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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慶尙道) 영천군(永川郡)
樂民 장달수
경상도(慶尙道) 영천군(永川郡)
동쪽으로는 경주부(慶州府) 안강현(安康縣) 경계까지 42리요, 남쪽으로는 같은 부(府) 자인현(慈仁縣) 경계까지 33리요, 서쪽으로는 하양현(河陽縣) 경계까지 23리요, 북쪽으로는 임내 신녕현(任內新寧縣) 경계까지 25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절야화군(切也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임고(臨皐)로 고쳤고, 고려 초년에 도동(道同)ㆍ임천(臨川) 두 고을을 합쳐서 영주(永州) 고울부(高鬱府)라고도 한다. 라고 고쳤다. 성종(成宗)이 자사(刺史)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경주(慶州)에 붙였고,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뒤에 승격시켜서 지주사(知州事)로 삼았으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삼았다.
【속현】 신녕현(新寧縣)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사정화현(史丁火縣)으로 또는 화산(花山)이라고도 하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임고군(臨皐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이 경주부(慶州府)에 붙였고,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치고 치소를 장수역(長壽驛)으로 옮겼다. 금상(今上) 3년에 현의 아전들이 현감 길수(吉脩)의 엄하고 사나운 것을 싫어해서 고을을 비우고 도망하니, 이를 없애어 군(郡)에 붙이고 북면 신촌리(新村里) 땅을 베어서 의성(義城)에 붙이고, 남면 이부현(梨阜縣) 땅은 하양(河陽)에 붙이고, 서면 치산리(雉山里) 땅은 의흥(義興)에 붙였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절야화(切也火)ㆍ임고(臨皐)ㆍ영주(永州)ㆍ익양(益陽)ㆍ영양(永陽)ㆍ고울(高鬱).
【성씨】 본군 황보(皇甫)ㆍ이(李)ㆍ윤(尹)ㆍ신(申), 송(宋)ㆍ김(金)ㆍ극(克)ㆍ유(兪)ㆍ최(崔)ㆍ심(沈) 모두 내성(來姓)이다. 이(李)ㆍ박(朴)ㆍ정(丁)ㆍ사(史) 신녕(新寧).
【풍속】 풍속은 평이한 것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형승】 청계석벽(淸溪石壁)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있다. 이수삼산(二水三山)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흰 구름 누른 학은 몇몇 때나 돌아왔나. 이수(二水)와 삼산(三山)이 차례로 열려있네.” 하였다. 형세웅반(形勢雄盤) 정조(鄭慥)의 시에 있다.
【산천】 모자산(母子山) 고을 북쪽 90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사룡산(四龍山) 고을 남쪽 50리에 있다. 채약산(採藥山)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금강산성(金剛山城)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공산(公山)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대구부(大丘府) 조에도 있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지팡이 끌고 제일 높은 데 올라갔다 돌아오니, 산에 오른 지 반나절에 귀밑머리 희어졌네. 하늘이 얕고 바다는 넓어 땅이 없는가 의심스럽고, 안개는 흩어지고 구름이 열리더니 갑자기 산이 있네. 위태로운 길 구불거려 마치 촉(蜀) 땅 가는 길 같고, 여러 봉우리 높고 높아 진(秦) 나라 관(關)과 같네. 우리들은 이미 집에 전해 오는 훈계를 알거니, 무슨 일로 지금같이 위험한 일 당하는가.” 하였다. 작산(鵲山) 고을 남쪽 6리에 잇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이 고을의 지형이 나는 봉(鳳)과 같다.” 하는데, 봉은 대나무를 사랑하고, 또 까치가 지저귀고 날아가지 않는 것을 보았으므로 산의 이름을 작(鵲)이라 하고 또 죽방(竹防)이라고도 한다. 죽방산(竹防山) 고을 남쪽 9리 떨어진 곳의 남천(南川)과 북천(北川) 두 물 어구에 있다. 청경산(淸景山)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보현산(普賢山) 혹은 모자산(母子山)이라고도 하며, 신녕현(新寧縣) 북쪽 30리에 있다. 화산(花山) 신녕현 북쪽 3리에 있다. 유현(柳峴) 고을 남쪽에 있으며, 청경산에서 나와서 명원루(明遠樓) 밑을 거쳐서 북천과 합하여 흘러 가다가 하양현(河陽縣) 남천이 되었다. 북천 고을 북쪽 6리에 있는데, 모자산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청통역(淸通驛)에 이르고 남쪽으로 남천과 합해서 동경도(東京渡)가 되었다. 이 고을이 두 물이 합류하는 곳에 있기 때문에 영천(永川)이라고 이름했으며 영(永) 자는 이수(二水)를 뜻한다. 범어천(凡魚川)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그 근원이 사룡산(四龍山)에서 나와서 동경도(東京渡)로 들어갔다. 자을아천(茲乙阿川) 옛날 신녕 북천 상류에 있다. 서천(西川) 신녕현 서쪽 1리에 있는데, 공산(公山)에서 흘러나와서 고을 북천과 합하여 흐른다. 시천(匙川) 고을 서쪽 16리에 있는데, 근원은 공산에서 나와서 하양현 남천 상류로 들어갔다. 동경도(東京渡)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청천지(菁川池)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신증』 병풍암(屛風巖)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토산】 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왕골[莞草], 입초(笠草) 풀로 갓을 만들 수 있다 해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 산수유(山茱萸)ㆍ인삼(人蔘)ㆍ복령(茯笭), 철(鐵) 고을 동쪽 건천(乾川)에서 난다. 잣[海松子]ㆍ지치[紫草]ㆍ옻[漆]ㆍ지황(地黃)ㆍ맥문동(麥門冬).
【봉수】 방산 봉수(方山烽燧) 고을 동쪽 13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경주 주사산(慶州朱砂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성황당(城隍堂)에 응한다. 소산 봉수(所山烽燧) 고을 동쪽 47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경주 안강현(慶州安康縣) 형산(兄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성황당에 응한다. 성산 봉수(城山烽燧) 고을 서쪽 23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성황당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의흥현 여질동산(義興縣餘叱同山)에 응한다. 성황당 봉수 고을 서쪽 10리에 있으며, 동쪽으로 소산과 방산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하양현 시산(河陽縣匙山)과 이 고을 성산에 응한다.
【누정】 명원루(明遠樓) 객사 동남쪽에 있으며, 삼면이 모두 넓고, 아래에는 큰 냇물이 있어 남쪽으로 흐른다. ○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맑은 시내 석벽이 이 고을을 안고 돌다가, 다시 새로운 누각이 우뚝 섰는데 눈이 훤하게 열리네. 남쪽 밭두둑 누른 구름은 곡식 익은 것 알겠고, 서쪽 산 모퉁이 시원한 기운 아침이 분명하구나. 풍류있는 태수는 2천 석이고, 잠깐 만난 옛 친구 술이 3백 잔일세. 밤은 깊은데 옥피리 불며불며, 높이 밝은 달 휘어잡고 함께 배회하고 싶네.” 하였다. ○ 고려 최원우(崔元祐)의 시에, “날마다 여기 올라 돌아가기를 잊었으니, 눈에 띄는 기이한 경치 차례로 열려오네. 어느 곳 먼 멧부리 구름밖에 나와 있고, 때때로 날려오는 빗방울 들 가에 떨어지네. 서늘한 저녁 무렵 기둥에 의지하니 바람이 모자에 불고, 고요한 밤에 퉁소를 부니 달빛은 술잔에 가득하네. 흐르는 물 또한 사람이 사랑함을 알아서, 누 앞에 바싹 와서 일부러 배회하네.” 하였다. ○ 이용(李容)의 시에, “새로운 누각 우뚝한데 나는 새 돌아오고, 여기 오르니 좋은 회포 저절로 열려오네. 딴 고을 사는 옛 친구 다시 만나기 어렵고, 올해의 오늘은 다시 오지 않는다네. 시내가 비었으니 물 그림자는 노래하는 부채를 흔들고, 산이 가까우니 가을 빛은 술잔에 떨어지네. 2년 동안 적은 녹봉으로 무슨 일을 이루었는가. 천 리 밖에 혼자 서서 부질없이 배회하네.” 하였다.
『신증』 서거정(徐居正)의 기문에, “영천(永川)은 경상도에서 제일 아름다운 군으로서 우리 고향 대구와 멀지 않다. 무진년에 내가 태수 손선생(孫先生) 사성(士成)을 뵙고 말하기를, ‘이 군(郡)을 영(永)이라고 일컫는 이수에서 취한 뜻이니, 대개 이수(二水)는 근원이 모자산(母子山)에서 나와서 두 갈래로 나뉘어 다시 꺾어져 남쪽으로 흐르다가 이 고을 앞에 이르러 하나로 합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입니다.’ 하였다. 선생이 나를 끌고 높은 데 올라 바라보매, 내 시험삼아 좋은 산천의 경치를 대략을 그리고 여기에 누(樓)까지도 써 보았으나 몹시 화려한 글이 되지 못했다. 그 뒤 임오년 가을에 내가 사신이 되어서 영지군(永知郡)에 이르니, 지군(知郡) 김선생(金先生)이 나를 맞아 함께 누각에 올라 종일토록 술 마시고 글을 읊었다. 누의 건물이 크고 넓으며 단청 빛이 아름다워 옛날과 다르니, 이는 전 태수 정차공(鄭次恭)공이 중수한 것이다. 을미년에 내가 사신이 되어 다시 이곳에 왔었고, 그 뒤 무술년 가을에 남도(南道)를 순찰하면서 이름난 누각을 두루 찾았으니, 진주(晉州) 촉석루(矗石樓)ㆍ안동(安東) 영호루(映湖樓)ㆍ밀양(密陽) 영남루(嶺南樓)ㆍ울산(蔚山) 대화루(大和樓)ㆍ양산(梁山) 쌍벽루(雙碧樓)ㆍ김해(金海) 연자루(燕子樓) 등은 모두 이름난 곳들인데 이 누의 경치도 또한 이 누각들과 비슷할 뿐 아니라, 명원루가 오히려 나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재상 김극련(金克鍊)후가 번잡한 일을 잘 처리하는 재능이 있어 동서쪽의 별실을 고쳐 지었는데, 모양을 옳게 하였기로 내 몹시 칭찬했었다. 그 뒤 오래 되어 임인년 가을에 신윤종(申允宗)후가 원으로 나갔는데, 부임한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정치가 잘 되고 사람들이 화합하여 까다롭게 하지 않고서도 저절로 엄하게 되었다. 이에 동쪽 별실을 고쳐 짓고 거기에 조그만 마루를 붙여 지어서 이름을 청량당(淸涼堂)이라고 하였다. 또 서쪽 별실을 만들어 크게 마루를 붙여 지은 다음, 이것을 쌍청당(雙淸堂)이라고 했는데 모두 몹시 정미했다. 을사년에 개연히 이 누를 새로 고칠 생각이 있어 낡은 곳을 보충하고 찌그러진 곳은 고치며, 또 단청을 새로하니 정하고 빛나기가 전보다 백 배는 더했다. 따로이 포주(庖廚) 아홉을 만드니 누각의 제도가 이에 이르러서 크게 고쳐졌다. 그 동안에 조카 팽소(彭召)가 나에게 기문을 쓰기를 청하기로 나는 말하기를, ‘이 명원루가 생긴 지 이미 오래라서 고려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 고을을 지난 사람으로 영웅 호걸과 문인 재사(才士)가 그 몇 명인지 알지 못하건만 아직까지 기문을 지은 이가 없었는데, 내가 어떤 사람이길래 뻔뻔스럽게 이를 짓겠는가.’ 하고 여러 날을 끌어 왔었다. 이제 다시 누차 청하니 사양할 길이 없어 이에 기문을 쓰는 것이다. 내 일찍이 명원(明遠)의 뜻을 이 고을의 한두 부로들에게 물었더니 절간의 복잡한 말을 하므로 나는 한 번 웃고 그만두었다. 내 생각건대 한유(韓愈)의 시에, ‘먼 곳을 보는 눈이 쌍으로 밝은 것을 더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명원의 뜻은 혹시 여기에서 나온 것인가. 보건대 그림 그린 기둥, 나는 듯한 대들보와 겹으로 된 처마, 구부러진 난간이 팔면으로 활짝 열려 있어 사방에서 바라다 보아도 모두 통해서 명랑하고 상쾌하며, 크고 넓어서 위로 하늘에 닿아 별을 딸만하고 아래로 땅에 닿지 않았는데, 맑은 냇물을 움킬 만하다. 하늘과 땅이 맑고 편안하며 바람과 달이 활짝 개서 사계절의 아침과 저녁이 광명하고 맑은 기운이 길이길이 발과 책상 가운데 있고, 풍속의 티를 벗어나고 세상 티끌을 끊어 한 점 티도 그 사이에 없으니 이른바 명(明)이라는 것이요, 바라다보면 모든 산이 둘러싸이고 여러 산봉우리가 높고 높아서, 푸르게 튀어나고 푸르게 솟아 있는 것이 연기와 구름 아득한 안개 속에 출몰하여 저 멀리 몇 백 리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다. 긴 숲과 큰 들판은 꾸불꾸불 평탄하며, 누른 밭두둑 푸른 풀밭은 가로세로 뻗쳐 있어 하늘이 길어도 끝이 없고 새가 날아도 다하지 못하여 저 멀리 그 끝간 데를 알지 못하겠으니, 이른바 원(遠)이라는 것이다. 이 누에 오른 이는 장막속에 칼을 차고 창을 든 대부가 아니면 반드시 진신(搢紳)의 의관을 한 군자들로서, 모두 고명하고 원대한 의견이 있는 사람들이라, 눈을 들어 멀리 명원한 뜻을 보게 되니, 반드시 마음으로 터득하고 스스로 얻을 것이다. 전후에 원이 된 자가 또한 모두 밝게[明] 판단한는 재주와 크고 먼[遠] 그릇이 있어서, 비록 조그만 일을 경영하는 데도 역시 여러모로 계획해서 혹은 보충하고 혹은 더하며, 혹은 수리하고 혹은 고쳤으니, 그 마음 쓰는 것이 역시 부지런하지 않은가. 아, 명원이란 뜻을 크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막힌 데를 보면 밝지 못하고 밝지 못하면 멀지 못할 것이니, 군자가 고명(高明)하고 궁원(窮遠)한 데 거하여 먼데를 보는 것이 오직 밝은 연후에라야 가히 이치가 통달하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니, 누라고 유독 그렇지 않겠는가. 신후(申侯)가 군을 다스린지 6년에 여기에 종사해서 정치를 잘한다고 조정에 알려지자 칭찬하고 멀지 않아 불러 들이게 되었으니, 명성이 더욱 밝게 나타나고 먼 곳에 전해졌음이 의심 없을 것이다. 내가 태사(太史)의 장(長)이 되었으니 불가불 대서특필하여 찬미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우선 이렇게 써서 기문을 삼노라.” 하였다.
이요루(二樂樓) 보통원(普通院)에 있다. 동수루(東水樓) 고을 서쪽 청통역(淸通驛)의 동남쪽 절벽 위에 있다. 두 물이 그 남쪽으로 합하여 흐른다. 문회루(文會樓) 남정원(南亭院)에 있다. ○ 최원우(崔元祐)의 시에, “숲 밖엔 긴 내요, 들 밖엔 산인데, 누에 의지하여 사람은 그림 속에 있구나. 이미 재주 있는 사람들 올라보는 곳에, 구름과 물건 천년에 정히 한가하지 않네.” 하였다.『신증』 청량당(淸涼堂) 명원루 동쪽에 있다. ○ 조위(曹偉)의 시에, “새로이 화려한 집을 지어 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내 여기 올라서서 있은 지 오래어라. 더운 바람 꽃다운 풀 개인 냇물 멀었고, 떨어지는 해 외로운 구름 새만 홀로 날고 있네. 산 안개 몽롱하여 주렴밖에 떨어지고, 버들 꽃 어지러이 모자 가에 불어오네. 밤이 깊자 달이 난간 위에 올라오니, 한결같은 청량(淸涼)한 맛 홀로 알고만 있네.” 하였다. 쌍청당(雙淸堂) 명원루 서쪽에 있다.
【학교】 향교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청통역(淸通驛)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청경역(淸景驛) 고을 동쪽 38리에 있는데, 옛날에는 신역(新驛)이라고 일컬었다. 장수역(長壽驛) 신녕현(新寧縣) 서쪽 5리에 있는데 군에서의 거리가 42리이다. 찰방(察訪)이 있고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이 14이니, 청통(淸通)ㆍ아화(阿火)ㆍ모량(毛良)ㆍ사리(沙里)ㆍ압량(押梁)ㆍ우곡(牛谷)ㆍ부평(富平)ㆍ청경(淸景)ㆍ구어(仇於)ㆍ화양(華陽)ㆍ의곡(義谷)ㆍ인비(仁庇)ㆍ경역(鏡驛)ㆍ조역(朝驛)이다. ○ 찰방 1인. 제천원(濟川院)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적률원(赤栗院)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요간원(要看院) 고을 동쪽49 리에 있다. 오읍포원(烏邑浦院)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신원(新院) 고을 동쪽 28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임하원(臨河院)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길상원(吉祥院) 고을 서쪽 10리에 있다. 시천원(匙川院)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영등원(永登院) 고을 북쪽 24리에 있다.
【불우】 정각사(鼎脚寺)ㆍ공 덕사(功德寺) 모두 모자산(母子山)에 있다.『신증』 운부사(雲浮寺)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혼자서 운부사를 찾아가니, 중의 방 고요해서 의지할 만하네. 골짜기 깊어 수레와 말이 적고, 중은 늙어 해는 더디 가네. 대나무 그림자 빈 걸상을 침노하고, 솔바람은 엷은 옷에 불어오네. 산신령 응당 어둡지 않으니, 집 짓는 것이 필경 시기대로 될 것이다.” 하였다. 백지사(柏旨寺) 『신증』유방선의 시에, “병을 피해서 산사에 와 있으니, 산중 일마다 신기로워라. 들나물 밥 싸먹기 부드럽고, 시내 고사리 국 속에 살쪄 있네. 방이 따뜻하니 아침 잠 편안하고, 등잔불 밝으니 밤 이야기 늦었어라. 중과 같이 있으니 마음 속되지 않아, 반쪽 달에 돌아갈 것 잊었네.” 하였다. 거조사(居祖寺)ㆍ은해성(銀海城)ㆍ원명사(圓明寺)ㆍ안흥사(安興寺)ㆍ상원사(上元寺) 모두 공산에 있다. 죽방사(竹防寺) 죽방산에 있다. 부귀사(富貴寺) 공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여단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태조지(太祖旨) 고을 서쪽 3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해서 퇴병하여 공산 밑 한 조그만 봉우리에서 보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영주성(永州城) 남정원(南亭院) 서쪽에 있는데, 고려 고종(高宗) 때에 동경적(東京賊) 최산(崔山)과 이유(李儒)가 난을 꾸미므로 임금이 이자성(李子晟)을 보내서 치게 했다. 자성이 밤을 세워 달려가서 영주성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적이 자성의 군사가 먼데서 급히 왔다하여 그 군사가 피로했을 때를 타서 공격하고자 하여 남교(南郊)에 주둔했다. 관군이 성에 올라 이것을 바라보다가 자성에게 고하기를, “우리 군사가 더위를 무릅 쓰고 멀리 왔고 적의 형세는 성하고 또 날카로워 가히 적을 당하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성문을 닫고 군사를 쉬게 했다가 며칠 후에 그들과 싸우게 하옵소서.” 했다. 자성이 말하기를, “그것은 옳지 않다. 대체 피로한 군사가 쉬게 되면 더욱 게을러진다. 만일 여러 날을 끌게 되면 적이 우리 실정을 알게되어 딴 변이 생길까 두려우니 급히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문을 열고 뛰쳐나가서 적이 진을 치기 전에 급히 쳐서 크게 격파하니 적의 시체가 수십 리에 깔렸다.
고읍성(古邑城)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기문에, “《춘추》에 성에 대해 쓴 것이 24곳이 되는데, 모두 허여하지 않는 것은, 곧 시기가 아니요 의리에 해로우며 또 그 제도가 아니라 해서 그런 것이다. 비록 그렇지 않더라도 또한 쓴 것은 백성을 수고롭게 한 것을 중한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공자(孔子)가 지금 세상에 났더라도 성이 제도에 어긋나지 않고 역사가 때를 어기지 않았으며 일이 의리에 맞게 되면, 반드시 특별히 써서 상주고 아름답게 여길 것이니, 어찌 그대로 두고 말겠는가. 임술년 봄에 이지중(李止中)후가 나가서 영주(永州)를 다스릴 때,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왜적이 침입해 왔다. 이 뒤로 모두 36차례나 계속하여 침입해오니, 영주 백성들이 모두 강을 건너 서쪽으로 도망해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면서, 동쪽으로 돌아올 뜻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가 이 성을 쌓는다는 말을 듣자 서로 이끌고 와서 역사에 참여하여 얼마 안 되어 성이 이루어졌다. 때에 마침 난리가 있으므로 이후는 지킬 준비를 한 다음 무리에게 명하여 성으로 들어가 군사를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으니, 인심이 이미 견고해져서 적들이 어찌하지 못했다. 역사는 늦은 가을에 시작하여 중동(仲冬)에 완성했으니, 진실로 그 때를 얻었다 할 것이요, 편안한 도민들로 하여금 그 수고로움을 잊게 하여 급하고 빠르지 않게 하였으니, 의리가 진실로 그 속에 있다 할 것이요, 3리밖에 되지 않는 성이 백치(百雉)에 지나지 않으나 또한 제도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가 없다. 이 세 가지가 이미 갖추어졌는데 당시 세상의 태사씨(太史氏)가 영주의 성을 쓸 줄을 모른 것은 잘못이 아닌가. 성을 쓴다는 것은 옛 법을 완전히 하는 것이요, 쌓은 걸 쓰는 것은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니, 이 성은 우연히 이후의 손으로 이루어져서 일시의 계획과 터를 닦는데 비로소 옛 기물(器物)을 얻었으니 반드시 그 옛터라고 한다면 단연코 이 성을 써야 할 것이다. 성은 고을 서쪽 청통역(淸通驛) 위에 있는데, 3면이 높고 끊어져 있으며 오직 남쪽만이 올라갈 수 있다. 이후는 나와 동방급제(同榜笈第)한 벗으로 그가 이런 큰 역사를 했다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또 아무런 허물도 짓지 않았다 하기로, 그 기문을 구하는데 있어 감히 내가 글이 졸렬하다고 해서 사양하지 못했노라.” 하였다.
도동폐현(道同廢縣)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본래 신라 도동화현(刀冬火縣)이니, 경덕왕(景德王)이 고쳐서 도동(道同)이라 하여 임고군(臨皐郡)의 영현을 삼았었는데, 고려 초년에 인하여 소속시켰다. 임천폐현(臨川廢縣) 본래 골화소국(骨火小國)인데 신라 조분왕(助賁王) 때에 이곳을 쳐서 빼앗아 가지고 현(縣)을 두었었다. 경덕왕이 임천(臨川)으로 고쳐서 임고군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초년에 인하여 붙였으니 고을 동남쪽 5리에 있다. ○ 김유신(金庾信)이 고려를 칠 계획으로 골화관(骨火館)에 나와 잤는데 바로 이곳이다.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있다. 면백현(黽白縣) 본래 신라의 매숙차현(買熟次縣)이던 것을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신녕현(新寧縣)에 소속시켰다. 전하(殿下) 6년에 와서 붙였다. 고신녕(古新寧) 신녕현(新寧縣) 동쪽 25리에 있다.
【명환】 본조 정차공(鄭次恭).
【인물】 고려 황보능장(皇甫能長) 태조(太祖) 때 사람이며, 금강성장군(金剛城將軍)이 되어 공이 있다. 자기가 일으킨 땅 골화(骨火)ㆍ도동(道同) 등 현을 합쳐서 영주(永州)를 만들었다.본조 이승손(李承孫) 세종조(世宗朝) 때 과거에 뽑혀 벼슬이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성정(成靖)이다. 이응(李膺) 과거에 뽑혀 벼슬이 병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정경(貞景)이다. 이순몽(李順蒙) 응(膺)의 아들인데, 벼슬이 영중추원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이종검(李宗儉)ㆍ이종겸(李宗謙) 경기 용인(京畿龍仁) 우거(寓居) 편에 자세하다.
【우거】 고려 정몽주(鄭夢周) 고을 동쪽 우항리(亐項里)에서 났으며, 영일(迎日) 인물(人物) 편에 자세하다.
【효자】 본조 이감(李敢) 벼슬이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이르렀다. 부모를 위하여 여막에서 3년을 사니 선덕(宣德) 병오년에 정문을 세웠다. 양배(楊培) 벼슬이 동래 병마사(東萊兵馬使)에 이르고, 부모를 위하여 3년 동안 여막에서 살아서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문을 세웠다.
『신증』 【열녀】 본조 이씨(李氏) 권성필(權成弼)의 아내이다. 연산조(燕山朝) 때 남편이 죽임을 당하자 이씨는 관비(官婢)로 있으면서 자기 남편이 죄 없이 죽었다하여 일찍이 자결하려 하는 것을 그 어머니가 말렸었다. 사람이 그를 겁탈하려하였으나 이씨는 항상 조그만 칼을 차고 자기 몸을 방비해서 마침내 범하지 못했다. 금상(今上) 2년에 정문을 세웠다.
【제영】 누고옥적성요두(樓高玉笛聲搖斗) 이징(李澄)의 시에, “누가 높아 옥피리 소리 별을 흔들고, 하늘이 가까우니 달 그림자 술잔에 거꾸러지네.” 하였다. 차어소점연롱저(叉魚小店煙籠渚) 정조(鄭慥)의 시에, “고기 잡는 조그만 주막 연기가 물가에 덮여 있고, 손님을 대한 높은 마루에 달이 술잔에 들어오네.” 하였다. 야평운츤지(野平雲襯地)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들이 평평하니 구름이 땅에 가깝고, 내가 머니 물이 하늘에 떴네.” 하였다. 강류부진겸천거(江流不盡兼天去)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강 흐름이 다하지 않아 하늘과 함께 가고, 산 빛 평평하게 나뉘니 땅을 말아 오네.” 하였다. 여염희소불의군(閭閻稀少不宜郡) 유방선의 신녕현(新寧縣) 시에, “민가가 드물게 있으니 고을 되기 마땅치 않고, 수목이 울창하니 도리어 마을과 같네.” 하였다. 계도누전각불류(溪到樓前却不流) 홍여방(洪汝方)의 신녕현 시에, “시내가 누 앞에 이르러 문득 흐르지 않고, 빙빙 돌아 맑게 머무는 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제 마음은 이로부터 가득 찬 뒤에 흐르려 함이라. 이름 내기 급급해 하는 것 비웃는 듯하네.” 하였다. 계함월색정진심(溪涵月色淨塵心) 윤자영(尹子濚)의 신녕현 시에, “이른 저녁 찬 매미 먼 숲에서 울제, 앉아 있노라니 풍치가 족히 옷깃을 열어주네. 주원(周原)에는 감히 황화(皇華)의 시를 이었고, 선보(單父)에는 오히려 복천(宓賤)의 거문고를 자랑하네. 대나무는 가을 바람 이끌어서 손의 꿈을 맑게 하고, 시내는 달빛을 머금어 세상 마음 씻어주네. 고향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취미 많으니, 우습다, 장생(莊生)의 월음(越吟)을 읊음이여.” 하였다. 요체만환소소계(繞砌灣環小小溪) 서거정의 신녕현 시에, “뜰을 두르고 언덕을 감아돈 조그만 시내에, 만 줄기 푸른 대나무 가지가 나지막 해라. 한 마루 정다운 생각 물보다도 맑으니, 가지가지 그윽한 새들 제 멋대로 울고 있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내동(內東) 끝이 10리이다. 내서(內西) 끝이 10리이다. 완산(完山) 동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이다. 추곡(追谷)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30리이다. 고촌(古村) 동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이다. 원당(元堂)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칠백(七百)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거여(巨餘) 서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이다. 고현(古峴) 서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이다. 북습(北習) 서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이다. 산저(山底) 서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5리이다. 아천(阿川)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즐림(櫛林) 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명산(鳴山)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5리이다. 자천(慈川) 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80리이다. 구천(仇川) 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1백 리이다. 비태곡(比台谷)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후곡(厚谷) 처음은 30리, 끝은 50리이다. 부곡(釜谷) 처음은 15리, 끝은 25리이다. 모사동(毛沙洞)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창수(蒼水) 처음은 20리, 끝은 30리이다. 환귀(還歸)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이다.
【성곽】 읍성(邑城) 선조(宣祖) 24년에 쌓았다. 둘레 1천 9백 2척이며 우물 세 개가 있다. 고읍성(古邑城) 서쪽 2리에 있는데, 고려 신우(辛禑) 8년에 쌓았다. 둘레가 1천 3백 척이며, 우물 세 개가 있다. 임천고현성(臨川古縣城) 남정원(南亭院) 서쪽에 있는데, 읍에서 동남쪽으로 5리 떨어져 있다. 고려 고종 20년에 이자성(李子晟)이 이 성에 의거하여 동경(東京)의 적을 대파하였다. 금강성(金剛城) 동쪽에 옛터가 있는데 곧 동현성(同縣城)이라 일컫는다.
【봉수】 구토현(仇吐峴) 북쪽으로 20리에 있다.
【창고】 읍창(邑倉) 두 개가 있다. 북창(北倉) 동쪽으로 40리에 있다. 자창(慈倉) 북쪽으로 60리에 있다. 동창(東倉) 동쪽으로 30리에 있다. 남창(南倉) 남쪽으로 35리에 있다. 산창(山倉) 칠곡(漆谷) 가산산성(架山山城)에 있다.
【사원】 임고서원(臨皐書院) 명종(明宗) 을묘년에 세웠으며, 선조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정몽주 문묘 조에 보라. 황보인(皇甫仁) 자는 사겸(四兼)이요, 호는 지봉(芝峯)이며, 영천인(永川人)이다. 단종(端宗) 계유년에 화를 입었으며, 벼슬은 영의정이고,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장현광(張顯光) 성주(星州) 조에 보라. ○ 도잠서원(道岑書院) 광해주 계축년에 세웠으며, 숙종 무오년에 사액하였다. 조호익(曹好益) 자는 사우(士友)요, 호는 지산(芝山)이며, 창녕인(昌寧人)이다. 벼슬은 안주목사(安州牧使)였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永川郡
東至慶州府安康縣界四十二里,南至同府慈仁縣界三十三里,西至河陽縣界二十三里,北至任內新寧縣界二十五里。距京都六百八十七里。
建置沿革
本新羅切也火郡。景德王改臨皐。高麗初,以道同、臨川二縣來合,改永州。或云高鬱府。成宗置刺史,顯宗屬慶州。明宗置監務,後陞爲知州事。本朝太宗十三年,例改今名爲郡。
屬縣 新寧縣。
官員 郡守,訓導。各一人。
郡名
切也火,臨皐,永州,益陽,永陽,高鬱。
姓氏
本郡 皇甫,李,尹,申。宋,金,克,兪,崔,沈。竝來。李,朴,丁,史。新寧。
俗尙平易。觀風案。
形勝
淸溪石壁。鄭夢周詩。
二水三山。徐居正詩:“白雲黃鶴幾時迴?二水三山次第開。”
形勢雄盤。鄭慥詩。
山川
母子山。在郡北九十里。鎭山。
四龍山。在郡南五十里。
採藥山。在郡南十五里。
金剛城山。在郡東八里。
公山。在郡西三十里。又見大丘府。○柳方善詩:“策杖晨登至大還,攀緣半日鬢堪斑。天低海闊疑無地,霧散雲開忽有山。危棧縈紆同蜀道,衆峯迢遞想秦關。吾生已識垂堂戒,何事如今抵險難?”
鵲山。在郡南六里。俗傳郡地勢似飛鳳,鳳愛竹,又見鵲噪不飛去,故山名曰鵲,曰竹防。
竹防山。距郡南九里。在南川、北川二水
之口。
淸景山。在郡東三十里。
普賢山。一云母子山。在新寧縣北三十里。
花山。在新寧縣北三里。
柳峴。在郡東二十里。
南川。在郡南。出淸景山,經明遠樓下,與北川合流爲河陽縣南川。
北川。在郡北六里。出母子山西,至淸通驛南,與南川合爲東京渡。郡在二水合流之內,故名永州,永字乃二水也。
凡魚川。在郡東十里。其源出四龍山,入于東京渡。
玆乙阿川。在古新寧北川上流。
西川。在新寧縣西一里。流出公山,合流郡北川。
匙川。在郡西十六里。源出公山,入河陽縣南川上流。
東京渡。在郡南十里。
菁川池。在郡南十里。
〔新增〕 屛風巖。在郡西十五里。
土産
銀口魚,黃魚,蜂蜜,松蕈,莞草,
笠草,以草可造笠子,故名。山茱萸,人參,茯苓,鐵,出郡東乾川。海松子,紫草,漆,地黃,麥門冬。
烽燧
方山烽燧。在郡東十三里。東應慶州朱砂山,西應城隍堂。
所山烽燧。在郡東四十七里。東應慶州安康縣兄山,西應城隍堂。
城山烽燧。在郡西二十三里。東應城隍堂,北應義興縣餘叱同山。
城隍堂烽燧。在郡西十里。東應所山及方山,西應河陽縣匙山及郡城山。
樓亭
明遠樓。在客舍東南。三面敞豁,下有大川南流。○鄭夢周詩:“淸溪石壁抱州回,更
起新樓眼豁開。南畝黃雲知歲熟,西山爽氣覺朝來。風流太守二千石,邂逅故人三百杯。直欲夜深吹玉笛,高攀明月共徘徊。” ○高麗崔元祐詩:“登臨日日却忘回,傍眼奇觀次第開。何處遙岑雲外出?有時飛雨野邊來。晩涼倚柱風生帽,夜靜吹簫月滿杯。流水亦知人著愛,樓前直到故徘徊。” ○李容詩:“新樓突兀鳥飛回,懷抱登臨得好開。異縣故人難再會,今年此日不重來。溪虛水影搖歌扇,山近秋光落酒杯。五斗二年成底事?更堪千里獨徘徊。” 〔新增〕 徐居正記:“永,慶尙一道之美郡也,與吾鄕大丘不遠。歲戊辰,居正謁太守孫先生士晟,先生曰:‘稱郡曰永,取二水之義。蓋二水發源於母子山,分二派,折而南流,抵郡前,合爲一,所以揭號也。’ 先生拉予登高眺覽,予試得山川形勝之大槪,至於樓觀,不甚華藻。越壬午秋居正奉使到永,知郡金先生邀予登樓,觴詠終日。樓觀之制作,宏敞曠豁,丹碧昡曜,異於昔時,乃前太守鄭公次恭重
新也。於乙未居正奉使重過,越戊戌秋巡察南道,歷訪名樓。如晉之矗石、安之映湖、密之嶺南、蔚之大和、梁之雙碧、金之燕子皆各擅名,而斯樓形勝亦可伯仲於其間,明遠則過之。時宰金侯克鍊有盤錯之才,改構東西別室,體勢得宜,予嘖嘖稱賞久之。壬寅秋申侯允宗出宰,下車不數月,政通人和,不苛而嚴。改構東別室,翼以小軒,名曰淸涼堂;又闢西別室增大之,翼以小軒,名曰雙淸堂,皆極精微。乙巳慨然有重新斯樓之志,補殘理缺,又施丹堊,精彩百倍於前,別構庖廚九楹,樓之制至此大修。間因姪子彭召索予記,予以謂:‘明遠有樓已久。自高麗迄今,過是郡英雄豪傑、文人才士,不知其幾,而曾無題記。顧予何人,强顔爲之?’ 以此依違者有日。今復勤請,辭不獲已,乃言曰:‘予嘗問明遠之義於郡之一二父老,有佛宇荒雜之說,可付之一笑。予念韓愈詩有「遠目增雙明」之句,明遠之義,意或出此。觀夫畫棟飛甍,重簷曲欄,八面
洞開,四望皆通,明朗爽塏,宏敞曠豁。上磨于天,明星可摘;下臨無地,明川可掬。乾坤淸寧,風月光霽,四時朝暮光明瑩澈之氣,長在簾櫳几席之中,脫俗氛,絶纖埃,無一點瑕纇間於其間:此所謂明也。望之則群山繚繞,列嶽嵯峨,攢靑聳碧,出沒煙雲杳靄之間,渺不知其幾千百里。長林大野,逶迤平楚,黃畦綠塍,縱橫延袤,天長無際,鳥飛不盡,敻不知其崖岸:此所謂遠也。登斯樓者,非襜帷棨戟之大夫,必搢紳簪纓之君子,皆有高明遠大之見,騁目遐矚,於明遠之義,必心會而自得者矣。前後爲守者,亦皆有明斷之才、宏遠之器,雖營締細事,亦張皇布置,或補或增,或修或改,其用心不亦勤乎?嗚呼!明遠之義大矣哉!夫人視壅則不明,不明則不遠,君子居高明窮遠眺,視遠惟明,然後可以理達而事成。於樓,獨不然乎?申侯爲郡六年,從事於斯,以政最聞。褒詔徵還,亦將不日,聲名之尤益著明傳於悠遠也,無疑矣。居正忝長太史,
不可不大書特書美之,姑書爲記。’”
二樂樓。在普通院。
東水樓。在郡西淸通驛東南石崖上。二水合流於其南。
文會樓。在南亭院。○崔元祐詩:“林外長川野外山,倚樓人在畫圖間。已爲才俊登臨地,雲物千年定不閑。”
〔新增〕 淸涼堂。在明遠樓東。○曺偉詩:“新構華堂壓水湄,我來登眺立多時。薰風芳草晴川遠,落日孤雲獨鳥遲。嵐氣空濛簾外滴,楊花撩亂帽邊吹。夜深月上欄干曲,一味淸涼獨自知。”
雙淸堂。在明遠樓西。
學校
鄕校。在郡北二里。
驛院
淸通驛。在郡西三里。
淸景驛。在郡東三十八里。古稱新驛。
長壽驛。在新寧縣西五里。距郡四十二里。察訪。本道屬驛十四:淸通,阿火,毛良,沙里,押梁,牛谷,富
平,淸景,仇於,華陽,義谷,仁庇,鏡驛,朝驛。○察訪一人。
濟川院。在郡南五里。
普通院。在郡西五里。
赤栗院。在郡東二十里。
要看院。在郡東四十九里。
烏邑浦院。在郡東十二里。
新院。在郡東二十八里。
要光院。在郡南三十里。
臨河院。在郡南三十里。
吉祥院。在郡西十里。
匙川院。在郡西二十里。
永登院。在郡北二十四里。
佛宇
鼎脚寺,功德寺。俱在母子山。
雲浮寺。〔新增〕 柳方善詩:“獨訪雲浮寺,禪房靜可依。谷深車馬少,僧老歲年遲。竹影侵虛榻,松風透薄衣。山靈應不昧,結社會如期。”
柏旨寺。〔新增〕 柳方善詩:“避病投山寺,山中事事奇。野蔬包飯軟,溪蕨入羹肥。房暖朝眠
穩,燈明夜話遲。居僧心不俗,半月爲忘歸。”
居祖寺,銀海城,圓明寺,安興寺,上元寺。俱在公山。
竹防寺。在竹防山。
富貴寺。在公山。
祠廟
社稷壇。在郡西。
文廟。在鄕校。
城隍祠。在郡西五里。
厲壇。在郡北。
古跡
太祖旨。在郡西三十里許。俗傳高麗太祖爲甄萱所敗,退保公山下一小峯,因名爲太祖旨。
永州城。在南亭院西。高麗高宗時,東京賊崔山、李儒作亂,王遣李子晟往擊之。子晟倂日疾馳,據永州城,賊以爲子晟軍自遠急來,欲乘其勞擊之,屯南郊。官軍登城望之,告子晟曰:“我軍
冒熱遠來,賊勢盛且銳,鋒不可當。宜閉門休士,數日而後與戰。” 子晟曰:“不可。凡疲卒,休則愈怠。若曠日持久,則賊得我情,恐生他變,不如急擊。” 遂開門突出,及賊未陣,奮擊大敗之,僵屍數十里。
古邑城。在郡西二里。○李詹記:“《春秋》書‘城’者二十有四,率皆不許,直以非時害義,且非其制耳。雖不爾亦書之,見勞民爲重事也。雖孔子生於今世,而使城不踰制,役不違時,事得合義,則必將特書而褒美之,豈但已乎?壬戌春,李侯止中出知永州,閱月倭入寇。是後相繼呑噬,凡三十六次,永民皆渡江而西,糊口以居,無東意。及聞李侯之城是城也,相率而來,敏於趨赴,城成甫爾。適有警,李侯粗備守具,命衆入城,按兵以待,人心已固,賊亦無若我何。役起於季秋,告成於仲冬,誠得其時矣。使以逸道,民忘其勞,勿亟而疾,義固在其中矣。三里之城,不過百雉,亦不可謂非制矣。三者旣備,而當世太史氏未知書‘城於永’否乎?凡書‘城’
者,完舊也;書‘築’者,創始也。是城也,偶出於李侯一時指畫,撥地始得古器物,必其舊址也,則斷可書‘城’矣。城在州治之西淸通驛之上,三面峻絶,惟南可上也。李侯,同年友也。嘉其興大作而不愆于素,故其求記也,不敢以文拙辭。”
道同廢縣。在郡南七里。本新羅刀冬火縣。景德王改道同,爲臨皐郡領縣。高麗初仍屬。
臨川廢縣。本骨火小國。新羅助賁王時,伐取之置縣,景德王改臨川,爲臨皐郡領縣。高麗初仍屬。在郡東南五里。○金庾信謀伐高麗,出宿於骨火館,此其地。見《三國遺事》。
黽白縣。本新羅買熱次縣。景德王改今名,屬新寧縣。殿下六年來屬。
古新寧。在新寧縣東二十五里。
名宦
本朝 鄭次恭。
人物
高麗 皇甫能長。太祖時人。爲金剛城將軍有功,合所起地骨火、道同等縣爲永州。
本朝 李承孫。世宗朝登第,官至議政府右贊成。諡成靖。
李膺。登第,官至兵曹判書。諡貞景。
李順蒙。膺之子。官至領中樞院事。諡威襄。
李宗儉,李宗謙。詳京畿龍仁寓居下。
寓居
高麗 鄭夢周。生於郡東于項里。詳見迎日人物。
孝子
本朝 李敢。官至密陽府使。爲親居廬三年。宣德丙午旌門。
楊培。官至東萊兵馬使。爲親居廬三年。事聞旌門。
〔新增〕 烈女
本朝 李氏。權成弼妻也。燕山朝夫被殺,李氏沒爲官婢。以夫死非辜,常欲自經,母止之。人欲汚之,李氏常佩小刀以自防,終不得犯。今上二年旌門。
題詠
樓高玉笛聲搖斗。李澄詩:“云云,天近氷輪影倒杯。”
叉魚小店煙籠渚。鄭慥詩:“云云,對客高軒月入杯。”
野平雲襯地。柳方善詩:“云云,川迥水浮天。”
江流不盡兼天去。徐居正詩:“云云,山色平分捲地來。”
閭閻稀少不宜郡。柳方善《新寧縣》詩:“云云,樹木鬱蒼還似村。”
溪到樓前却不流。洪汝方《新寧縣》詩:“云云,盤旋停澈爲誰留?渠心自是盈科進,似笑名途汲汲愁。”
溪涵月色淨塵心。尹子濚《新寧縣》詩:“薄暮寒蟬咽遠林,坐來風致足開襟。周原敢續皇華什,單父猶誇宓賤琴。竹引秋聲淸客夢,云云。鄕關到處饒佳趣,笑殺莊生起越吟!”
繞砌灣環小小溪。徐居正《新寧縣》詩:“云云,萬竿蒼翠竹枝低。一軒情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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