에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울 때가 많기에 그냥 적어보았다. 다음의 말씀이 정확히 여기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인지는 몰라도 좋은 자극을 준다고 보여지기에 옮겨 적으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아가페적 사랑의 탁월성만 아니라 대표 기도의 탁월성도 생각해 보면서.
죤 죤스톤의 『가장 멋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중에서(생명의 말씀사 p203)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탁월성 가운데서 성장하게 되면 평범한 데서는 점차 멀어지게 된다. 우리의 삶은 성취감과 의미와 기쁨과 평화로 가득 차게 된다. 우리의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이 되고, 우리의 보상이 그분의 보상이 된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 탁월성의 기치를 하늘 높이 올리고 그 기치를 꽉 붙잡도록 하자. 오늘과 내일뿐 아니라 영원토록. 이렇게 되면 세속적 탁월성에 매료된 이 세상은 점차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진 탁월성, 진정한 아가페적 사랑의 탁월성에 더 크게 매료될 것이다. 이 신적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우리 마음 가운데 심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