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남력(orientation) 이야기
동화작가 겸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는 문영숙(1959)은 지난 1996년에 시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다.
광복이 되던 해 혈혈단신으로 삼팔선을 넘어왔던 시어머니는 단옷날만 되면 가족들이 아무리 말려도 강릉까지 가서 단오절 행사의 하나인 그네뛰기 대회에 참가하고 평소 성품이 올곧아 자신의 주장을 굽히는 적이 없었을 정도로 대범한 분이었다. 군인사회에서 일방적 명령만 하던 예비역 장교출신의 시아버지도 일상에서는 늘 시어머니의 의견을 따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강한 시어머니에게도 한 가지 취약점이 있었다. 심한 건망증이다.
"시집살이 초기에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어머님의 건망증이었는데요. 제가 결혼하던 해 어머님 연세가 갱년기를 갓 넘겼을 때였으니까 보통의 주부건망증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머님은 젊었을 때부터 다른 사람보다 건망증이 훨씬 심하셨대요. 제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물건을 잃어버리는 단순한 건망증보다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보이는 당신의 행동이었고요."
보통 사람들은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찾지 못하면 먼저 주변을 탐색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물으며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그녀의 시어머니는 달랐다. 찾는 물건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누군가 가져간 것이라고 의심부터 하기 일쑤였다. 지갑 속 돈이 사라졌다며 야단법석을 떠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매 번 의심부터 받고 억울한 해명을 해야 했던 며느리의 맘고생은 심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분노가 치솟기도 했다. 시집살이의 육체적 고통보다도 심적 고통이 몇 배는 훨씬 컸다.
그녀와 가족은 시어머니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지켜본 결과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병원을 찾게 됐다. 의사는 시어머니의 증상에 대해 기질성 우울증 및 노인성 치매라는 진단을 내렸다.
건망증은 치매와는 다르다. 그런데 건망증이 심하게 나타나면 치매를 의심하게 마련이다. 건망증과 치매를 확실하게 구분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지남력이라는 게 있다. 지남력을 상실하면 치매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간과 공간 감각의 소실이 생기는 경우이다.
가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가게에서 사야 할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건망증일 수 있으나 치매환자들은 자주 다니던 곳에서 길을 잃고 어떻게 목적지에 가야 하는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와야 할지를 모른다.
지남력(orientation)이란 시간과 장소, 상황이나 환경 따위를 올바로 인식하는 능력이다.
시가지를 거닐다가 지금이 몇 시쯤인지, 거닐고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지금 무엇을 하러 시가지를 거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바로 지남력이다. 그들은 지금 그 자리가 시가지의 어느 부분인지를 알며, 동서남북 방위도 안다. 또 한 번 지나온 길은 잊지 않고 기억해낸다.
그러나 지남력을 상실한 사람은 그러하지 못하다.
정신력이 미치지 못하여, 방향감각을 잃거나 동서남북 방위를 측정하는 능력이 상실되었거나, 현재를 어린 시절로 착각한다거나 공원에 있으면서도 극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남력이 상실된 예이다.
치매환자는 지남력이 현저하게 상실되어 있는 것이다.
치매를 말한 김에 건망증과의 차이도 알아보자.
간혹 건망증이 오래 되면 치매가 된다는 속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건망증과 치매에 대한 개념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건망증이란 자신이 체험한 일 중에서 일부분만을 잊어버리는 것을 말하고, 치매는 자신이 체험한 일 자체를 완전히 잊어버리며 또한 본인이 건망증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가 간혹 비 오는 날 우산을 들고 나갔다가 집으로 들어올 때 우산을 잃어버리고 그냥 오는 경우가 있다. 이 때 “아! 맞아. 우산을 놓고 왔어.”라고 생각을 떠올릴 수 있으면 건망증이고, 우산의 존재조차 모르면 이는 치매에 가깝다.
건망증으로 착각하기 쉬운 초기 기억장애 환자 가운데 치매 증상이나 증후를 열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기억장애를 보인다.
가정이나 직장생활에 지장을 줄 만큼 약속, 마감일, 동료 이름 등을 자주 잊어버려 업무와 사회생활에 지장이 있다.
둘째, 익숙하게 잘하던 작업과 일에 장애가 발생한다.
건망증이 있는 사람은 음식을 태우거나 조리과정의 일부를 잊는 경우가 있으나, 치매환자는 아예 식사준비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기억해내지도 못한다.
셋째, 언어에 이상이 생긴다.
건망증 사람들은 정확한 단어를 생각해내지 못할 때가 있으나, 치매환자의 경우는 쉬운 단어를 잊어버리고 엉뚱한 단어를 사용하여 언어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넷째, 시간과 공간 감각을 상실한다.
가끔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가게에서 사야 할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건망증일 수 있으나, 치매환자들은 자주 다니던 곳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다섯째, 판단력이 저하된다.
추운 저녁에 가벼운 상의를 입거나 더운 날에 상의를 몇 개씩 껴입는 경우도 있다.
여섯째, 추상적 사고를 하지 못한다.
숫자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전에 잘하던 단순 계산도 전혀 못한다.
일곱째, 엉뚱한 곳에 물건을 둔다.
보통 지갑이나 열쇠를 둔 곳을 몰라 찾는 경우는 건망증에 속하지만, 치매환자는 물건을 엉뚱한 곳에다 두고 잊어버린다.
여덟째, 기분과 행동이 급변한다.
특별한 이유 없이 기분이 매우 빠르게 변하고 이를 그대로 표현한다.
아홉째, 갑자기 성격이 변한다.
치매환자는 매사에 의심하고, 화를 잘 내며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으로 돌변한다.
열 번째, 자발성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대개의 사람들은 하여야 할 일을 가끔 소홀히 하다가도 곧 일을 성실하게 계속하는 반면, 치매환자는 무관심해져서 평소에 추구하던 어떤 일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남력!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처해있는 공간을 인지하거나, 시간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상대방을 구체적으로 인지하는 능력.
동쪽을 의미하는 어원을 가지고 있는 'orientation'(지남력)을 우리말로 '지동(指東)'이라 하지 않고 '지남(指南)'이라고 한 데 대하여, 어떤 외딴 곳에 서면 우선 남쪽이 어디인지를 쉽게 알아볼 수 있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치매 증상이 아니라하더라도 우리는 가끔 지남력을 상실할 때가 있다. 어떤 위급한 상황에 놓이면 나아갈 방향을 바로 정하지 못하여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이 때 본인 스스로 지남력을 발휘하여 현명하게 대처해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의사가 환자를 진찰할 때 환자의 지남력을 검사하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다.
지남력은 자신이 놓인 상황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바르게 파악하여 이것과 관계되는 주위 사람이나 대상을 똑똑히 알아보는 것이다. 이 기능을 상실하면 정신적 장애가 발생한다.
이 세상에는 두뇌 기능이 멀쩡하면서도 지남력을 상실한 사람이 많으니 어이하면 좋을까!
(2011. 5. 16)
첫댓글 일찍 잠이들어 이른 새벽이라 생각하고 깨어보니 아직 자정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남곡님의 '심리방담' 글은 생활의 지침서 같은 내용이 많아 읽은후엔 방심했던
마음을 항상 추스리게합니다. '지남력 이야기' 또한 마찬가집니다. 남곡님께서 열거한
10개항 중 몇개가 나에게 해당되고 있으니...
이 세상엔 겉으론 멀쩡해도 지남력을 상실한 사람이 부지기수인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관료들 중 이에 해당된 자가 많다고 난 생각하고 있답니다.
남곡님! 오늘 그 와중에도 껄껄 웃음짓는 여유가 부러웠습니다. 속히 쾌차하시길...
시내 인터넷을 이용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김충곤형님,김신운교수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